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7 던전으로 피크닉
“외뿔 광우의 뿔과 토기(土氣)를 담고 있는 순도 높은 1등급, 그러니까 요즘 말로는 A급 마정석 한 개, 그리고 화룡의 숨결로 녹인 태양초의 열매입니다.”
수다르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고미가 왜 인상을 찌푸렸는지 알 것도 같았다.
화룡의 숨결로 녹인 태양초의 열매면, 화룡을 만나야 한다는 거잖아.
외뿔 광우는······.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은데 잘은 모르겠다.
이름만 들어서는 먹으면 안 될 것 같은데, 뿔은 먹어도 괜찮은 건가?
가장 구하기 쉬운 건 A급 마정석.
가격이 만만치 않지만, 저스티스 길드 내에 몇 개는 있겠지.
“이강혁 씨, 지금 길드 내에 A급 지속성 마정석이 있나요?”
“네. 구하러 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럼 남은 것은 외뿔 광우의 뿔과 태양초 열매로구나.”
고미의 말에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이강혁이 입을 열었다.
“태양초의 열매도 저희 길드에 몇 개가 있습니다. 다만 화룡의 숨결이 문제인데······.”
뭐가 문제지? 패왕과 저스티스는 앙숙이지만, 용왕길드와는 별다른 문제가 없지 않았나?
“용왕 길드하고는 사이가 괜찮지 않나요?”
나의 질문에 이강혁은 조금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뇨. 4대 길드 중에 사이가 좋은 길드 따위는 없습니다. 용왕과는 비교적 관계가 좋은 편이지만, 아무리 좋게 말해도 같은 편이라고는 못 하죠.”
아니, 돈 많고 성공한 사람들끼리 왜 그래. 같이 비싼 거라도 먹으면서 친하게들 지내지.
“게다가 한유진 씨는 의심도 많고, 완전히 독자노선을 걷는 사람입니다. 저를 회귀자로 의심하고 있으니 제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습니다.”
이강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럼 제가 한번 부탁 해볼까요?”
짤막한 한마디에 이강혁과 고미, 수다르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쏠렸다.
“어떻게 말씀이십니까?”
“한유진 씨가 저한테 연락 달라고 했거든요. 얼마 전에 마주치기도 했었고, 태양초의 열매만 가져가면 구워주는 것 정도는 해주지 않을까요? F급인 제가 뭐 대단한 일을 할거라고 의심하지도 않을 거고요. 이유야 상황 봐서 적당히 갖다 붙이죠 뭐.”
“으음······.”
한유진 이야기가 나오자 고미는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확실히 한유진도, 용도, 고미와 궁합이 좋지 않긴 하지······.
하지만 저 천도환인지 뭔지 하는 물건의 효과를 두 배나 올릴 수 있다면 도전은 해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나도 이강혁 씨한테 뭘 받아도 당당하게 받지.’
부모님 가게 내주고 고미 간식도 사주고, 나한테도 이런저런 다양한 것들을 해줄 사람이니 이 정도는 해주는게 당연하지.
천도환의 효과가 어느 정도냐에 따라 뭔가 더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고미, 싫어?”
“흥, 별수 있느냐. 불도마뱀이 그리 흔한 생물도 아니니,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지.”
그래도 거절은 하지 않으니 다행이네.
이따 갈비라도 먹여야겠다. 달달하고 고기니까 당연히 좋아하겠지.
“고마워, 대신 내일도 새로운 요리해 줄게.”
“흥, 화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요리는 맛있게 먹겠다.”
뭔가 말의 조합이 이상하지만, 일단 오케이.
“그럼 태양초 열매 주시면 굽는 건 제가 어떻게 해볼게요. 외뿔 광우의 뿔은 어떻게 할까요?”
“뭐, 진귀한 몬스터도 아니고 저희 길드 소유 던전에서도 나오는 몬스터니 제가 가서 하나 잘라오겠습니다.”
이강혁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저도 같이 갈 수 있을까요?”
나는 곧바로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원래는 이강혁에게 검술 시범을 보여달라고 해서 검술을 좀 배우려고 했는데, 실전을 보는 것보다 좋은 건 없을 테니까.
그 밖에 다른 목적도 좀 있고.
“알겠습니다.”
“허허, 저도 오랜만에 바깥세상 공기를 쐬고 싶은데, 함께 해도 되겠습니까?”
얌전히 대화를 듣고 있던 수다르가 자신도 함께 가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렇다면 나와 함께 저 두 녀석들이 싸우는 것을 구경하며 맛있는 것이라도 먹으면 되겠구나.”
고미는 그렇게 말하며 이강혁을 빤히 바라봤다.
‘뭐해, 먹을 거 안 사오고.’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
“허허, 그런데 고미님, 혹시 한과를 드셔 보셨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 눈빛을 읽은 수다르가 넌지시 자신의 원하는 메뉴를 말했다. 역시 사회생활 만렙이다.
한과 중에는 단맛이 강한 것이 많으니 고미도 만족할 수 있는 메뉴 선정이군.
고미의 이름을 빌려 메뉴를 정해놓고 고미가 마음에 안 들어 하면 상당히 난처해질 테니까, 자기가 먹고 싶은 메뉴 중에서 교수님이 좋아하는 음식을 고르는 방식인 건가.
“한과? 그것은 무엇이냐?”
고미가 눈을 빛내며 묻자, 수다르가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어나갔다.
“엿과 조청, 과일과 곡물을 이용해 자연 그대로의 단맛을 끌어낸 아주 훌륭한 음식입니다.”
뭐야 당신, 왜 그렇게 잘 알고 있어.
“한과의 일종인 유과는 찰떡을 말려 기름에 튀긴 후에 그 위에 조청을 입히고 고물을 묻혀 만든 것으로, 바삭하면서도 속이 비어있고, 부드러운 단맛이 아주 일품이지요.”
거기다 설명하는 척하면서 구체적인 메뉴까지 언급하고 있다. 굉장해.
한편, 이강혁은 그 간식 값이 다 자기 주머니에서 나간다는 것마저 잊고 수다르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만 제대로 된 유과가 아니라면 그 참맛을 느낄 수 없다는 점이 아쉽군요. 요즘 세상에 진짜 유과를 구할 수나 있을지······.”
마무리로 제대로 된 걸 사오라는 요구까지. 감탄스러운 걸 넘어 배우고 싶은 화술이다.
“유밀과 역시 훌륭하지요. 밀가루에 기름과 꿀을 섞어 말린 뒤 튀기고, 다시 조청에 절여내는 과자로, 그 식감과 단맛이 가히 천하일미라 할 수 있습니다.”
“오오, 수다르! 너는 어찌 그리도 잘 알고 있느냐?”
고미가 대견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렇게 묻자, 수다르가 흐뭇하게 웃으며 답했다.
“산신제에 올라온 음식은 모두 맛을 보았으니 약간은 아는 바가 있습니다. 제 미천한 식견이 고미님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니, 참으로 기쁘군요.”
“좋다! 좋아! 훌륭하다, 수다르! 그렇다면 오늘 소풍의 메뉴는 한과로 하자꾸나.”
고미의 컨펌(?)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 수다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이강혁을 슬쩍 바라본 뒤 마무리 멘트를 날렸다.
“이 밖에도 한과에는 꿀이나 엿, 조청이 들어가는 것이 대부분이니, 모두 고미님의 입맛에는 딱 맞을 것입니다. 오래 전 왕족이나 양반처럼 지체 높은 인간들이 차와 한과를 즐겼다고 하니, 고미님의 품격에도 걸맞은 음식이 아닐런지요?”
“굉장하군요. 과연 산신령님다운 해박한 지식입니다. 거기에 곰 선생님의 취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계시군요. 한 수 배웠습니다.”
이강혁이 감탄스러운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으이구, 인간아. 지금 저거 당신한테 사오라고 옆구리 찌르는 거잖아.
그것도 차까지 얹어서.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던전으로 가는 길에 한과를 사두라고 지시해 두겠습니다.”
말을 마친 이강혁은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박 실장, 지금 백화점에 가서 고급 한과 세트랑 거기에 맞는 차를 좀 사둬. 그리고 평택 쪽 외뿔 광우 나오는 B급 던전에 지금 사람 있는지 확인 좀 해보고.”
이강혁이 부하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는 사이, 고미는 자신의 꿀폰을 꺼내 수다르에게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다.
“이것을 보아라. 굉장하지 않느냐? 이것을 이렇게 누르면······.”
“오오, 벌써 속세의 물건을 이렇게까지 다룰 수 있게 되신 것입니까? 정말로 적응이 빠르시군요. 역시 고미님이십니다.”
이것들이······.
“한데 고미님, 고미님은 예로부터 풍류를 즐기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지. 너도 알다시피, 이 몸은 시서화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조예가 깊으니 말이다.”
고미가 자부심이 넘치는 표정으로 눈을 지그시 감으며 말했다.
생각해보니, 처음 만난 날도 이상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지.
‘곰곰히 생각해봐도~, 살곰살곰 다가갈 거야아~’ 어쩌고 하던.
“그럼 이 스마트폰이라는 것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십니까? 요즘 인간들이 어떤 음악을 듣는지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이것은 말입니다······.”
응? 뭐야 당신. 수박 플레이어도 알아? 왜 이렇게 현대문물에 정통한 건데.
아, 안되지. 그건 내가 가르쳐 줘야 한다고!
내가 못 놀아줄 때마다 하나씩 새로운 기능을 가르쳐주려고 사준 건데······.
꼭 내가 알려줘야 하는 이유가 있단 말이야!
게다가 너무 많은 걸 한 번에 알려주면 스마트 폰 중독에 빠진 곰이 돼버릴지도 모른다고!
“저, 산신령님, 잠깐만요. 그런 건 제가 가르쳐 줄게요. 일단 가시죠.”
나의 만류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산신령은 곧바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생각해보니 수하님께 배우는 편이 더 정확하게 배울 수 있겠군요. 사실 이 늙은이는 이런 것에 그다지 정통하지 못하니 수하님과 함께 하나하나 배워가는 즐거움을 느껴 보시지요.”
굉장하다. 빠지는 타이밍까지 완벽해······.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면서도 뭔가가 있다는 걸 감지하는 순간 정확하게 빠지고 있어.
그렇게 수다르의 사회생활 능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고 있을 때, 통화를 마친 이강혁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준비 다 됐습니다. 이제 가시죠.”
* * *
이강혁과 함께 도착한 것은 평택의 한 B급 던전이었다.
외뿔 광우라는 게 B급이었구나. 몰랐다. 그냥 이름은 몇 번 들어 본 정도.
나라고 모든 몬스터를 다 알 수는 없으니까.
던전 안으로 발을 들이자, 광활한 황금색 초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중간중간 기괴하게 뒤틀린 나무나 괴상하게 생긴 바위가 있다는 점 정도를 제외하면 ‘야생의 왕국’ 같은 프로그램에 자주 나오는 초원 지대.
“이 던전에는 C급 몬스터와 B급 몬스터가 혼재되어 있습니다. 현재 수하 씨의 실력으로 B급은 조금 무리가 있을 테니 B급은 제가 맡고, 수하 씨는 C급 위주로 연습을 해보죠.”
말을 마친 이강혁은 곧바로 배낭을 짊어지고 앞으로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배낭 안에는 차 세트와 휴대용 버너, 한과 세트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 손에는 뜨거운 태양을 막아줄 휴대용 파라솔이 들려 있었다.
수다르를 위한 이강혁의 안배랄까.
이런 거 보면 꽤 섬세한 사람인 것 같다.
“허수아비, 어서 돗자리를 펴거라. 이 몸은 빨리 한과를 맛보고 싶다.”
고미가 꼬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이강혁의 뒤를 쫓아가고 있었다.
오늘은 정말로 구경만 할 생각인가 보네.
뭐, 괜찮다. 나도 고미에게 싸움시키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으니까.
그냥 조금 특별한 곳으로 소풍 왔다고 생각하자.
“후후후, 그럼 이 몸은 한과를 맛보며 너희의 실력을 감상겠다.”
고미는 그렇게 말하며 돗자리를 깔고 한과 세트를 꺼냈고, 이강혁은 긴장한 표정으로 장검을 빼 들었다.
B급 정도면 한칼일 텐데, 고미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만으로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괴상한 생김새의 몬스터 몇 마리가 석상처럼 우뚝 멈춰선 채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게 외뿔 광우인가······. 뭐 저따위로 생겼어.’
나 역시 산신령의 보물에서 나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오늘 내 무기 구성은 평소와는 달랐다.
방패에 티타늄 주걱도 아니고, 방패에 몽둥이도 아니고, 몽둥이에 강철주걱.
음······. 네이밍이 찰지지가 않다.
티타늄 주걱에 핵빠따? 아니면 티타늄 주걱에 절구? 뭘로 하지?
‘와라, 소고기.’
어쨌든, 내 가설이 맞다면, B급인 외뿔 광우를 내 힘으로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B급 스킬은 하나도 없지만, 전투력을 단숨에 B급으로 올릴 비책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