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 착하면 복이 오고, 약하면 야간 선행
놀이에 전념하기 위해 일부러 시스템 창을 열어보지 않았지만, 이쯤 되니 상황을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상태창.’
나는 곁눈으로 고미가 사고를 치지 않나 예의주시하며 메시지를 확인했다.
원래 초보 운전은 잠깐 눈 돌린 사이에 사고가 나니까.
내가 선생님이니까 잘 가르쳐······.
< 히든 퀘스트 : 고미의 선생님이 되어주세요 (1) >
고미에게 새로운 기술을 알려주세요.
< 달성 조건 >
1. 고미에게 ‘가르쳐 달라’는 말을 들으세요.
2. 고미에게 성공적으로 새로운 기술을 가르쳐 주세요.
< 달성 보상 >
능력치 상승. (선택, +3)
······.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카트 드리프트를 기술로 쳐주는 거야? 대체 얼마나 커트 라인이 낭낭한 거냐?
하지만 공짜라면 독이라도 삼키는 게 인간이지. 감사합니다, 땡큐.
< 상승시킬 능력치를 선택해 주세요. >
- 현재 능력치
힘 : 4 / 민첩 : 3 / 체력 : 6 / 마력 : 5
능력치 상태는 그럭저럭 준수하다.
하지만 이렇게 숫자로 표현된다고는 해도, 몸으로 실감하지 않는 이상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다.
이럴 때는 실ㅎ, 아니 확인을 해보고 결정하는 게 낫다.
보류도 가능한가?
보류.
< 능력치 선택을 보류합니다. >
되는군. 좋아. 이건 상황 닥치면 결정하자.
두 번째 퀘스트는 뭐지?
하지만 두 번째 퀘스트를 확인하려는 순간, 무언가 위험한 것이 포착됐다.
계산대를 향해 잘 나아가던 고미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어디론가 진격하고 있었다.
“고미! 어디 가!”
평소에는 다른 짓을 하다가도 내 말에는 꼭 반응을 보였는데, 지금 녀석은 정말로 무언가에 홀린 듯이 카트를 몰고 돌진하고 있었다.
“고미!”
그 순간, 고미가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멈춰 섰다.
녀석이 서 있는 곳 앞에는 황금색의 웅장한 탑이 쌓여있었다.
<< 토종 벌꿀 특별 기획전 >>
소백산 자연산 벌꿀 2.4kg / 4만 5천 원 -> 4만 원
‘끈적하고 농염한, 그러면서도 한없이 우아한 황금빛 액체가 병에 담긴 채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그 모습이란······.’
이라고, 고미라면 말했을 것 같다.
아니, 눈으로는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다.
“고미!”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자, 녀석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화들짝 놀라며 나를 돌아봤다.
[ 미, 미안하다. 하지만 꾸, 꿀이 날, 꿀이 나를 불렀느니라! ]
고미는 과자를 사달라고 조르는 어린아이처럼 연신 손가락으로 꿀단지를 가리켰다.
눈빛을 보니 안 사주면 마트를 부수고 꿀을 훔쳐 달아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한 통 사줄게.”
[ 저, 정말이냐? 4만 원이라면 엄청나게 비싼 것이 아니냐? 초코바의 40배다! 초코바 40개를 살 수 있는 금액이란 말이다! ]
초코바 하나에 1,500원이니까 40배는 아닌데······.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아흔 아홉 칸짜리 집에서 살게 해준다는 놈치고는 금전 감각이 참 소박하다.
내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꿀 한 통에 4만 원은 꽤 거금이지만, 일단 사주자.
“응, 대신 지금은 돈이 없으니까 한 통만. 다음에는 더 맛있는 꿀로 사줄게.”
벌꿀 한 통을 카트에 담자, 고미는 거의 금메달을 딴 국가대표, 혹은 대상을 받은 연기자나 가수처럼 눈물을 글썽이며 그것을 바라봤다.
[ 고맙다 수하! 정말로 고맙다! 너는 좋은 녀석이다! 내 제자로, 헙······. ]
아쉽네. 퀘스트 거의 달성이었는데.
전혀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도 괜찮다. 녀석이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으니까.
그러니까 제자는 조금 미뤄도 좋다.
아, 물론 미뤄도 좋은 거지 안 한다고는 안 했다.
일종의 밀당 기간으로 생각하고 뜸을 들이겠다는 거지.
“괜찮아. 제자는 다음에 시켜줘도 돼.”
나는 그렇게 말하며 카트를 끌고 계산대로 향했다.
[ 수하! 제자는 안되지만, 내가 지리산에 가면 너를 위해 선물을 주마! 빠르게 강해지는 데 아주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
고미가 나의 뒤를 쪼르르 따라오며 외쳤다.
훗, 귀여운 자식. 살짝 미니까 벌써 마음이 급해져서 당기는군. 넌 연애는 못 하겠다.
“알았어, 고마워. 이제 슬슬 집에 가서 지리산 갈 준비하자.”
* * *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더블백에 필요한 물건들을 하나하나 집어넣었다.
가장 먼저 상비약 몇 가지······.
포션이 있으면 좋겠지만, 내 형편에 포션은 무슨.
어차피 고미가 있으니 위험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다. 그러니 배탈 같은 사소하지만 중요한 문제에나 대비하자. 산속 가서 탈 나면 답도 없으니까.
다음으로는 잡부일 하면서 쓰던 텐트랑 캠핑용 장비 몇 가지.
마지막으로 라면, 참치캔, 스팜, 초코바, 젤리, 사탕, 달달한 과자들.
아, 꿀. 꿀도 넣고······.
자, 이제 준비 완료.
“가자. 고미.”
[ 좋다! 큰 버스를 타고 갈 것이냐? ]
“응, 큰 버스 타고 갈 거야. 그것도 꽤 오래.”
[ 정말이냐!? 어서 가자! ]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흠······. 꿀 때문인가? 오늘 묘하게 활력이 넘치네······.’
* * *
내가 선택한 교통수단은 고미가 좋아하는 버스였다.
그것도 처음 탔던 시내버스보다 훨씬 더 크고, 웅장하며, 편안한, 우등 고속버스.
[ 호오, 이 버스는 지금까지 탔던 것과는 뭔가 다른 것 같구나. 저 아래에 커다란 쇠문은 무엇이냐? ]
고미가 짧고 통통한 손가락으로 짐칸을 가리키며 물었다.
생각보다 심드렁한 반응이었다. 호감도 상승 메시지도 없고.
버스는 오며 가며 자주 보았으니, 크기가 약간 커지거나 모양이 달라지는 정도로는 이제 녀석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우등 고속버스의 진수는 다른 곳에 있으니,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응, 저기에 짐을 싣는 거야.”
[ 흐음. ]
다시 조금은 실망스러운 반응.
하지만 문을 열고 버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 오오오! ]
역시, 터졌군.
< 고미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39/50) >
신경 안 쓴 새에 많이도 올랐네. 이제 곧 50 되겠네.
보상이 하급 권능 하나하고 능력치 상승이었지?
[ 굉장하구나! 전에 탔던 버스보다 훨씬 더 고급스럽다! 위대한 이 몸에게 딱 어울리는 큰 버스다! 이제 사람도 많이 타는 것이냐? ]
음, 항상 고급과 위대함의 기준이 묘하게 소박하단 말이지.
“응, 곧 사람들도 많이 탈 거야. 일단 우리 자리로 가자.”
1급 펫 허가증과 버스표 두 장을 보여주자, 기사님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와 고미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하긴, 1급 펫 허가증 가진 헌터가 고속버스 타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 스포츠카는 아니어도 자가용 한 대 굴릴 돈은 충분할 테니까.
[ 창가! 창가는 내가 앉을 것이다! ]
고미는 혹여나 내가 창가에 앉을까 불안한 듯 잽싸게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그래, 창가는 너 해. 편하게 앉고.”
나는 고미가 좀 더 편하게 바깥을 내다볼 수 있도록 녀석의 엉덩이에 짐이 잔뜩 든 더블백을 깔아주고는 시스템 창을 열었다.
이제 두 번째 히든 퀘스트 보상을 확인할 시간이다.
< 히든 퀘스트 : 고미를 아껴주세요! (1) >
고미를 진심으로 아껴주세요.
< 달성 조건 >
시스템 창 메시지를 무시하고 고미와 놀아주기.
< 달성 보상 >
하급 스킬 강화 (+1)
< 강화할 스킬을 선택해 주세요. >
개보다 낫다. (F)
호랑이와는 다르다. (F)
하······. 좋은 일을 하면 복이 온다더니.
진심으로 고미와 놀아준 보상이 온 거였군.
뭔가 기분이 묘하다.
여기서 한 번 더 거절해볼까?
< 보상 및 퀘스트 포기는 불가능합니다.>
쳇, 진심 보너스 하나 정도는 더 나올 줄 알았는데 그건 안 되나 보다.
고미를 아껴주세요 1이길래 2도 있을 줄 알았는데.
공짜는 여기까지라고 선을 긋는 것 같은 메시지네.
그런데 보상 포기뿐 아니라 퀘스트 포기도 안 된다는 건, 주어진 퀘스트는 무조건 해야 한다는 건가? 좀 불안한데.
‘그나저나, 뭘 강화하지.’
나는 상태창을 보며 계속해서 고민하다가 이번에도 보류를 선택했다.
고미의 정식 제자가 되면 스킬 하나가 더 생길 텐데, 그 스킬이 지금 가진 것보다 쓸만할지도 모르니까.
상태창 확인까지 마치고 나자,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고미를 만난 날은 상태창 만든다고 거의 밤을 새웠고, 그 후로 등록에 병원에······. 꼬박 이틀 가까이 한숨도 못 잤다.
지구력 강화 스킬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시체 상태가 됐을 것이다.
“고미, 나는 좀 잘게. 도착하면 알려줘.”
[ 알았다! 이 몸에게 맡겨라! ]
* * *
[ 수하! 수하! 일어나라!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다! ]
머릿속에 울리는 고미의 목소리에 나는 졸린 눈을 부비며 잠에서 깼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네 시간 이상이 흘러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시원한 밤공기를 들이키자, 몽롱했던 머리가 맑아지며 정신이 번뜩 들었다.
산 근처라 그런지 도시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공기가 맑았다.
그믐달이 걸린 하늘 아래로 어슴푸레하게 거대한 능선이 보였다.
“잘 따라오거라 수하, 할 일이 많다.”
“응. 그런데 어디 가서 자고 가는 게 낫지 않을까?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인간이라 밤에는 잘 안 보인다고.”
군대에 다녀온 남자라면 알 것이다. 밤의 산이 얼마나 어두운지.
도시에서는 어두운 곳이라고 해도 대충 흐릿한 형체는 보인다.
하지만 산은 이야기가 다르다.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달빛밖에 없는 상황에서 인간의 시야는 극도로 제한되고, 그믐달이 뜬 날에 숲에 들어가면 고작 몇 미터만 떨어져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 지리산에는 굳이 몬스터가 아니더라도 인간이 산을 떠나면서 늘어난 야생동물들이 가득하니, 위험도는 두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였다.
“고미, 이런 시간에는 프로 등산가들도 산에 안 올라가.”
“프로? 등산가? 그것이 무엇이냐?”
“산을 올라가는게 직업인 사람이야.”
“호오, 신기한 일을 하는 사람이구나.”
“어쨌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올라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앞도 잘 안보이는 데다가 지형도 험하고, 하여간, 너무 위험하다고.”
“후훗.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올라가려는 것이니라.”
고미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는 감각이 예민해지지 않았느냐. 산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정신을 바짝 차리거라. 그럼 조금 흐릿하기는 해도 앞이 보일 것이니라. 이제부터 눈과 귀, 코와 촉감까지, 모든 것을 동원해 주위를 느끼는 훈련을 하는 것이다.”
잠깐, 이거 어째 느낌이 안 좋은데.
고미의 표정에서 뭔가 익숙한 냄새가 난다.
마트에 들어갈 때 내가 딱 저랬지.
‘여기는 내 홈그라운드다.’ 하는 표정.
설마······.
“이제부터 너는 첫 수련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이 몸의 부하가 그렇게 약해서야 내 체면이 무엇이 되겠느냐?”
“자, 잠깐만. 이렇게 갑자기? 우리 영약 구하러 온 거 아니었어? 그리고 강해지는 건 역시 몬스터를 잡아서…….”
“훗. 당연히 몬스터도 잡을 것이다. 하지만 시작은 역시 오감을 단련하는 것이다. 뭐든지 기초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려야지. 나만 믿고 따라오거라. 죽지는 않을 터이니.”
말을 마친 고미는 축지법을 쓰듯 앞으로 슥슥 나아가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따라오지 않아도 좋다. 이곳에 혼자 남고 싶다면 말이지. 아, 그리고 네 말대로 곳곳에서 괴수뿐 아니라 맹수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구나. 너무 멀어지지 않도록 주의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