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1 위험한 거래
아침 산책(?)겸 대책 회의를 마친 고미와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 봉식이를 깨웠다.
“야, 야, 덩어리. 일어나.”
고미만 있어도 충분할 걸 왜 봉식이를 데려가냐고?
일단 서류상으로 F급인 내가 혼자 지리산 던전을 클리어했다고 하면, 바보가 아닌 이상 뭔가가 있다고 의심을 할 거다.
구라 상태창을 보여준다면 어찌어찌 납득이야 하겠지.
하지만 등록할 때 내 등급은 F였다.
‘놀랍게도 등록한지 일주일도 안되서 D급이 되었답니다.’라고 말하면서 상태창 보여줘 봐야 ‘축하합니다. 굉장하네요.’라고 말하는 머저리가 어딨겠나.
누가 봐도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으니 분명히 뒷조사가 들어올 거고, 결국 고미에게 뭔가가 있는 것 아닐까 하는데 생각이 미치겠지.
‘이럴 때는 믿을 수 없는 진실보다는 믿기 쉬운 거짓을 제시하는 게 나아.’
때마침 봉식이는 C급 헌터가 됐다. 당연히 C급 중에서는 꽤 강한 축에 속할거고. 뭐, 이 인간병기라면 당연한 결과지.
「봉식이 각성했다고?」
「걔는 각성 안 해도 몬스터 잡을 수 있을걸?」
「그 괴물이 각성 안하는게 더 신기한 거 같은데.」
봉식이가 각성했을 때 주변인들의 평가가 이랬을 정도다.
물론, 스킬 듣고 자지러 지기는 했지만.
여하튼, 이 인간 흉기를 얼굴 마담으로 내세우면 최대한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게 내 계획이었다.
“어어······. 세수하고 올게.”
봉식이가 간단하게 세수를 하는 사이, 나는 어머니의 머리 맡에 쪽지를 남겨두고 카드를 올려 놓았다.
<< 엄마, 일이 좀 있어서, 봉식이랑 고미랑 셋이 좀 나갔다 올게. 저녁 전에는 돌아올 테니까 이 카드로 장 봐. 엄마가 해준 밥 먹고 싶어. 그리고 옷도 좀 사고. >>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봉식이가 다가오더니 내 카드를 집어 나에게 돌려주고는 자기 카드를 그 자리에 올려놓고 편지에 몇 마디를 덧붙였다.
<< 어머니, 아들 돈 많이 버니까 먹고 싶은거 다 사요. 또 아들이 번 돈을 어떻게 쓰냐고 아끼고 그러지 말고. 대신 저녁 메뉴는 닭도리탕. 나 어머니가 해준 닭도리탕 먹고 싶어. 옷은 열 벌 사요. 아버지랑 어머니랑 열 벌씩. 두 분 다 열벌씩 안 사면 아들 오늘 저녁 안 먹어요. >>
“됐다. 조용히 나가자. 어머니 아버지 쉬시게.”
“후훗. 좋다. 나를 따라하거라! 이렇게 살곰살곰 나가면 절대로 모를 것이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고미는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문 앞에 멈춰선 채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 수하! 문을 열어다오! ]
짧은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는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래, 고미가 있으니까, 아무 일도 없을 거야.’
* * *
집을 나선 후, 봉식이는 차를 몰아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
이강혁을 만나기 전에 먼저 산신령의 항아리와 산삼을 받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자, 그럼 나는 수다르에게 다녀오마. 너희는 이곳에서 기다리거라.”
고미는 그 말을 남기고는 산신령의 보물이 만들어낸 공간 통로 안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통통한 궁둥이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봉식이가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공간이동까지 가능한 거야?”
“인벤토리 안에도 들어가는데 공간 이동을 못 하겠냐.”
“진짜 후덜덜하구만. 대체 어디서 저런 곰을 주워왔냐.”
봉식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고미가 다시 우리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녀석은 양손에 각각 한 개, 그리고 겨드랑이에 각각 한 개씩, 총 네 개나 되는 항아리를 들고 있었다.
“고미······.”
“후훗, 어떠냐. 하나를 달라고 하니 얼마든지 가져가도 된다고 하여 네 개를 가져왔다. 이 정도면 꿀을 집안에 가득 쌓아두고 먹을 수 있지 않겠느냐? 엄마 아빠와 나눠 먹어도 일 년은 먹을 수 있을 것이다!”
4억 원 어치 꿀을 일 년 만에 먹자고······.?
돈도 돈이지만, 꿀을 그렇게 먹으면 당뇨로 죽을 것 같은데······.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구나.
너무 황당한 계산법에 나도 모르게 문제의 핵심을 놓치고 말았다.
“안돼 고미! 얼른 세 개 돌려주고 와!”
하지만 평소와 달리 고미는 나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 이제 엄마 아빠와 나눠 먹어야 하니 더 많은 꿀이 필요하다. 이 막내님이 아니라면 누가 가족들을 챙기겠느냐! 너희 둘은 너무 약하다!”
어휴······. 가족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지적할 게 한두 개가 아니다. 일단 나랑 봉식이는 왜 계산에서 빼는 거냐. 그리고 인간은 그렇게 많은 꿀을 먹을 수가 없다고.
“자, 고미. 꿀 한통에 4만원, 항아리 하나에 1억. 그럼 항아리 하나가 꿀 2500 통이야. 그걸 365로 나누면 대충 6에서 7이지. 그럼 한 끼에 최소한 꿀을 두통씩 먹어치워야 한다고.”
나의 정확한 계산에 고미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좌우로 흔들렸다.
“아, 알고 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마음은 고마운데, 보통 사람은 꿀을 그렇게 먹으면 죽어.”
“!!!!”
죽는다는 말에 고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후다닥 공간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가 항아리 하나만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 이제 엄마 아빠는 죽지 않는 것이냐?”
“응. 그 대신 고미가 가져온 항아리랑 산삼을 돈으로 바꿔서 더 맛있는 거 많이 해먹을 수 있어.”
사실 항아리를 돌려주고 오라고 말한데는 다른 이유가 있지만, 일단 고미를 설득시키기에는 이런 방법이 가장 좋다.
산신령의 보물을 네 개나 들고 나타나면 이강혁이 아니라 개나 돌고래가 와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겠나.
하지만 그걸 고미에게 이해시키기는 상당히 어려운 문제거든.
“아, 알겠다!”
그런데, 꿀 계산에서 나는 왜 자꾸 빼는 거야 서운하게.
“고미, 근데 말이야. 나는 왜 자꾸 계산에서 빼는 거야?”
조금 마음이 상해 던진 질문에, 고미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당연하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답했다.
“너는 초코바도 꿀도 안 먹지 않느냐? 그래서 수다르가 맛없는 차를 내왔을 때도 꿀을 넣지 않은 것 아니더냐? 나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맛없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일부러 주지 않았다.”
윽······. 심쿵해 버렸다.
어지간하면 마음이 동하지 않는 나지만, 이번 건 정말 강력한 한방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더욱 강렬한 한 방.
“먹고 싶다면 말하지 그랬느냐? 진즉에 내어주었을 텐데. 꿀은 수다르의 창고에 있으니 우선은 이것이라도 먹거라.”
무심한 듯 시크하게 초코바를 내미는 고미의 모습에 그동안 서운했던 마음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나도 모르게 아빠 미소를 짓고 말았다.
“아니야. 그냥 물어봤어. 초코바도 너 먹어.”
“흠······. 싱거운 녀석 같으니. 어서 가자.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기로 엄마와 약속하지 않았느냐. 신의를 지켜야지.”
고미가 봉식이의 차 문 앞에 다가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음······. 집 문이고 차 문이고 문 여는 법부터 가르쳐야겠구나.
* * *
이강혁을 만나기로 한 곳은 수리산이라는 경기도의 작은 산 끄트머리에 위치한 개인 까페였다.
일단 스킬 포인트를 모두 투자해 감각 강화를 올려두기는 했지만, 조금 더 정확한 관찰을 위해서는 ‘산신령의 진짜 가호를 받은 자’ 칭호 효과를 받는 편이 좋으니까.
솔직히 멀리 나가기는 조금 귀찮기도 했고.
빨리 돌아가서 닭도리탕 먹어야 한다고.
테라스에서 커피를 시키고 잠시 기다리자, 검은 승용차 한 대가 멈춰서더니 말끔한 인상의 호리호리한 사내 하나가 차에서 내려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장검이 들려있었다.
“물건은 가져 오셨습니까?”
이강혁은 인사도 없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
표정도 조금 굳어있다.
원래 상당히 예의 바른 캐릭터 아니었던가?
“네. 그 안에 산삼도 담겨있는데, 산삼 판 돈은 나중에 보내주시면 됩니다.”
“벌써 산신령의 보물을 아주 잘 활용하고 계시는군요.”
말을 하는 이강혁의 시선이 아주 잠깐이지만 봉식이에게로 향했다.
감각 강화 스킬이 없었다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짧은 순간.
표정은······.
순간적으로 동공이 커지고, 영 점 몇 초 동안 눈썹이 올라가며 안륜근(눈꺼풀 속에 있는 고리 모양의 근육)과 전두근(이마에 있는 근육)이 움직였다.
‘놀람’을 의미하는 전형적인 표정.
‘봉식이를 보고? 왜?’
게다가 의식적으로 놀라지 않은 듯 담담한 표정을 연기하고 있다.
틀림없다. 이 자는 봉식이를 알고 있다.
불과 얼마 전 C급이 된 헌터를, 대한민국 4대 길드의 수장이.
하지만 봉식이는 단 한 번도 이강혁을 직접 만난 적이 없다.
“역시, 지리산 던전 클리어를 도와준 동료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상대를 알아봤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척 짐짓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간다.
하지만 이미 예상한 일이라면 놀랄 이유가 없다.
동료가 있다는 걸 예상했다는 말은 아마 사실일거다.
정말 F급 혼자 지리산 던전을 클리어했다고 믿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그럼 놀란 이유는 그 동료가 봉식이라는 것 때문인가? 대체 왜?’
“뭐, 상관없죠. 저는 물건만 받으면 그만이니까요.”
이어서 이강혁의 눈동자가 왼쪽 위로 향했다가 정면으로 돌아왔다.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과거를 회상할 때 나타나는 움직임.
점점 더 이강혁이 회귀자라는 추론에 확신이 붙는다.
초면인 사람을 앞에 두고 과거를 회상할 이유가 없으니까.
이강혁이 일방적으로 봉식이를 알고 있을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저런 유명인이 주변에 있는데 봉식이는 그 사실을 모르고, 이강혁만 봉식이를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아이템은 진짜인 것 같네요. 약속드린 1억을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산삼은 얼마나 받을 수 있을까요?”
일부러 던진 질문에 이강혁은 산삼은 보지도 않고 웃으며 나와 봉식이를 바라봤다.
“죄송합니다만, 산삼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네요. 일단 최대한 많이 받도록 노력은 해보죠.”
그리고는 짐짓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봉식이에 대해 물었다.
“옆에 계신 분은 못해도 C급은 되시는 것 같은데, 혹시 무슨 사이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 불알 친구예요.”
“아······. 실례지만 성함이? 저는 이강혁이라고 합니다.”
"민봉식입니다."
이강혁의 표정을 확인하는 순간,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감추려 애쓰고 있지만, 아주 미세하게 안면근육이 수축하고, 동공이 확장되고, 입술이 마르고 있다.
긴장 상태. 도피 혹은 투쟁 반응의 전형적인 패턴.
위험을 감지하고 달아나거나 임전 태세에 들어갔을 때 나타나는 반응이다.
“혹시 소속 길드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얼굴에서 핏기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젠장, 이거 진짜 위험한데.
“없습니다.”
“그렇군요······.”
바로 그때, 줄곧 봉식이를 바라보던 이강혁의 시선이 나에게 못 박힌듯 고정됐다.
"김수하씨,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아주 중요한 질문이니 솔직하게 답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어서 그의 손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장검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