EP.59 빔은 그렇게 쉽게 쏠 수 있는 게 아니야
“음……. 테이머스 가입하면 알려드릴게요.”
한유진이 장난스레 웃으며 말했다.
이, 이 신종 호구가……. 이미 골수까지 곰빠가 되어버린 건가.
그래도 꽤 중요한 정보 아니야?
이러지 마, 좀 더 어렵게 가도 된다고.
괜히 머리 굴려 가면서 어떻게든 정보를 캐내려던 내가 바보 같아지잖아.
나도 분량 좀 챙기고 싶어!
“저,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정보를 고미랑 노는 거랑 교환하는 건 좀…….”
나의 말에 한유진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고미는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아이라고요! 저 보송보송한 털, 완벽한 젤리, 그림으로 그려 놓은듯한 3등신의 비율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존재 자체로 힐링이라고요!”
미, 미쳐버렸어. 이강혁과는 다른 의미로 미쳐버렸어.
“그……. 귀여운 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이어지는 나의 질문에 한유진은 갑자기 흥분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왜 돈 들이고 시간 들여가면서 테이머스를 운영하는 줄 알아요!? 다 힐링 때문이라고요, 힐링! 길드 운영하는 게 얼마나 스트레스받는 일인 줄 알아요? 틈만 나면 뒤통수치려는 인간투성이에, 기껏 던전 클리어하고 게이트 파괴하면 늦게 왔네, 뭐네 악플이나 달리고!”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지, 그녀는 초코 에클레어를 와구와구 입안에 욱여넣었다. 먹는 거로 스트레스 푸시는 타입이구나.
“나는 그냥 물어본 건데, 인터넷에 뭐라고 올라오는 줄 알아요? 내가 도끼눈 뜨고 협박했대요! S급이라고! 용 좀 키우고 마법 좀 쓴다고 아무 데서나 갑질한다고!”
그간 엄청 억울했나 보네……. 가슴에 울화가 많으신 것 같다.
“난 맛있는 거 먹고 귀여운 애들 보려고 돈 벌어요! 목숨 걸고 도와줘 봐야 욕하는 사람 투성이니까! 그게 뭐 나빠요!?”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푸념을 들어주었다.
이런 이야기는 그냥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치료 효과가 있거든.
“다른 헌터들은 돈지랄 하고, 진짜로 갑질하면서 스트레스 풀어요! 근데 나는 기껏해야 단 음식 좀 먹고 귀여운 거 보면서 힐링하는데, 욕은 욕대로 다 먹고!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확실히 한유진은 다른 헌터들에 비해 유독 팬도 안티도 많은 편이다.
4대 길드의 길드장 중에 가장 어리고, 드래곤을 데리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눈에 띄는 데다, 얼굴까지 어지간한 아이돌 뺨치게 예쁘고, 돈까지 많으니까.
이렇게 여러모로 어그로가 끌리는 캐릭터니, 팬도 많고 안티도 많은 게 당연하지.
“다 지들 돈 벌려고 하는 짓이라고, 무슨 고결한 희생하는 것처럼 얘기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럼 내가 왜 목숨 걸고 S급 던전 돌겠어요! 안전한 던전만 돌아도 평생 배 터지게 놀고먹을 만큼 버는데!”
그 후로도 한참이나 씩씩대며 불만을 늘어놓던 한유진의 얼굴이 돌연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으……. 죄송해요. 제가 요새 스트레스가 좀 쌓여서…….”
“아니에요, 그럴 수 있죠. 기분이 좀 나아지셨다면 다행이네요.”
어째 상담실로 돌아간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기분이 좀 풀린 것 같다니 다행이네.
탈주 대학원생이 된 지가 언젠데 왜 이런 성격은 변하질 않는 걸까. 생각해보니 조금 씁쓸하군.
하지만 테이머스 가입 이야기는 별개다.
고미랑 드래곤이랑 붙여놓으면 별로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까…….
그때,
[ 수하, 그 테이머스라는 조직에 가입하거라. ]
머릿속에 고미의 전음이 들려왔다.
[ 보아하니 심성이 나쁜 아이도 아닌 것 같고, 하찮은 도마뱀들 따위가 이 몸의 정체를 알아챌 리가 없다. 무엇보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받고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 것은 신의에 어긋나는 것이니라. ]
진짜냐. 아무리 봐도 먹을 거에 넘어간 것 같은데…….
[ 그리고 그 알틴이라는 아기 도마뱀을 다시 보고 싶다. 그러려면 이 테이머스라는 조직에 가입해야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
응? 알틴? 그 쪼끄만 골드 드래곤?
시스템 창에 ‘왜?’라고 써넣어 슬쩍 보여주자, 고미가 오레오 스무디를 한 모금 들이키며 말을 이었다.
으, 초코케이크를 그렇게 먹었으면서 거기에 저렇게 단 걸 끼얹어도 속이 괜찮은 건가?
[ 그 녀석에게서 익숙한 기운을 느꼈다. ]
익숙한 기운? 왜 용의 기운이 익숙해.
용들하고는 사이가 안 좋은 거 아니었어?
“네? 네? 그러니까 테이머스 가입해요!”
내가 고미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한유진이 거의 테이블을 뛰어넘을 것처럼 몸을 쭉 내밀며 다시 한번 나를 재촉했다.
이렇게 보니 완전 애네.
하긴, 실제로도 나이가 많지는 않지.
평범한 여자라면 한창 대학교 다니고 있을 나이니까.
“아, 알겠어요.”
어색하게 웃으며 그렇게 답하자, 한유진의 입가에 전에 없이 환한 미소가 걸렸다.
“진짜죠? 진짜, 완전 진짜죠? 무르는 거 없죠?”
“네, 없어요.”
확답을 들은 한유진은 입이 귀에 걸린 채 싱글벙글 웃으며 두 손으로 턱을 받친 채 고미를 바라봤다.
“고미야, 이제부터 내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
고미는 그런 한유진을 빤히 바라보며 계속해서 케이크를 입으로 가져갔다.
4대 길드의 길드장 중에 두 명을 간식 셔틀로 만들다니, 굉장하네.
어쩌면 고미는 인간을 테이밍하는 스킬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럼 이제 김춘식하고 무슨 얘기를 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저도 왜 당했는지는 알아야죠.”
“저한테 던전 하나만 같이 클리어하자고 하더라고요.”
“던전이요? 무슨 던전이요?”
“드래곤이 나오는 던전인데, 드래곤은 제가 테이밍하고, 클리어 보상 중 하나를 자기한테 달라는 거였어요. 나머지는 전부 제가 가져도 된다고.”
수상한 냄새가 풀풀 나는 제안이네.
“왜 패왕 길드의 다른 헌터들을 놔두고 한유진 씨한테 그런 제안을 했을까요?”
“그건 저도 모르죠. 그냥 아무리 생각해 봐도 뒤가 구린 것 같아서 거절한 거예요.”
김춘식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그녀의 콧등에는 옅은 주름이 생겨났고, 윗입술이 올라갔다.
‘혐오’를 의미하는 전형적인 표정.
그렇게 싫은 인간을 집까지 불러 이야기를 나눈 이유가 대체 뭘까?
“김춘식을 꽤 싫어하시는 것 같은데, 왜 집까지 부르신 건가요?”
나의 질문에 한유진은 생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거래 조건은 무슨 제안을 받았는지를 말해주는 거였잖아요.”
“그렇네요.”
그 순간, 한유진에게 있어 더욱 중요한 것은 김춘식의 제안이 뭐였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집까지 불러들인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굳이 그런 부분까지 파고들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 목표는 김춘식이 다시는 나를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럼 이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 * *
김춘식을 처리할 방법을 논의한 후, 나는 한유진의 빨간색 람보르기니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음, 조만간 차를 한 대 마련하든가 해야겠다.
매번 이렇게 남의 차 타고 돌아다니기도 뭐하니까.
고미가 좋아하는 큰 차로 뽑아볼까.
“고미, 그런데 아까 그거 무슨 소리야? 아기 드래곤을 다시 보고 싶다니?”
한유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사라지자마자 나는 고미에게 질문을 던졌다.
[ 말하지 않았느냐, 그 녀석에게서 익숙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
“설마, 예전에 원수였던 드래곤의 후손이라던가, 그런 건 아니지?”
불안한 마음에 한 질문에 고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 그런 것은 아니다. 걱정하지 말거라. ]
“다른 드래곤들하고도 싸우면 안 돼. 알지?”
[ 그보다, 오늘은 너무 배가 부르구나. 이래서야 또 엄마 아빠와 함께 저녁을 먹지 못할 것 같아 걱정이다. ]
드래곤과 싸우지 말라는 나의 말에 고미는 딴청을 피우며 곧바로 말을 돌렸다.
으, 불안하다 불안해.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고…….
역시 블랙 드래곤하고 레드 드래곤은 가급적 피하는 게 좋겠다.
“그보다 고미, 그 축기라는 건 어떻게 하는 거야? 아까 웅왕청심환을 먹은 이후로 뭔가 알 것도 같은데.”
결국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한 나는 다른 문제로 신경을 돌리기로 했다.
왕유도 먹었겠다, 웅왕청심환을 먹고 기를 움직이는 방법도 대충은 알게 됐으니 본격적으로 수련을 좀 해야지.
[ 호오, 드디어 너도 이 몸의 기공술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냐? ]
고미가 반갑다는 듯 귀를 쫑긋거리며 물었다.
“응, 웅왕청심환 먹고 나니까 기라는 게 얼마나 대단한건지 실감이 나네.”
[ 후후, 이 몸의 위대한 기운을 느껴보고는 조금이라도 더 이 몸을 닮고 싶어 온몸이 근질근질한 것이구나? ]
고미가 흐뭇한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 녀석은 왜 나에게 뭘 못 가르쳐 안달인 걸까.
단순히 자신이 잘하는 걸 자랑하고 싶은 수준을 넘어있는 것 같은데…….
“응, 뭔가 굉장했어. 혹시 축기를 잘하면 나도 손에서 장풍 같은 걸 쏠 수 있는 건가?”
[ 후후, 본래 장풍이나 곰기를 쓰려면 오랜 수련이 필요하지만, 너는 이야기가 다르다. 일단 축기를 시작하고 기맥이 넓어지기만 해도 웅왕청심환에 더욱 많은 기를 담을 수 있으니, 금세 스틸맨처럼 손에서 기를 방출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
호오……. 그것참 솔깃한 소리네. 정말 손에서 빔을 쏠 수 있게 되는 건가?
솔직히 지금까지 익힌 기술들은, 그냥 어쩌다 보니 상황에 맞는 것을 배웠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빔’은 얘기가 다르지. 모든 남자의 로망이니까.
좋아, 당장 배우자.
“굉장하네. 얼른 가르쳐 줘.”
[ 후훗, 좋다. 본래 축기를 하려면 공기가 맑은 곳으로 가야 하지만, 이 몸이 있다면 그런 것은 필요가 없지. ]
“응? 그래도 되는 거야?”
[ 걱정하지 말거라. ]
뭔가 내가 아는 무협지의 상식과는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지만, 고미가 하는 말이니 다 이유가 있겠지.
“알겠어, 가자!”
나는 고미를 어깨에 태운 채 그대로 집으로 달려가 벌컥 문을 열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할 봉식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 어디 갔냐?
의이한 마음에 카톡을 보내보았지만, 확인을 하지 않는다.
‘에이 뭐, 다 큰 어른인데 어련히 알아서 기어들어 오겠지. 나는 수련이나 하자.’
잠시 봉식이와 카톡을 하는 사이, 고미는 받아올 것이 있다며 수다르의 동굴에 다녀왔다.
그리고 돌아온 녀석의 손에는, 불길하고도 익숙한 냄새를 풍기는 검은 단약과 정반대로 청아한 향기를 내뿜는 흰색 단약 하나가 들려있었다.
“고미, 그거 설마…….”
“왕유를 다른 약재와 결합하여 단약의 형태로 만든 것이다. 이것과 수다르가 만든 이 단약을 함께 섭취하면 빠르게 축기가 가능할 것이다.”
아, 안 돼. 축기 취소. 빔 필요 없어. 안 해. 그냥 평범한 지구인으로 살아갈게. 용서해줘.
“아, 그, 고미, 잠깐만……. 급한 일이 생각났…….”
텁.
“우욱……!”
하지만 반항할 새도 없이 고미가 나의 코를 틀어막은 뒤 입안에 강제로 두 개의 단약을 집어넣었다.
꿈에서라도 다시 맛볼까 두려운 왕유의 맛에 가려져 백색 단약의 맛은 거의 느껴지지도 않았다.
산신령님의 취향 타는 약 맛을 완전히 가려버리는 절대적인 파괴력을 가진 맛.
그 맛에 정신이 혼미해질 무렵, 단전에서부터 알 수 없는 기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 왕유를 먹었을 때와는 달리 눈앞이 붉게 물든다거나, 무언가를 부수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자, 이제 가부좌를 틀거라.”
고미의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가부좌를 틀고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고미, 털색이 왜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