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6 산신령과의 만남
“헐······.”
소환진 중앙에 나타난 것은 사람 둘은 능히 태울 수 있을 것 같은 초대형 다람쥐였다.
아니, 다람쥐라고 하기에는 무늬가 없고······.
어디서 봤더라?
날다라미면, 다람쥐가 아니라 하늘다람쥐인가?
“짹, 짹-, 째액-.”
······.
그런데 하늘다람쥐라는 게 원래 이렇게 우나?
쥐처럼 울 줄 알았는데, 이건 숫제 쥐보다는 새소리에 가깝다.
“오랜만이다 날다라미.”
“짹짹-”
고미를 만난 날다라미는 반갑다는 듯 연신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손짓, 발짓을 해댔다.
“흐음······. 알겠다. 일단 저 아래로 이 녀석과 나를 좀 데려다 다오.”
고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하자, 하늘다람쥐가 쪼르르 다가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으음······. 고미도 고미지만, 이 녀석도 정말 귀엽네.
“짹-째잭.”
날다라미가 어서 올라타라는 듯 보들보들하고 풍성한 털이 달린 꼬리를 가볍게 움직여 자신의 등을 가리켰다.
“고마워. 잘 부탁할게.”
녀석의 등은 마치 최고급 모피처럼 –사실 최고급 모피를 만져본 적도 없지만, 대충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부드럽고 푹신했다.
“가자.”
고미까지 탑승을 완료하자, 커다란 날다라미가 곧바로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으아아아!”
그리고 이어지는 낙하.
백 미터 이상의 절벽 아래로 훅 꺼지듯 추락하는 느낌에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굳이 비유하자면, 안전바 없이 손잡이만 잡고 자이로드롭이나 롤러코스터를 타는 느낌.
‘이대로 죽는 건가’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찰나,
후웅-
날다라미가 팔다리를 넓게 펼치며 우아한 활공이 시작됐다.
발아래를 내려다보자, 새하얀 물줄기를 쏟아내는 폭포와 유리 같은 수면 위에 비추는 구름과 달,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위와 자갈들이 선연히 시야에 들어왔다.
“와아······.”
“짹, 짹짹짹짹-”
날다라미는 살짝 고개를 돌려 곁눈질로 나와 고미를 바라보며 연신 짹짹거리는 소리를 냈다.
“하늘 위에서 보는 풍경은 정말로 아름답지 않냐고 묻는구나.”
고미가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날다라미의 털을 꼭 붙잡고 있는 나와는 달리, 고미는 마치 평지에 선 것처럼 두 발로 꼿꼿하게 서 있었다.
“미안. 털 뽑힌 거 아닌지 모르겠다.”
그제야 안정을 되찾은 나는 날다라미의 등을 두드려주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다행히 생각보다 많은 털이 뽑히지는 않았다.
오백 원 정도 크기의 땜빵이 생기긴 했는데, 워낙 털도 많고 덩치도 크니······. 그래, 이 정도면 티도 안 나겠지.
“짹!”
“괜찮다는구나.”
“고마워.”
손아귀에 남은 털 한 줌을 바람에 날려 보내자, 꼭 민들레 씨처럼 보드라운 털이 밤하늘을 가르고 날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날다라미의 네 발이 땅에 닿았고, 나와 고미는 등에서 내려 폭포를 향해 다가갔다.
“이제 가거라.”
고미가 저보다 몇 배는 큰 날다라미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마치 대형견의 머리를 쓰다듬는 세 살배기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자 날다라미는 기분이 좋은 듯 높게 짹짹거리는 소리를 내며 커다랗고 까만 두 눈으로 고미를 바라보다가 서운한 듯 어깨를 떨구었다.
“어, 고미······. 간식이라도 쥐어서 보내자. 그래도 여기까지 태워줬는데.”
친구가 차 태워주면 기름값이라도 보태는 게 예의다.
어디서 온 녀석인지는 몰라도 멀리서 와서 태워준 것 같은데, 그냥 보내기에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 녀석은 나와 달리 사람의 음식은 먹지 않는다. 정 미안하면 다음에 다시 불러줄 테니 과일이라도 먹이거라.”
고미가 날다라미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이며 말했다.
“게다가 기가 약해 산신령을 만나면 오히려 좋지 않은 영향을 받을지도 모르니 이쯤에서 보내주는 게 좋다.”
“그럼 할 수 없지······. 다음에 꼭 맛있는 거 줄게. 또 보자.”
“짹!”
날다라미가 신이 난 듯 힘차게 대답을 하고는 바닥에 납작 엎드리자, 고미가 녀석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잠시 후, 날다라미의 몸이 은은한 빛으로 변해 흩어져 사라졌다.
“흐흠······. 이쪽인가.”
고미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 폭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로 다가가며 말했다.
“산삼을 꺼내거라. 세 개면 충분할 것이다.”
고미의 말에 산삼을 꺼내려던 나는 잠시 어떤 것을 골라야 할지 망설였다.
가장 좋은 것은 부모님에게 드리고 싶지만, 그렇다고 산신령에게 안 좋은 걸 주기도 뭐하고······.
그것도 부모님 치료제를 주는 양반한테.
“가장 좋은 것은 네 부모에게 주고, 중간 크기의 것으로 꺼내면 된다.”
고미가 내 속을 읽기라도 한 듯 적당한 선을 정해주었다.
녀석의 말에 나는 더블백에 들어있는 산삼 중 가장 큰 것 두 개를 제한 뒤 다음으로 큰 것 세 개를 꺼냈다.
산삼을 건네받은 고미는 바위 위에 세 개의 산삼을 나란히 늘어놓고는 바람처럼 어디론가 사라졌다.
“응? 고미! 어디가!”
“거기서 잠시만 기다리거라!”
첨벙! 첨벙!
곧이어 저 멀리 계곡에서 자그마한 물기둥이 두 개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뭐 하고 있는 거지?’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금세 자리로 돌아온 고미의 손에는 민물고기 몇 마리와 가재, 민물 게 같은 것이 들려 있었다.
‘산삼 말고 저런 것도 필요한 건가?’
이후 고미는 세 개의 산삼 주위에 마법진을 그리듯 일정한 간격으로 가져온 것들을 배치했다.
그러자 자욱하게 안개가 끼며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신비한 기운이 주위를 뒤덮었다.
잠시 후, 물살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며 수면 아래로 무언가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이, 이무기? 용? 산신령의 정체가 그런 건가?’
예상치 못한 산신령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당연히 구름을 타고 산에서 내려올 줄 알았는데.'
촤악-
그리고는 물이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그림자가 물기둥을 뚫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오오, 역시 그 강렬한 영기가 고미님의 기운이 맞았군요.”
물에서 나온 산신령은 고미를 보자마자 감동한 듯 두 손을 모으더니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마치 동굴 속에 있는 듯 신비한 울림을 가진 노쇠한 목소리, 몸 주위를 은은히 맴도는 구름 같은 안개.
까지는······. 내가 상상한 그대로인데······.
“수달!?”
산신령의 정체는······.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수달이었다.
“이 녀석이 바로 대대로 지리산을 지키고 있는 산신령, 수다르다. 네가 몇 번째지?”
“8세입니다.”
“그래, 수다르 8세.”
······.
이게 뭐야. 동물의 왕국이냐.
곰에 수달에 하늘다람쥐.
어째 고미를 만난 이후로 인간보다 동물들과 더 친해진 것 같다.
고미와 숲속 친구들. 뭐 그런 느낌.
“허허허······. 제 대에서 고미 님이 세상 밖에 나오실 줄이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위대한 수호자이시여.”
수다르 8세가 다시 한번 깎듯이 예를 갖추어 고미를 향해 절을 올리며 말했다.
3미터짜리 수달이 1미터도 안 되는 아기곰에게 오체투지(五體投地 :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땅에 댄 다음 머리를 바닥에 닿게 절을 하는 것)를 하는 이 기괴한 광경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옆에 계신 분은······.”
“나의 부하다. 이 녀석 덕분에 밖으로 나올 수 있었지.”
“허허,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고미님의 부하시여.”
산신령, 수다르 8세가 깊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나저나, 어쩐 일로 저 같은 미천한 존재를 만나기 위해 친히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고미님.”
“이 녀석의 부모가 영혼 수확자에게 당해 의식을 잃었다. 해서 영약을 얻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다.”
고미의 이야기를 들은 수다르 8세의 미간에 순간 깊은 주름이 생겨났다.
“설마······. 벌써 악몽의 지배자가 깨어난 것입니까?”
“그래. 생각한 것보다 너무 빠르구나.”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
다만 분위기로 보아 제법 심각한 사태라는 것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어쨌든, 영약을 내어줄 수 있겠느냐?”
영약을 달라는 고미의 말에 수다르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꺽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고미 님에게 도움이 될 수 있어 영광입니다. 가시지요. 저의 처소로.”
* * *
산신령의 집은 폭포 뒤에 위치한 동굴이었다.
< 산신령의 집에 입장했습니다. >
아니, 메시지가 뜨는 것을 보면 진짜 동굴이라기보다, 던전이나 게이트처럼 다른 차원에 속한 공간인 것 같았다.
동굴의 높이는 십 미터도 넘었고, 온화한 금빛이 동굴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수달의 동굴이라 물비린내가 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조금 축축한 것 외에는 아주 깨끗하고 정갈했다.
동굴의 깊숙한 곳에는 내 몸뚱아리만한 것부터 시작해 주먹보다 조금 큰 것까지, 각기 다른 크기의 항아리가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요.”
“그리하마.”
잠시 항아리를 뒤지던 수다르는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진흙을 구워 만든 것 같은 소담한 잔 안에 차를 담아 우리에게 건넸다.
“차라도 드시면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영혼 회복제를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고맙구나.”
산신령이 직접 내린 차라니, 생각지도 않게 참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됐네.
살짝 쌉싸름하면서도 진한 향······.
인삼차? 도라지 차인가?
따스한 차가 혀끝을 적시고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 산신령의 기운이 깃든 차가 몸 안으로 흡수됩니다. >
능력치가 향상됩니다. (힘 +1, 체력 +1, 마력 +1)
현재 능력치
힘 : 5 / 민첩 : 3 / 체력 : 7 / 마력 : 6
헐······.
산신령은 산신령이구나. 차에 이런 효과가······.
맛도 좋고.
“으으음······.”
그러나 고미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찻잔을 손에 쥔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뻔하지. 차가 입에 안 맞는 거다.
[ 맛없어? ]
시스템 창에 메시지를 써넣어 물어보자,
[ 그래도 수다르가 준 것인데 억지로라도 먹어보겠다. ]
역시, 인삼차나 도라지 차 같은게 고미 입맛에 맞을 리가 없지.
이건 어른들이나 좋아하는 맛이니까.
[ 기다려 봐. ]
나는 더블백을 뒤적여 꿀을 꺼낸 뒤 곧바로 뚜껑을 열었다.
[ 수, 수하! ]
그 모습을 본 고미는 무슨 짓이냐는 듯 경기를 일으켰다.
고급요리와 잿가루를 비벼버리는 것을 보면 지을 것 같은 표정이라고 해야하나.
[ 어차피 영약을 받으면 꿀로 축하연을 하기로 했잖아. 도라지 차에 꿀 타면 의외로 맛있어. 맛없으면 내가 또 한 통 사줄 테니까 내 말 믿고 먹어봐. ]
나의 제안에 고미는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눈 깜짝할 새에 꿀도라지 차가 완성됐다.
“오오······!”
꿀도라지 차를 마신 고미의 눈이 평소보다 두 배는 커지며 흥분에 찬 아기 같은 목소리가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왔다.
이어지는 익숙한 메시지.
< 호감도가 5 상승합니다. (53/50) >
< 축하합니다. 메인 퀘스트 ‘고미의 제자가 되어보자’의 달성 조건이 만족되었습니다. >
이제 정식으로 고미와 계약을 맺을 수 있습니다.
고미를 설득해 제자가 되어보세요.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인 퀘스트 조건 중 하나를 달성했다는 메시지였다.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제자로 삼아달라고 말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동굴 전체에 산뜻하고 청량한 향기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수다르가 커다란 나뭇잎으로 약탕기에 부채질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차 맛은 어떠십니까? 이제 잠시 후면 약이 완성될 것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건······. 산신령님이 산삼을 좋아한다고 하셔서.”
바위 위에 널어놓았던 세 개의 산삼을 조심스럽게 내밀자, 수다르는 당치 않다는 듯 손사래를 쳐댔다.
“아닙니다, 위대하신 고미님의 부하님을 도와드리는 일에 대가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아니에요, 받아주세요.”
“그래, 받거라. 어차피 산삼은 몇 뿌리나 더 있다. 게다가 이 산은 너의 땅이니, 이곳에서 난 것을 너에게 선물하는 것이 당연하다.”
고미까지 가세해 산삼을 들이미니 수다르는 난처하다는 듯 눈을 굴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흐음······. 그럼 혹여 누가 되지 않는다면, 산삼 대신 제 부탁을 좀 들어주실 수 있으실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