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25화 (25/300)

EP.25 깨어나다(1)

이강혁은 고미와 나의 뒤를 ‘따라온’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앞서간 뒤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만 그 넓은 산중에서 우리가 어느 길을 택해 내려올 줄 알고?

[ 수하,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

고미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때, 우리를 향해 다가오던 이강혁이 돌연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미안합니다. 괜히 겁을 준 것 같군요. 괜찮다면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잠시 고민하던 이강혁이 그대로 자리에 선 채 말을 이어나갔다.

“조용한 곳으로 가는 게 불안하시다면 이곳에서 이야기를 나눠도 좋습니다. 그것도 곤란하다면 다음에 이야기를 나눠도 좋고요.”

지극히 정중하고, 예의 바른 태도.

표정이나 말투에도 전혀 적의가 없다.

하지만 그를 처음 봤을 때의 그 살기등등한 표정이 너무나도 생생해 쉽게 경계를 풀 수는 없었다.

“조용한 데서 하죠. 대신 제가 좀 바쁜데, 빨리 끝낼 수 있을까요?”

고미가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여차하면 사람의 눈이 없는 곳에서 싸우는 편이 낫기도 하고.

조금은 무례할 수 있는 그 말에 이강혁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쪽으로 가시죠.”

* * *

나와 고미는 이강혁과 함께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시골 길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어떻게 우리가 이 길로 내려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죠?”

“그냥 아는 헌터들에게 연락을 돌려 아기곰과 함께 다니는 헌터가 있으면 그 사람의 위치를 알려달라고 부탁했을 뿐입니다. 놀라게 했다면 죄송하군요.”

이강혁이 미안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 생략된 전제가 나의 신경을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

‘역시, 나와 고미가 수다르를 만난 걸 알고 있었어.’

문제는 그 방법이 뭐냐하는 거다.

“왜 절 찾았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내 질문에 이강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전 이제 막 각성한 F급 헌터입니다. 저한테 사고 싶은 게 있을 리가 없을 것 같은데요.”

“등급은 상관없습니다. 당신이 내가 원하는 물건을 갖고 있다는 게 중요할 뿐이죠.”

“사고 싶다는 물건이 뭔데요?”

“산신령의 보물. 가호도 아직 가지고 있다면 사고 싶군요.”

이강혁의 답을 듣는 순간,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확실하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이 녀석은 산신령의 ‘가호’가 뭔지 알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 가지고 있다’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말하는 거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이상한 지점에서 앞뒤가 맞질 않아.’

산신령의 보물이 뭔지 안다면, 내 손에 끼워진 반지를 알아봤을 거다. 일부러 머리를 만지는 척하며 반지를 보여줬는데도 전혀 반응이 없다.

정말로 산신령의 보물이 뭔지 알고 있다면 최악의 경우에는 내 손가락을 잘라버릴······. 으, 끔찍해. 이건 상상 안 할란다.

물론 고미가 있으니 내 손가락을 자르려다 목이 날아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사람을 죽이지 않기로 약속했으니 죽이지는 않겠지.

제 입으로 약속한 건 반드시 지키는 녀석이니까.

그때, 이강혁이 제 입으로 의문을 해결해줬다.

“어렵게 던전 클리어 조건을 알아냈는데, 산신령을 불러낼 산삼을 찾는 사이에 누가 선수를 쳤더군요. 당신이 그 사람이라는 걸 알아챈 건 인근에서 아기곰과 사람의 발자국이 나 있는걸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값은 제대로 치를 테니 저에게 파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 답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좋은 생각 하나가 번뜩 스쳐 지났다.

“그 물건을 대체 어디에 쓰려고 이렇게까지 급하게 구시는 거죠?”

“꼭 만들어야 할 영약이 있는데, 시간이 좀 오래 걸립니다. 그 시간을 단축할 필요가 있어서요. 저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역시, ‘진짜’ 보물이 아니라, 산신령의 항아리를 보물로 착각하고 있다.

그제야 머릿속에서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이강혁이 가진 정보는 산신령의 ‘진짜’ 가호와 보물이 아니라 그 얍... 아니, 영리한 수달 영감님이 주려고 했던 가짜 보상에 대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얼마나 주실 건데요?”

“1억.”

······.

1억!? 그 꿀 냉장고를 1억이나 주고 산다고!?

잠깐만, 1억이면 초코바랑 꿀이······. 아니, 아니, 이건 고미식 셈법이구나. 뭔가 이상한 쪽으로 고미의 영향력이 발휘되고 있다.

[ 오오, 수하! 수하! 당장 팔거라. 내가 수다르에게 항아리를 하나 받아주마! 아니, 두 개 받아주마! 꿀을 만 개는 살 수 있는 금액이 아니더냐! ]

그때, 고미가 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아 흔들며 전음으로 외쳤다.

계산도 틀렸고, 고미치고는 상당히 속물같은 반응이긴 하지만, 나쁜 거래는 아니다. 이 녀석도 내 영향을 받았나······. 역시 애 앞에서는 물도 함부로 마시면 안 되는구나.

“제가 알기로 산신령의 보물은 C급 아이템입니다. 그나마도 솜씨 좋은 포션 제작자가 있어야 쓸모가 있는 물건이고요. 이 정도면 충분히 후하게 쳐 드렸다고 생각합니다만.”

하지만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이 사람한테 받아낼 수 있는 게 더 남아있는 것 같거든.

“몇 가지 조건을 더 얹어도 될까요?”

[ 오오, 수하 그래! 꿀, 꿀을 받아라! 꿀을 버스에 가득 채워달라고 하거라! 초코바도 받아내거라! 그럼 내가 검술도 가르쳐준다고 하거라! 어서! ]

흥분한 고미가 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거칠게 흔들어대며 외쳤다. 이 자식이······. 너 그거 다 먹으면 당뇨 걸려 임마.

“들어보죠.”

“산삼 구하는 사이에 제가 선수를 쳤다고 했죠?”

“아쉽게도 그랬죠.”

“제가 지리산에서 산삼을 좀 캤는데, 대신 팔아줄 수 있으세요?”

산삼은 누가, 누구에게 파느냐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인 물건이다.

물론 감정스킬이 있으니 몇 년 산이니 뭐니 하는 걸로 날 속일 수는 없겠지만, 그 과정에서 생기는 부차적인 문제들이 적잖이 성가실 게 확실하다.

하지만 이강혁 정도의 거물이 산삼을 판다는 데 사기를 칠 정신 나간 놈이 어디 있을까?

무엇보다 난······. 지금 피곤하다.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라고. 산삼 판매처 알아보러 다니기 싫다고.

게다가 부모님이 병상에서 일어나면 할일이 태산이니 산삼 판매는 이사람에게 떠넘기는 편이 낫다.

“네, 반드시 제값을 받아드리죠.”

오······. 시원시원한 반응 보소. 하나만 더 던져보자.

“마지막으로, 이번 거래는 철저히 비밀로 해주세요. 운 좋게 좋은 아이템 얻은 F급이 어떤 꼴 당하는지는 그쪽이 더 잘 아실 테니까요.”

인터넷에 사진 올려준 누구 덕에 고미와 나는 이미 제법 유명세를 탔다. 이런 상황에서 지리산 던전을 클리어 한게 우리라는 게 알려지면, 고미가 무언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사람들이 생기는게 당연하다.

내 능력은 테이밍과 지구력 강화로 등록되어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신중한 분이시군요. 이 거래는 제 이름을 걸고 그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이강혁은 이번에도 흔쾌히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며칠 뒤에 제가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지금은 좀 바쁜 일이 있어서.”

“얼마든지요.”

거래가 성사되자, 이강혁은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긴장이 풀린 나는 그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

솔직히 좀 쫄렸거든. 하지만 고미가 있으니 대담하게 나갈 수 있었다.

역시 사람은 믿는 구석이 있으면 쉽게 용감해질 수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 생각보다 나쁜 놈은 아닌 것 같구나. 저 허접한 검술을 조금 손봐주고 맛있는 것을 받아내는 것은 어떻겠느냐? 참 좋은 생각이지 않느냐? ]

고미가 혀를 내밀어 연신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앞으로 얘 앞에서 이런거 하면 안되겠다······.

* * *

이후 고미와 나는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고, 곧바로 호리병에 든 영약을 들고 병원으로 향했다.

‘됐어. 이제 다 된 거야.’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고미의 뒤를 따라 산길을 달리던 때도 이만큼 심장이 뛰지는 않았던 것 같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부모님이 누워 계신 병실로 달려가고 있을 때,

“김수하.”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진짜 곰하고 맞짱을 떠도 이길 것 같은 거구의 사내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커다란 키에 내 두 배는 되는 어깨, 터질 듯 부플어오른 근육에 짧게 자른 스포츠 머리, 눈만 마주쳐도 척추를 반으로 접어줄 것 같은 험상궂은 얼굴까지······.

[ 수하 ! 피해라! ]

그때, 고미가 나와 ‘누군가’ 사이를 가로막고 섰다.

“괜찮아 고미, 그런 거 아니야.”

[ 아니다, 이놈의 분위기가 보통 흉악한 것이 아니다! 실력은 형편없지만, 틀림없이 너를 노리고 있다! ]

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우리 봉식이가 좀 많이 험하게 생기긴 했지.

오죽하면 학창시절 별명이 살육전차였다.

“이야, 이 곰돌이가 지금 너 지키겠다고 이러는 거냐? 귀엽네.”

진짜로 귀여워서 하는 말일 텐데, 외모 때문에 사채업자가 자식 안부 묻는 거랑 같은 분위기가 되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봉식 이펙트.

좋은 말을 해도 협박처럼 들리고, 나쁜 말을 하면 공포가 배가 되지.

“괜찮다니까, 이리 와. 이 녀석이 그 제일 친한 친구야.”

고미를 덥석 끌어안아 들어 올리며 그렇게 말하자, 녀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신 봉식으로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이것은 영락없이 악당의 외모가 아니더냐! ]

아무리 애들도 외모 보고 사람 판단한다지만, 봉식이가 들으면 상처받을 말이네.

저 자식이 또 의외로 여리거든.

“야, 그 곰돌이 실제로 보니까 더 귀엽네. 만져봐도 되냐?”

“시끄러. 따라오기나 해.”

봉식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살짝 입술을 비죽이고는 군말 없이 뒤를 따라왔다.

사람들은 한 대 치기 직전의 표정이라고 오해하곤 하지만, 나름 상처받은 얼굴이다 저거.

“대체 어디서 뭘 구해 온 거길래 그렇게 확신에 차 있냐?”

“일단 부모님 깨어나면 한 번에 설명하자. 길어.”

아기곰을 끌어안고 봉식이와 함께 걸어가자, 아이돌 그룹 못지않은 시선을 받을 수 있었다.

고릴라 하나에 아기곰이라······.

산에서 내려와도 동물원이구만.

“고미, 전에 거기로 와. 알았지?”

병원 문 앞에서 고미를 내려놓으며 그렇게 말하자, 녀석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어? 야, 곰돌이 어디 갔어? 뭐야 이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봉식이가 귀신에 홀린 듯 화들짝 놀라며 외쳤다.

“가자. 병실 안에 있을 거야.”

* * *

병실 안에 도착하자, 먼저 도착한 고미가 초코바를 야금야금 베어먹으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야, 이거 뭐냐. 나 지금 꿈꾸냐?”

그 모습을 본 봉식이는 바위 같은 주먹으로 눈을 비벼대며 고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평소 같으면 ‘역시 나의 위대함은······’ 어쩌고 했을 고미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말없이 진지한 말투로 부모님의 상태를 설명해 주었다.

[ 수하, 네 부모의 상태는 아주 안정적이다. 이제 약만 먹이면 될 것이다. ]

고미의 말을 들은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더블백에서 산신령의 영약이 담긴 호리병을 꺼내 조심스럽게 부모님의 입에 흘려 넣었다.

“이제 곧 깨어나실 거야. 혹시 의사들이 어떻게 깨어났냐고 물어보면 네가 어디서 좋은 아이템 구해왔다고 말 좀 해줘라. 너 C급 됐다며.”

“무슨 소리야. 설명을 좀 해달라니까. 저건 또 어디서 구해왔어? 이 귀여운 곰돌이는 또 뭐고. 이거 아무리 봐도 보통 물건이 아닌데.”

봉식이가 빚 독촉하는 사채업자 같은 포스로 계속해서 설명을 요구했다. 물론 나쁜 의도는 없다. 하지만 저놈을 형제처럼 생각하는 나도 가끔 무섭다고 느낀다.

잠시 후, 병실 안에 가득 찬 약향이 점점 더 짙어지며 부모님의 몸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고미의 몸에서도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이 퍼져나와 병실 전체를 뒤덮었다.

'또 뭘 하려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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