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5 버리는 것 없이 알뜰하게
일단 말은 했지만, 솔직히 자신은 없네.
‘그 손이 어떤 손인데.’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의 대척점.
예술의 나락, 예술의 지옥 중에서도 가장 깊고 깊은 심연을 만들어내는 진정한 곰손.
그게 바로 고미다.
다행히도, 내가 원하는 건 고미의 작품을 예술로 승화시키는게 아니라, 녀석이 펼칠 지옥도에 모자이크를 하는 정도다.
‘가자, 한 번 해보는 거야.’
“고미, 저쪽으로 가자.”
이강혁이 주문한 스무디를 받아온 후, 나는 두 사람과 함께 주위의 한적한 숲으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인벤토리에 담아온 돗자리를 펼쳤다. 아무리 그래도 카페에서 ‘이짓’을 할 수는 없으니까.
돗자리를 깔고 ‘준비물’을 쏟아내자, 이강혁과 고미가 나란히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아니, 고미는 그렇다 치고 당신은 왜 눈을 빛내.
“흐음······. 이것이 무엇이냐?”
‘준비물’은 바로 아동 놀이 치료에 쓰는 색깔 점토 세트.
이제부터 이걸로 고미의 작업 방식을 개선할 생각이다.
과학적으로 곰손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미적 감각 자체에 문제가 있음.
둘째, 섬세한 작업에 필요한 소근육과 섬세한 운동에 필요한 뇌 영역의 미발달.
셋째, 작업 방식의 결함.
넷째, 섬세한 작업이 불가능한 손 모양. (고미 한정)
미적 감각은 타고난 재능에 경험이 겹쳐져 만들어지는 것이라 문제가 있다 한들 내가 손댈 수 없다.
소근육과 뇌 영역의 미발달, 싸우는 걸 보면 전혀 문제가 없는데, 이건······. 현대 과학으로는 풀 수 없는 미스터리다. 모르는 걸 손댈 수는 없으니 패스.
네 번째도 마찬가지.
‘역시, 손댈 수 있는 건 작업 방식 뿐이야.’
작업 방식을 개선하고, ‘고미의 조력자’ 칭호 효과가 보태지면 조금이나마 효과가 있을거다.
솔직히 칭호 효과 없으면 시도할 엄두도 안 났겠지.
이건 불치병이니까.
“자, 고미. 이거 봐.”
나는 천천히 심호흡을 한 뒤 갈색 점토 하나를 꺼내 곰 모양을 만들어 주었다.
훗, 내가 이런 건 좀 하지. 한두 번 만들어 본 게 아니거든.
“오오! 수하! 이, 이것은······. 위대한 곰의 형상이 아니더냐! 남몰래 이런 것을 만드는 연습을 했단 말이냐? 나를 흠모하는 마음이 참으로 기특하구나.”
<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130 / 100 ) >
< 참 잘했어요 포인트가 상승합니다. (48 / 50) >
역시 눈이나 미감은 정상이구나.
“수하 씨는 손재주가 좋군요.”
이강혁이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으로 은근슬쩍 고미를 훑어보며 말했다.
“너도 한번 만들어 볼래?”
나의 제안에 고미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훗, 그것은 위대한 이 몸에게는 너무 쉽다. 나는 우리 가족을 만들 것이다. 멋지지 않느냐?”
마음이 예쁘기는 한데······.
한 명이라도 제대로 만들 수 있을까?
말을 마친 고미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점토를 주물럭거리더니 이내 다섯 개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들을 쏟아냈다.
역시, 큰 틀을 만들고 다듬어 나간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
“흐음, 나쁘지는 않은데······.”
고미가 진지한 표정으로 내가 만든 곰과 자신의 작품을 비교해보며 중얼거렸다.
“무언가 부족하구나.”
······.
아무리 봐도 약간 부족한 수준은 아닌데······.
“자, 잘 봐 고미.”
나는 고미의 눈앞에 점토를 가져다 놓은 뒤 큰 부분부터 모양을 만들고, 팔다리나 귀 같은 세부적인 부분은 나중에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보여줬다.
점토가 다섯 개니까, 자연스럽게 다섯 번은 보여줄 수 있지.
< ‘조물조물’에 대한 고미의 이해도가 상승합니다. >
이어지는 반가운 메시지.
‘역시, 칭호 효과가 있으면 조금이나마 이 녀석의 병을 고쳐줄 수 있어.’
사실 내가 바라는 건 아슬아슬하게 ‘원형’을 알아볼 수 있는 정도까지만 고미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건 아침에 이미 확인했고.
“으음, 알 것도 같구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고미는 다섯 개의 ‘덩어리’를 만지작거려 한층 나아진 ‘개선품’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돼, 됐어!’
짝짝이기는 해도 팔다리로 추정되는 게 붙어있고, 머리와 몸통, 사지를 구분할 수 있다.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고미가 만든 우리 가족은 누가 봐도 큰 짱돌, 작은 짱돌, 중간 짱돌 1, 2, 3이었으니까.
“고미, 이제 이걸로 검을 만들어 보자.”
“검? 그것은 너무 쉽지 않느냐. 나는 조금 더 웅장하고 멋진 것을 만들고 싶다.”
고미의 한마디에 이강혁의 표정이 우는 듯 웃는 듯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그래, 무슨 말 하고 싶은지 안다.
“정말? 이런 거 만들 수 있어?”
점토로 장검을 만들어 흔들자, 고미는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걸려들었군. 고미 같은 성격을 가진 아이에게는 승부욕을 자극하는 게 가장 효과가 좋지.
“훗, 수하. 네 솜씨는 겨우 그 정도냐? 내가 너에게 진정한 검을 보여주마.”
말을 마친 고미는 붉은색 점토를 동글동글 뭉치더니 그것을 손으로 밀어 길쭉하게 만들고, 천천히 검의 형태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배운 걸 제대로 써먹고 있다. 이런 걸 보면 지능에도 문제는 없는 것 같다.
‘좋아, 여기까지는 제대로야.’
그렇게 약 1분이 지나자······. 끝부분이 조금 뾰족한 막대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중간중간 찌그러진 곳이 있지만, 검이라는 느낌적인 느낌은 있다.
“오······. 멋있네. 내가 만든 것보다 남자답고 힘이 넘치는 검이야.”
그리고 의욕을 끌어올리기 위해 칭찬을 해주자,
“후훗······. 역시 너는 안목이 있구나.”
이내 자신감이 줄줄 흐르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반면 이강혁은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되살아난 듯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럼 이제 진짜 검을 만들어 볼까?”
까톡, 까톡.
그때, 갑자기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울렸다.
└ 수하씨, 검이 필요하면 제가 가지고 있는 것 중에 쓸만한 것으로 하나 내드리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어 이강혁에게 ‘노’ 싸인을 보냈다.
내가 원하는 건 ‘검’이 아니라 ‘고미가 만들어 준 검 비스무리한 것’이니까.
“훗, 꼭 내가 만든 검이 갖고 싶은 것이냐?”
한껏 자신감이 차오른 고미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응. 좋은 거로 만들어 줘.”
“걱정하지 말거라. 그럼 재료를 다오. 허수아비. 너에게도 이 몸의 작품을 감상할 영광을 주마.”
고미가 ‘메스’라고 말하는 외과 의사 같은 자세로 손을 내밀자, 이강혁은 말없이 마력철과 마정석을 건넸다.
평소 같으면 ‘감사합니다’라고 말이라도 할 텐데, 부메랑의 충격이 너무 큰 모양이다.
“간다. 조물, 조물······!”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자, 나는 잽싸게 핸드폰에 메시지를 써 이강혁에게 보여주었다.
이강혁은 내 요구사항을 보고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고미는 김밥을 말듯 점토를 서서히 말아 길쭉하게 만들고, 앞발로 살살 눌러 대략적인 형태를 잡아갔다.
‘강철주걱’을 만들 때 보다는 몇 배는 나아진 작업 방식.
선생님으로서 보람이 느껴지는 광경이다.
하지만 결국 점점 더 형태가 이상해지더니, 이곳저곳 울퉁불퉁 튀어나온 막대기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그래도 크게 휜 곳은 없으니, 이 정도면 고미 인생 최고의 역작이라고 해도 될 수준이다.
“후훗, 자, 들어보거라. 이름은 무엇이라고 짓는 것이 좋겠느냐?”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고미가 만든 검을 붙잡아 보았다.
‘아직 모자란 건가?’
하지만, 애석하게도 ‘검의 달인’ 스킬은 활성화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회생불가능한 상태는 아니야'
이에 나는 마지막 수단에 모든 것을 걸어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강혁 씨. 부탁드릴게요. 고미, 이것 좀 꽉 잡고 있어 줘. 절대 움직이면 안 돼. 이제 이강혁 씨가 검을 완성해 줄 거야.”
“응? 그게 무슨 소리냐?”
고미는 그렇게 되물으면서도 순순히 검을 들고 서 있었고,
“후우······.”
이강혁이 긴 한숨을 내쉬며 장검을 뽑아 가볍게 두세 번 휘둘렀다. - 오늘 이강혁은 부메랑 외에도 제대로 된 검을 들고 왔다. 역시 건물주+길드장이라 그런가, 비싸 보이는 검을 몇 개나 가지고 있다. -
쩡, 쩌정!
다음 순간,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고미가 만든 검에서 가장 울퉁불퉁 튀어나온 부분이 매끈하게 잘려나갔다.
실은 내가 붙잡고 있고 싶었지만, 내 힘으로는 검격을 받는 순간 검을 놓치고 말 테니까.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허수아비!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나의 작품에!”
“고미, 진정해! 내가 부탁한 거야.”
“수하, 어, 어떻게 네가······.”
작품을 훼손(?)당한 충격에 고미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 어떡하지. 생각보다 너무 충격을 받았네.
“미안해 고미, 대신 꽃등심 사줄게.”
“꽃등심? 그것은 무엇이냐?”
“지난 번에 먹은 소고기보다 몇 배는 맛있는 고기야.”
소고기보다 몇 배는 맛있다는 말에 잠시 고민에 빠져있던 고미가 꼴딱 침을 삼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절대 그 꽃등심이라는 것 때문에 용서해주는 것은 아니다. 왜 나의 작품에 손을 댔는지, 반드시 해명하거라.”
“알겠어, 꼭 해명할게. 그리고 이 검, 진짜 제대로 쓸게.”
그리고 고미에게 검을 건네받는 순간······.
< 검의 달인(F) 스킬이 활성화됩니다. >
역시! 됐어!
오전에 내가 확인한 것은 ‘검의 범위’였다.
웹 소설에서 보면 검술 스킬을 가진 사람들은 검을 들면 스킬이 발현된다.
그런데 검의 범위가 정확히 어디까지일까? 날만 있으면 되나? 식칼은? 단검도, 대검도 모두 검으로 인정한다면, 죽도나 목검, 막대기는?
이 생각을 검증하기 위해, 나는 아침 일찍 운동용품점에 가서 목검과 죽도를 들어봤다.
그 결과, 시스템이 그 모든 것을 ‘검’으로 인정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검 역시 조금 각지고 튀어나온 부분이 있는 데다가 날도 없지만, 대충 목검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긴 하고.
“고미, 이것 봐.”
내가 검을 잡고 위아래로 휘둘러보자, 아직 삐진 기색이 남아있던 고미의 표정이 대번에 변했다.
“호오······.”
“수하 씨, 검술 스킬도 가지고 계신 겁니까?”
“아뇨, 그냥 눈대중으로 보고 따라 하는 거예요.”
“재능이 있으시네요.”
“확실히 그렇구나. 이전에 만들어 준 철퇴를 쓸 때는 자세가 영 좋지 않았는데 말이다.”
감탄하고 있는 두 사람을 앞에 두고, 나는 ‘곰정사의 눈’ 스킬을 발동했다.
< 날카로운 곰정사의 눈(E) 스킬을 사용합니다. >
- 감정에 실패했습니다. 아이템의 등급이 너무 높습니다.
역시, D등급 이상의 무기다.
거기에 ‘고미님의 제자’ 칭호가 적용되고, ‘검술의 달인’ 스킬 효과까지 추가.
이로써 내가 가진 칭호와 스킬을 하나도 낭비 없이 사용할 수 있다.
좋은 검을 사면 ‘검의 달인’은 쓸 수 있지만, 칭호 효과는 버려야 한다. 반대로 ‘강철 주걱’만 사용하면 검의 달인 스킬을 버려야 하고.
‘하지만 이렇게 하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모두 쓸 수 있지.’
솔직히 말해 하나하나 다 고미와 함께 얻은 스킬이고 칭호인데, 버리고 싶지는 않다는 감정적인 이유도 좀 있다.
내가 원래 추억이 깃든 물건 잘 못버리는 스타일이거든.
게다가 이렇게 하면서 스킬과 검을 계속해서 강화해 나가다보면 시너지도 더 커질거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봤을 때도 이게 베스트다.
생각을 마친 나는 이강혁 씨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이강혁 씨, 너무 화려한 거 말고, 가장 기본적인 자세 몇 개만 보여주실래요?”
“그러죠.”
이강혁은 군말 없이 종 베기, 횡 베기, 사선 베기와 찌르기를 보여주었다.
“음······.”
감각 강화에 검의 달인 스킬이 쌍으로 붙어있어서 그런가, 검이라고는 잡아본 적도 없지만,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이것도 성공. 역시 이 두 스킬도 시너지가 나는구나.’
이걸로 준비한 실험은 거의 다 성공이다.
그럼 이제 마지막 실험만 남았네.
“이강혁 씨,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고미,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도와줘.”
마지막 실험은, 나뿐 아니라 고미와 이강혁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