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38화 (38/300)

EP.38 고미와 꽃놀이

“후우······.”

이강혁은 어두운 표정으로 긴 한숨을 내쉰 뒤 자신의 지난 생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첫 번째 회귀 후 그는 웹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온갖 기연과 아이템을 독식하며 오로지 자신의 성공만을 위해 달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초월자들이 개입하면서 제가 한 실수가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남에게 갔으면 더 잘 쓰였을 아이템과 능력들을 모두 제가 가졌고, 그 결과 세상은 멸망하고 말았죠.”

나는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계속해서 표정을 관찰했다.

내가 이강혁에게 요구한 것은 오직 하나였다.

자신의 마음을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솔직하게 밝힐 것.

고미의 생각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알량한 잔꾀가 아니라 진심뿐이라고 믿었으니까.

진실보다 더 큰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없다.

그것이 내가 대학원 시절 상처 입은 사람들을 대하며 배운 가장 큰 교훈이다.

무엇보다, 결국 가르치는 건 내가 아니라 고미다.

그렇다면 그를 도와주든, 그렇지 않든, 그 결정은 온전히 고미가 내려야 한다는게 내 생각이었다.

말을 마친 이강혁은 참지 못하고 그만 눈물을 떨구었다.

“모두 제가 욕심을 부렸기 때문입니다. 기연은 그것을 손에 넣을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갔어야 하는데······.”

어느새 고미는 초코바를 할짝대는 것마저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두 번째 생은 어떠했느냐?”

이어서 이강혁은 고해성사를 하듯 두 번째 생에 대해 털어놓았다.

두 번째 생에서 그는 자신이 얻은 것들을 그 능력을 가장 잘 쓸 수 있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중에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만 능력을 사용하는 자들이 더 많았고, 세상은 더욱 혼란해졌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에는 두 번의 회귀에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위험해 보이는 사람을 모두 제거할 생각이었다. 뭐 이런 얘기인가요?”

나의 질문에 이강혁은 죄인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용서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나와 봉식이는 차마 그를 책망하지도 못하고, 위로하지도 못한 채 한숨으로 답을 대신했다.

나에게 세계의 미래가 달려있다면, 두 번의 멸망을 맞이하고, 마지막 기회가 찾아왔다면, 그러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때, 고미가 손에 든 초코바를 와구와구 먹어치우더니 봉식이의 손에 들린 초콜렛 선물 상자를 열어젖혔다.

“허수아비, 나는 이미 몇 번이나 회귀자를 만나보았다. 그 중 대부분은 몇 번이나 시간을 돌렸음에도 자기 밖에 몰랐고, 개중에 나은 자들도 끝내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다 실패했지. 그리고 너는 그 중에 가장 못나고, 나약한 회귀자다.”

고미가 선물 상자 안에 있던 초콜릿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고미!”

‘말이 너무 심하잖아.’라는 말을 하려는 순간,

고미가 아몬드가 박힌 초콜릿 하나를 이강혁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너 같은 선택을 하는 녀석은 처음이다. 자신의 실수와 부족함을 모두 솔직히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하다니, 실로 훌륭했다. 너라면 언젠가 이 몸처럼 위대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리고는 화이트 초콜릿 하나를 입안에 넣고 오물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일어나거라. 그것은 맹약의 초콜릿이다. 네가 지금의 마음가짐을 잃지 않는다면 위대한 곰의 명예를 걸고 너를 도와주마.”

뭐, 뭔가 감동적인 장면인 것 같은데······.

묘하게 분위기가······.

“그럼 고미, 이강혁 씨도 제자로 받아주는 거야?”

하지만 나의 질문에 고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능하다. 제자는 한 번에 한 명이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규칙이다. 다만 너에게도 때때로 가르침을 내려주겠다.”

“감사합니다 곰 선생님!”

가끔 가르침을 주겠다는 말에 이강혁은 곧바로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다시 한번 영약을 내밀었다.

“그리고 수하님······.”

“아뇨.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이강혁 씨가 먹는 게 맞아요. 난 내 나름대로 강해질 수 있으니까 그건 이강혁 씨가 드세요. 전체적인 전력을 생각한다면 그게 최선이에요.”

이강혁의 부탁을 거절한 것은 나에게 그것 말고도 강해질 방법이 있어서 이기도 했지만, 너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싶지 않다는 조금 비겁한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어쩌면 저 사람도 그 무거운 짐을 나눠지기 위해 나에게 약을 내밀었을지도 모를 일이고.

잠시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고미가 헛기침을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음······. 걱정하지 말아라! 정말 너희가 감당할 수 없는 적이 나타난다면 위대한 이 몸이 직접 혼쭐을 내줄 것이다!”

화이트 초콜릿의 단맛을 음미하다 말고 꼬리와 귀를 빳빳하게 세운 채 그렇게 말하는 고미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실소가 새어 나왔다.

제법 심각한 대화인 것 같은데, 이 녀석만 있으면 왠지 분위기가 풀어져 버린다.

이 문제는 대충 해결된 것 같으니, 이제 봉식이 이야기로 넘어가 볼까?

“아, 그리고, 봉식이 문제로 상의하고 싶은게 있는데요.”

내가 운을 떼자, 봉식이가 머쓱한 표정으로 딴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흠흠······. 이강혁씨, 내 이제 일은 시원하게 털어버리죠. 그리고 그쪽이 나보다 연상이니까 이제부터 존댓말 쓸게요.”

‘연상’이라는 단어에 고미는 또다시 화들짝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봉식이를 바라봤다.

“뭣이!? 허수아비가 너보다 나이가 많다는 말이냐?! 어째서 그런 것이냐!”

어째서 그러긴······. 그냥 한쪽이 워낙 노안인거지.

고미의 팩폭에 봉식이는 잠시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고는 본론으로 돌아갔다.

“대신 공짜는 아니고, 나를 길드원으로 받아주쇼. 당신이라면 이미 내 능력 알고 있을테고, 내가 왜 길드 안 들어가고 혼자 다니는지도 알 거 아니야.”

봉식아······. 존댓말 쓴다며. 묘하게 말이 짧잖아.

[ 수하, 봉식이가 수상하다. 사실 저 녀석이 나이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니냐? 지금도 반말을 하고 있지 않느냐? ]

고미의 전음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말이지 어린애란 무자비할 정도로 솔직하군.

봉식이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이강혁은 눈을 깜빡이며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저희 길드에 들어와 준다면 저도 전폭적으로 봉식 씨를 지원하겠습니다. 부디 힘이 되어 주십시오.”

오, 일이 술술 풀린다.

그럼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는 다 해결됐으니, 이제 고미랑 놀아주러 가볼까?

“그럼 이제 나가 볼까요? 계약 조건 같은 딱딱한 얘기는 나중에 하죠.”

* * *

던전 밖으로 나오자, 고미가 좋아하는 헬기가 대기······.

“수하! 허수아비! 어서 이리 오너라! 하늘 버스가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미가 헬기의 좌석 위에 나타났다.

헬기가 우릴 기다린 게 아니라 네가 헬기를 기다린 것 같은데.

“곰 선생님은 정말 천진난만 하시군요. 진정한 고수들은 마음이 티끌 한점 없이 맑다던데,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부가 됩니다.”

이강혁이 흐뭇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돼, 이 사람은 이미 곰빠가 되어버렸어.

정상적인 사고회로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선생님께서 헬기를 너무 좋아하시는데, 헬기를 한 대 선물해 드리면 좋아할까요?”

사, 사고 회로가 마비된 수준이 아니군. 미쳐버렸어.

혹시 왕유를 훔쳐 먹은 건가!

“하하, 아무리 그래도 헬기는······.”

“하하, 농담입니다. 사실 그 정도로 돈이 많지는 않거든요.”

진지한 표정으로 그런 농담하지 마라, 살짝 기대했잖아.

“그럼 집으로 모셔 드리면 될까요?”

이강혁의 질문에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생각보다 일도 잘 풀렸고, 날씨도 좋고, 해도 쨍쨍하다.

이런 날 가만히 집에 들어가면 손해지.

나야 집돌이 기질이 있어서 상관없지만, 고미에게 이 계절에만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었다.

“수하! 어서 타거라! 하늘 버스가 기다리고 있지 않느냐!”

어린애처럼 방방 뛰며 눈을 반짝이는 고미의 모습을 보니, 역시 꽃놀이라도 데려가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예전 같으면 사람들 눈이 걱정되서 사람 많은 곳은 피했겠지만, 저스티스 길드장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였는데 어지간해서는 별일 없겠지.

이제부터 고미 데리고 신나게 돌아다닐 수 있겠군.

가족도 지키고, 지구도 지키고, 고미랑 놀아주기도 편해졌고, 마음도 편하고, 기타 등등, 이게 일석몇조냐.

“음······. 아니요. 고미랑 꽃놀이나 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적당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 * *

헬기가 내려선 것은 상암동 근처의 한 헬기장이었다.

“이 근처에 산책하기 좋은 곳이 있습니다. 함께 가시죠.”

이강혁이 우리를 안내한 곳은 하늘공원이라는 상암동 근처의 커다란 공원이었다.

언젠가 TV에서 본 것 같기는 한데, 직접 와본 것은 처음이다.

생각해보니 나도 놀러 다닌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하다.

군을 전역하고 나서는 대학원, 대학원을 그만두고 나서는 일을 하느라 한가롭게 돌아다닐 짬이 없었으니까.

‘기분 좋네. 이게 몇 년 만이냐.’

아무런 생각 없이 가만히 꽃이 만발한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괜히 기분이 들떴다.

[ 오오, 수하! 주위에 꽃이 만발했구나! 참으로 아름답다! 저 꽃의 이름은 무엇이냐? ]

“저건 벚꽃이고, 저건 개나리.”

신이 난 고미는 여기저기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떨어지는 벚꽃 잎을 붙잡으려 애쓰고······.

쉭-쉭-

고미의 주먹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날카로운 파공음이 울린다.

[ 우하하! 수하 보거라! 꽃잎을 벌써 이만큼이나 모았느니라! ]

고미의 손에는 이미 수십 장의 연분홍색 꽃잎이 가득했다.

음······. 애쓸 필요가 없구나.

저 정도는 그냥 쉽게 잡는 거였어.

이 쓸데없이 대단한 먼치킨 같으니.

이강혁 역시 고미를 따라 계속해서 떨어지는 벚꽃 잎을 잡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흠······. 굉장하군요. 저렇게 가벼운 꽃잎이 손에서 빠져나가지 않게 하면서 다른 꽃잎을 수십 장이나 잡을 수 있다니. 과연 곰 선생님은 대단하십니다.”

실수다. 이 인간을 데려오는 게 아니었어.

쓸데없는 행동까지 다 따라 하면서 수련을 하고 있다.

[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허수아비! 손을 펼칠 때 너의 기로 작은 흐름을 만들어 꽃잎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

“과연, 한번 해보겠습니다.”

고미의 전음이 나와 이강혁의 귓가에 동시에 울려퍼졌다.

사실 이강혁에게 들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반응으로 봐서는 그렇다는 거지.

“흠······.”

하지만 이강혁은 결국 열 장 이상의 꽃잎을 붙잡아 두지는 못했다.

“확실히 어렵군요.”

[ 중요한 것은 흐름이다 흐름! 바람의 흐름을 거스르려 하지 말고, 너의 기와 바람의 흐름을 합쳐 하나의 소용돌이를 만든다고 생각하거라! ]

꽃잎 하나 가지고 참 잘들 논다.

“어, 어렵네······.”

심지어 봉식이까지 대열에 합류해서 꽃잎 잡기를 하고 있다.

다들 하니까 나도 하고 싶어지잖아. 그러지들 마라.

‘어, 이거 되게 어렵네······.’

앗! 나도 모르게 저 셋과 동화되고 말았다.

안되지 안돼.

그렇게 넷이서 꽃잎 잡기 삼매경에 빠져 있을 때, 돌연 고미가 손에 잡고 있던 꽃잎을 모두 놓치며 날카로운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봤다.

[ 호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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