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55화 (55/300)

EP.55 가끔은 빌런도 필요하지

“내가 스틸 맨입니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 고미의 온몸이 부르르 떨리며 보송보송한 솜털이 빳빳하게 곤두섰다.

그야말로 몸으로 흥분과 전율이라는 단어를 표현하는 듯한 몸짓과 털짓.

“왜 그러십니까?”

이강혁이 치킨을 손에 든 채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불안한데······.’

개미굴에 들어갔을 때 보였던 행동, 이강혁에게 사용했던 초코소드, 드래곤을 속일 때 보인 태도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미는 자신의 권능을 일종의 ‘놀이도구’로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던전은 놀이터 같은 거고.

그리고 애들, 특히 고미처럼 호기심이 많고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들은 새로운 장난감을 얻으면 어떻게든 그걸 써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게 보통이거든.

키이이잉-

나의 불안한 생각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귀에 익은 소리와 함께 고미의 젤리에서 새빨간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으음······.”

고미는 자신의 젤리를 바라보며 침음을 흘리다가 다시 한번 빛을 뿜어냈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훨씬 백색에 가까운 붉은색.

이어서 백색으로 변한 광선(?)이 빛이 이내 푸른 빛을 띠기 시작했다.

“고미!”

말려야 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는 둘째치고, 저거 잘못 쏘면 전셋집에 구멍이 생기는 정도로 끝날 리가 없다고!

“응? 왜 그러느냐?”

툭.

고미가 몸을 돌리는 순간, 이강혁과 봉식이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치킨을 떨궜다.

지금 고미의 가슴에서는······.

굉장히 익숙하고 영롱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그거 여기서 쏘면 큰일 나!”

나의 다급한 외침에 고미는 콧방귀를 뀌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걱정 말거라. 이런 곳에서 이 몸의 권능을 사용하면 집이 무너진다는 것 따위는 이미 알고 있느니라.”

그리고는 손과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점점 희미해지더니, 완전히 사라졌다.

“제법 멋이 느껴지는 기술이기는 하지만, 위대한 이 몸이 저런 반쪽짜리 기술을 그대로 따라 할 리가 없지 않느냐.”

고미가 빨간 치킨 한 조각을 집어 들며 말했다.

“준비 동작도 너무 길고, 빛이 뿜어져 나오는 통에 상대에게 공격을 읽히기 쉽다. 이래서야 어디를 공격하겠다고 미리 말해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느냐.”

조금 신랄한 평가가 곁들여지기는 했지만, 내 입장에서는 고미가 손과 가슴에서 빔을 뿜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남자애들이 하늘을 날겠다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거나, 나가지도 않는 빔이나 장풍을 쏘는 흉내를 내는 건 지극히 정상적이고, 흔한 행동이다.

고미 역시 성격이나 정신세계 면에서는 그런 아이들과 크게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결정적인 차이는, 저 녀석은 진짜로 하늘을 날거나 빔을 쏠 수 있다는 거지.’

그래도 무협지도 아니고 SF에 가까운 설정을 가진 스틸 맨을 보고 그대로 따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앞으로 고미한테 뭘 보여줄 때는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겠다.

“기술은 볼품없지만, 그래도 저 토미 스파크라는 자는 제법 훌륭하구나. 언제 한번 만날 기회가 있다면 이 몸이 상을 주어야겠다.”

매운 치킨을 한입 베어 문 고미가 입과 코를 살짝 찡그리더니 꿀 치킨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며 말했다.

“으음, 단맵단맵이라······. 참으로 오묘한지고.”

그리고는 행복한 표정으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다. 분명히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서 스킬이 생겼다고 했는데······. 빔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상태창을 불러보자,

< 고미에게 새로운 스킬이 추가되었습니다. >

< 웅왕청심환(熊王淸心丸) >

-위대한 고미 님이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깨달은 기공술의 결정체입니다. ???

< 갓-고미님의 웅혼한 기상이 깃든 갑주 >

-위대한 고미 님이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깨달은 기공술의 극치입니다. ???

뭐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는 거냐?

내 스킬이 아니라서 그런가? 어차피 고미 스킬은 나도 배울 수 있는 거 아니야?

이놈의 상태창은 왜 이렇게 자기 멋대로인 거야.

“일단 그자의 인상착의를 알려주시겠습니까? 제가 조사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때, 이강혁의 목소리가 내 정신을 다시 그 ‘양아치’의 문제로 돌려놓았다.

“아, 키는 180 정도, 마르고 날카로운 인상이었어요. 그리고 왼쪽 이마부터 턱까지 기다란 흉터가 나 있었어요.”

순간 이강혁의 눈썹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김춘식이군요. 패왕 길드의 B급 검술 계열 헌터입니다.”

“잘 아는 사람인가요?”

“잘 알겠지, 그 흉터가 강혁이 형 작품이니까.”

벌써 치킨 두 마리를 해치우고 세 번째 전투에 들어간 봉식이가 손가락으로 자기 왼쪽 눈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뭐!?”

으아, 그 살벌한 포인트 메이크업을 만들어 준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이강혁 씨였어?

“업계에서는 꽤 유명한 얘기야. 던전 내에서 벌어진 일이니까 쉬쉬하는 거지.”

던전 안에서 벌어진 사건은 경찰들도 어지간해서는 관여하지 않는다. 일종의 암묵적인 치외법권이랄까.

이능력자를 감옥에서 썩히기는 아깝기도 하거니와, 클리어한 던전이 사라져 버리면 증거라고는 증언 밖에 남질 않으니 은근슬쩍 손을 놔버린 것이다.

게다가 공권력이 개입한다 한들 상대가 이능력자라면 평범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점 등,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헌터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에는 잘 개입하지 않는 편이다.

실제로 살인이나 상해 사건이 그리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 데다가, 경쟁자를 성가시게 만들기 위해 이루어지는 거짓신고와 무고가 몇 배는 더 많기도 하고.

“어쩌다가요?”

패왕과 저스티스가 앙숙이라는 건 꽤 유명한 얘기다.

이강혁의 높은 대인전 능력이 알려진 계기 역시 패왕 길드 헌터들과의 충돌 때문이었으니까. 일반인을 상대로 문제를 일으킨 헌터를 이강혁이 잡아다 줬는데, 그게 패왕 길드의 길드원이었던 적이 몇 번 있었거든.

하지만 내가 본 그 양아치가 이강혁 씨 칼에 맞아 그런 꼴이 됐다니까 조금 무섭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던전에서 저희 길드의 신입 헌터를 건드렸거든요.”

“왜요?”

“표면적인 이유는 눈빛이 맘에 안 든다는 이유였습니다.”

진짜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사람이네······.

“저한테도 그러던데, 그 사람 대체 뭐하던 사람이에요?”

“뭐, 원래 조폭 출신이니까요. 하지만 정말 눈빛이 맘에 안 든다고 시비를 건 것은 아닐 겁니다. 그냥 이유를 그렇게 댄 것 뿐이죠.”

이강혁이 혐오스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찌 됐든 안 좋은 쪽으로 발도 넓고,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입니다. 그래서 길드 내의 은밀한 일들을 도맡아 처리하죠. 한유진의 집에 간 사람이 김춘식이라니, 느낌이 좋지 않군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B급이 제 실력으로 이강혁의 칼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 결론은 하나였다. 이강혁이 ‘살려줬다.’

문제는, 살려준 이유가 뭔가 하는 점이었다.

“왜 살려두신 거예요?”

“항상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하시는군요. 김춘식은 벌레 같은 놈이지만, 그게 저에게는 도움이 되니까요.”

“안에서 조직을 좀먹을 놈이다?”

“네. 바깥의 적 백 명보다 내부의 적 하나가 무섭다고들 하니까요.”

이강혁이 담담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렇군요. 그래도 이번 일에 대해서는 조사를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길드로 돌아가서 믿을만한 헌터를 몇 불러다 조사를 맡기겠습니다.”

"저도 한유진씨 만나서 한번 어떻게 된건지 알아볼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말을 마친 이강혁은 곧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문을 나서기 전,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참, 부모님 가게 문제는 대충 해결이 될 것 같습니다. 두세 곳 정도 자리가 났는데, 가까운 시일 내에 한번 보러 오시죠.”

“네, 알겠습니다.”

* * *

이강혁이 돌아간 뒤, 나는 상태창을 앞에 두고 또 한차례 고민에 빠졌다.

수제자 퀘스트와 가족 퀘스트가 완료되면서 또 새로운 스킬을 익힐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사용하지 않고 놔둔 스탯 포인트만 17에, 익힐 수 있는 중급 권능이 두 개, 스킬 포인트가 2개.

이거 다 쓰고 나면 B급 수준은 되겠군.

‘사실 스킬 하나는 정해져 있지.’

나는 끝도 없이 늘어선 중급 권능 중에서 망설임 없이 하나를 선택했다.

< 고미류 기공술 (입문) – 웅신입기혈(熊身入氣穴) (D / Gomi~D) >

- 위대한 곰은 천지의 기운을 몸 안에 축적하여 자신의 힘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고미류 기공술에 입문하는 순간 당신 역시 천지의 기운을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비고 : 일부 중급 권능과 상급 권능의 사용을 위해 반드시 익혀야 할 스킬입니다.

역시 첫 번째는 기공술이다.

강해지기 위해 반드시 익혀야 하는 스킬이기도 하지만, 이걸 배워야 내가 전음을 써도 고미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왕유의 효과를 고려해봐도 이쪽이 효율이 높고.

눈을 아래로 내리자,

<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특수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

가족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특수 스킬이 개방되어 있었다.

‘무슨 스킬이지······.’

< 고미와 둥기둥기 (Gomi) >

- 위대한 고미님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가족의 의무이자, 기쁨입니다. 이제부터 ‘해피 곰 포인트’를 사용하여 일시적으로 스킬 효과를 상승시킬 수 있습니다.

비고 : 스킬에 따라 소모 포인트가 달라집니다.

버프 스킬인가.

둥기둥기에 해피 곰 포인트라니······. 갈수록 태산이군.

< 현재 해피 곰 포인트 : 232 >

음······. 해피 곰 포인트가 호감도보다 훨씬 많네. 기분이 좋을 때마다 쌓여 왔던 건가?

그래도 지금까지 보았던 것들보다는 훨씬 기분이 덜 나쁘다.

이걸 보면, 고미가 행복한지 아닌지 알 수 있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찝찝한 기분을 떨쳐내기가 어렵다.

애정의 대가로 보상이 돌아오는 것과 보상을 노리고 애정을 주는 건 비슷하지만 완전히 결이 다른 이야기다.

아직은 애정이 우선이다. 하지만 때때로 보상이 더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그리고 내가 정말 두려워하는 건, 어느 순간부터 그 경계가 흐릿해지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원래 얄팍한 거니까.

간혹 한치의 흔들림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강하지 못하다.

보상이 있으면 혹하고, 그게 커지면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이며 내 마음을 정당화하는, 그런 흔해 빠진 속물이다.

‘휴, 반려동물 너튜브 운영하는 사람들 기분이 이러려나.’

“수하! 큰일이다!”

그렇게 상태창을 만지작거리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고미가 잔뜩 당황한 표정으로 허둥지둥 나에게 달려왔다.

“왜 그래?”

“어, 엄마 아빠가 오고 있다!”

“응? 그게 왜?”

“우리는 이미 저녁을 먹지 않았더냐! 엄마 아빠가 서운해할 것이다!”

고미가 볼록 부풀어 오른 자신의 배를 걱정스레 바라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더 먹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를 어찌해야 하느냐!?”

어휴, 이 귀여운 녀석을 어째야 좋을까.

“괜찮아. 원래 같이 살다 보면 따로 밥 먹기도 하고 그런 거야.”

“저, 정말이냐? 엄마 아빠가 우리를 신의 없는 녀석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그래, 걱정하지 마.”

나는 고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녀석을 달래주었다.

* * *

그렇게 밤이 지나고, 다시 아침.

모처럼 아무 계획도, 할 일도 없는 하루였다.

나는 아침을 먹고 혼자 멍하니 TV를 보며 오늘은 뭘 할까 고민했다.

부모님은 나갔고, 봉식이와 고미는 언제나 그렇듯이 늦은 시간까지 잠을 자고 있다.

4년 정도를 잘 시간도 없이 일만 하다 보니, 취미라고 부를만한 게 없어져 버렸다.

내가 뭘 좋아했었는지, 쉬는 날에는 뭘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떠올려 봐도, 딴 사람 이야기처럼 ‘아, 그랬었지’하는, 감정이 쏙 빠진 무미건조한 사건과 사실의 나열만이 반복된다.

‘고미 데리고 산책이나 나갈까. 한유진 씨도 만나고.’

조금 부담스러운 사람이기는 하지만, 고미에게 순수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싫지는 않다.

고미와 드래곤들이 사이가 좋지 않아서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을 뿐이지.

‘그 동안 좀 미안한 것도 있었고, 만나는 김에 김춘식이랑 무슨 얘기 나눴는지도 확인해 봐야겠다.’

└ 한유진 씨, 오늘 고미보러 오실래요? 그런데 고미가 용을 좀 무서워하는 것 같아서, 드래곤은 빼고 만나고 싶은데······.

└ 완전 한가해요! 완전! 제 드래곤들은 근처에서 기다리라고 할게요. 어디로 가면 돼요?

그렇게 한유진과 약속을 잡고, 고미를 깨워 주위를 돌아다니며 아침 산책을 즐기고 있을 때,

[ 수하, 살기가 느껴진다. ]

고미의 전음이 머리 안에 울려 퍼졌다.

감각 강화를 사용해 주위를 훑어보자, 딱 봐도 일반인은 아닌 것 같은 사람 예닐곱이 사방에서 포위망을 펼친 채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 마침 잘 됐구나. 이 몸의 새로운 권능을 확인해 보고 싶었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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