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8 이집 실험 잘하네
< 검의 달인 스킬(F)이 활성화됩니다. >
좋아. 일단 스킬은 활성화되네.
주걱+빠따 조합에 대한 나의 가설은······.
“수하님.”
설명을 시작하려던 찰나, 산신령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왔다.
“왜 그러시죠?”
꼭 사람의 그것처럼 생긴 수다르의 손에는 동그란 노란색 단약 세 알이 들려 있었다.
“허허, 수하님이 저에게 주신 산삼으로 만든 단약입니다.”
“어······.”
생각해보니 내가 준 산삼으로 영약을 만들어준다고 했지.
그런데 막상 받으려니 영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러면 해준 거 없이 받기만 하는 건데.
“한과값이라 생각하고 받아주시지요. 거기다 고미님과 함께 바깥세상을 구경하는 것은 이 늙은이에게 있어 값을 매길 수 없는 영광이요, 즐거움입니다. 이 모든 것이 수하님 덕분이니, 재료만 있으면 만들 수 있는 영약 따위가 아깝겠습니까.”
내가 미안해하는 기색을 보이자, 귀신같이 치고 들어오며 단약을 손에 쥐여준다.
반격을 허락하지 않는 완벽한 칼 타이밍.
역시, 수다르 할아버지의 말재간과 사회생활 능력은 당해낼 도리가 없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대신 오늘 저녁이라도 드시고 가세요. 산신령님이랑 같이 드실 수 있는 거로 준비할게요.”
메뉴는...'그거'면 되겠지.
“허허허, 이렇게 감사할 데가, 그럼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영약은 수련을 시작하기 전에 드십시오.”
수다르 할아버지와 대화를 마친 후, 나는 곧바로 단약 하나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음······. 이번에는 인삼 껌 맛이네.
그래도 산삼을 베이스로 한 단약이니 납득은 가는 맛이다.
설마 전에 먹은 단약에는 홍삼과 민트가 들어가는 걸까?
< 산의 정수가 몸 안으로 흡수됩니다. >
< 1시간 동안 능력치 상승치가 200% 증가합니다. >
‘와······. 장난 아니네.’
능력치를 올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단, 던전 클리어 보상, 아이템, 영약 같은건 갖고 싶다고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니 대부분은 전투나 훈련을 통해 신체를 단련할 수밖에 없다.
나야 고미 덕분에 날로 먹은 거고.
원래 능력치 1 정도 올리려면 자기 수준에 맞는 던전 두세 번은 돌아야 한다.
그나마도 주 능력치나 그렇게 오르지, 보조 능력치는 그 절반 수준밖에 성장하지 않는다.
‘200%면······. 거의 던전 세 번 돈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거네.’
수다르가 살해당한 이유에 점점 더 확신이 생긴다.
산속에 틀어박혀 있어서 그렇지 완전 사기캐였잖아.
‘이 양반이 하산해서 인간들 사이에서 산다고 하면······.’
이 정도 단약 제조 능력에 사회생활 능력이면 진짜 어디 가서도 제 역할 톡톡히 할 거다.
“그럼 이제 시작해볼까요?”
내가 단약을 먹은 것을 확인한 이강혁이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흐음······. 그럼 나는 이곳에서 수다르와 차를 마시며 너희의 실력을 감상하고 있겠다.”
고미가 자리를 잡은 곳은 던전 입구 근처에 위치한 커다란 바위 위였다.
녀석이 가볍게 손을 휘두르자, 돗자리와 다과 세트, 내 손에 들린 파라솔이 저절로 허공을 날아 바위 위에 안착했다.
이후 고미는 손가락으로 바위에 구멍을 뚫은 뒤 그곳에 파라솔을 놓고 여유롭게 돗자리 위에 앉아 한과 세트를 개봉했다.
허공섭물과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는 능력을 파라솔 펼 자리를 잡기 위해 쓰다니······.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굉장한 능력을 참 소소하게 쓴다.
“호오, 수다르! 냄새와 생김새부터가 범상치 않구나. 실로 훌륭하다!”
고미는 맛을 보기도 전부터 꼬리를 흔들며 수다르의 안목(?)을 칭찬했다.
던전에서의 티타임이라······. 정말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다.
이성계가 전장에서 왜구를 토벌하는 장면을 안주삼아 술잔을 기울였다고 하던데, 왠지 그 얘기가 떠오르네.
“시작하죠.”
내가 신호를 보내자, 이강혁은 곧바로 주위에 있는 돌을 던졌고,
- 음머어!
짱돌을 맞은 ‘이족 보행 미친 소’ 두 마리가 굵직한 강철 몽둥이를 들고 달려오기 시작했다.
놈들의 머리에는 외뿔 광우라는 이름답게 날카로운 뿔이 하나 달려 있었다.
하지만 한 마리는 뿔이 이마에 있고, 한 마리는 오른쪽에만 뿔이 붙어 있다. 뿔의 위치는 랜덤인가보다.
섬뜩할 정도로 검고 윤기 나는 털에, 칼날조차 튕겨낼 것 같은 근육, 외모만 봐도 지금까지 상대했던 잔챙이들과는 격이 다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음, 풀만 먹고 어떻게 저렇게 벌크업을 했을까.’
비결이 궁금해지는 육체미다.
- 음머어!
왼쪽에 있는 놈이 몽둥이를 휘두르자, 이강혁은 기다렸다는 듯 몸을 숙이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자로잰 듯 정확한 간격까지 파고들어 가볍게 검을 휘둘렀고,
서늘한 검광이 광우의 허리를 스치며 거대한 몸뚱이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음······. 대충 알겠어. 역시 검성과 던전에 오길 잘했군.’
내가 굳이 이 사람과 함께 던전에 온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솔직히 말해서, 고미의 전투는 그다지 참고가 되지 않거든.
언제나 슥, 번쩍, 쾅! 끝. 이런 느낌.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어떻게 이겼는지도 모르겠다.
‘원래 수준 차이가 너무 크면 이해가 안 되지.’
고미의 싸움을 볼 때면 교수님과 미팅을 할 때마다 느꼈던 일종의 ‘벽’이 떠오른다.
내가 보기에는 될 리가 없는 게 돼버릴 때나,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걸 ‘왜 이걸 이해 못하니?’라고 답답하고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실 때 느끼던 기분이랄까.
그게 수준 차이라는 거겠지.
하지만 이강혁의 움직임은 대충 눈에 보인다.
감각 강화 덕분에 검의 달인 스킬 등급이 낮음에도 확실히 볼 수 있고, 그만큼 이해도도 높아지는 것 같다.
기대했던 효과 그대로.
문제는 내 움직임이 따라 주느냐 하는 건데.
나는 자리에 선 채 이강혁 씨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재현해 보았다.
‘여기서 발을 내디디고, 이쯤에서 숙이면서 다시 반보 앞으로, 그리고 좌측에서 우측으로······.’
비슷한 것 같지만, 어딘가 미묘하게 다르다.
그런데 어디가 다른지는 모르겠다.
‘하긴, 검성의 칼 놀림을 이제 막 칼 잡은 내가 그대로 따라 할 수 있으면 그게 이상한 거지.’
바로 그때,
‘챙!’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이강혁이 손을 대지도 않은 외뿔 광우가 털썩하고 쓰러졌다.
“쯧쯧, 칼을 힘으로 휘두르려고 하는구나. 그러니 자세에 군더더기가 붙고, 위력은 약해지는 것이다. 이러니 내가 너를 허수아비라고 부르는 것 아니냐.”
고미가 유밀과를 오물거리며 말했다.
뭐야, 뭔데.
“곰 선생님! 감사합니다!”
이에 이강혁은 감격한 듯 머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제발 나도 좀 알려줘······. 너네 왜 자꾸 나 소외시키냐.
뭔가 번쩍한 건 봤는데, 그게 왜 굉장한 건지 전혀 모르겠다고.
“한과 값이다. 맛있는 것을 대접받았으니 한 수 정도는 가르쳐 줘도 좋겠지.”
말을 마친 고미는 유밀과를 한입 깨물어 먹은 뒤 수다르가 타준 차를 홀짝였다.
그리고는 방금 전 이강혁과 똑같은 표정으로 수다르를 바라봤다.
무언가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사람같은 얼굴.
“참으로 신기하구나. 어째서 이 차는 씁쓸한데 이 유밀과라는 것과 함께 먹으면 더욱 달콤해지는 것이냐? 평소라면 입에 맞지 않을 차가 이리도 훌륭한 맛으로 변하다니!”
그 사이 이강혁은 생각에 잠겨 천천히 검을 휘둘러 보고 있었다.
조금 전 광우를 쓰러뜨린 ‘곰기’를 보고 뭔가 깨달은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곰기'와는 달리, 이강혁의 움직임은 조금 이해가 갔다.
역시 저 사람을 검술 교본으로 삼길 잘했다.
이강혁은 고미에게 배우고, 나는 이강혁을 보고 배운다.
이게 바로 진정한 윈윈이지.
“허허허, 원래 단것과 단것을 함께 먹는 것보다 단것과 씁쓸한 것, 단것과 짠 것을 번갈아 먹으면 더욱 맛이 선명해지는 법입니다..”
내가 천천히 이강혁의 동작을 되짚어 보는 사이, 수다르의 ‘맛 강연’이 이어졌다.
“속세에서는 이것을 단짠단짠이라 부릅니다. 먹는 순서를 바꾸는 것만으로 맛을 배가 시킬 수 있다니, 참으로 놀라운 발견이지요. 단짠단짠의 변형으로는 단맵단맵, 맵짠맵짠 등이 있습니다.”
당신, 대체 뭘 듣고 보고 다니길래 그렇게 잘 알아······.
맨날 동굴 비우고 어디 돌아다니고 있는 거 아니야?
“호오······. 너는 어찌 그리 먹을 것에 정통한 것이냐? 혹시 산에서 내려와 나와 함께 지낼 생각은 없느냐?”
고미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음······. 설마 이대로 산신령을 집에 모시게 되는 건가.
부모님이 횟집을 하는데 수달과 함께 살아도 되는 걸까?
조금 고민이 되는군.
“허허, 제가 산을 오래 비우면 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이 어려워지니, 가끔 이렇게 외출을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지요.”
수다르의 대답에 고미는 조금 서운한 듯 귀를 늘어뜨렸다.
그래도 자기 역할은 잊지 않는 사람, 아니 수달이구나. 여러모로 본받을 점이 많다.
'같이 살면 재밌을 것 같기는 한데, 나도 좀 아쉽네.'
“너무 서운해 마시지요. 아무리 반가운 얼굴도 매일 보면 지겨워진다 하니, 꿀을 숙성시키듯 아쉬움을 항아리 삼아 재회의 즐거움을 기다리시는 것도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괴, 굉장하다. 수다르······. 왠지 연애 잘할 것 같아.
그렇게 수다르의 멘트에 감탄하고 있을 때, 외뿔 광우 서너 마리와 여섯 개의 다리를 가진 맹수가 우릴 향해 다가왔다.
“음, 저 다리 많은 하이에나처럼 생긴 놈이 이 던전의 C급 몬스터인 시체 청소부입니다. 수하 씨의 연습 상대로는 저놈이 적당할 것 같군요.”
이강혁이 손을 들어 흉악하게 생긴 몬스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나도 슬슬 시작해 볼까.’
나는 곧바로 ‘빠따’와 ‘주걱’을 휘둘러보며 나의 가설을 시험해 보았다.
무기 두 개를 동시에 쓰는 건 처음인데, 밸런스가 무너지지도 않고, 제법 원하는 대로 몸이 움직인다.
본 연구의 주제는 아래와 같다.
‘검의 달인 스킬을 가지고 검과 검이 아닌 무기를 동시에 쓰면 어떻게 될까?’
일단 스킬은 켜지지만, 효과가 온전하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때문에 다른 쪽도 온전히 검술 스킬이 적용될지, 몸의 반쪽만 스킬 보정을 받을지, 혹은 양쪽 모두 스킬은 적용되지만 대신 총 보정치가 감소할지 실험해보는 것이 오늘의 목표였다.
허공에 대고 휘둘러 본 결과, 현재까지의 답은 ‘가능하다.’였다.
하지만 이강혁 씨의 검을 빌려 ‘이도류’를 해봐야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
‘보정치 감소라면 이 상태로는 알 수가 없으니까.’
-크르르!
그때, ‘시체 청소부’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우씨, 선생님! 연구 모형도 확실히 안나왔는데 갑자기 결과 논문을 제출하라니요!’
오른손에 든 빠따를 휘두르자, 녀석이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나는 그대로 녀석에게 따라붙으며 왼손에 든 주걱을 휘둘렀다.
-크륵!
그와 동시에 왼쪽에 있던 놈이 빈틈을 노리고 내 옆구리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었다.
황급히 몸을 틀어 녀석의 공격을 피한 뒤 빠따를 휘둘러 뒷목을 내리치자,
-켕!
빈틈을 놀리고 달려들었던 놈이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가 고개를 흔들며 일어섰다.
‘한 방에 끝나질 않네. 역시 C급은 C급이라 이건가.’
하긴, 내 공격력의 반은 약점간파와 강철주걱의 크리티컬에 의존한 거였으니까. 그런것도 없이 C급을 한방에 보내는 건 무리지.
퍽! 퍽! 퍽!
나는 빠따로 쓰러진 놈을 일정한 리듬으로 두들겨 주며 주걱으로 다른 놈들을 겨누었다.
무기가 자기 쪽을 향해 있으면 섣불리 달려들지 않는 게 동물의 습성이니까.
이놈들처럼 무리 사냥이 기본인 놈들은 더욱 그런 습성이 강하다.
한 놈이 저항불능 상태가 되니 나머지가 주춤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뭔가 이상한데.’
그래도 이 정도로 한 놈만 조지면 나머지가 빈틈을 노려 공격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응?”
하지만 고개를 드는 순간, 녀석들이 왜 달려들지 않았는지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뭐야 이거, 왜 이래.”
‘빠따’가······. 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