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 지리산 던전의 비밀
“뭘 받을 수 있는데?”
“글쎄다. 오랫동안 산을 지키며 이런저런 신기한 물건들을 주워 모아온 녀석이니 나보다야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고미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라면 물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이제 스프를 먼저 넣고, 면을 넣고, 젓가락으로 들었다 놨다······. 면발은 쫄깃해야 제맛이지.
그다음 야채참치를 한 캔 딱.
훌륭하다. 짜장 라면에는 고추 참치, 국물 라면에는 야채 참치. 부정할 여지가 없는 최고의 조합이다.
“고미, 밖으로 나가자!”
“응? 왜 밖으로 나가야 하느냐?”
“원래 산에 오면 밖에서 라면 먹는 거야. 얘기하느라 깜빡했네.”
“오오, 그런 것이냐? 알겠다!”
고미는 신이 나서 쪼르르 문밖으로 따라 나왔다.
문간 근처에 대충 자리를 잡고 앉자, 살짝 매콤한 라면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애, 앳취!”
냄새를 맡은 고미는 곧바로 살짝 눈물을 흘리며 재채기를 해댔다.
“뭐야, 매운 거 못 먹어?”
“흥! 무슨 소리냐! 이 몸은 전지전능한 곰이시다! 매운 것을 못 먹을 리가 없지 않느냐! 인간들도 먹을 수 있는 것을!”
“정말?”
“그렇다! 어서 다오!”
“젓가락질은 할 줄 알아?”
“걱정 말거라!”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고미에게 웃으며 나무젓가락을 쥐여주자, 녀석이 벌컥 성을 냈다.
“이 몸을 시험하는 것이냐! 젓가락은 두 개를 쓰는 것임을 내 뻔히 알고 있거늘!”
이 녀석, 나무젓가락 쪼갤 줄 모르는구나.
“그런 거 아니야. 잘 봐.”
내 손에 들린 젓가락을 짝, 하고 쪼개 건네주고 녀석의 손에 들린 것을 돌려받자,
“오오······!”
녀석은 언제 성을 냈냐는 듯 구슬처럼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박수를 치듯 젓가락 두개를 딱딱 부딪혀댔다.
“대단하다! 신기한 젓가락이구나!”
참······. 이 녀석이 대단한 건지 아닌 건지 헷갈릴 때가 많다. 가만 보면 꽤 맹한 구석도 있는 것 같고.
그래도 같이 있으면 즐겁기는 하다.
별거 아닌 일에도 반응이 좋아서 그런가.
“자, 얼른 먹어. 라면 불어.”
참치 캔을 따서 고미에게 내밀자, 녀석은 신이 나서 젓가락을 놀려 면발을 집었다.
그리고는
“켁!”
면발을 삼키자마자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내밀었다.
“흐, 흥! 가소롭구나! 이것이 매운맛이라는 것이냐?! 스읍, 인간들이 종종, 하, 매운맛을 보여주겠다고 해서, 대단한 것인 줄 알았더니, 별것, 스읍, 아니구나!”
너 지금 매워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게다가 매운맛이 뭔지도 모르고 먹을 수 있다고 한 거냐.
“매운 거 먹어본 적 없어?”
“던전에는 흐아, 매운맛도, 습, 단맛도, 하, 짠맛도 없다.”
맛있는 음식의 삼대 요소를 전부 뺀 맛이라 이거고만. 그거 세 개 빠지면 이미 글러먹은 거잖아.
“으으으······.”
고미는 매운 것을 처음 먹어본 아이처럼 혀를 내밀고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계속해서 젓가락을 놀렸고, 나도 슬슬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서늘한 초저녁 산 공기에 매운 라면, 거기에 살짝 단 야채 참치의 맛이 더해지니 퍽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역시 라면은 야외에서 먹는 게 제맛이지.
아, 갑자기 궁금한 건데, 왜 산에서 라면을 먹으면 더 맛있을까?
혹시 아는 사람 있으면 알려주라. 고미랑 같이 좀 알게.
“참치도 먹어. 같이 먹으면 더 맛있어.”
“스읍, 알겠다!”
그리고 야채 참치가 녀석의 입에 들어가는 순간,
< 호감도가 3 상승합니다. (48/50) >
익숙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오오, 두 가지를 같이 먹으니 오묘하고 새로운 맛이 나는구나!”
“그런 걸 꿀 조합이라고 하는 거야.”
“꿀 조합이라니, 말만 들어도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짐작이 간다!”
이후 나는 쓰레기를 정리해 깔끔히 봉투 안에 집어 넣은 뒤 깨끗하게 씻은 냄비와 함께 더블백에 집어넣었다.
산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는 것은 문명인의 기본이니까.
“그럼 이제 적당히 배도 부르겠다, 다시 올라가자.”
“좋다! 가자!”
* * *
가파른 산길을 한참을 걸어 올라가자, 저 멀리 커다란 안내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 일반인 출입엄금 : 전방 300M부터 필드형 던전 구역입니다. >>
벌써 여기까지 왔네.
주위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고, 저 멀리 산봉우리에서 맹수인지 몬스터인지 모를 무언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쓰레기 던전, 버려진 영산.
지리산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해발 1,000m 이상부터 펼쳐지는, 넓이만 해도 서울의 대략 3분의 1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의 던전.
필드형 던전인만큼 빨리 없애버리는 것이 좋지만, 그러기는커녕 해가 갈수록 지리산을 찾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몬스터의 밀도가 너무 낮아 같은 등급의 던전이라면 다른 곳을 가는 것이 훨씬 효율이 좋았다.
두 번째, 쓸만한 아이템이 나오지 않고, 큰 보상을 기대하기 어려운 중하급의 몬스터로 구성되어 있다.
지형이 너무 험하고 면적이 너무 넓다는 점 역시 문제였다.
무엇보다······.
띠링.
표지판을 지나는 순간.
시스템 창에 던전 정보가 떴다.
< 지리산 >
< 출몰 몬스터 등급 D~F >
< 클리어 조건 >
??? : 조건이 충족될 시 개방됩니다.
< 클리어 보상 >
??? : 조건이 충족될 시 개방됩니다.
이렇게 던전의 클리어 조건과 보상을 알 수 없음에도 위의 조건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것이 지리산이 버려진 가장 큰 이유였다.
헌터들도 땅 파서 장사하는 게 아닌데 클리어 조건도 모르고 몬스터를 잡아서 얻을 수 있는 보상도 애매한 던전을 죽어라 클리어할 이유가 없으니까.
덕분에 주기적으로 몬스터가 너무 많아지지 않도록 정리해주는 것 외에는 사실상 방치된 것이나 다름없는 게 현재의 지리산이었다.
“흐아······. 고미, 잠깐 쉬었다 가자.”
내가 땀을 닦으며 그렇게 말하자, 고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산등성이를 둘러보았다.
“산을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없어 산신령이 서운하겠구나.”
“사람이 있긴 있어?”
“이 주위에서는 인간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산 전체로 따지면 사오십 명 정도는 있구나.”
“그걸 알 수 있어?”
“네가 원래 살던 곳은 시끄럽고 사람이 너무 많아 사람 숫자를 헤아리기가 어렵지만, 이곳은 조용하지 않느냐.”
······.
이건 뭐 인공위성도 아니고······.
고미의 끝을 알 수 없는 능력에 감탄하고 있을 때,
< 퀘스트 개방 조건 달성, 퀘스트가 개방됩니다. >
< 던전 퀘스트 : 산신령과의 은밀한 만남 >
누군가가 산신령에게 주기 위한 선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선물을 들고 지리산에 숨어있는 산신령을 만나보세요.
< 클리어 조건 >
산신령을 찾아 그의 부탁을 들어주세요.
< 클리어 보상 >
산신령의 가호, 산신령의 보물, 능력치 영구 상승 +5%
“어······?”
선물? 설마 산삼을 들고 산을 오르는 게 퀘스트 개방 조건이었나?
어째서 지리산 던전의 클리어 조건이 여태 알려지지 않았는지 단박에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상식적으로 누가 산삼을 들고 던전에 들어오겠냐······.
길 잃은 심마니가 미친 척 하고 던전에 발을 들이지 않는 이상 벌어질 일 없는 일이 퀘스트 개방 조건이라니, 어이가 없구만.
“고미, 혹시 지리산에 있는 다른 사람들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알려줄 수 있어?”
잠시 속으로 시스템을 욕하던 나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고미를 불러 상황을 확인했다.
보통 던전 정보는 현재 던전에 들어와 있는 모든 사람에게 공개되기 때문이다.
“흐음······. 대여섯 정도가 갑자기 산 아래로 달리고 있구나.”
“나머지는?”
“일부는 산 정상으로 열심히 달리고 있고, 나머지도 갑자기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역시······. 저 사람들한테도 이 정보가 보인 거야.
산신령의 가호와 보물은 뭔지 모르겠지만, 능력치 영구상승이 무려 5%다.
아이템도 아니니 누구에게 빼앗길 일도 없고.
기껏해야 D급 몬스터 밖에 없는 던전에 이 정도 보상이라니, 내일 아침이면 지리산 전체가 헌터들로 가득찰게 분명했다.
‘아마 아래로 내려간 사람들은 길드나 어딘가에 연락을 취하려고 하는 거겠지. 여기서는 핸드폰이 안 터지니까.’
물론 ‘선물’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테니, 조급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경쟁자가 전혀 없는 것과는 상황이 달라졌으니, 조금 속도를 높일 필요는 있었다.
“고미, 조금만 서두르자.”
“왜 그러느냐?”
“저 사람들도 산신령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괜찮다. 만나고 싶다고 아무나 만날 수 있으면 그게 산신령이겠느냐?”
듣고 보니 그건 또 그렇네.
“흐음······. 그래도 네 말대로 길을 서두르는 편이 좋겠구나.”
말을 마친 고미는 합장을 하며 눈을 감더니 가볍게 발을 들어 바닥을 내리찍었다.
“웅기충천(熊氣衝天)!”
쿵!
바닥이 미미하게 떨리며 알 수 없는 기운이 산 전체로 퍼져나갔다.
이어서 희미하게 들려오던 맹수와 몬스터들의 울음소리가 거짓말처럼 잦아들고, 벌레 우는 소리마저 사라졌다.
정신을 집중해 감각강화 스킬을 사용해도 초목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이게 뭐야?”
“내 기를 천지의 기와 융합해 주위에 있는 모든 생물을 위압한 것이다. 이제 우리 주위로는 어떤 몬스터도 접근하지 않을 것이니 곧장 산신령을 만나러 가면 된다.”
고미가 산등성이를 타고 빠르게 위쪽으로 올라가며 말했다.
‘말도 안 돼······.’
나는 황급히 고미의 뒤를 따라 거의 네발로 기어 산을 올랐다.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완벽한 적막.
마치 이 거대한 산 위에 고미와 나 단둘만 존재한다는 착각이 느껴질 정도의 고요함이었다.
강력한 몬스터나 헌터들은 종종 위압 스킬을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이렇게 엄청난 효과와 범위를 가진 위압 스킬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쓸데없이 힘을 자랑하고 싶지 않아 자주 사용하는 기술은 아니지만, 효과는 확실하지. 그래도 죄 없는 산짐승과 인간들이 다치거나 놀라지 않을 정도로 힘 조절은 했다.”
고미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며 쉼 없이 험난한 산길을 올랐고, 나 역시 이를 악물고 그 뒤를 따랐다.
사람들이 몰려들기 전에 어서 산신령을 만나야 한다.
그렇게 말없이 산을 오르기를 30여 분, 마침내 고미가 발걸음을 멈춰 섰다.
녀석의 뒤를 따라 거의 뛰듯이 산을 오르다 보니 점점 다리에 힘이 풀리고,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흐음······. 이쯤인 것 같구나.”
고미의 앞에는 깎아지른듯한 절벽이 놓여 있었고, 저 멀리 아래에서 희미하게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폭포가 있는 것 같았다.
“저 아래가 산신령의 거처다.”
고미가 절벽 아래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폭포가 있는 곳에 산신령이라, 전래동화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문제는 저기까지 어떻게 내려가냐는 건데······.
그냥은 못 갈 것 같고, 돌아서 가려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다.
그때, 고미가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먼저 입을 열었다.
“네 녀석의 발로는 내려가기가 어렵겠구나. 사실 여기까지 멈추지 않고 뛰어온 것만으로도 칭찬해 줄만 하지. 수행은 잠시 미뤄두고 조금 편하게 이동하자.”
말을 마친 고미는 대웅전을 소환할 때처럼 바닥에 원을 그리고는 그 중앙에 자신의 앞발로 발자국을 남겼다.
그러자, 희미한 빛이 응집되며 아주 익숙한 생물 하나가 튀어나왔다.
짹-
응?
그런데······. 울음소리가 뭔가 이상했다.
이녀석이 원래 이렇게 울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