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2 고미류 검술
챙-
나와 봉식이가 무언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시퍼런 칼날이 칼집에서 뽑혀 나왔다.
표정 분석할 필요도 없네.
[ 걱정하지 말거라. 아직 널 벨 마음은 없는 듯하다. ]
그때, 머릿속에 차분한 고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 저 녀석의 속도라면 칼이 반쯤 떨어지고 나서 움직여도 너끈하게 막을 수 있으니 안심해라. ]
그 말만으로도 이강혁의 칼이 장난감 칼처럼 느껴진다면, 내가 고미의 힘을 너무 믿는 걸까?
테이블 위에 앉아 초코바를 핥고 있는 고미를 보고 있자니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감이 샘솟았다.
“묻고 싶은 게 뭔데 천하의 이강혁이 대낮에 칼까지 뽑는거죠?”
이강혁은 한국의 헌터 중 가장 정의롭고 절대 약자를 해치지 않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모습이 가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략 90% 정도? 세상에 100%는 없으니까.
어젯밤, 나는 봉식이의 컴퓨터로 이강혁이 나왔던 인터뷰 영상을 초 단위로 분석해 보았다.
그는 불의에 진심으로 분노했고, 힘없는 사람들을 동정하고 연민했으며, 심지어 그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보상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때도, 어떤 이유로도 헌터가 일반인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고 말할 때도, 어떠한 거짓말의 징후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런 사람이, 갑자기 F급인 나를 상대로 칼을 뽑는 다고?'
그런데 지금까지 봐왔던 성격과 지금 내 눈앞에서 보이는 모습의 간극이 너무나도 크다.
즉, 이 사람이 이러는 데는 제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내가 어떻게든 자신을 이해해보려고 노력 중인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강혁의 얼굴은 점점 더 싸늘하게 굳어갔다.
“당신과 당신 친구, 지금 누구와 계약한 상태입니까?”
이강혁이 칼등이 아래로 오도록 칼을 잡은 뒤 나를 노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와중에 죽일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전세 묻는 거냐? 부동산 소개해줘? 우리 집 주인 별로 좋은 양반 아닌데.”
옆에서 듣고 있던 봉식이가 짜증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으로 답했다.
역시 이 미친놈은 고미를 제외하면 아무도 안 무서워하는구나.
난 고미가 있어도 저렇게까지는 말 못 하겠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을 텐데요?”
“전혀 모르겠는데. 내가 한 계약이라고는 우리 집 전세 계약이랑 보험, 자동차 할부밖에 없어. 보험사 소개해줘?”
이어지는 봉식이의 앙칼진 반격.
“역시, 순순히 대답하지는 않는다 이건가······. 김수하 씨, 아무래도 당신, 나와 함께 가줘야겠어. 당신 친구도 함께. 물어볼 게 많을 것 같군.”
말을 마친 이강혁의 칼등이 우리를 향해 날아들려는 찰나,
섬뜩한 기운이 주위를 뒤덮었다.
쿵-
그리고는 낮은 울림과 함께 이강혁의 몸이 폭풍에 휩쓸린 나무판자처럼 숲속으로 날아갔다.
[ 수하, 따라와라. 이곳은 보는 눈이 너무 많다. ]
그와 동시에 줄곧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벌리고 있던 고미가 한줄기 갈색 빛줄기로 변해 이강혁이 날아간 곳으로 사라졌다.
“가자, 봉식아!”
나와 봉식이는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숲속으로 달려갔다.
* * *
숲속으로 들어가자, 내 허벅지까지도 오지 않는 자그마한 곰 한 마리가 야수 같은 표정으로 검을 뽑아 든 사내와 대치하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김수하 씨. 당신, 대체 뭘 데리고 다니는 거지?”
이강혁은 이미 칼날을 고미에게 향한 채 온몸에서 안개와 같은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표정으로 보나 눈빛으로 보나 우리를 상대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런 어린 짐승을 베는 것은 마음이 좋지 않지만, 할 수 없지. 당신들은 나와 함께 가줘야겠어.”
쉭-
다음 순간, 이강혁의 몸이 한줄기 하얀 섬광으로 변해 갈색 섬광과 교차했다.
그리고는 챙,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서로 등을 돌린 채 몇 걸음을 걸어가더니,
고미가 먼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 고미! 아 안돼!”
하지만 내가 다가가기도 전에 고미가 멋들어진 자세로 자신의 무릎을 짚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미류 검술. 초코 소드.”
“커헉!”
그와 동시에 이강혁의 몸이 그대로 수직으로 무너졌다.
고미의 초코바에서는 마치 실재하는 칼날 같은 기이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저, 저게 ’곰기‘인가.
하지만 굳이 초코바를 매개로 쓸 필요가 있는 거야...?
“내 초코바에 흠집조차 내지 못하는군. 시시한 상대였다.”
고미가 이강혁의 검을 튕겨낸 초코바를 한입 깨물며 말했다.
“노, 놀랬잖아!”
“원래 이렇게 해줘야 긴장감이 산단 말이다!”
“그래도 왜 무릎을 꿇어!”
“그편이 멋있지 않느냐!”
그렇게 고미와 잠시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바닥에 쓰러진 이강혁이 정신을 잃었다.
그의 머리맡에는 깔끔하게 두 동강이 나버린 칼날이 바닥에 박힌 채 푸른 빛을 발하고 있었다.
* * *
“저기요, 저기요. 이강혁 씨?”
“야, 이강혁. 일어나.”
봉식이가 솥뚜껑 같은 손으로 이강혁의 어깨를 잡아 몇 번 흔들자,
“으윽······.”
정신을 잃고 있던 이강혁이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고미와 눈이 마주친 이강혁은 창백한 얼굴로 미친 사람처럼 발버둥을 쳤지만, 그의 몸에는 이미 고미의 기로 만들어진 특제 밧줄이 감겨 있었다.
“흥, 그것은 곰올무라는 것이다. 너처럼 허약한 녀석은 백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풀 수 없는 물건이지.”
“아아악!”
이어서 이강혁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억지로 풀려고 하면 더욱 살 속 깊이 파고들 터이니 움직이지 않는 것을 권하마.”
하지만 고미가 말을 하자, 그는 비명을 지르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말았다.
“고, 곰이 말을 하다니······.”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부러진 검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게다가 어, 어떻게 초코바 따위로 내 검을······.”
하긴 놀랄 만도 하지. 검성이라는 별명까지 가진 자신의 검이 초코바에 부러져 버렸으니······. 솔직히 나도 놀랬다.
“내가 직접 손을 쓰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여기거라. 그랬다면 네 놈은 이미 시체가 되어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을테니 말이다.”
고미는 이강혁의 앞에 앉은 채 야금야금 초코바를 씹어먹고 있었다.
물론 나쁜 뜻은 없겠지만, 이강혁 입장에서는 조롱을 당하는 느낌일 것 같다.
어쩌면 검 부러지고 아기곰한테 일격에 패한 것보다 저게 더 멘탈에 데미지가 갈지도 모르겠네.
“자, 수하. 이제 네가 묻고 싶은 것을 물어보거라.”
고미가 다 먹은 초코바 봉지를 바닥에 버리며 말했다.
“안 돼 고미. 쓰레기 함부로 버리는 거 아니야.”
내가 그것을 주워들어 주머니에 집어넣자, 이강혁의 눈이 부엉이처럼 커다랗게 변했다.
응, 나도 안다. 대체 이게 무슨 관계인가 싶겠지.
초코바를 먹는, 말하는 슈퍼 곰에 보모 같은 F급이라니. 아니지, 나 이제 D급이구나. 여튼.
“이강혁 씨. 당신이 우릴 곱게 보내줬으면 우리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왜 우리를 공격한 거죠?”
나의 가장 큰 의문은, 이강혁이 회귀자냐 아니냐가 아니라, 왜 우리를 공격했냐는 것이었다.
분명히 처음에는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봉식이를 본 순간부터 태도가 돌변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에 따라 이강혁을 무사히 돌려보내 줄 수도 있고, 뭔가 다른 조치를 취해야 할 지도 모른다.
“그걸 몰라서 묻는 건가? 저 곰은 뭐지? 그자의 사도인가?”
그러나 이강혁은 내 질문에 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문 채 고미와 봉식이를 번갈아 가며 노려봤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 결연한 표정이었다.
“이강혁 씨,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아까부터?”
“내가 보기에는 이거 정신병자다. 수하야 치료해줘라.”
봉식이가 혀를 차며 말했다.
“하······. 당신 회귀자죠?”
“웃기는 소리. 회귀자는 없다.”
거짓말.
말을 하기 전에 이강혁의 이근(아래턱뼈의 앞니에서 시작해 턱의 피부에 닿는 근육)이 움찔거리는 게 보였다.
“거짓말이군요.”
“정신계통 스킬을 가지고 있나?”
이강혁이 이를 악물며 되물었다.
당혹감과 놀람이 섞인 표정.
정신계열 스킬 방어하는 아이템 차고 있는 모양이네.
최소한 A급인가?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놀라지 않았을 테지.
물론 내가 사용하는 건 스킬도 아니고, 아이템도 아니다.
그냥 인간이라면 통제할 수 없는 불수의적인 반응을 이용해 거짓말인지 아닌지를 가려내는 것 뿐.
물론 왜 거짓말을 하는지, 진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는 점에서는 한계가 있지만, 아이템으로도 스킬로도 막을 수 없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이점을 가지고 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이강혁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사건의 흐름으로 보나, 그의 성격으로 보나, 무언가 이유가 있어 우리를 공격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를 만나고 나서 저스티스의 수장이 사라지면 평화로운 삶은 영원히 안녕이잖아. 그건 안 되지.
닭도리탕 먹어야 한다고. 엄마표 김치찌개도. 삼겹살도 먹고 싶다.
아, 얘기하다 보니 자꾸만 고미처럼 되어가는 것 같네.
“하······. 고미, 이거 풀어줘.”
나의 말에 고미는 질문조차 하지 않고 곧바로 곰올무를 풀어주었다.
이강혁이 다시 달려든다고 해봤자 제압할 자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행동.
“어, 어째서?”
순순히 포박을 풀어주자, 이강혁은 얼빠진 표정으로 우리를 훑어보았다.
“이강혁 씨. 당신이 알고 있는 걸 말해줘야 저도 그쪽을 믿죠. 난 당신이 회귀자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미래에서 뭘 봤길래 봉식이와 나를 끌고 가려고 한 거죠?”
잠시 숲 안에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5분 정도 지났을까?
마침내 이강혁이 입을 열었다.
“당신 말대로, 나는 회귀자입니다.”
역시, 예상대로다. 이제부터 하나하나 이 사람의 행동에 대한 의문을 풀어갈 차례다.
“지리산 동굴 앞에서 중얼거렸던 말은 무슨 의미였죠? 다행이라고 하던데.”
“그때도 지켜보고 있었던 겁니까?”
이강혁이 나와 고미를 번갈아 보며 되물었다.
“훗, 이 몸이 살곰살곰 바위 뒤에 숨어 훔쳐보고 있는데도 눈치채지 못하더구나. 하긴, 너같이 나약한 녀석이 위대한 이 몸의 잠행술을 간파할 수 있을 리 없지.”
고미의 팩폭에 기분이 상할 수도 있으련만, 이강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왜 저에게 이런 엄청난 기연이 찾아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보다 훨씬 더 강하고 뛰어난 사람도 많은데······.”
그의 말과 표정에서는 깊은 절망과 무력감, 회한이 진하게 묻어났다.
“산신령은 반드시 지켜야 할 존재입니다. 회귀하기 전, 한국의 붕괴는 항상 산신령의 죽음으로 시작됐으니까요.”
“붕괴요?”
“네. 회귀 전 한국은······. 그 일을 시작으로 빠르게 멸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제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죠. 산신령의 죽음을 막아야 조금이라도 붕괴를 늦출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산신령이 죽지 않아 다행이라고 한 건가요?”
“네. 산신령의 죽음까지는 적어도 1년 이상이 남아있었고, 그 전에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지리산 던전이 클리어됐다기에 황급히 달려가 본 것입니다. 이전 세계에서는 보상을 받은 사람이 산신령을 죽이면서 붕괴가 시작됐습니다.”
“항아리는······.”
항아리에 대한 질문에 이강혁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 있으면 좋지만, 꼭 필요한 물건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지리산 던전을 클리어한 자가 누구인지, 그자의 수하, 아, 아니, 부하는 아닌지 확인해보려 한 것입니다.”
“그럼 봉식이를 보고 놀란 건······.”
“이전의 세계에서 민봉식 씨는 아주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앞으로 1, 2년 후의 일이기는 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