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 어린애는 눈 떼면 사라져있다
< 칭호가 변화합니다. >
- 제법 훌륭한 안목을 가진 고미님의 제자(E+)
안목이 뛰어난 고미님의 제자입니다. 이제 더욱 다양한 권능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 스킬을 선택해 주십시오. >
- 현재 습득 가능한 하급 스킬 목록
고미류 제작술 : 조물조물
고미류 침술 : 웅기조식
고미류 잠행술 : 살곰살곰
고미류 소환술 : 날다라미, 소웅전······.
······.
‘와······.’
하나, 둘, 이게 대체 몇 개야?
얼핏 보기에도 스킬의 종류가 수십 개는 넘었다.
이건 뭐 스킬 백화점도 아니고······.
선택지가 너무 많으니 오히려 뭘 골라야 할지를 모르겠다.
‘아니지.’
생각해보니, 딱 좋은 게 하나 있다.
“고미, 같이 가자. 내가 직접 봉인을 부수고 싶어.”
“그래도 되겠느냐? 아까는 잠행술을 할 줄 몰라 안 된다더니.”
“아니야. 생각해 봤는데, 할 줄 모른다고 안 하면 언제 잠행술을 배우겠어?”
“호오······. 훌륭한 자세다. 역시 나의 제자답구나!”
제자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부하보다는 제자가 듣기 좋잖아.
“그럼 잠행술 알려줘.”
“좋다. 기초는 숨을 죽이는 것이다. 숨을 평소보다 3배쯤 천천히 쉰다고 생각하거라. 아주 일정하게 들이쉬고 내쉬어야 한다.”
나는 고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척하면서 스킬창에 떠 있는 수많은 스킬 중 한 가지를 선택했다.
< ‘고미류 잠행술 : 살곰살곰’을 선택하셨습니다. >
- 살곰살곰 (E)
위대한 곰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이자, 사냥꾼입니다. 훌륭한 사냥꾼은 은밀하게 움직여 보다 적은 힘으로, 확실하게 적의 숨통을 끊을 수 있습니다.
위대한 고미님의 제자가 되는 순간, 당신은 누구보다 뛰어난 사냥꾼이 될 기회를 손에 넣은 것입니다.
‘살곰살곰’ 다가가 치명적인 일격을 선사하세요.
‘부하’가 제자로 바뀐 점 빼고는 이전의 그것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순전히 고미 위주의 서술이군.
시스템이 고미를 편애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자, 그리고 이동할 때는 뒤꿈치를 들고, 종이 한 장 정도만 발을 들어 앞으로 이동하는 거다.”
고미가 한껏 목소리를 낮춘 뒤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그리고, 절대로 발을 끌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너에게는 이 몸처럼 훌륭한 발바닥이 없어 소리가 나기 쉬우니 더욱 주의해야 하지!”
그리고는 숨도 쉬지 않고 설명을 이어나가며 직접 ‘살곰살곰’을 펼쳐 이동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표정으로 보나, 평소보다 몇 배는 빨라진 말 속도로 보나, 나에게 뭔가를 가르치는 게 무척이나 즐거운 모양이었다.
하긴, 어린애란 자기가 잘하거나 잘 아는 것을 자랑하고, 남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싶어하는 법이니까. 나도 그랬고.
“알았어, 그럼 살곰살곰······.”
고미의 뒤를 따라가며 몰래 새로 익힌 스킬을 활성화하자,
< 살곰살곰(E)이 활성화됩니다. 당신의 기척이 희미해집니다. >
< 살곰살곰이 활성화 된 동안에는 마력이 소모됩니다. >
“응?”
앞서 나가던 고미가 발걸음을 우뚝 멈춰서며 고개를 홱 돌렸다.
“왜 그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뚝 떼고 질문을 던진 후,
“제법이구나! 처음이라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
“그래? 스승님이 훌륭해서 그런가?”
천연덕스럽게 고미를 추켜세워줬다.
“물론 나는 위대한 곰이지만, 이것은 재능이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이렇게 살곰살곰 움직일 수 있다니!”
“고마워. 역시 스승이 훌륭해서 그런 것 같네.”
물개박수를 쳐대며 눈을 빛내는 녀석의 귀여운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짓는 순간, 새로운 퀘스트 메시지가 떠올랐다.
< 고미가 진심으로 감탄합니다. >
< 축하합니다. 새로운 메인 퀘스트가 개방됩니다. >
응?
< 메인 퀘스트 : 제자라고 다 같은 제자가 아니야. >
- 제자가 됐다고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
이 자식이,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나.
- 당신은 이제 막 고미의 제자가 되었을 뿐입니다. 끊임없이 정진하여 고미의 ‘수제자’가 되어보세요.
< 달성 조건 >
1. 호감도 100 이상 (55/100)
2. 참 잘했어요 포인트 획득 (3 / 50)
< 퀘스트 보상 >
중급 권능 (택1). 스킬 레벨 상승 (택1), 능력치 상승 (+7), 칭호 효과 상승.
참 잘했어요 포인트? 어째 작명 센스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아, 아차! 이, 이러면 안 되는데······. 탕약이 식는다! 서두르자 수하!”
잔뜩 신이 나있던 고미는 그제야 탕약이 생각났는지 오도도도 달려가기 시작했고, 나 역시 그 귀여운 뒤통수와 엉덩이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발을 놀렸다.
그렇게 녀석의 뒤를 따라 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살곰살곰을 사용하면 달려도 소리가 거의 안 나는구나.’
거의 전력으로 달리고 있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발소리가 나질 않는다.
마치 무성영화를 틀어놓은 것처럼, 동작만 분주하고 소리가 없다.
‘이거 굉장한데.’
하지만 마냥 감탄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이 틈에 히든 퀘스트 확인해야지. 바쁘다 바빠.
< 히든 퀘스트 : 고미를 이겨라! >
- 고미는 태어나서 한 번도 패배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패배를 통해 배우는 것도 있는 법.
- 달성 조건 : 고미에게 패배의 쓴맛을 알려 주세요.
······.
그깟 말장난으로 애를 좀 몰아세운 걸 ‘패배의 쓴맛’이라고 표현하다니······. 기분이 좋군.
아차차, 애한테 이겼다고 이렇게 좋아하면 안 되지.
하지만 나이가 들어도 애를 이기고 좋아하는 게 남자라는 생물이지. 유치하지만, 부정할 마음은 없다.
후후후, 나 김수하, 유일하게 고미에게 1승을 거둔 남자가 된 건가.
1승으로 내가 챔피언이다!
< 퀘스트 보상으로 새로운 스킬이 생성됩니다. >
- 약점 간파 (D)
- 위대한 전사 고미는 오랜 시간 누구에게도 약점을 들켜 본 적이 없습니다. 고미의 약점을 꿰뚫어 본 당신은 상대의 약점을 간파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비겁하지만 훌륭합니다.’
- 마력 1을 사용해 D등급 이하 상대의 약점을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쳇.
잠깐, 마지막 줄에 그거 뭐냐. 쳇?
게다가 비겁하다는 문장은 왜 강조하는 건데?
‘이놈이 나랑 한번 해보자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고미가 발걸음을 멈추며 잽싸게 바닥에 엎드렸다.
[ 수하! 도착이다! 함께 살곰살곰 숨어들어 임무를 완수하자!
[ 알겠어. ]
말을 마친 고미는 엉덩이를 치켜든 채 엉금엉금, 아니, 엉곰엉곰 바닥을 기어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포복 자세가 엉망이구만. 자세가 저런데도 안 걸리는 게 신기할 정도야.’
나 역시 씰룩씰룩 움직이는 궁둥이를 따라 낮은 포복으로 바닥을 기어갔다.
‘자세만 보면 내가 FM인데 말이지.’
개미굴을 지키고 있는 철갑 개미들은 고미가 바로 옆으로 지나가는데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분주히 먹이를 나르고 있었다.
[ 수하! 여기다 여기! 어서 오너라! ]
심지어 대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폴짝폴짝 뛰며 손을 흔드는데도 못 본다.
하지만 내가 다가가자, 커다란 개미 중 하나가 돌연 발걸음을 멈추고 내 쪽을 돌아봤다.
‘이런.’
그러나 고미의 가르침대로 평소보다 몇 배는 느리게 숨을 내쉬며 가만히 그 자리에 멈춰있자,
- 크르륵?
철갑 개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휴우.’
< 한계 시간 도달. 마력이 소모됩니다. (5/6) >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마력이 소모됐다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마도 대충 10분마다 1씩 마력이 차감되는 것 같았다.
마력이 소모된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살곰살곰을 사용한 채로 달린 이유가 이거였다.
생각없이 개미굴에 내려갔다가 갑자기 마력이 바닥나면 결국 ‘살곰살곰 대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 테니까.
‘자, 그럼 다시 가볼까.’
그렇게 고미와 나는 함께 철갑 개미굴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 * *
개미 굴의 내부는 생각보다 훨씬 더 컸다.
일어서서 걸어 다녀도 전혀 무리가 없을 정도.
다행히도, 모든 통로에 개미가 바글바글 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긴, 통로가 이렇게 많은데 모든 굴이 꽉 찰 정도면 얘네도 신도시 세워야겠지.
[ 히히, 수하! 즐겁다! 이렇게 누군가와 함께 몬스터 굴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구나! ]
고미는 개미굴에 들어온 이후로 상당히 텐션이 올라가 있었다.
나와 함께 놀이라도 하는 기분인 걸까?
[ 봉인이 있는 방 위치는 정확히 알고 있는 거지? ]
시스템 창에 메시지를 써넣어 묻자, 고미는 개선장군처럼 큰 보폭으로 앞으로 나아가며 이렇게 답했다.
[ 걱정하지 말거라. 이 몸의 코는 결코 틀리는 법이 없느니라! ]
마음 같아서는 나도 동굴 탐사라도 하는 기분으로 놀아주고 싶었지만······. 그럴 여력이 없다.
-크륵, 크르륵.
감각 강화로 개미들의 발소리나 울음소리를 감지하고, 소리를 내지 않고 가만히 있는 놈에게 실수로 너무 가까이 가지 않기 위해 후각까지 총동원해야 한다.
거기에 아직 완벽하게 기척을 감추지 못하니 개미가 다가오는 것 같으면 바닥에 납작 엎드리거나 바위 뒤에 숨는 식으로 몸을 숨기기도 해야 하고.
그야말로 초긴장 상태의 연속.
하지만 조금 즐겁기도 하다. 잠입 액션 게임을 하는 기분이랄까.
사소한 문제라면, 게임과는 달리 실수를 하는 순간 1미터에 달하는 거대 개미들에게 둘러싸일지도 모른다는 점.
‘그래도 봉인은 내 손으로 깨고 싶어.’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이곳으로 온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역시 던전 클리어 보상을 얻기 위해서라는 목적이 가장 컸다.
사실 지금 내 능력치와 스킬로는 뭘 배워도 개미굴이나 장군 말벌 밀집지에 들어가 봉인을 깰 수는 없다.
하지만 ‘살곰살곰’이 있다면 최악의 경우 고미가 어그로를 끌고, 내가 몰래 들어가서 봉인을 깨는 것도 가능하니까.
지금처럼 고미와 함께 움직일 수 있다면 더 좋고.
무엇보다······.
‘위험한 일은 모두 고미에게 떠넘기고 손가락이나 빨고 있을 수는 없지.’
나는 약하다. 고미와 비교하면, 조금 심하게 말해 벌레 수준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벌레도 벌레 나름이다. 나는 느려도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는 달팽이가 되고 싶지, 기생충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고미는 신이 나서 동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장난을 쳐대고 있었다.
[ 호잇! 핫! ]
이상한 소리를 내며 혼자 벽에 달라붙고,
[ 살곰살곰! ]
바위 뒤에 숨었다가,
[ 엉곰엉곰! ]
바닥에 납작 엎드려 포복도 해보고······. 아주 신이 났다.
그러다가 실수로 개미 몇을 건드리기까지 했는데, 녀석들은 전혀 눈치를 못 채는게 더 황당하다.
‘아오, 저 먼치킨이 정말.’
귀엽기는 하지만, 저럴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그러던 어느 순간, 잔뜩 흥분한 고미가 돌연 코너를 돌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 고, 고미? ]
시스템 창에 메시지를 써넣어봐도, 시야에 없으니 녀석이 볼 리가 없다.
‘자, 잠깐만. 설마 너무 신나서 날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황급히 녀석의 뒤를 따라 코너를 도는 순간,
-크륵?
코너에 숨어있던 D급, ‘병정개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