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9 구름 3,+1
신이 나서 달려 나가던 고미가 돌연 코너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외쳤다.
[ 수하! 어서 따라오거라! ]
보아하니 개미굴 때 다시는 말없이 사라지지 않기로 약속한 일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을 몰라하는 게 어지간히도 마음이 급해 보였다.
‘왜 저러지?’
고미가 왜 저러는지 궁금해진 나는 감각 강화를 사용한 뒤 코끝에 온 신경을 집중해 보았다.
녀석의 말마따나, 후각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활용도가 높았다.
소리가 안 나도, 눈에 보이지 않아도, 주위에 무엇이 있는지 대충은 알 수 있으니까.
이렇게 귀와 코가 좋아지고 나니 인간이 지나치게 시각에만 의존하는 생물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수하님! 곰 선생님께서 왜 저러시는 것입니까? 혹시 주위에 게이트라도 열린 걸까요?”
이강혁이 장검에 손을 가져다 댄 채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이 사람은 아직 고미를 잘 모르는구나. 게이트가 열렸다면 더 느긋했을 거다.
반대로 이미 눈앞에서 사라져 게이트를 박살냈거나.
“아니에요. 걱정하지 말고 따라오세요. 가보면 이유를 아실 거예요.”
[ 수하! 빨리, 빨리! ]
손을 휘두르며 나를 재촉하는 고미의 귀여운 모습에 나는 일부러 속도를 늦추고 싶은 짓궂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녀석의 뒤를 따라 달렸다.
그렇게 두 번 정도 코너를 돌아 앞으로 달려가자, 저 멀리 형형색색의 구름이 땅 위에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 고미를 이끈 것은 이번에도 먹을 것이었다.
솜사탕. 낭만과 봄나들이의 상징과도 같은 군것질거리지.
잔뜩 긴장한 채 달려가던 이강혁과 봉식이는 솜사탕을 가리킨 채 발을 동동 구르며 꼬리를 뱅글뱅글 돌리는 고미의 모습에 그만 픽, 하고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 수하! 어서 저것을 사다오! 오늘은 초코바 대신 저 작은 구름을 먹을 것이다! ]
작은 구름이라, 참 고미다운 작명법이다.
“알았어.”
솜사탕을 앞에 두고 고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깊은 고민에 빠졌다. 누가 보면 인생을 좌우할 중요한 선택을 하는 곰처럼 보일 정도로 진중한 표정이었다.
솜사탕의 색은 하늘색, 노란색, 분홍색, 흰색 총 네 가지.
사실 맛이야 모두 똑같지만, 그걸 모르니 고민이 되는 모양이었다.
[ 으음······. ]
“색깔 별로 하나씩 주세요.”
결국 나는 전부 사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 녀석한테 하나만 고르라고 하면 나머지를 먹어보지 못한 걸 아까워하며 밤잠을 설칠 테니까.
“팔천 원입니다.”
솜사탕을 파는 아저씨가 환히 웃으며 가격을 말하자,
“아, 그럼 흰색으로 하나 더 주시겠습니까?”
이강혁이 나 대신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네며 말했다.
의외네. 이 사람 이런 거 좋아하나?
꽤 차가운 인상이라 나 이상으로 단 음식은 입에도 안 댈 것 같은데.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계산을 마친 우리는 고미에게 양손에 하나씩 솜사탕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세 개는 나와 이강혁, 봉식이가 각각 하나씩 나눠 가졌다. 고미 혼자 다섯 개나 되는 솜사탕을 들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하늘색과 분홍색 솜사탕을 양손에 손에 쥔 고미는 한참을 고민하다 먼저 하늘색 솜사탕에 얼굴을 폭하고 파묻었다.
대참사다······.
설마 저런 방식으로 먹으려 들 줄이야.
먹는 방법을 미리 가르쳐 줄 걸 그랬다.
[ 우웃! ]
아니나 다를까, 고미의 얼굴에 하늘색 솜사탕이 잔뜩 엉겨 붙고 말았다.
[ 수하, 큰일이다! 이렇게 먹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끙, 얼굴이 끈적하다! ]
당황한 고미는 코와 뺨에 들러붙은 하늘색 솜사탕을 떼어내려고 팔을 들어 얼굴에 문질러 댔다.
“이리와. 그러면 녹아서 더 끈적해져.”
나는 녀석에게 다가가 보송보송한 솜털에 뒤엉킨 솜사탕을 떼어주었다.
“곰 선생님, 솜사탕은 이렇게 먹는 것입니다.”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강혁이 솜사탕을 손으로 떼어 먹는 것을 보여주자, 고미는 입을 벌린 채 바보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허수아비, 제법이구나! 마음에 들었다! ]
대체 어디가 마음에 든다는 건지, 어디가 제법이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곧 새로운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으니······.
양손에 모두 솜사탕을 들어버려 남는 손이 없게 된 것이다.
이에 고미는 잠시 고민하며 주위를 둘러보더니 내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기(氣)를 이용해 솜사탕을 떼어내 입으로 집어넣었다.
“고미! 사람들 있는 곳에서 능력 쓰지 말라니까.”
손을 대지 않고 물건을 움직일 수 있는 아기곰이라니, 너무 눈에 띄잖아.
“곰 선생님은 과연 대단하군요······. 허공섭물이라니.”
이강혁은 그것을 말리기는커녕 고개를 주억거리며 감탄하고 있었다.
확실히 대단하긴 대단하다. 그 대단한 능력을 솜사탕 먹는게 쓰는 게 문제지.
[ 여, 역시 안되는 것이냐? ]
고미가 커다란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측은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백이면 백 오구오구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귀여운 표정.
“응, 안 돼.”
하지만 나는 그런 것에 약해지지 않는다.
한두 번 넘어가 주면 계속해서 이런 일이 벌어질 거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조르면 된다’라는 인식이 머리에 박혀 버릴 테니까.
[ 으음······. 봉식이, 네가 분홍색 구름을 맡아라! 너라면 감히 그 누구도 이 구름을 빼앗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겠지! ]
결국 고심 끝에 고미는 자신의 소중한 솜사탕 하나를 봉식이에게 맡겼다.
[ 굉장하구나, 어찌 입에 닿자마자 이리 사르르 녹아버린단 말인고? 맛은 평범하지만, 식감이 참으로 훌륭하다. 설탕으로 실을 짜낸 것 같은 식감이라니······. 초콜릿을 이렇게 만든다면 어떤 맛이 날지 궁금하구나. ]
그리고는 흡족한 표정으로 하늘색 솜사탕을 떼어내 입안에 넣고 오물거리며 소박한 불량식품(?)에 어울리지 않는 거창한 시식 평을 늘어놓았다.
[ 응? 너희는 왜 먹지 않느냐? 어서 먹거라! ]
한껏 솜사탕의 달콤함을 즐기던 고미가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괜찮아. 다 너 주려고 산 거야. 색깔별로 맛보라고.”
그렇게 말하며 봉식이와 이강혁에게 시선을 돌린 순간, 이 인간들이 솜사탕을 떼어먹고 있는 것이 보였다.
봉식이는 맡아둔 분홍 솜사탕과 노란 솜사탕을 한 손에 모아 쥔 채 나머지 손으로 솜사탕을 떼어먹고 있었다.
아니, 다 큰 어른이 고미 주려고 산 걸 뺏어 먹는단 말이야!?
“수하님은 안 드십니까?”
“야, 김수하, 너도 먹어.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꽤 괜찮네.”
거기다 당연하다는 듯 반문까지.
[ 후후, 수하, 나는 괜찮다. 이 몸은 이미 중요한 사실을 눈치챘느니라. ]
고미가 크게 인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자못 인자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사실 색만 다를 뿐이지, 맛은 모두 똑같다는 것 말이다. 그것을 한눈에 간파하다니, 실로 굉장하지 않느냐? ]
“음, 역시 곰 선생님의 안목은 대단하시군요. 저는 솜사탕을 처음 봤을 때 그 사실을 모르고 모두 맛이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지. 어릴 때는 돈은 없는데 무슨 색을 사야 할지 엄청나게 고민했었어.”
게다가 이강혁과 봉식이가 쌍으로 고미의 의견에 동의를 표하고 있다.
어째 고미랑 같이 있으면 다들 생각하는 게 저 녀석과 비슷해진단 말이지. 나도 그렇고.
그렇게 우리는 솜사탕을 야금야금 뜯어 먹으며 꽃이 만발한 길을 느긋하게 걸어 올라갔다.
왜 이름이 하늘공원인가 했더니, 공원은 산 위에 있어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고.
그새 솜사탕 하나를 모두 먹어버린 고미는 봉식이에게 맡겨두었던 솜사탕을 받아 아쉬운 듯 조금씩 뜯어먹으며 쉴 새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개나리에 벚꽃, 민들레, 그리고 이름 모를 풀과 나무까지,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봄의 풍경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고 싶은 듯, 꽃구경을 하는 것 치고는 지나치게 분주한 움직임이었다.
“이렇게 평화로운 기분은 참 오랜만입니다. 늘 마음이 무거워 산책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는데 말이죠.”
이강혁이 길 양쪽에 가득 핀 노란색 개나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홀가분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저도 그래요. 얼마 전까지 부모님이 쓰러져 있어서 이런 시간이 올 거라고는 꿈도 못 꿨거든요.”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자, 개나리와 벚꽃에 정신이 팔려있던 고미가 무언가 떠오른 듯 귀를 쫑긋 세우며 나에게 달려왔다.
[ 수하! 엄마 아빠에게도 이 솜사탕이라는 것을 사줘야 한다! ]
“아니야, 이거 집에 가는 동안 다 녹아서 안 돼.”
[ 하지만······. 그럼 서운해하지 않겠느냐? ]
“괜찮아. 두 분은 이런 거 많이 먹어봤어.”
[ 으음, 그렇구나! 그럼 다음에는 엄마 아빠도 함께 이곳에 오는 것이 어떻느냐? ]
계속해서 부모님을 챙기는 고미의 모습에 왠지 마음이 뭉클해졌다.
맛있는 건 나눠 먹고, 좋은 곳은 함께 오고.
그런 소소하고 행복한 일들.
너무나 사소해서 잊기 쉬운 것들의 소중함을, 고미는 참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늘 혼자였으니 그런 것들의 소중함을 더 잘 알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존재의 가치는 부재를 통해 깨닫는다고 했던가······.
나도 사고가 나기 전까지는 그런 일상의 소중함을 잊고 지냈었지.
“그래, 다음에 꼭 같이 오자.”
[ 후후, 좋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있었으니 이런 곳에 나오면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다! ]
“혹시 부모님이 편찮으십니까?”
그때,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강혁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 유령 게이트 사태 피해자였거든요. 지금은 깨어나셨으니까 괜찮아요.”
이후 나는 던전 잡부로 일을 하다가 고미를 만났다는 사실과, 녀석이 부모님을 구해주었다는 사실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흐음······. 힘든 시간을 보내셨겠군요.”
이강혁이 안쓰럽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다 지나간 일인데요 뭐.”
“그럼 곰 선생님도 수하 님도, 봉식 씨도 모두 부모님과 함께 살고 계신 겁니까?”
“지금은 그렇죠. 일단 산삼 판 돈으로 전세라도 구해볼까 생각 중이에요. 얹혀사는 주제에 이런 말하기는 뭐하지만, 고미까지 다섯이 살기에 지금 집은 조금 좁아서요.”
가족에 대한 이야기에 이강혁의 표정이 보기 드물게 부드럽게 풀어졌다.
“참 보기 좋은 가족이네요. 부럽습니다.”
[ 후훗, 그렇지! 이 몸이 막내로 들어간 덕에 더욱 훌륭한 가족이 되었다! ]
고미가 개나리 가지 하나를 손에 들고 뛰어다니며 말했다.
“고미, 꽃 함부로 꺾으면 안돼.”
[ 흥, 걱정 말거라.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웠느니라! 위대한 이 몸은 약한 것을 괴롭히지 않는다! 이것을 엄마에게 가져다 주면 틀림없이 좋아할 것이다! 어쩌면 또 굉장한 요리를 만들어 줄지도 모르지! ]
고미에게 닭도리탕은 상당히 대단한 요리였나보다.
하긴 내가 먹인 거라곤 컵라면과 야채참치, 초콜릿 같은게 다였으니까.
“하하, 그렇군요. 곰 선생님이 있으니 이제 수하 님의 가족은 걱정이 없겠습니다.”
고미의 이야기를 듣던 이강혁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미소에는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구석이 있었다.
그 순간, 문득 말실수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강혁은 가족이 없으니까······.
각성하기 전에 게이트 사태로 가족을 잃었다고 들었다.
그렇다는 건, 회귀한 시점이 가족을 잃은 후라는 소리겠지.
‘하, 가족 이야기는 하는게 아니었는데. 괜히 미안하네.’
몇 번이나 회귀했는데도 가장 구하고 싶을 사람들은 이미 죽은 뒤였으니,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렇게 미안하고 민망한 마음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이강혁이 머뭇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아주 뜻밖의 제안 한 가지를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