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10화 (10/300)

EP.10 웰컴 투 마이 홈그라운드

다리에 힘이 풀려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희망이 생겼다고 믿었는데······.

하지만 자리에 주저앉으려는 찰나, 알 수 없는 기운이 부드럽게 나를 떠받쳐 주었다.

“수하, 포기하지 말아라. 살릴 수 없다고는 하지 않았다.”

“정말이야?”

고미의 한마디에 흐릿해지던 정신이 조금은 또렷하게 돌아왔다.

“네 부모는 영혼 수확자에게 당한 것이 분명하다. 이건 위대한 나의 침술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몸이 아니라 영혼이 상한 것이니 말이야.”

“하지만 게이트에서 나왔던 유령종 중에 그런 몬스터는 없었어.”

“영혼 수확자는 몬스터가 아니라 악몽의 지배자의 하수인을 부르는 호칭이니라.”

“악몽의 지배자?”

유명한 보스 몬스터나 다른 차원의 강력한 존재들에 대해서는 제법 주워들은게 있지만, 너무나 생경한 이름이었다.

“들어본 적 없어.”

“그렇겠지. 안다 해도 네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도 없느니라. 어쨌든 지금은 네 부모의 영혼을 회복시켜 줄 영약을 구하러 가야 한다. 그 녀석은 내가 나중에 친히 손을 봐줄 것이다.”

“그럼 그 영약이라는 건 어디서 구할 수 있는 거야? 알고 있지?”

나의 질문에 고미는 또다시 평소와 같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후훗, 당연히 알고 있다.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이 몸은 전지전능하며, 신의를 아는 진정한 곰이니라!”

말을 마친 고미는 다시 바닥으로 내려가 도톰한 앞발을 들어 위로하듯 나의 다리를 토닥토닥 두드린 뒤 몸을 돌렸다.

“가자. 네 부모를 구할 영약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어, 어디로?”

“지리산.”

* * *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곧바로 더블백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필드형 던전은 일반적인 던전처럼 입구를 통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지역 전체가 이세계처럼 변해버린 것으로, 천왕봉 인근 수 킬로미터는 한국의 대표적인 필드형 던전 중 하나였다.

‘어, 일단 텐트에, 식기에, 갈아입을 옷하고······.’

지리산은 아주 큰 산이고, 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고 며칠이나 산속을 돌아다닐 수는 없으니 준비를 단단히 해야 했다.

하지만 찬장과 냉장고를 뒤져보니 먹을 게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냉장고야 원래 마실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 그렇다 쳐도, 컵라면마저 달랑 하나 남아 있었다.

‘장 보러 가야겠네.’

“그것은 무엇이냐?”

그때, 고미가 내 손에 들린 마지막 컵라면을 가리키며 물었다.

“라면이라는 거야. 지리산에서 먹지도 자지도 않고 영약을 찾아다닐 수는 없잖아.”

“초코바는?”

또 초코바. 영양 불균형이 심각하게 걱정되는 식습관이다.

이 녀석 다른 것도 좀 먹여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도 사러 가려고 했어. 그런데 넌 초코바 말고 아무 것도 안 먹어도 돼?”

“후훗, 이 몸은 벽곡의 경지에 이르러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되느니라.”

“?”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럼 초코바는 왜 그렇게 찾는 건데 이 먹보가.

“그럼 초코바는 왜 그렇게 먹는 건데?”

“너는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면 아무것도 먹지 않고 살 것이냐?”

고미의 대꾸에 나는 순간적으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 꼭 살려고 먹는 건 아니지.

하지만 이 녀석이 이런 논리적인 말을 하다니······.

조금 놀랍다. 먹을 거에 한해서만 논리력이 발휘되는 건가.

“그건 그렇네.”

“그러니 어서 초코바를 내놓거라.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느니라.”

고미는 그렇게 말하며 마지막 남은 ‘프리타임’을 한입 베어 물었다.

“으, 으음······. 역시 이 녀석이 가장 마음에 드는구나. 참으로 감미롭도다. 어쩜 이리 달콤할꼬.”

나는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초코바를 음미하는 고미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황금색 상태창을 소환했다.

어디 보자.

< 퀘스트 목록 >

< 메인 퀘스트 : 고미의 제자가 되어 보자! >

달성 조건 1. 호감도 50 이상 (20 / 50)

달성 조건 2. 고미와 정식으로 계약 맺기.

퀘스트 보상 : 하급 권능 (택 1). 신체 능력 강화 (택 1).

어? 안 올랐어? 왜? 프리타임을 제일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잠깐만.

< 이제부터 당신은 고미에게 더 넓은 세계를 알려주세요. >

< 고미를 행복하게 해줄 때마다 보상이 팡팡! >

나는 머릿속으로 황금색 상태창이 생겨났을 때 떠오른 메시지를 곰곰이 되짚어 보았다.

‘설마······.’

두 개가 따로 논다면,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줘도 호감도가 오르고, 행복하게 해줘도 호감도가 올라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실험 결과는 or 이 아니라 and, 그러니까 새롭고 행복한 경험을 할 때만 호감도가 오르는 것 같았다.

‘어쩐지, 난이도가 너무 낮다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결국 가설이다. 실험을 통해 검증되어야 할.

그리고 실험의 핵심은 가설을 바탕으로 변인을 특정하고······.

아, 안돼. 아직도 대학원생 물이 덜 빠졌어.

실험과 검증이라니, 이런 더러운 말을 입, 아니 머릿속에도 담아서는 안 돼.

대학원 그만둔 지가 2년인데, 아직도 그때의 사고방식과 기억들이 몸과 머리 곳곳에 남아있다.

내 첫 스킬도 그때의 경험이 반영되서 생긴게 분명하고.

첫 스킬은 대체로 자신의 인생 경험을 반영한다.

가장 자주 한 행동, 가장 인상 깊은 경험, 혹은 가장 즐겁거나 괴로운 경험 같은 것.

가장 자주한 행동.

1. 눈치 보기 2. 잠 못 자고 공부하고 실습하고 연구하기.

가장 인상 깊은 경험. 마찬가지로 대학원 생활.

가장 괴로운 경험. 압도적인 득표수로 대학원 생활. 군대와 비교해도 역시 대학원 생활이다.

감각 강화는 교수님과 선배들, 학내 정치에 치여 하도 눈칫밥을 먹어서 생긴 거고, 지구력 강화는 대학원 시절의 노예 생활이 원인일 거다.

대학원을 그만둔 후로는 투잡, 쓰리잡을 뛰었으니 지구력 강화가 생길 가능성이 더욱 상승했겠지.

'생각하니까 또 열받네. 이런 씨······.'

안되지, 바른말, 고운 말. 좋은 생각, 예쁜 생각.

고미가 나쁜 거 배운다. 애 앞에서는 물도 조심해서 마시랬잖아. 참자.

트라우마에 휩싸여 잠시 정신을 놓을 뻔했다.

그래, 장을 보러 가야지. 장보는 김에 퀘스트 창의 메시지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확인’해보자.

“고미, 장 보러 가자. 먹을 게 하나도 없어. 초코바도 사줄게.”

나는 불행한 기억을 떨쳐내기 위해 두어 번 머리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고미는 초코바를 사준다는 말에도 무언가 미묘한 표정을 지은 채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그래?”

“수하, 표정이 좋지 않다. 또 부모님 생각을 하는 것이냐?”

······.

그 정도로 표정이 안 좋았니.

“아니야, 잠깐 다른 일 생각했어. 얼른 가자. 맛있는 거 사줄게.”

“오오! 또 새로운 초코바를 사주는 것이냐?”

“초코바 말고 다른 것도 사줄게.”

“좋다! 어서 가자!”

* * *

평소 나는 대형 마트에 잘 가지 않는다.

사봐야 컵라면에 물에 커피 정도인데, 굳이 갈 이유가 없으니까.

그나마도 인터넷으로 한 번에 대량주문해놓고 쌓아두고 먹는 편이고.

혼자 사는 남자야 다 그렇지 뭐.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조금 다른 선택을 했다.

한가지 이유는 고미를 위해서였고, 다른 한가지는 퀘스트를 완료하기 위해서였다.

[ 드디어 인간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모습을 보여도 되는 것이냐! ]

고미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짤막한 꼬리를 휘휘 저으며 말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섬주섬 신발을 챙겨 신었다.

'훗, 이걸 위해 1급 허가증을 받았지. 역시 받아두길 잘했어.'

사실 1급 허가증에 대해서는 루머가 많다.

굳이 평범한 동물들도 잘 못 들어가는 장소에 펫을 데리고 들어갈 수 있는 허가증을 제도적으로 만들 이유가 없으니까.

그래서 대기업이고 어디고 헌터들 눈치 보느라 그렇다, 용왕 길드의 수장, '한유진'이 드래곤 데리고 아무 곳이나 들어가려고 꼬장놔서 그렇다 등등, 온갖 풍문이 돌고 있는 실정.

‘에이, 아무리 그래도 한국 최강의 헌터 중 하나가 그런 걸로 갑질을 하겠어.’ 라는게 내 생각이지만.

이유야 어찌 됐든, 내 입장에서는 고미를 데리고 마트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마트에서 할 수 있는 퀘스트라니, 생활의 냄새가 상당히 진하게 풍기는군.

고미와 함께 마트의 출입구에 다가가자, 마트 직원이 걸어와 말을 걸어왔다.

“죄송합니다. 1급 허가증이 없으면 펫을 데리고······.”

나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곧장 1급 허가증을 내밀었다.

마치 술집에 들어갈 때 유독 당당하게 민증을 내미는 20살처럼.

“여기 있습니다.”

“어······. 들어가시죠.”

직원은 조금 놀란 듯 눈을 치켜떴다가 이내 친절하게 웃음을 지었다.

1급 허가증을 받을 정도로 펫과 친밀도를 쌓으려면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거나, 헌터의 테이밍 능력이 아주 뛰어나야 한다. 최소한 B급 정도.

그게 아니라도 상당히 뛰어난 테이머가 길들인 펫을 사야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돈 걱정 안 하는 사람들이고.

그런데 무릎 튀어나온 추리닝 입고 꼬질꼬질한 운동화 신고 있으니 조금 이상하게 보이기도 하겠지.

무릎나온 추리닝을 입고 있던 의문의 사내를 훑어보던 직원의 시선이 이내 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는 솜뭉치에게 고정됐다.

“와아!”

예상대로 터져 나오는 감탄사.

직원의 시선을 느낀 고미는 고개를 치켜드는 것으로는 모자랐는지 배까지 불룩 내밀고 레드 카펫 위를 걷는 탑스타처럼 당당하게 마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고미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 (23/50) ]

마트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호감도 상승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3점? 마트 입성만으로 3점이나 오른다고?

[ 수, 수하! 이곳은······. ]

고미는 뭔가 엄청난 장관을 본 사람처럼 그대로 자리에 굳어 움직이지 못하다가 이내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 그 협회라는 곳은 됐다. 이곳, 이곳을 나의 새로운 거처로 하고 싶구나. 사실 생각해 보니 그곳은 너무 크다. 진정한 곰이라면 허영심을 버릴 줄도 알아야 하는 것 같다. 그러니 소박하게 이곳을 나의 거처로 하자꾸나. ]

허이구, 말은······. 먹을 게 많아서 그런 거겠죠.

굶어 죽은 귀신이 붙었는지 먹을 걸 너무 밝힌다.

그래도 귀여우니 넘어가자. 누구 말마따나, 귀여운건 최강이니까.

“그래. 그런데 여기서도 못 살아. 일단 가자.”

나는 그렇게 말하며 거침없이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던전이 너의 영역이라면 마트는 나의 홈 그라운드.

이곳이라면 한방에 호감도 50도 꿈이 아니지.

단순히 먹을 거만 살 거라면 동네 마트로 갔을 거다.

와라, 고미. 너에게 신세계를 맛보여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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