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42화 (42/300)

EP.42 걸림돌이 지나치게 거창하다

음성인식 프로그램을 사용해도 전화는 걸 수 있지만, 내가 고미에게 스마트폰을 주려는 이유는 꼭 전화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직 음성인식으로는 사용할 수 없는 기능들도 많은 데다가, 고미의 사극 말투를 어디까지 인식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그리고 음성인식이 실패하면······.

‘수하! 이놈이 자꾸 내 말을 무시한다!’

‘네 이놈! 왜 묻는 말에 답을 하지 않고 자꾸 딴소리를 하는 것이냐!’

대노할 고미의 모습이 머리에 그려진다.

최악의 경우 스마트폰을 부숴버릴지도 모르고.

그럼 해결책은 하나다. 터치펜.

“고미, 나가자. 10분 내로 해결할 수 있어.”

“알겠다!”

나는 곧바로 고미를 데리고 집 밖으로 나갔다.

제한 시간은 55분이나 남아있다.

‘여유롭구만.’

이 녀석은 약간 맹한 구석이 있으니, 잃어버리거나 부서질 걸 대비해 예비용으로 여러 개를 사두는 편이 좋겠지.

* * *

그렇게 고미를 어깨 위에 태운 채 스마트폰 용품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

저 멀리 보여선 안 될 것이 보였다.

‘왜, 왜 지금이냐!’

게이트라니, 터치펜 사는 걸 방해하는 거 치곤 너무 거창하잖아!

그렇다고 게이트 열린 걸 무시하고 그냥 지나갈 수는 없다.

[ 수하, 균열이 열리고 있다! 어서 저쪽으로 가자!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 ]

고미가 한 손에 ‘꿀폰’을 꼭 쥔 채 외쳤다.

물론 고미에게 맡기면 1분 내로 정리할 수 있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제대로 힘을 쓰면 ‘곰트라이더’ 때처럼 그냥 ‘귀엽다.’, ‘곰 키우고 싶다.’ 같은 수준으로 끝날 리가 없지.

‘대환장 파티구만.’

나는 봉식이에게 전화를 걸며 게이트가 열린 곳으로 달려갔다.

“봉식아, 게이트 열렸다! 그만 쉬고 튀어나와! 이강혁 씨한테 연락하고!”

“뭐? 어딘데!”

“1번가! 횡단보도 건너편, 어디야 커피 있는 쪽!”

그 사이, 게이트가 빠른 속도로 안정되기 시작했다.

‘뭐가 이렇게 빨라. 보통 몇 분은 더 걸리잖아.’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가 쏟아지기까지는 보통 10분 내외의 시간이 걸린다.

그게 아니면 게이트 한번 열릴 때마다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이미 사회가 붕괴했을 거다.

물론 유령 게이트 사태처럼 예외도 있긴 하지만, 그런 일은 드물다.

그 드문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는 게 문제지.

‘왜 처음으로 시간제한 퀘스트 받았는데 저딴 게이트가 열리냐고!’

나는 곧바로 보라 찐빵과 티타늄 주걱을 꺼내 들고 게이트를 향해 달려갔다.

‘아오, 무슨 터치펜 하나 사러 가는 길이 이렇게 험난하냐!’

“고미, 보는 눈이 너무 많아. 넌 나서지 마.”

[ 알겠다. 흘러나오는 기가 대단치 않으니 너 혼자서도 봉식이와 허수아비가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

그때,

“헌터다!”

“이쪽으로!”

“게이트 열리는 거 너무 빠른 거 아니야?”

“뛰어, 뛰어!”

“다른 헌터들은 왜 아직도 출동을 안 해!”

몇몇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며 황급히 내 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근데 저 사람 좀 이상한데?”

“무기도 이상하고, 어깨에 곰은 왜 올리고 다니는 거야?”

“헌터 맞아? 그냥 정신 이상한 사람 아니야?”

그러나 내 행색(?)을 보자마자 상당히 못 미더워하는 눈빛을 보냈고, 심지어 몇몇은 불안한 듯 방향을 틀기까지 했다.

‘근로 의욕 꺾이네.’

외모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다니, 이런 편견에 사로잡힌 인간들 같으니.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게이트를 향해 내달렸다.

지지직-

이어서 대중없이 뻗어 나가던 균열이 서서히 일정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곧 몬스터가 쏟아진다는 신호.

- 달그닥, 달그닥.

“하아······.”

게이트에서 나타난 첫 번째 몬스터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언데드 계열이네. 그것도 스켈레톤 시리즈.

강하지는 않지만, 어중간하게 부숴놓으면 자꾸 다시 일어나니 상당히 시간을 잡아먹는 놈들이다.

‘맞춤형 게이트냐.’

할 수 없지. 스마트폰 용품점 아저씨가 너무 멀리 도망가지 않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용맹하게 앞으로 나가며 티타늄 주걱의 날을 사선으로 휘두르자,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앞을 막아선 스켈레톤의 뼈가 부서졌다.

‘몸이 가벼워.’

확실히 왕유를 먹고 난 이후로 몸이 가벼워진 게 느껴진다.

능력치는 상승하지 않았지만, 온몸이 원하는 대로 물 흐르듯 움직인다.

‘운동 통제 능력이나 협응 능력이 향상된 건가.’

운동 통제 능력이나 협응 능력은 민첩이나 근력 이상으로 운동 능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헌터들 중에서 단순 능력치 총합은 높은데 생각보다 실력이 시원치 않은 사람들은 이런 능력이 부족해서고.

실제로 스포츠 선수들 중에도 소위 '탑급'이라고 불리는 선수들은 근력이나 민첩성 이상으로 협응 능력이나 운동 계획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고미가 얘기한 상태창에 의지해서는 강해질 수 없다는 게 그런 의미인가? 이런 능력은 상태창에 나타나지 않으니까.’

그때, 뒤쪽에서 뭔가가 바람을 가르고 날아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살!’

깡!

감각이 강화된 덕에 보지 않아도 화살이 시위를 떠나는 순간부터 공격이 온다는 걸 알 수 있다.

화살이 공중에서 방향이라도 틀지 않는 이상 그냥 방패를 가져다 대기만 해도 되는 수준.

감각 강화는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의외로 활용도가 높구나.

나, 은근히 스킬 구성이 알찬데······.

[ 오오······. 벌써 이만큼이나 강해졌다니, 제법 쓸만하구나! 가라, 수하! 수행이다! ]

고미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앞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살짝 포x몬이 된 기분이지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거지 뭐.

“알겠어! 간다! 몸통 박치기!”

[ 응? 그것이 무엇이냐? ]

“그런 게 있어! 곧 알려줄게!”

포x몬을 모르니 드립이 안 먹히네.

앞쪽에 서 있는 스켈레톤 한 마리의 다리를 부수자, 그 뒤에 있던 2미터에 가까운 크기의 스켈레톤 워리어가 나를 향해 도끼를 내리찍었다.

방패로 막아도 근력에서 밀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을 것 같다.

‘넘어지면 주위에 있는 놈들한테 포위될 거야.’

그럼 바로 둘러싸여서 다구리 맞는거지.

나는 반사적으로 옆쪽으로 구르며 녀석의 도끼를 피했다.

쾅!

[ 쓸만한 판단이구나. 잘했다, 수하. ]

그리고 몸을 일으켜 오른쪽에 있는 놈을 주걱으로 내려치고, 왼쪽에 있는 놈을 방패로 미는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몸이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또?”

[ 오호? ]

어깨에 앉아있던 고미가 놀란 듯 몸을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네가 만들어 준 거잖아······. 놀라지 말라고.

이제는 모른다는 거 감출 생각도 없는 거냐.

어쨌든, 이번 일로 대충 감을 잡았다.

보라 찐빵의 숨겨진 옵션, 이거구나!

깨달음을 얻은 나는 옆에 있는 놈을 있는 힘껏 방패로 후려쳤다.

그러나······.

깡!

‘여보세요?’

불발이네······.

이번 실험은 실패입니다! 가설을 수정하세요!

‘단순히 방패로 공격하면 터지는 게 아닌가?’

실험에 실패한 내가 잠시 낙담하고 있을 때,

“김수하! 머리 숙여!”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거대한 붉은색의 짐승 한 마리가 달려와 2미터도 넘는 스켈레톤 워리어의 머리를 한방에 박살 냈다.

퍽! 퍽!

무자비한 주먹질에 스켈레톤 워리어의 몸이 허무하게 부서지고, 바닥에 뼈다귀가 굴러다닌다.

“워어······.”

넘치는 박력.

무기 하나 들지 않고 맨손으로 C급 몬스터를 박살 내 버리는 폭발적인 힘.

이 시대의 진정한 물리 치료사, 이게 민봉식이지.

“하아······. 안 늦었네.”

까무잡잡한 피부가 붉게 달아올라 있고, 온몸에서 새하얀 김이 뿜어져 나온다.

거기에 몸 곳곳에 무언가에 맞은 듯 유독 새빨갛게 변한 지점이 보인다.

“스킬 썼냐?”

“어. 급해서 오는 길에 좀 맞았다.”

‘급해서’ , ‘맞았다.’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지만, 봉식이에게는 성립이 가능한 문장이다.

이놈 스킬이 맞을수록 강해지는 거거든······.

[ 호오, 봉식이······. 제법이구나. ]

봉식이의 힘을 본 고미의 입에서 ‘제법’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강혁한테는 맨날 허수아비라고 하면서······. 확실히 이놈은 그릇이 다른가 보다.

“저게 대장인 것 같지?”

나는 손을 들어 게이트 앞에 서 있는 말 탄 해골을 가리켰다.

놈은 섣불리 나서지 않고 거대한 칼을 손에 든 채 게이트 앞을 지키고 있었고, 게이트에서는 계속해서 해골 군단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스켈레톤 나이트. C급 중에서는 꽤 성가신 상대다.

말까지 전투력을 가지고 있고, 말에 올라 있다는 것만으로도 높이라는 면에서 상당한 이점을 가지고 있으니까.

“둘이서 될까?”

“안 되겠냐 그럼?”

봉식이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며 말했다.

“저 망아지 새끼는 내가 찢어줄 테니까 그 위에 있는 놈 뚝배기 깨라.”

말을 마친 봉식이는 거침없이 해골들을 때려 부수며 앞으로 전진했고, 나 역시 녀석과 딱 달라붙어 해골들을 처리하며 다시 ‘실험’에 들어갔다.

이번 기회에 보라찐빵의 비밀을 꼭 밝혀야겠다.

‘말벌을 잡을 때는 빗겨 쳤더니 폭발했지, 왕유 먹었을 때는 기억이 흐려서 잘 모르겠고, 조금 전에는 밀었더니 터졌어.’

실험이 실패했다면 우선 실패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설을 세워야 한다.

방어할 때는 한 번도 안 터졌으니까, 공격에 활용해야 터지는 건 확실한데.

그때, 해골 하나가 몽둥이를 휘두르며 나에게 달려들었다.

평소라면 방패로 막고 주걱으로 마무리를 할 테지만, 실험을 위해 주걱으로 막고 방패로 녀석을 후려쳤다.

퍽! 이번에도 실패. 대체 뭘까.

그렇게 세 번, 네 번의 실험을 거쳤을 때,

쾅!

‘터졌다!’

드디어 보라 찐빵의 비밀을 풀 수 있었다.

비밀은 의외로 간단했다. 찐빵의 ‘터진’ 부위로 공격하면 적이 터진다.

상당히 유치하고 1차원적인 메타포군.

얼핏 구려 보이는 생김새에 이런 비밀이 담겨 있을 줄이야.

‘역시 아이템이고 사람이고 겉모습보다는 내실이지!’

사람들은 나를 보고 ‘이상한 헌터’라고 했지만, 나는 상처 받지 않는다.

보아라! 이것은 터진 찐빵이 아니라 적을 터뜨리는 찐빵이다!

마침내 보라 찐빵의 비밀을 파헤치는 데 성공한 나는 주먹과 방패로 번갈아 해골들을 박살 내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고미 교수님! 드디어 실험 성공입니다!

저, 졸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차, 이건 아니지.’

드립에 심취한 나머지 해서는 안 될 드립을 치고 말았다.

한편, 고미는 내 어깨에 가만히 앉아 말 한마디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스켈레톤 나이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평소답지 않은 표정, 평소답지 않은 행동.

‘왜 이렇게 조용하지?’

그런 의문을 느끼고 있을 때, 봉식이가 스켈레톤 나이트의 말을 향해 달려들었다.

- 푸르르! 히힝!

2미터에 가까운 봉식이가 작아 보일 정도로 엄청난 체구의 해골 말이 앞발을 치켜들었다 내리찍자,

콰득!

“크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봉식이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녀석의 몸이 더욱더 붉게 물들었다.

녀석의 양손에는 어지간한 남자의 머리통보다 큰 발굽 두 개가 붙잡혀 있었다.

“김수하!”

그 순간, 말 위에 올라타 있던 스켈레톤 나이트가 대검을 들어 올렸고, 나는 아래로 파고드는 동시에 약점 간파를 활성화했다.

‘뒷다리!’

온 힘을 다해 해골 말의 왼쪽 뒷다리를 향해 티타늄 주걱을 휘두르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몸뚱이가 그대로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쓰러졌다.

‘됐어!’

일단 말에서 끌어 내렸으니, 전투가 한층 쉬워질 거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방패와 주걱을 손에 든 채 앞으로 돌진하려는 찰나,

- 크오오오오!

갑자기 상공에서 섬뜩한 울음소리가 울려퍼지며 시커먼 그림자가 드리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