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4 새 스킬은 수하만 생기는 게 아니다
제르보나가 남긴 마지막 말에 나는 헤아릴 길 없는 불안함과 의문을 느꼈다.
‘설마 다 알면서 눈감아준 건가? 왜?’
게다가 ‘고미에게 눈을 떼지 말라’니······.
왜 말썽꾸러기나 나쁜애처럼 얘기하는 거냐!
조금 종잡을 수 없는 구석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애가 얼마나 착한데!
[ 후후후, 수하. 해냈다. 어떠하냐 이 몸의 연기력이! ]
고미의 거만한 목소리에 나는 생각을 멈추고 웃으며 녀석을 안아 들었다.
“그러게, 연기를 꽤 잘하네.”
사실 고미의 연기력(?)은 조금 의외였다.
필요한 연기가 그냥 가만히 누워서 끙끙거리는 게 아니라면 이런 작전은 시작도 안 했을 거다.
말로는 거짓말을 못 하는데, 몸으로 하는 건 다른 건가.
하긴, 액션은 되는데 대사 치는게 안 되는 배우라는 것도 있는 거니까.
[ 후후, 사실 그것은 이 몸의 비술 중 하나인 ‘죽은 척’ 이니라. 전신의 기맥을 닫아 기의 흐름을 끊고, 호흡은 물론이고 내장의 움직임까지 느리게 만들어 적을 속이는 비장의 기술이지! ]
음, 무공으로 슈퍼스타가 될 가능성이 보이는 기술이군.
뭔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 것 같기는 하지만, 고미가 하는 것 중에 말이 되는 게 더 드무니까 그냥 넘어가자.
“그런데, 혹시 그 용들이 뭔가 눈치챈 건 아닐까?”
내 질문에 곧바로 고미의 눈꼬리가 사납게 변했다.
[ 흥! 도마뱀 따위가 이 몸의 비술을 꿰뚫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 ]
그럼 그 용들은 대체 어떻게 고미가 아프지 않다는 걸 알아차린 걸까? 아니, 어쩌면 고미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제르보나의 말이 무슨 의미일지 추측해 보고 있을 때, 벨 소리가 내 생각을 끊었다.
전화를 건 것은 이강혁이었다.
“수하씨, 열매는 무사히 빼돌렸습니다.”
“그럼 한 시간쯤 있다가 열매를 가지고 집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할 얘기가 좀 있어서요.”
평소 같으면 밖에서 만났겠지만, 오늘은 조금 조용한 곳에서 얘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내가 저스티스 건물을 들락날락할 수는 없으니, 조금 미안하지만, 집으로 오라고 하는 수밖에.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그렇게 짧은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아, 수하 씨.”
“네? 더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간식은 뭘 사갈까요?”
너무나 당연하다는 말투. 빈손으로 온다는 건 아예 머릿속에 없는 모양이다.
역시 신종 호구는 원조를 당할 수 없는 건가.
“치킨 가능할까요. 순살로.”
“알겠습니다. 후라이드로 할까요, 양념으로 할까요?”
“고촌 치킨, 꿀맛으로 하죠.”
굳이 따지자면, 나는 뼈 없는 치킨은 치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럴 거면 닭강정이나 치킨이나 뭐가 다르겠나.
하지만 지난번에 고미뼈 씹어먹는 걸 보고 나니 뼈 있는 치킨 사 오라는 말이 나오질 않는다.
“아! 그렇네요. 곰 선생님 입맛을 생각하면 꿀맛 치킨을 사가는 게 좋겠군요. 역시 수하 씨에게는 배울 점이 많네요.”
그런 거 안 배워도 되는데······.
“오오! 허수아비! 역시 네 녀석은 신의를 아는구나! 좋다! 꿀맛 치킨으로 사 오거라!”
“고미, 치킨이 뭔 줄 알아?”
싱긋 웃으며 질문을 던지자,
“치킨은 닭이다!”
응? 어떻게 치킨을 알지?
“먹어본 적 있어?”
“닭도리탕이 치킨이 아니더냐! 꿀맛 치킨이라니, 생각만 해도 군침이 흐르는구나!”
음, 미묘하게 다른데······.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났을 때도 알파벳으로 자기소개를 했었지. 영어는 어떻게 할 줄 아는 걸까.
“하하, 걱정 마십시오, 곰 선생님. 금방 가겠습니다.”
이강혁과 통화를 마친 후, 고미와 나는 느긋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 * *
집에 도착하자, 등에 50킬로그램짜리 헌터용 특제 원판을 올린 채 팔굽혀 펴기를 하는 짐승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도 트레이닝 중이군.
“오오, 봉식이! 몸을 단련하고 있었느냐?”
비 오듯 땀을 흘리는 봉식이의 모습을 본 고미가 대견하다는 듯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응. 왔네.”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냐?”
“대충 너 나가고 나서부터?”
그럼 3시간 넘게 그러고 있었다는 거냐.
역시 이 짐승은 차원이 다르군.
봉식이는 나처럼 지구력 강화 스킬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야수의 심장’의 효과가 체력 회복을 빠르게 만들어 주는 거라, 팔굽혀 펴기 정도로는 등에 저딴 걸 올려놓고 해도 체력 회복 속도가 소모 속도를 상회한다.
그렇게 끊임없이 자극을 주고 회복을 반복하니 근육이 계속해서 강해지고, 점점 더 궁극의 인간 병기로 거듭나는 거지.
“후우······. 개운하다. 고미한테 침 한 방 맞고 한약 좀 먹었더니 이상할 정도로 힘이 남아돈다.”
“후훗, 그것이 웅기조식의 효과이니라. 본래도 자질이 나쁘지 않았으니, 꾸준히 정진한다면 더 큰 성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강혁은 허수아비에, 드래곤은 도마뱀이라고 부르면서, 봉식이에게는 언제나 평가가 후하군.
이래서야 이놈에게 라면 뺏어 먹을 날이 오기나 할까 걱정이 든다.
“이제 치킨 먹으면서 영화나 한 편 때리자.”
봉식이가 수건으로 땀을 대충 닦아내며 말했다.
“때리다니, 영화라는 녀석이 무슨 잘못을 한 것이냐?”
음, 언제 한번 봉식이한테 주의를 줘야겠다.
고미가 잘못된 언어습관을 가지게 될까 심히 걱정되니까.
“아니야. 영화는 보는 거야. 보는 걸 때린다고 표현한 거고.”
“보는 것을 왜 때린다고 하는 것이냐?”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생각해보니, 나도 궁금하다.
“흠, 어쨌든 이 몸에게 어울리는 격식 있는 표현은 아닌 듯하구나. 봉식이! 너도 앞으로는 좀 더 품격 있는 말을 사용하거라!”
고미의 따끔(?)한 지적에 봉식이는 제꺽 고개를 끄덕이며 농담조로 받아쳤다.
“알겠소, 송구스럽구려. 그럼 이 몸은 씻고 나올 터이니, 두 분은 닭튀김을 시켜놓고 어떤 영화를 볼지 고르고 계시오.”
······.
실패한 드립이다. 무시.
“아, 치킨은 이강혁 씨가 사 오기로 했어.”
“강혁이 형이?”
언제 또 형이 됐냐. 며칠 전에는 반말하더니.
“야 그래도 길드장인데 그렇게 불러도 되는 거냐?”
“우리끼리 합의했는데?”
“언제?”
“너 나간 사이에.”
봉식이는 그 말을 남기고 훌쩍 화장실로 들어갔다.
“흐음, 그런데 아까부터 영화, 영화하던데, 그 영화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냐?”
고미의 질문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영화가 뭔지는 당연히 알지만, 정확하게 설명할 방법을 모르겠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고미에게 검색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현대 사회에 적응하려면 검색 기능을 가르쳐야 하기도 했고. 애초에 스마트 폰을 사준 이유 중 하나가 그거였으니까.
내가 고미에게 모든 걸 답해줄 수 있을 정도로 지식이 해박하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거든.
“막상 그렇게 물어보니까 설명하기가 어렵네. 이걸로 같이 찾아볼까?”
스마트폰을 꺼내자, 고미가 귀를 쫑긋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자, 이걸 누르고, 여기에 궁금한 걸 써넣으면 돼.”
- 영화.
- 정의 : 촬영으로 필름에 기록한 화상을 스크린에 투영, 영상과 음향을 통해 보여주는 영상물.
······.
음, 전혀 설명이 안 되네.
“호오······.”
“응? 알겠어?”
“궁금한 걸 써넣었는데 궁금한 것이 늘어나는구나.”
안 되겠다. 차라리 한편 보여주는 게 빠르겠다.
그런데, 뭘 보여주지?
너무 폭력적인 걸 보여주면 안 될 것 같고······. 그렇다고 너무 유치한 걸 보여주기도 조금 그렇고, 예술 영화나 철학적인 건 당연히 패스.
역시 히어로물이 적당하려나?
그렇게 깊은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띵동’하고 벨 소리가 울렸다.
“왔다.”
인터폰을 눌러 1층 보안문을 열어주자, 얼마 지나지 않아 양손 가득 치킨을 든 이강혁이 집으로 들어왔다.
“뭘 이렇게 많이 들고 오셨어요?”
“봉식이는 두 마리는 먹을 것 같고, 치킨은 1인 1닭 아니겠습니까?”
1인 1닭이 국룰이기는 하지만, 나는 한 마리 못 먹는데······.
그래도 운동 끝난 봉식이면 두 마리 이상은 해치워줄 테니 남지는 않으려나.
“어, 형 왔네.”
“응, 치킨 여섯 마리 사 왔다.”
“이 형이 가만 보면 센스가 있어. 괜히 4대 길드 길드장이 아니라니까. 넷이서 먹는데 여섯 마리는 돼야지.”
진짜 형 동생 하기로 했나 보네.
다 같이 모여 치킨을 뜯는 사이, 나는 고미에게 보여줄 영화를 결정했다.
히어로물의 정석이라면, 역시 ‘스틸 맨’이지.
“응? 이것은 닭도리탕이 아니구나?”
고미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그마한 코를 움찔거리며 말했다.
“닭도리탕이 드시고 싶으셨습니까? 나가서 사 올까요?”
고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강혁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니다. 치킨이라 하여 닭도리탕을 생각했는데, 두 가지가 다른 것이라 조금 놀랐을 뿐이다. 인간들은 닭을 가지고 참으로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냈구나.”
확실히 닭만큼 조리법이 다양한 요리가 드물기는 하지.
“흐음, 한쪽은 단 냄새가 나고, 한쪽은 조금 매콤한 냄새가 나는구나······. 이것이 단맵단맵이라는 것이냐?”
“오, 곰 선생님. 단맵단맵을 알고 계십니까?”
이강혁의 반응에 고미는 꼬리를 빳빳하게 세우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후훗, 이 몸은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위대한 곰이니라. 그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지.”
그리고 치킨이 입에 들어가는 순간.
"호오, 맛이 아주 제법인 녀석이구나. 그런데, 어째서 뼈가 없는 것이냐?"
고미가 흡족함과 실망이 반반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이 녀석도 순살파가 아니군.
"닭은 뼈가 있어야 맛이 나는데...그래도 나름대로 색다른 맛이 있구나."
"다음부터는 뼈가 있는 것으로 사오겠습니다."
고미의 한마디에 이강혁이 제꺽 반응을 보였다.
"안돼요. 고미가 말하는 뼈맛이 뭔지 알면 제가 왜 순살 사오라고 했는지 아실 거예요."
나는 그렇게 말한 뒤 곧바로 리모콘을 손에 쥐었다.
“자자, 이제 치킨도 다 뜯었으니까, 영화 보면서 먹자.”
그리고는 IPTV의 영화 다시 보기에서 스틸 맨 전설의 시작이자 최고의 명작, 스틸 맨 1을 구매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영화가 시작되자, 고미는 금세 홀린 듯이 화면 안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스틸 맨 수트가 등장하는 순간,
“오오오오!”
치킨을 먹는 것도 잊어버린 채 주먹을 바르쥐며 비명에 가까운 감탄사를 내뱉었다.
“괴, 굉장하구나! 웅혼한 기상이 느껴지는 갑옷이다!”
역시, 스틸 맨 시리즈를 선택하길 잘했군.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할 만한 작품이지.
고미가 즐거워하는 것을 확인한 나는 작은 목소리로 이강혁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애초에 이 사람을 집으로 부른 목적이 이것 때문이었으니까.
“그런데, 패왕 길드랑 용왕 길드가 원래 왕래가 있던가요?”
“뭐, 전혀 없지는 않죠. 사이가 좋은 건 아니지만.”
“길드장 집에 따로 사람을 보내서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요?”
보통 공적인 일이라면 길드 건물로 사람을 보내거나, 밖에서 만나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그런데 집으로 사람을 보내 은밀히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수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던진 질문이었다.
게다가 그날 보인 드래곤의 차가운 태도로 보나, 한유진의 성격으로 보나, 좋아서 그런 사람을 불러들인 것 같지는 않았다.
앞뒤를 맞춰보면, ‘싫은 상대를 집으로 불러 비밀스럽게 할 얘기가 있었다’는 건데······. 그런 질 나쁜 사람과 좋은 이야기를 나눴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건 조금 이상하군요. 한유진은 제 집에 사람을 들이는 걸 싫어합니다. 적어도 저나 저희 길드원 중에는 한유진의 집에 방문한 사람이 없고요.”
“확실히 뭔가 이상하네요. 미래에서 두 길드가 손을 잡았던 적이 있던가요?”
“아뇨. 없었습니다. 꼭 할 얘기가 있는게 아니면 얼굴 마주하는 일도 거의 없는 수준이었죠.”
대체 뭘까······.
사실 이 문제 자체에 대해 궁금한 것은 아니었다.
나의 의문은 그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내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에서 비롯된 거니까.
그래, 지금 스틸 맨에 푹 빠져있는 저 귀여운 영혼과 관련된······.
그렇게 내가 고미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눈을 의심하게 하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 고미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
< 새로운 능력이 개화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