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3 하산
수다르가 내민 단약까지 건네받자, 퀘스트가 완료되었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 축하합니다. 던전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
< 능력치가 영구적으로 상승합니다. (+5%) >
< 산신령의 ‘진짜’ 가호를 획득했습니다. >
< 산신령의 ‘진짜’ 보물을 획득했습니다. >
‘진짜’ 가호와 보물이라니.
설마 아까 했던 말이 진짜라는 거야?
정말로 다른 사람이 왔으면 적당한 아이템 줘서 돌려보낼 생각이었냐고, 이 얍삽한 수달아!
내가 속으로 자신을 욕하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다르가 한껏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허허, 산신령의 가호는 지금 드시는 편이 좋습니다. 자연 그대로의 기운을 담아 만든 것이라 오래 지나면 상할지도 모릅니다.”
영약이라더니, 유통기한도 있는 거냐.
“그래, 지금 먹어두거라.”
고미도 산신령의 의견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는 그렇게 답하고는 상쾌한 향을 내뿜는 단약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민트향이네.’
그렇다. 산신령의 단약은 상당히 취향을 타는 맛이었다.
약효는······.
< 새로운 칭호를 획득했습니다. >
< 산신령의 ‘진짜’ 가호를 받은 자 (희귀) >
- 산신령의 진짜 가호를 받은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입니다. 산악지형에서 능력치가 10% 상승합니다.
- 산악지형에서 스킬 효율이 상승합니다.
- 약재를 섭취할 시 효과가 10% 상승합니다.
- 자연의 기를 더욱 잘 느끼고, 흡수할 수 있게 됩니다.
오······. 이런저런 좋은 옵션이 덕지덕지 붙었는데, 특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마지막 문장이었다.
“자연의 기를 흡수할 수 있다는 게 무슨 소리죠?”
나의 질문에 수다르 대신 고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하며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대충 이런 걸 할 수 있게 된다는 소리다.”
챙!
그러자, 돌연 허공에서 예리한 빛이 솟아나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뭐, 뭐야 이거?”
“곰기다.”
대단하다. 확실히 엄청 대단한데.
언제나 그렇듯이 발음이 좀······.
“검기가 아니라?”
“그것은 이 몸의 위대한 권능을 보고 어줍잖게 흉내 낸 가짜이니라.”
고미가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검기의 오리지널이 곰기라니, 참으로 신박한 주장일세.
“물론 약간의 수행이 필요하지만 말이다. 마침 잘 됐구나. 왕유와 함께 복용하면 더욱 좋은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미는 그렇게 말하며 검은 왕만두를 통통 두드렸다.
“왕유라는 건 언제 완성되는데?”
“최소한 일주일은 지나야 한다.”
그때, 산신령이 커다란 항아리의 뚜껑을 열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허허허, 고미님. 산신령의 단지를 이용하시면 삼일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내 제자의 부모를 구해주어야 하니 이곳에 더 머무를 수는 없다.”
고미의 대답에 산신령은 기다렸다는 듯 나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가리켰다.
“산신령의 보물을 가지고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저의 단지에 있는 물건을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반대로 원하는 물건을 저에게 보내는 것도 가능하지요.”
“호오······.”
“그리고 산신령의 단지에 약재를 넣어두면 지리산의 영기를 받아 약효가 증가하고, 생장 속도가 더욱 빨라지지요. 더욱 굉장한 것은······.”
말꼬리를 흐리는 수다르의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아마도 엄청난 기능이...
“음식을 넣어두면 그 맛이 아주 각별해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특히 장을 넣어두면 10년, 기한에 따라 100년은 묵힌 것처럼 깊은 맛을 내지요.”
“오오오! 수다르!”
그래, 그렇구나. 비전의 숨쉬는 장독대였구나, 대단하네.
하지만 맛이 깊어진다는 말에 고미는 전에 없이 격렬한 반응을 보이며 항아리를 향해 뜨거운 눈길을 보냈다.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네 아주······.
그리고는 더블백에서 자신의 보물인 꿀단지를 꺼낸 도톰한 두 손으로 그것을 꼭 붙들고 한참동안 고민에 빠졌다.
“흐흠. 이것은 내가 바깥세상에 나온 후 얻은 가장 귀중한 물건이다. 잠시 맡길 테니 맛이 적당히 깊어지면 나에게 보내줄 수 있겠느냐?”
꿀단지를 들고 있는 고미의 손이 흥분과 기대로 가느다랗게 떨렸다.
이 자식들이, 대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거야.
산신령의 보물의 용도가 고작 꿀 냉장고냐고.
“허허, 걱정하지 마십시오. 가장 깊은 맛을 내게 되었을 때 보내드리지요.”
수다르가 고미의 손에 들린 꿀단지를 붙잡으며 말했다.
“응?”
하지만 고미는 꿀을 꼭 붙잡고 차마 놓지 못했다.
‘지금 먹을지 보관해뒀다 먹을지 고민하는거구만.’
어린애들이 많이 하는 고민이지. 맛있는 걸 당장 먹을까 아껴뒀다 나중에 먹을까.
좀 쓸데없지만, 저 식탐 대장이 무슨 선택을 할지 조금은 궁금하다.
“저······. 고미님?”
수다르가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을 부르자, 고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아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 잠시만. 하, 한잔. 아직 제대로 꿀맛을 보지 못했으니, 딱 한 잔만 마시고 넘겨주겠다.”
말을 마친 고미는 황급히 찻잔 하나를 가져와 잔이 찰랑찰랑 넘치기 직전까지 꿀을 따랐다.
그리고는 크게 줄어버린 꿀의 양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 꿀꺽, 꿀꺽.
시원하게 그 안에 든 꿀을 원샷했다.
‘으아아, 생꿀을 저렇게 잔으로 벌컥 벌컥 마신다고?’
으으, 내가 먹는 것도 아닌데 속이 니글거린다. 엄청 달텐데······.
그때,
“아, 아아······.”
꿀의 맛에 너무 감격한 나머지 고미의 사지에서 힘이 풀리며 손에 든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척.
“고미, 정신 차려.”
나는 향상된 민첩성을 이용해 그것을 멋지게 붙잡아 고미에게 건넸다.
민첩에 올인한 보람이 느껴지는 순간이구만.
“오, 오오······.”
너무나 감격한 탓인지 고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찻잔에 남은 꿀까지 깔끔하게 손으로 훑어 핥아먹었다.
< 호감도가 10 상승합니다. (65 / 100) >
< 참 잘했어요 포인트가 5 상승합니다. (8/50) >
······.
꿀 한잔 + 꿀잔 받아주기로 호감도와 참 잘했어요 포인트까지 알뜰하게 챙겨버렸네. 그것도 역대 최대치로.
잠시 후, 꿀단지를 건네받은 수다르가 그것을 가장 커다란 항아리에 집어넣은 뒤 아주 조심스럽게 뚜껑을 닫았다.
'앞으로 맛있는 물건들은 여기서 숙성시켰다가 먹여야겠군.'
생각을 마친 나는 이 산신령 직배송 서비스의 보다 '정상적인 사용 방법'에 대해 물었다.
“그럼 제가 약재를 보내드리면 단약도 만들어 주실 수 있는 건가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혹시 누군가가 탐낼만한 귀한 물건이 있다면 저에게 보내두었다가 다시 가져가셔도 됩니다.”
“그럼 이제 가보자꾸나. 수하.”
정신을 차린 고미가 자신의 꿀단지가 담긴 항아리를 향해 뜨거운 눈길을 보내며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나는 그렇게 답한 뒤 더블백에 들어 있는 산삼을 모두 꺼내 수다르에게 건넸다.
“어······. 이 중에 세 개는 산신령님 하시고, 나머지만 나중에 찾아가도 될까요?”
“허허허, 봉인석을 부숴주신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수다르는 괜찮다는 듯 손을 저으며 사양했지만, 나는 다시 한번 산삼을 내밀었다.
“마음이 편치 않아서 그래요. 사실 일은 고미가 다 했는데 제가 너무 많이 받은 것 같아서요.”
솔직히 조금 속이 쓰리다. 아니, 많이 쓰리다. 산삼 세 개면······. 못 해도 학자금 대출받은 건 다 갚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람이 받아먹기만 하고 낼름 입 닦는 건 도리가 아니다. 아직 남은 산삼도 일곱개나 되고, 나도 꽤 강해졌으니 내 빚 정도는 내 힘으로 갚을 수 있겠지.
“흐음······. 이거, 고미님이 아주 훌륭한 분을 제자로 거두셨군요.”
산삼을 받는 수다르의 입가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지금까지 본 표정 중에 가장 산신령다운 표정이다.
“그럼 이제 이 산삼 세 개는 제 물건이 되는 것입니까?”
흐뭇한 표정으로 산삼을 흔드는 수다르의 모습이 꼭 천만원 짜리 수표 세장을 흔드는 것처럼 보인다.
크으, 아까워 죽겠네.
“네.”
그래도 기왕 보답하기로 한 거 시원하게 하자.
일단 말은 뱉으면 주워 담지도 못하니까 미련 버리기도 쉽고.
“그럼 이 산삼으로 영약을 만들어드려도 그것은 제 소관이니 받아 주시겠군요?”
허······. 역시 사회생활 만렙이구나.
배워야 할 대처 방식이다.
“어, 그게······.”
“허허허, 그럼 그렇게 알고 다음에 영약을 보내드리도록 하지요. 부모님께서 무사히 깨어나시길 빌겠습니다. 이제 그만 가시지요.”
수다르는 손주를 보내는 할아버지처럼 아쉬움과 흐뭇함이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산신령도 고미처럼 외로운 걸까?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그래, 가끔 와서 인사라도 하고 차라도 마시고 가자.
“저, 다음에 고미랑 꼭 놀러 올게요.”
“허허, 언제든지 오십시오. 맛있는 차를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 * *
수다르의 동굴을 벗어나자, 지리산 전체에서 영롱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시스템 창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 지리산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
이어서 필드형 던전으로 변했던 곳에서 오색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지리산이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사실 고미가 클리어한 것이나 다름이 없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지리산 주위에 사는 사람들도 이제 한시름 놓을 수 있겠지.’
부모님이 몬스터에게 당한 이후로 몬스터에 의해 다치거나 생계가 곤란해진 사람들을 보면 줄곧 마음이 좋지 않았다.
누가 알아주건 말건, 그 사람들의 삶이 정상으로 돌아가도록 도왔다는 사실에 자못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 사실 공짜로 일한 것은 아니긴 하지만, 좋은 일도 하고, 보상도 받으면 더 좋잖아.
능력 닿는 선에서 적당한 선행을 하고, 내 인생도 잘 챙기고.
이제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놀기만 하면 딱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삶이다.
“가자, 고미.”
“후후후, 수하. 정말 훌륭하구나. 처음에는 조금 음흉한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아주 신의를 아는 녀석이었구나. 과연 이 몸의 제자답다.”
하지만 보상은 아직 끝이 아니었으니,
< 참 잘했어요 포인트가 3 상승합니다. (11/50) >
‘뭔가 초등학교 때 착한 일 하고 도장받았던 거랑 비슷한 기분이네.’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돌연 고미의 눈이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수하! 살곰살곰!”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반사적으로 살곰살곰을 사용하며 몸을 숙였다.
< 살곰살곰(E)이 활성화됩니다. >
< 산악 지형 보너스가 적용됩니다. >
“왜 그래 고미?”
“누군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 살기가 보통이 아니구나. 내가 처리하마.”
늘 토실토실 귀엽고 맹한 녀석이 갑자기 무섭게 느껴질 정도로, 지금 고미의 표정은 싸움에 들어간 맹수의 그것, 그 자체였다.
“아, 안 돼 고미. 잠깐만 기다려 봐.”
“안 된다. 누군지는 몰라도, 이런 살기를 품고 수다르의 거처까지 찾아왔다는 것은 틀림없이 나쁜 의도가 있는 것이다.”
정신을 집중해 감각을 강화하자, 저 멀리 호리호리한 체격의 사내 하나가 빠르게 폭포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고미가 말하는 ‘살기’가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털이 거꾸로 솟는 느낌.
그보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얼굴인데, 누구였더라······.
‘아!’
그때, 섬광처럼 나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름이 있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아니 왜 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