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3 고미 싸움에 수하 등 터질까 무섭다
시커먼 그림자가 더욱 짙어지는 순간, 돌연 무언가가 나의 몸을 짓눌렀다.
[ 수하! 숙여라! ]
- 끼이이이!
이어서 날카로운 소리가 귓등을 때렸다.
쇳소리와 짐승의 울음소리가 뒤섞인 것 같은 날카로운 소음.
그리고는 봉식이 못지않은 거구의 스켈레톤 나이트가 무언가에 붙들려 허공으로 솟구쳤다.
토끼를 낚아채는 매처럼 스켈레톤 나이트를 낚아챈 거대한 ‘무언가’는 빠르게 하늘 위로 솟구쳐 갑옷을 입은 새하얀 백골을 허공으로 내던졌다.
“드, 드래곤!”
전신이 붉게 달아오른 봉식이가 하늘을 보며 외쳤다.
- 키이이이!
또 한 번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며 두 마리의 드래곤이 추락하는 스켈레톤 나이트를 낚아채고, 집어 던지고, 찢어발겨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으아, 불쌍하다. 몬스터지만 저렇게 죽이는 건 좀······.’
나름 위엄 넘치는 해골 기사였는데, 순식간에 하늘을 날아다니는 뼈다귀가 됐네...
[ 게이트에서 떨어져요! ]
뒤이어 낭랑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고미가 아니라, 낯선 여자의 목소리.
나와 봉식이는 반사적으로 게이트 반대편으로 달려갔고, 그와 동시에 거대한 레드 드래곤이 둥근 곡선을 그리며 하강하더니 게이트를 향해 시뻘건 브레스를 내뿜었다.
- 크오오오오!
진짜 브레스라는 건 이런 거구나.
고미, 너 정말 브레스 맞고도 무사했니······.
처음으로 고미의 말이 허풍은 아닐까 의심이 가는 순간이다.
[ 쳇, 다잡은 먹이를 낚아채다니,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
어느새 나의 어깨에서 내려온 고미가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표정으로 드래곤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드래곤이랑 사이가 안 좋기는 한 모양이다.
고열의 브레스에 의해 순식간에 게이트가 사라지고, 붉은 드래곤의 앞을 막고 있던 해골들이 재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제르보나, 그만.”
뒤늦게 온 헌터 몇이 황망한 표정으로 붉은 드래곤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새까만 드래곤 한 마리가 나와 고미의 바로 앞에 내려앉았다.
「몬슐랭~♩ 몬슐랭~♪」
그 순간, 머릿속에 BGM이 깔리고, 늘씬한 갈색 머리의 여자 하나가 드래곤의 등에서 내려 나를 향해 걸어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 오해하지 마라. 사랑에 빠졌다거나, 첫눈에 반해서 배경음악 깔린 거 아니다. 그런 것 치고는 로맨틱함이 부족하잖아.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게 몬슐랭 CF의 주인공이거든.
S급 테이머, 한유진.
4대 길드 중 하나인 ‘용왕’의 수장이자, 세 마리의 용을 거느린 공포의 마녀.
“곰트라이더. 맞죠?”
“네?”
······.
이분, 인터넷 많이 하시는구나.
첫인사치고는 꽤 강렬한 질문이네.
“사진 봤어요. 쟤가 고미에요? 실물이 훨씬 더 귀엽네요. 어쩜 저렇게 예쁘지?”
새하얀 손가락이 자신을 향하자, 고미는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 수하, 저 예의를 모르는 계집은 누구냐? ]
“어머, 손가락으로 가리켜서 기분 상했니? 듣던 대로 정말 머리가 좋네.”
[ 그래도 보는 눈은 있구나. ]
하지만 머리가 좋다는 말에 조금 기분이 풀어진 모양이다.
아닙니다. 보시다시피 굳이 따지자면 맹한 쪽이에요.
“고미를 어떻게 아시는 거죠?”
“응? 이상하네, 성한 오빠가 연락 안 했어요? 제가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달라고 말씀드렸는데.”
성한 오빠면······. 아 맞다, 임성한 씨.
이 사람이 나, 아니 고미 보고 싶다고 했었지.
솔직히 말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요 며칠 이런저런 문제로 정신이 없었으니까.
“아, 네. 들었습니다. 죄송해요. 제가 좀 바빠서 까먹고 있었네요.”
나의 대답에 한유진의 고운 이마에 곧바로 주름이 잡혔다.
동양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새하얀 피부에 밝은 갈색 머리, 가느다랗고 긴 팔다리에 또렷하고 날카로운 이목구비.
왜 연예인 안 하고 헌터 하냐는 소리가 나올 만큼 화려하고 예쁜 외모······. 인데, 나는 이런 타입 좀 부담스럽다.
“까먹어요?”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비죽 내미는 한유진의 모습에 고미는 또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한유진이 어지간히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너무하네. 진짜로 까먹었다고요?”
다른 남자들이라면 한유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겠지.
확실히 예쁘긴 예쁘니까. 이런 여자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걸면 눈을 못 떼는게 정상이지.
하지만 나는 지금 한유진이 아니라 그 뒤에 서 있는 블랙 드래곤을 보고 있었다.
녀석의 커다란 눈동자는 고미에게 못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너무 유심히 보는데······.’
어째 느낌이 쎄하다. 도망 마렵네.
그때, 나의 눈앞에 퀘스트 메시지가 떠올랐다.
< 퀘스트 제한 시간이 30분 남았습니다. >
‘아, 퀘스트. 터치펜 사러 가야지.’
갑작스러운 상황에 경황이 없어 잠시 잊고 있었다.
그래, 퀘스트 해야지.
오해하지 마라, 절대 무서워서 퀘스트 핑계대고 도망가는 거 아니다.
“용이다, 진짜 용이야!”
“와, 크기 장난 아니다.”
“나 아까 브레스 뿜는 거 봤거든? 티비에서 보던 거랑 차원이 다르더라. 완전 멋있어.”
“사진 찍자.”
게이트가 정리되자, 달아났던 사람들이 삼삼오오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드래곤 말고도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존재가 있었으니······.
“어? 나 저 사람 알아. 그거, 마트 곰.”
“마트 곰?”
“몰라? 곰이랑 마트에서 카트 타는 짤방으로 유명한 헌터인데.”
“이거 봐봐.”
“와, 진짜 귀엽다. 난 드래곤보다 저 곰이 더 좋아.”
사람이 모이니 곰트라이더 짤방을 본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라도 드래곤 두 마리 끌고 온 한유진이랑 붙어있으면 너무 눈에 띄고.
“와, 한유진이다!”
“예쁘다. 진짜 웬만한 연예인보다 훨씬 예쁘네.”
“머리 작은거봐, 진짜 사람 아닌 것 같다.”
봐라, 드래곤+곰 조합이든, 한유진+곰 조합이든, 시선 강탈하는 조합이지.
‘하긴, 나 같아도 구경은 할 것 같네.’
하지만 난 사람들한테 관심받는 거 싫어한다.
고미가 너무 유명해지는 것도 곤란하고.
무엇보다 고미가 드래곤이랑 사이 안 좋은 거 뻔히 아는데 여기 계속 있다가 사고 칠까 봐 무섭다.
가장 무서운 건 블랙 드래곤에 이어 레드 드래곤까지 고미를 주시하기 시작했다는 점.
도저히 안 되겠다. 한유진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빨리 고미랑 용들이랑 떼어 놓는 게 좋겠어.
“저, 죄송한데, 저는 이제 가봐도 될까요? 좀 급한 일이 있어서.”
내가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리자, 한유진이 황당하다는 듯 내 뒤를 쫓아왔다.
“아니, 죄송하시면 잠깐 얘기라도 하고 가요! 며칠씩이나 연락도 안 줘놓고!”
“제가 지금 시간이 없거든요.”
“대체 뭐가 그렇게 바쁜데요?”
“터치펜 사야 해요.”
“네?”
나의 대답에 한유진의 표정이 무언가 잘못 들은 사람처럼 그대로 굳어버렸다.
“죄송해요, 진짜 죄송한데, 이게 엄청 급한 일이거든요. 나중에 임성한 씨 통해서 연락 한번 드릴게요. 봉식아, 고미! 가자.”
“어, 어, 그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나도 용 타보고 싶다.’하는 표정으로 드래곤을 바라보던 봉식이가 서둘러 내 곁으로 돌아왔다.
응, 안 해. 연락 안 할 거야.
당신네 용들이랑 고미랑 궁합 안 좋을 거 같아.
옆에 서 있다가 브레스 맞을 것 같단 말이야.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후다닥 스마트폰 용품점으로 달려갔다.
* * *
제한 시간 20분. 하지만 여전히 사장님은 오지 않는다.
가게 밖에는 용 두 마리를 돌려보내고 홀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유진이 서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안 오고, 안 기다려줬으면 하는 사람은 나를 기다리고 있는 이 불편한 상황.
‘사장님, 대체 어디까지 도망간 거예요. 좀 와라! 대한민국 치안이 아무리 좋다지만 이렇게 오래 가게 비우면 안 되지!’
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
마침내 사장님으로 보이는 중년의 아저씨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이고 손님, 죄송합니다. 요 앞에 잠깐 게이트가 열려가지고 문도 못 잠그고 도망부터 갔다 왔네.”
땀을 뻘뻘 흘리는 게 제법 멀리까지 달려갔다가 돌아온 모양이다.
“뭐 사시려고요?”
“터치펜, 터치펜이요.”
아, 터치펜 하나가 이렇게 간절하다니······.
“아, 터치펜! 기다리세요.”
사장님이 터치펜 몇 개를 가져오는 순간, 머릿속에 빵빠레가 울려 퍼진다.
‘됐어, 드디어 됐다.’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를 뚫고, 마침내 손에 넣었다. 터치펜.
“어······. 어떤 거로 드릴까요? 우선 이거는······.”
“다 주세요. 다.”
사장님의 손에 들린 터치펜은 총 다섯 자루.
시간이 아깝다. 빨리 집에 가져가서 고미에게 사용법 알려줘야 한다.
20분이면 빠듯하다고.
“다요?”
“네, 빨리요. 급해요.”
나는 황급히 계산을 마치고 뒤쪽에 서 있는 봉식이의 뒤로 몸을 숨겼다.
“야, 봉식아. 미안한데, 한유진이 나 찾으면 갑자기 없어졌다고 해라.”
“뭐?”
“고미, 살곰살곰으로 빠져나가자. 부탁할게. 우리 여기서 붙잡히면 엄마한테 전화 못 해.”
[ 뭣이? 그럴 수는 없지. 가자, 수하. ]
< 위대한 고미님의 가호가 깃듭니다. >
< 살곰살곰이 최대치로 활성화됩니다. >
< 당신의 기척이 사라집니다. >
* * *
살곰살곰을 켜고 고미를 어깨에 얹은 채로 가게를 빠져나와 집까지 달려서 10분.
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지만, 시간이 없다.
나는 수건으로 대충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곧바로 터치펜을 고미의 손에 쥐여줬다.
“응? 이것이 무엇이냐?”
“자, 손 대신 그걸로 화면 눌러봐.”
고미가 가볍게 스마트폰의 화면을 누르자, 화면의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오오!”
“자, 이제 아까 가르쳐 준 대로 그걸 누르고, 엄마를 누르면 돼.”
톡, 톡.
띠리리-
마침내 스마트폰이 제대로 작동하고, 신호음이 들리자, 고미의 꼬리가 메트로놈처럼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BPM이 150은 되겠네.
“여보세요?”
“엄마!”
“응? 고미니? 처음 보는 번호인데······. 누구 핸드폰으로 전화 걸었니?”
“위대한 이 몸의 것이다!”
“어머, 우리 수하가 고미 핸드폰도 사준 거야?”
“그렇다! 엄마는 언제 오는 것이냐?”
고미의 손에는 어느새 낮에 소풍을 가서 주워온 개나리 가지가 들려 있었다. 허공섭물로 가져온 건가······.
“으음, 아직 한 30분은 있어야 하는데······. 왜? 고미 뭐 먹고 싶은 거 있니?”
“후훗, 아니다! 이 몸이 엄마를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 잔뜩 기대하거라!”
“오구, 그랬어요~? 알았어, 엄마가 맛있는 거 사서 얼른 들어갈게!”
그렇게 짧은 통화를 마치자,
상태창에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떠올랐다.
< 축하합니다. 긴급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
< 퀘스트 보상이 지급됩니다. >
-능력치 강화 (+5)
-칭호 : 위대한 고미님의 첫 번째 조력자 (F)
위대한 존재는 언제나 고독한 법입니다. 당신은 외로운 고미의 도움에 응한 첫 번째 존재입니다. 당신의 조언과 도움을 통해 고미는 자신의 권능을 보다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버프인가······? 그런데 고미한테 버프가 필요하기나 한 건가······.
곰손이라는 문제를 제외하면 사실상 전지전능, 슈퍼먼치킨, 사상최강, 뭐 이런 말이 어울리는 캐릭터잖아.
‘이거 애매한데······. 내가 고미한테 무슨 조언을 할 수 있다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고미의 전화번호부에 등록된 이강혁의 이름이 선명하게 두 눈에 들어왔다.
‘아······. 어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