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3 항아리 강매
“내가?”
봉식이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네, 정확히는 2년 뒤의 당신이죠.”
“그러니까, 지금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 가지고 날 죽이려고 했다는 거냐?”
가뜩이나 험하게 생긴 봉식이의 얼굴이 더욱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그래, 이해는 간다. 하지만 여기서 각을 더 세워봤자 문제만 복잡해진다. 난 끝장을 보러 온 게 아니라 이야기를 해보기 위해 온 거니까.
그 이야기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고민 좀 해봐야지.
“솔직히 분위기만 놓고 보면 지구를 멸망시켜도 이상하지 않지.”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나의 농담에,
“그렇다! 나도 봉식이 너를 처음 봤을 때는 악당이라 생각했지! 하지만 알고 보니 제법 좋은 녀석이었다!”
고미가 신이 나서 맞장구를 쳤다.
“미안합니다. 죽일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당신이 그자와 계약을 했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강혁의 사과까지 이어지자, 봉식이의 표정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알았어. 계속해봐. 내가 뭘 어쨌는데.”
또다시 잠깐의 적막이 흐르고, 이강혁이 봉식이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회귀하기 전 세상에서 민봉식 씨는 한국 최초로 초월자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중소 길드 두세 곳을 전멸시키고, 4대 길드 중 하나를 거의 궤멸 직전까지 몰아넣었죠.”
자신이 그런 일을 벌였다는 얘기에 봉식이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그런 짓을 벌였다고?”
“네.”
“왜?”
나도 믿기지가 않는다. 생긴 게 험해서 그렇지, 속정은 누구보다 깊은 녀석이니까.
“가족을 잃은 것이 방아쇠가 됐다고 들었습니다.”
가족이라는 단어에 봉식이의 시선이 자연스레 나에게 향했다.
이 녀석은 7살에 부모님을 사고로 잃었고, 나와 친구가 되면서 자연스레 우리 가족이 됐다.
그러니까 이 녀석이 ‘가족’이라고 말하면 나와 우리 부모님이다. 어딜 가나 그렇게 소개하니까 실제로 아주 가까운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렇게 알고 있기도 하고.
“확실해?”
“네.”
“더 자세히 말해봐.”
“2년 후, 패왕에서 관리하던 던전에서 던전내 균열이 생성됩니다. 도심지에서 가까워 진즉 없앴어야 할 던전이지만, 관리하는 길드가 패왕인 데다가 중소 길드까지 엮여있으니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할 확률이 낮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없애지 않았죠.”
“그런데 사고가 났고, 그 사고에 휘말려 가족들이 죽었다?”
“실상은 훨씬 더 복잡하지만, 요약하자면 그렇습니다.”
이강혁이 설명을 마치자, 봉식이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솔직히 그럴 것 같긴 하네. 그딴 일로 우리 어머니 아버지 돌아가시고 이 새끼까지 죽으면 눈 돌아가지.”
생각만 해도 화가 나는지, 봉식이의 두 눈은 이미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네? 두 분은 친구라고······.”
이강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와 봉식이를 바라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친구고 가족이고 그래요. 이 녀석이 가족이라고 하면 우리 부모님이랑 나예요.”
“그럼······.”
“그리고 봉식이는 아직 초월자랑 계약 안 했어요. 그건 제가 장담하죠.”
그때, 가만히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고미가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해대며 말했다.
“그 초월자라는 게 애꾸눈 괭이 새끼더냐?”
고미의 질문에 이강혁은 여태 보았던 것 중에 가장 놀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설마 곰 선생님께서도 만수의 왕을 알고 계십니까?”
곰 선생님이라니······.
예의가 바른 건 좋은데, 호칭이 좀······.
“하하하! 만수의 왕? 그놈이 아직도 그 같잖은 호칭을 쓴단 말이냐?”
만수왕이라는 말에 고미는 혐오와 경멸이 가득한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한쪽 눈을 잃자마자 자신의 수하들을 버리고 달아난 겁쟁이 괭이 놈 주제에 입만 살았구나!”
“서, 설마 곰 선생님께서 그자의 눈을 그렇게 만든 것 입니까?”
이강혁이 구세주를 보는 것처럼 선망과 동경이 가득한 눈으로 고미를 바라보며 물었다.
“흥! 지금 당장 그 괭이 새끼를 내 앞에 데려오거라! 내 그놈이 얼마나 허풍쟁이인지 네 눈앞에서 똑똑히 밝혀주마!”
하지만 고미는 그 질문 자체에 모욕감을 느꼈는지 노발대발하며 초코바를 흔들어댔다.
초코바가 눈앞을 오락가락하는 모습에 이강혁은 흠칫 놀라며 살짝 뒤쪽으로 물러났다.
‘초코 소드’가 트라우마가 된 모양이다.
초코바를 무서워하는 검성이라니, 마음이 복잡하군.
나중에 초코바 공포증 치료라도 해줘야겠다.
‘잠깐······.’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돌연 머릿속에 고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호랑이 따위와는 다르다니! 그렇지! 나는 호랑이 따위와는 다르다!」
“그 만수왕이라는 게 혹시 호랑이에요?”
“네, 이계 생물이기는 하지만, 생김새는 호랑이와 비슷합니다. 수하 씨, 아니, 수하 님도 그자를 아십니까?”
“아뇨. 몰라요. 그냥 고미가 호랑이를 싫어하거든요. 아마 정말 그놈이랑 한판한 모양이네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강혁이 덥석 무릎을 꿇으며 고미에게 절을 올렸다.
“곰 선생님! 저에게 검술을 가르쳐 주십시오!”
······.
왜 얘기가 그렇게 튀냐.
그래도 ‘처리해달라’는 게 아니라 ‘검술을 가르쳐달라’니, 양심은 살아있는 요청이네.
“저에게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강혁이 품 안에서 부서진 회중시계 하나를 꺼내 들며 외쳤다.
“그게 뭐죠?”
“회귀자의 회중시계구나. 꽤 귀한 물건인데, 운이 좋았구나.”
이어지는 고미의 설명에 따르면, 이강혁의 회귀는 스킬이 아니라 그 회중시계 덕분에 벌어진 일이라고 했다. 단, 회귀 제한은 세 번. 그리고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으니, 이 사람은 벌써 세 번이나 회귀를 한 모양이다.
그런데 고미는 어떻게 이런 것까지 다 알고 있는 걸까?
“역시 곰 선생님은 뭐든지 알고 계시는군요!”
“후훗······. 검술은 영 꽝이지만 그래도 보는 눈은 제법이구나.”
모처럼의 칭찬에 고미는 흡족한 듯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사실 검술에 재능도 없고, 머리도 좋지 못합니다. 그래서 벌써 세 번이나 시간을 돌렸는데도 멸망을 막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확신했습니다. 지금까지 겪은 모든 고통은 모두 곰 선생님과 수하 님을 만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부디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와······. 대환장 파티네.
이거 거절하면 지구 끝까지 쫓아올 기세인데.
고미는 자기를 떠받들어주는 걸 좋아하니 받아주려나.
“훗, 제법 마음에 드는 말을 할 줄 아는 허수아비구나.”
받아주겠네.
“네, 이 허수아비에게 진정한 검의 극의를 알려주십시오.”
“싫다.”
응? 이걸 거절한다고?
하지만 고미는 너무나도 냉정하게 이강혁의 애원(?)을 잘라냈고,
“제자는 한 번에 한 명이다. 이미 이 녀석을 제자로 삼았으니 너는 제자가 될 수 없다.”
이강혁은 마치 절벽에서 동아줄을 붙잡은 사람처럼 절실하게 고미에게 매달렸다.
“그럼 제자의 제자가 되어도 좋습니다! 부디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이어지는 더욱 환장할 전개.
이거 거절해도 분명 죽자 살자 따라다닐 텐데······.
문제는 고미도 황소고집이라 일단 말을 뱉으면 그걸로 끝이라는 거다.
‘이거 제법 골치 아픈 상황이네······.’
검성이 아기곰을 밤낮없이 쫓아다니며 제자로 받아달라고 애걸하는 걸 사람들이 보기라도 해봐라.
아······.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프다.
‘어떻게 하면 이걸 해결하지?’
물론 대충 제자의 제자로 받아줄 수는 있다.
하지만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게 없는데, 저스티스의 길드장을 데려다 놓고 그런 시간 낭비를 하게 할 수는 없지.
게다가 이 정도로 간절하게 세상을 지키려는 사람을 내치는 게 맞나, 하는 생각도 좀 들었고.
세상이 망하면 워라벨이고 뭐고 없어진다.
그렇다고 고미가 처리할 테니까 당신은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말하기도 싫다.
‘차라리 내가 실력이 있어서 그러면 모를까. 그건 아니지.’
그때, 벼락을 맞은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짜릿해지는 근사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고미의 생각도 바꾸고, 세상도 지키고, 우리 가족도 지키고, 어쩌면 다른 것도 얻어낼 수 있을지 모르는, 근사한 아이디어가.
“저는 검술을 전혀 못 해요. 고미한테 배운다고 해도 그쪽을 가르칠 수 있는 수준은 못 될 거고요.”
“하, 하지만······.”
“어쨌든 그런 대사건이 있다고 하면 저희도 손만 놓고 있을 수는 없죠. 그런 일이 생기면 도와는 드릴게요. 하지만 그 외에는 안 돼요.”
일단 나는 일단 그의 제안을 거절하는 척한 뒤에 초코바에 정신이 팔린 고미의 눈치를 살피다가 잽싸게 윙크를 했다.
아, 오해하지 마라.
이강혁을 유혹한다거나, 그런 거 아니다.
거짓말 싸인이다 거짓말 싸인.
“?”
몇 번 더 윙크를 하자, 이강혁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알아듣기는 한 모양이다.
“그리고 오늘 일은 비밀로 해주세요. 고미가 있으면 저는 죽을 일 없고, 우리 가족도 안전하니까, 그럼 봉식이가 그런 일 저지를 일도 없잖아요.”
“허수아비, 봉식이나 수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너와 네 패거리를 모두 저 검처럼 만들어 줄 것이다!”
고미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호통을 쳐대자, 이강혁이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 목숨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흠······. 네 녀석, 제법 신의를 아는구나. 그, 그럼 항아리도 당연히 사가겠지?”
고미가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강혁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 지금 이강혁이 항아리 안 사갈까 봐 걱정하고 있는거냐······.
그리고 약속만 했지 아직 지키지도 않았는데 왜 신의를 안다고 인정해 버리는데.
어찌 됐든, 고미에게는 항아리 = 돈 = 먹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도 먹을 것에 대한 집착을 잃지 않는 걸 보면 참 고미답다고 해야 하나.
설마 나랑 지내면서 이상한 물이 든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또 제꺽 대답하는 이강혁.
어째 강매하는 기분이 들지만, 뭐, 원래 팔기로 한 거니까.
꿀을 확보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진 모양인지 고미의 짤막한 꼬리가 신나게 빙글빙글 돌아갔다.
[ 후훗, 수하! 됐다! 이제 꿀을 잔뜩 먹을 수 있다! 그래, 소고기! 소고기도 먹자꾸나! 아니다, 아예 소고기에 꿀을 찍어 먹는 것이다! 어떠냐? 엄마 아빠도 좋아하겠지? 또다시 가족 회식이라는 것을 하는 것이다! ]
가족 회식...이라는 말에 왠지 가슴이 따뜻해졌다. 저 먹을거 생각한게 아니라 가족들과 맛있는 게 먹고 싶었던 거구나...
그래도 소고기에 꿀 찍어먹는 건 무리다.
대신 달달하게 양념해서 갈비를 먹으면 되겠지.
오케이, 콜.
“그럼 항아리 가져가세요.”
“돈은 돌아가는 대로 곧바로 입금해 드리겠습니다.”
“제가 이따 계좌 번호 문자로 쏴드릴게요. 산삼값은 천천히 주세요.”
“아닙니다. 제가 가격만 확인하고 먼저 돈을 보내드리고, 판매 후에 들어온 돈을 제가 받도록 하죠.”
이야, 역시 이강혁 정도 되면 씀씀이가 다르구나. 좋다 좋아.
[ 수, 수하. 산삼을 팔면 꿀을 얼마나 살 수 있느냐? ]
[ 아마 큰 버스에 가득 채워도 될 거야. ]
시스템 창을 통해 대답하자, 고미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좋아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고미의 말에, 절로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후훗. 좋다. 이강혁이라 하였느냐? 너도 제법 신의를 아는 녀석이구나. 지금 이 몸은 몹시 기분이 좋다. 상으로 네 검을 멋지게 되살려주마.”
아, 안 돼. 무슨 짓을 하려고······. 차라리 그냥 제작 능력자한테 수리하게 해줘!
이강혁 검정도면 몇억은 할 텐데!
“고, 고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