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0 지구를 지키기 위해 사야할 것은
“수하님만 괜찮다면 제가 좀 도와드려도 되겠습니까?”
왜 이래. 못 퍼줘서 환장한 귀신이라도 붙었나······.
“2년이나 쓰러져 계셨다면 일자리라든가 병원비라든가 꽤 골치 아픈 문제들이 남아있을 것 같은데요.”
“그거야 그렇죠.”
하지만 이강혁은 지금 상당히 현실적인 부분을 지적하고 있었다.
실제로 부모님은 병상에서 일어나자마자 일을 구하러 다니고 계신다.
의학적으로는 문제가 없다고 해도, 자식 입장에서 마음 편한 일은 아니지.
“혹시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래 봬도 발은 꽤 넓은 편이라서 말입니다.”
“아, 원래는 횟집 하셨어요.”
내 대답을 들은 이강혁은 잘됐다는 듯 환히 웃음을 지었다.
“잘됐군요. 제가 건물을 몇 개 가지고 있으니 그중 비는 곳에 가게를 내드리죠.”
뭐, 뭐야. 그게 이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는 문제야?
무슨 편의점에서 초코바 고르듯이 얘기하고 있어.
이게 바로 서민은 이해할 수 없는 건물주의 씀씀이인가!
그런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단순히 고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그러는 것 치고는 호의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은데······.
이미 가르침을 주겠다는 말까지 들은 마당에 이러는 건 더 이상하고.
“혹시 저한테 원하시는 게 있나요?”
나의 질문에 이강혁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눈치가 빠르시군요. 거래 조건은 수하님이 듣고 판단해 보시죠.”
역시, 호의의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 했다.
나랑 고미를 챙기는 건 그렇다 쳐도,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우리 부모님까지 챙기는 건 과하지.
일단 얘기나 들어볼까?
어차피 이 사람과는 반쯤 한배를 탄 사이니까.
“곰 선생님과 수하님은 앞으로 닥칠 재앙에 맞설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될 겁니다. 게다가 봉식 씨의 폭주는 가족을 잃은 분노가 계기가 됐으니, 두 분의 부모님을 지키는 건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말하자면, 앞으로 있을 재난에 대비한 투자라고 할 수 있죠.”
이강혁이 내건 조건은 간단했다.
내가 충분히 강해질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어느 정도 힘이 갖춰지면 저스티스에 가입할 것.
F 등급 테이머 – 기록상으로는 그러니까 –가 갑자기 저스티스에 들어가면 누가 봐도 수상하니, 약간의 시간을 두자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주기적으로 고미를 만나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고 싶다고.
“일종의 선금과 자문료다. 그런 건가요?”
“그렇죠.”
“나쁘지 않네요. 가게 외에 다른 조건은요?”
물론, 길드에 가입한다면, 현재로서는 저스티스가 최적의 선택이다.
봉식이도 있고, 이미 고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 길드장으로 있기도 하고.
하지만 가게 하나 받고 끝날 정도면 내가 너무 손해다.
초월자의 눈을 애꾸로 만들어 버리는 1타 강사의 특강료만 해도 그것보다는 비쌀 테니까.
도와줄 때 도와주더라도, 받을 건 받아야지.
“우선, 임대료나 권리금, 보증금은 받지 않는 걸로 하죠. 권리금은 제가 대신 내드리겠습니다.”
제법 귀가 솔깃해지는 조건이다.
가게를 시작할 때 가장 돈이 많이 드는 게 권리금, 보증금이고, 임대료는 고정 지출 중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니까.
그때,
[ 그럼 꿀을 내놓거라! 매일 매일 나에게 꿀을 바치는 것이다! 소고기도! 아, 닭도리 탕도! 초코바도! ]
고미가 바람처럼 달려와 나의 어깨 위에 목말을 타며 말했다.
“그건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만나 뵐 때마다 새로운 간식을 사 가고, 정기적으로 간식비를 보내겠습니다.”
고미의 요구에 이강혁은 못 당하겠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웹소설이면 주인공이 될만한 회귀자의 역할이 간식 셔틀이라니, 이게 무슨······.
어쨌든, 그럼 나도 조건을 걸어볼까.
“우선 수하님이 아니라 편하게 수하 씨라고 불러주세요. 솔직히 수하님은 좀 부담스럽거든요. 고객님 뭐 그런 느낌이라.”
“하하하! 알겠습니다.”
“그리고 계약금으로 한 1억 정도······.”
“지금 계좌이체로 보내드리면 될까요?”
이강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곧바로 핸드폰을 꺼냈다.
1억이 그렇게 적은 돈인가······.
으, 평생 큰돈을 만져본 적이 없으니 돈에 대한 감각이 너무 소박한 모양이다.
“그럼 2억은요?”
“수하 씨의 발전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2억도 큰돈이 아닙니다. C급만 돼도 계약금으로 1억은 받는 게 보통이니까요. 나머지 계약 조건도 전부 업계 최고 수준으로 맞춰드리겠습니다. 거기에 원하는 조건이 있다면 뭐든지 추가해 드리죠.”
이강혁의 파격적인 제안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계약금 2억에 권리금+보증금+임대료 면제면······.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액수군.
게다가 헌터 업계에서 중요한건 계약금의 크기가 아니라 던전에서 얻은 수익의 분배율이다. 그걸 업계 최고 수준으로 맞춰준다면 계약금은 1억만 받아도 충분할 정도지.
“그래, 나도 계약금 1억은 받는다. 너는 고미······. 까지 끼고 들어가니까 더 받아도 되지.”
돈 이야기가 나오자,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봉식이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고미가 무서운지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어려워했다.
음······. 그럼 내 통장에 거의 5억이 쌓이는 건데, 솔직히 너무 거금이라 실감이 안 난다.
잘하면 전세가 아니라 내 집 마련도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좋아, 콜.
“잘해봅시다, 길드장님.”
“그냥 이강혁 씨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오, 이제 명실상부한 한 식구네 그럼. 집에서도 한 식구, 직장에서도 한 식구. 징글징글하다.”
이후 세 사람은 신이 나서 공원을 돌아다니며 꽃놀이를 즐겼고, 나는 머릿속으로 앞으로 강해지기 위한 계획을 차근차근 세워나갔다.
언젠가 있을 초월자인지 뭔지의 전투에서 고미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니까.
가급적이면 내 손으로······. 는 조금 어려울 것 같지만, 노력은 해봐야지.
* * *
집으로 돌아온 후, 나는 오랜만에 상태창을 열어보았다.
가족 간의 단란한 시간에 ‘일’이 끼어드는 것도, 고미를 속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도 싫어 줄곧 열어보지 않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데 하루라도 빨리 강해져야지.’
내가 이강혁의 단약을 받지 않은 것도 그런 영약을 먹는 것보다 상태창의 퀘스트를 진행하는 편이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이강혁은 그 단약이 반드시 필요할 테고.
더군다나 그는 회귀자고, 그가 가진 정보의 가치는 돈으로 헤아릴 수 없으니, 절대로 죽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전력이다.
무엇보다 이미 제법 친해졌는데 죽어버리면······.
음, 싫다. 역시 난 그런 건 못 견딘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 각성! 같은 것보다는, 좀 늦게 강해져도 되니까 안 죽는 편이 좋다.
‘상태창.’
상태창을 부르자, 밀렸던 메시지가 좌르륵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그 수많은 메시지 중, 가장 첫 줄에 있는 내용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 축하합니다. 히든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
< 히든 퀘스트 : 고미에게 새 친구를 만들어줘 (1) >
고미는 친구가 없습니다. 외로운 고미에게 새 친구를 만들어 주세요.
‘새 친구? 이강혁을 말하는 건가?’
< 달성 조건 >
1. 고미와 새 친구가 서로 호감을 느낄 것.
2. 고미가 친구에게 먹을 것을 나눠줄 것.
< 달성 보상 >
- 새로운 친구의 스킬을 일부 사용할 수 있습니다.
- 획득 스킬 : 검의 달인 (A -> F)
뭐야, 고미가 아니라 이강혁의 스킬을 배웠어?
< 스킬 목록 >
검의 달인 (F)
- 검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집니다. 검을 무기로 삼을 시 검술 보정이 적용되며, 보다 빠르게 검술을 익힐 수 있습니다.
등급은 낮지만, 틀림없이 이강혁의 스킬이다.
게다가 나에게는 감각 강화가 있으니 검술을 보고 따라하기도 쉬울 것 같았다.
문제는 고미의 손재주로는 검을 만들지 못한다는 점인데······.
그렇다고 티타늄 주걱과 보라 찐빵의 옵션을 포기할 정도로 검술 스킬의 등급이 높은 것도 아니고.
‘스킬을 얻었는데 왜 쓰질 못하니······.’
대체 뭐냐 이 오묘한 조합은. 이해도는 높아지는데, 왜 직접 쓰지는 못하냐고.
검술을 책으로 배웠어요. 뭐 이런 거냐.
게다가 검도 없고, 사서 쓰자니 고미의 제자 칭호 효과가 너무 아깝다.
찐빵이나 티타늄 주걱이나 완전 사기템이니까.
그런 옵션 달린 장비면 못해도 몇 천, 등급 높으면 거의 전세 값은 될 텐데, F급 스킬 쓰자고 그 돈을 들이는 건 너무 낭비다.
아니, 잠깐만······.
그렇게 쓸모가 있는 듯 없는 듯 애매한 스킬 조합에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고미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수하!”
“응?”
상태창을 끄고 고개를 돌리자, 잔뜩 골이 난 표정을 짓고 있는 고미가 보였다.
“왜 그래?”
“엄마 아빠가 오지 않는다. 무슨 일인 것이냐?”
고미의 손에는 낮에 소풍을 나가 주워온 개나리 가지가 들려 있었다.
선물을 준비했는데 부모님이 들어오질 않으니 심통이 난 모양이었다.
“글쎄, 곧 돌아오실 때가 된 것 같은데. 기다려봐.”
핸드폰을 꺼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자,
“엄마, 어디야?”
“응, 지금 김 사장님 만나서 얘기 좀 하고 있어. 기억나지? 예전에 우리 집 근처에서 고깃집 하시던.”
“언제쯤 들어올 것 같아?”
“아마 한두 시간은 더 있어야 하지 않나 싶네.”
목소리에 힘이 없다. 아마 일자리를 구하는 게 어려운 모양이었다.
하긴, 주방장이든 주방보조든, 찬모(饌母)든, 그렇게 쉽게 일이 구해지지는 않겠지.
“일 구하느라 그런 거야?”
“으응, 수하야. 이따 얘기하자 이따.”
어머니가 전화를 끊자, 고미는 서운함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으로 손에 든 개나리 가지를 만지작거렸다.
“엄마는······. 오지 않는 것이냐?”
“두 시간 정도는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두 시간이라는 말에 고미의 꼬리와 귀가 힘없이 아래로 늘어졌다.
“엄마 기다리는 동안 같이 나갔다 올까?”
“그 사이에 엄마가 오면 어떻게 하느냐? 나는 엄마가 집에 들어오자마자 꽃을 주고 싶단 말이다.”
엄마를 향한 고미의 순수한 애정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뭉클해졌다.
“게다가 나는 수하 너처럼 떨어져 있어도 친구나 엄마와 연락하지 못한단 말이다······. 그런데 너는 집에 들어오고 나서 혼자 틀어박혀 있고, 봉식이는 나를 무서워하니 놀아달라고 말하지도 못한다.”
듣고 보니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나도 나름대로 할 일이 있는데, 24시간 고미와 놀아줄 수는 없다.
게다가 같이 지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한 번씩은 떨어져 있어야 할 텐데, 그때 고미와 연락을 할 방법도 없고.
음, 이강혁 일로 정신이 없어 생각하지 못했지만, 곰곰이 따져보니 제법 중요한 문제네.
“그럼 우리 핸드폰 사러 갈까?”
나의 제안에 고미가 귀를 쫑긋 세우며 눈을 반짝였다.
“핸드폰? 그것이 무엇이냐? 꿀보다 맛있는 것이냐?”
······.
뭔지도 모르면서 눈은 왜 반짝인거냐.
“내가 봉식이랑 멀리 있어도 연락하던 거 기억나지?”
“그렇지. 전음도 못 하는 녀석이 신기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이것 때문에 가능한 거야. 이것만 있으면 너도 아무 때나 엄마나 나나, 새로 사귄 친구들하고 연락할 수 있어.”
“정말이냐!?”
고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하지만 그것은······. 꿀보다 몇 배는 비싸지 않느냐?”
그리고는 이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땅을 내려다보았다.
음, 그동안 내가 많이 궁핍해 보이기는 했나보다.
“괜찮아. 네 덕분에 돈 많아져서 그 정도는 지금 당장 내려가서 사줄 수 있어.”
“그, 그럼 어서 사다오! 나도 가족들과 아무 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래, 고미가 벌어다 준 돈이니까, 고미를 위해서 써야지.
게다가 고미에게 스마트폰을 주면 그 외에도 엄청난 효과를 거둘 수 있을거다.
지금 생각나는 것만 해도 얼추 열 가지는 넘으니까.
좋아, 고미의 행복을 위해, 지구를 지키기 위해, 고오급 스마트폰을 사러 가는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