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 래퍼리 스탑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방패를 든 손에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다.
갑자기 지면이 사라진 것처럼 발아래에 아무것도 밟히는 것이 없다.
“컥!”
엄청난 힘에 붕 떠올랐던 몸이 동굴 벽에 부딪히며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반사적으로 찐빵을 들어서 막지 않았다면 저 일격에 뼈가 으스러졌을 거다.
“켁, 켁!”
숨을 쉬는 것조차 괴롭지만, 기침조차 편하게 할 수 없다.
나는 내 ‘살곰살곰’의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
그러니 고미와 달리 소리를 내면 다른 놈들이 몰려올지 어쩔지도 알 수 없고.
- 크르륵?
병정개미는 곧바로 내 숨통을 끊으러 오지 않고 더듬이를 바삐 움직였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너무 멀리 날아간 탓에 녀석이 내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직 살곰살곰은 안 풀렸다는 얘기네. 완벽하지는 않아도 나름 기척이 약해진 상태고······.’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며 머리를 굴렸다.
남은 스탯 포인트는 7.
하지만 힘에 전부 투자한다고 저 녀석과 정면으로 맞붙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상태창을 확인하자, 체력이 한 번에 삼 분의 일 이상 날아간 것이 보였다.
이런 식으로 타격을 받으면 남은 기회는 두 번.
‘아, 아니구나.’
-크륵!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병정개미가 정확히 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평범한 철갑 개미보다 두 배는 큰 머리와 턱.
저기에 물리면 한 번에 게임 오버다.
‘찐빵으로 막아도 힘이 너무 부족해서 바로 뺏길 거야. 어설프게 막지 말고 피하자. 속도는 지금도 큰 차이가 없으니까······.’
- 크르르륵!
< 민첩이 상승합니다. 6->13 >
콰드드득!
잽싸게 몸을 날려 피하자, 녀석의 거대한 턱이 동굴 벽을 파고들며 거대한 흔적을 남겼다.
‘잘못하면 진짜 뒈지게 생겼네.’
하지만 민첩에 올인한 덕에 속도는 내가 위다.
판단이 좋았다.
‘고미는 무사한 건가? 설마 길이라도 잃은 건 아니겠지?’
“풋······.”
생각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났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야 지금.
고미라면 병정개미가 아니라 우주 대장군 개미가 와도 뺨따귀 한방일 텐데.
아무리 신이 나서 정신이 없어도 내가 안 보이면 냄새라도 맡고 찾아오겠······지?
곧 고미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긴장이 풀리니 머리도 잘 돌아가고, 뒷배가 든든하니 자신감이 생겨 이런 괴물에게 맞설 용기도 생긴다.
이게 로또 1등 당첨된 사람이 자신감 생겨서 승승장구하는, 뭐 그런 원리인가.
상대는 D급이지만, 전혀 승산이 없는 건 아니잖아.
괜히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도망 다니다가 다른 개미를 끌어들이면 그게 더 위험하지.
< 약점 간파를 사용합니다. 마력이 소모됩니다. >
< 현재 마력 4/6 >
약점 간파 스킬을 사용하자, 놈의 몸 곳곳에서 빨간색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머리와 가슴 사이, 소위 개미허리라고 하는 부위와 각 다리의 관절.
역시, 약점은 일개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방어력은 더 높겠지만.
자, 와라. 왕대가리.
고미 돌아오면 나 혼자 D급 잡았다고 자랑이나 해보게.
······.
라고 폼은 잡았지만, 솔직히 좀 쫄리네.
자, 선생님, 살살 해주세요.
쿵쿵쿵쿵.
묵직한 철갑 개미의 발이 동굴 바닥을 박차는 소리가 내 심장 소리와 겹쳐 들린다.
살살 오라니까 얄짤없네. 너무한 양반이구만.
그렇게 뛰면 아래쪽 동굴에서 층간 소음으로 항의 들어옵니다, 선생님!
나는 벽을 밟고 위로 뛰어올라 쇄도하는 거대한 턱을 피해 놈의 등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강철주걱을 휘둘러 가장 가까운 다리의 관절을 있는 힘껏 후려치자,
퍽!
-크륵!?
놈의 몸이 크게 휘청이며 잠깐의 틈이 생겼다.
하지만 워낙에 몸이 단단하다 보니 일개미 때처럼 한 방에 끝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에 나는 공격을 이어가는 대신 다시 거리를 벌리는 것을 택했다.
‘알약 하나 까먹고.’
그리고 빈틈을 이용해 산신령이 준 알약을 잽싸게 집어삼켰다.
< 산신령의 알약을 복용합니다. >
< 대자연의 힘이 체력을 회복시켜줍니다. (10/10) >
< 대자연의 힘이 마력을 회복시켜줍니다. (6/6) >
< 일시적으로 힘과 체력이 상승합니다. >
- 힘+2
- 체력 +2
‘땡큐, 수달 할아버지.’
자, 힘도 올랐겠다. 체력도 회복됐겠다.
라운드 2, 시작이다.
-크륵! 크륵!
체력을 회복하게 무섭게 성난 병정개미가 다시 한번 나를 향해 돌진했다.
옆으로 크게 돌아 공격을 피한 뒤 다시 한번 다리를 내리치려는 순간,
“네 이노오오옴!”
우직!
성난 외침과 함께 검은 빛줄기 하나가 날아와 병정개미의 머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헐······.”
미안하다. 2라운드 시작하려고 했는데······. 레퍼리 스탑이네.
바위보다 몇 배는 단단한 병정개미의 거대한 머리에 커다란 바람구멍이 생긴 모습에 나도 모르게 온몸에서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수, 수하! 괜찮느냐!”
고미가 잔뜩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놀란 건 난데, 왜 네가 더 놀란 목소리를 내냐.
“아, 괜찮아. 제때 와줬네. 어디 갔다왔어?”
“미, 미안하다. 귀한 물건의 냄새를 맡아서 마음이 급해져 그만······.”
변명하듯 말을 늘어놓던 고미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 벌떡 일어나 자신이 날아온 방향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에 흑요석 같은 광택을 띤 시커먼 석판 같은 것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이것이다! 어서 이것을 네 가방에 넣거라!”
고미가 머리 위에 그것을 인 채 짤막한 다리를 열심히 놀려 나에게 돌아오며 말했다.
“그게 뭐야?”
석판의 크기는 얼추 가로세로 1미터가 조금 안되는 수준.
대충 흑요석과 비슷한 느낌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색도 어둡고 단단해 보인다.
“이것으로 너에게 영약을 만들어 줄 수 있다!”
뭐야, 나한테 영약 만들어주려고 그렇게 급하게 갔다 온 거였어?
돌아오면 잔소리 좀 하려고 했는데······. 그러기도 뭐하네.
“알았어, 고마워. 그래도 앞으로는 그렇게 말없이 사라지지 마. 놀랐잖아.”
“크훕······. 미안하다······. 지리산에 온 이후로 내내 이것을 찾았는데, 도통 보이지가 않아서 영약을 못 만들어주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개미 놈들의 창고에서 이 물건의 냄새가 나길래, 녀석들이 파먹기 전에 가져오느라······.”
순간 머릿속에 고미가 마트에서 했던 말이 떠올랐다.
“빠르게 강해지는 데 도움이 된다던 그게 이거야?”
“그렇다! 이제 이걸로 영약을 만들 수 있다!”
자기가 먹을 영약을 찾은 것도 아닌데 이렇게 기뻐하다니,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는 아기곰이다.
“고마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고미는 기분이 좋은 듯 귀를 눕힌 채 가만히 나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앗, 이럴 때가 아니다! 탕약이 식기 전에 돌아가야지! 어서 가자! 바로 이 아래에 봉인이 있다!”
잠시 편안하게 쓰담쓰담을 즐기던 고미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탕약마저 잊고 영약 재료를 찾아온 거였어?
한 번 더 이 녀석의 부하, 아니지, 제자가 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얼른 가자”
* * *
이후 우리는 ‘살곰살곰’ 개미들의 창고로 들어가서 몰래 봉인을 부수고 나왔다.
봉인이라고 하길래 뭔가 대단한 것을 기대했는데, 그 정체는 꼭 살아있는 것처럼 기분 나쁘게 꿈틀거리는 보석이었다.
검은색의 보석 안쪽에는 혈관처럼 생긴 붉은 색의 무언가가 끊임없이 박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어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아 열 번 정도 열심히 내리치니 내 힘으로도 어렵지 않게 부술 수 있었다.
“히힛, 비밀임무 완수! 자! 그럼 탈출이다. 수하!”
말을 마친 고미는 잔뜩 신이 나서 위쪽으로 달려갔고, 나 역시 살곰살곰 그 뒤를 따라 굴을 빠져나왔다.
* * *
“후우.”
동굴에 들어가 있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밖으로 나오니 긴장이 탁 풀리며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수하, 이제 곧 장군 말벌을 잡으러 가야 한다. 잠시 휴식을 취하거라.”
고미가 더블백을 뒤적이며 말했다.
“알겠어.”
“그럼 나는 그사이에 영약을 만들 준비를 하겠다! 그것을 만든 뒤에는 네 무기도 강화해주마!”
말을 마친 고미는 더블백에 넣어둔 커다란 석판을 꺼내 들었다.
“간다······. 조물조물!”
치이이이익-
고미의 젤리가 또다시 붉게 달아오르며 빛을 쏟아내더니 이내 흑요색 같은 검은 석판을 녹이기 시작했다.
수다르의 동굴에서 금속과 마정석을 녹일 때는 이런 연기가 나지 않았는데, 저 물건이 뭔지는 몰라도 제법 신통한 재질로 만들어진 것 같았다.
“다 됐다!”
잠시 후, 기이한 검은 색 광택을 내뿜는 못생긴 왕만두 하나가 완성됐다.
대체 어디다 쓰는 물건일까. 영약을 만드는 데 쓴다고 했으니 항아리 같은 건가?
고미가 만든 물건이야 다 그렇지만, 모양이 워낙 기괴하니 그 쓰임새가 짐작이 가질 않는다.
작업(?)을 마친 고미는 나지도 않은 땀을 닦는 척 복슬복슬한 털이 돋아난 솜방망이로 이마를 쓸어내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리고는 곧바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어디선가 넝쿨을 구해와서는 터진 왕만두를 칭칭 동여매려 끙끙거렸다.
하지만 애가 워낙에 손재주가 없다 보니 매듭 하나 제대로 맺지 못해 자꾸만 넝쿨이 끊어지고 엉키기만 했다.
‘음······. 저걸로 왕만두에 손잡이를 만들어서 달랑달랑 들고 다니려는 건가.’
“고미, 내가 해줄게.”
“오오! 너에게 그런 재주가 있더냐? 아주 제법이구나. 한 번 해보거라. 하지만 실패한다고 너무 실망하지 말거라. 보기보다 몹시 어려운 작업이니 말이다.”
······.
정말 이럴 때마다 얘가 대단한지 아닌지 헷갈린다.
보통 꿈도 못 꾸는 엄청난 일들은 아무렇지 않게 해내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이런 일에는 영 재주가 없으니.
“괜찮아. 위대한 곰의 제자가 이런 것도 못해서 어디다 쓰겠어. 이리 줘. 내가 해볼게.”
두꺼운 넝쿨들을 대충 세로로 찢어 적당한 굵기로 만든 다음 척척 엮어 왕만두에 걸어주자,
“오오오······. 제법이구나! 이 몸만큼은 아니지만, 너도 제법 제작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 다음에 이 몸이 너에게 조물조물을 전수해 주마!”
“그래, 고마워.”
“후훗, 그렇게 고마워할 것 없다. 너는 이제 이 몸의 제자가 아니더냐.”
고미가 맹한 녀석이라 다행이다.
내가 거짓말을 곧잘 하는 편이긴 하지만, 이 정도로 영혼 없게 대답해도 의심이라는 걸 안 하는 순수한 영혼이라니.
“자, 그럼 영약을 만들 준비도 끝났으니, 이번에는 너의 무기를 강화해 주마!”
말을 마친 고미는 곧바로 더블백을 뒤적여 그간 모은 E급 마정석을 와르르 쏟아냈다.
녀석의 젤리가 또 한 번 용광로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미리 생각해 둔 계획을 고미에게 말했다.
“잠깐만 고미.”
“응? 왜 그러느냐?”
“이번에 무기를 만들 때 부탁할 게 있어.”
“무엇이냐? 호, 혹시 새로운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라면······.”
그래, 네 뜻대로 되는 게 아니겠지······. 아니까 무리한 부탁 안 한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이번에 철퇴를 만들 때는 이 부분을 좀 더······.”
“호오······. 그것참 훌륭한 생각이구나. 그럼 그렇게 해보자.”
내 생각을 들은 고미는 흥미롭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곧장 강철주걱 MK-2, 대말벌용 티타늄 주걱의 제작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