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아기곰이 너무 강함-3화 (3/300)

EP.03 내 이름은 고미

“쿨럭.”

입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온다.

비릿한 피 맛이 입안 가득 퍼져 나간다.

뭉개진 내장과 으스러진 뼈···가 아니라, 멀쩡하네.

뭐야 이거?

분명히 엄청 세게 맞은 것 같았는데?

그워어어······.

등 뒤에서 다시 한번 그 이름 모를 괴물의 울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처음 등장할 때처럼 공포스러운 느낌은 없었다.

죽어가는 짐승이 마지막에 내뱉는 숨결처럼 한없는 무력함만이 가득한, 그런 소리.

쿵-!

이어지는 소리는 나의 생각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가슴 윗부분이 사라진 채 뒤로 넘어가 있는 거대한 몬스터의 시신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뭐, 뭐야.”

맞은 건 나인데, 왜 뒤에 있는 놈이 죽었어?

괴이하다 못해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그 광경에 내가 이미 죽은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꿈은 아닐까? 무슨 소설의 결말처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망상 중이라던가.

하지만 다시 아기 곰에게 돌리는 순간, 이 모든 일이 틀림없는 현실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아무리 정신 나간 사람이라도 마지막 순간에 슈퍼 아기곰이 구세주로 등장하는 망상을 할 리는 없을 테니까.

“다음 생에서는 부디 평안하기를······.”

아기곰이 합장을 하며 그렇게 중얼거리자, 몬스터의 시신이 먼지로 변해 흩어졌다.

“어어?”

놀랍게도 몬스터의 시신이 사라진 곳에는 마정석도, 아이템 큐브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거대한 균열만이 이곳에 S급 이상의 몬스터가 있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여기서 아깝다는 생각하면···속물이냐?

저 몬스터 분명히 S급 이상이었을 텐데! 마정석만 해도 부르는 게 값일 텐데! 이렇게 없어져도 되는 거야?

기왕 기적이 일어난 김에 한 방에 인생역전, 뭐 이런 거 서비스로 붙여주면 안 되냐고!

“자, 이제 약속을 지킬 차례이니라.”

그때, 아기곰이 뒷짐을 진 채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을 걸어왔다.

완벽한 이족보행. 거만한 자세와 눈빛.

목소리나 생김새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극 같은 말투.

“누구세요?”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나도 모르게 감사 인사보다 질문이 먼저 튀어나갔다.

생명의 은인에게, 실례군.

“아, 감사합니다. 정신이 없어서 인사를 까먹었네요.”

“후훗, 개의치 말거라. 나를 만나면 모두 그런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지. 내가 바로 고미니라.”

알고 있다. 한눈에 봐도 곰이잖아. 도저히 다른 거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곰이잖아.

“알아요. 곰이잖아요.”

“아니, 고미라고 했느니라.”

“그러니까요, 곰이요.”

“아니, 고.미. 낱자로 기역, 오, 미음, 이. 영어로는 G, O, M, I. 고미. 진정 날 모르느냐?”

······.

뭐야 이 정신 나간 자기 소개는.

게다가 말투는 조선시대인데 왜 자기소개는 알파벳으로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모르겠어요.”

“뭣이!?”

아기곰이 동그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치켜뜨며 외쳤다.

뜬금없지만, 귀엽다.

마치 할아버지 말투를 따라하는 아기를 보는 느낌이랄까.

게다가 이놈 눈이 보통 초롱초롱한게 아니다.

아니, 이 정도면 ‘영롱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그래도 눈빛을 보니 나의 위대함은 이해하는 모양이구나?”

세상 귀여운 아기를 보는 듯한 나의 표정에 녀석은 무슨 착각을 한 건지 우쭐해진 얼굴로 팔짱을 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부하가 된다는 게 무슨 소리예요?”

괜한 걸로 말꼬리를 잡기 싫었던 나는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말 그대로다. 이제 너는 나의 부하가 되어 세상을 누빌 것이다. 아까 너의 이름도 들어두었다. 김수하. 마치 나의 부하가 되기 위해 태어난 듯한 이름이구나.”

음, 그래도 나름 멋진 뜻이 있는 이름인데··· 아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구나.

“그게 아니라 왜 저를 부하로 삼으시려는 건지 모르겠어서요.”

나의 질문에 자신을 ‘고미’라고 소개한 아기곰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던전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선택받은 인간의 도움이 필요하다.”

선택받은 인간? 각성자를 말하는 건가?

“전 비각성자인데요.”

“흥, 네가 이능을 갖지 못했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느니라.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럼······.”

“게다가 넌 이미 그 각성이라는 것을 했느니라. 나의 부하를 위한 작은 선물이랄까.”

“네?”

이건 또 무슨 소리냐. 내가 각성을 했다니.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가장 해보고 싶었던 동시에 가장 오글거린다고 생각해 온 한마디를 내뱉었다.

“상태창.”

“?”

하지만 상태창은 뜨지 않았고, 고미는 무슨 헛짓거리를 하냐는 듯 나를 바라봤다.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

“각성했다면서요.”

“그래, 내가 시켜줬느니라. 대단하지 않느냐?”

“상태창 안 뜨는데요.”

“이놈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정신을 집중해 보거라. 변화가 느껴지지 않느냐?”

지그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해 보았지만, 결과는 별 다를게 없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데요?”

“이런 기본도 안 된 놈을 보았나? 양미간에 너의 모든 정신을 집중시킨다고 생각해 보거라.”

고미가 시킨대로 양미간에 정신을 집중하자, 무언가가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온몸에서 힘이 샘솟고, 울끈불끈!’은 아닌데, 어디선가 단내가 진동했다.

“단내가 나는데요?”

“뭣이?!”

고미는 화들짝 놀라며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나는 그 단내의 근원이 녀석의 입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제 보니 녀석의 입가에 갈색 부스러기와 고동색의 끈적해 보이는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초코바의 흔적이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이 던전에 초코바가 있을만한 장소는 한 곳 뿐이었다.

내 더블백.

한 열 개 들어 있었나? 내가 먹을 건 아니고, 헌터들 피곤하거나 신경 예민해지면 하나씩 먹이려고 매번 들고 다니는 물건이다.

“혹시 제 초코바 드셨어요?”

“후, 훔치다니! 우연히 들어간 곳에 맛있는 것이 있어 그만······.”

훔쳤냐고 물어보지는 않았는데······.

생명의 은인에게 초코바 값을 받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뭔가가 이상해서 던진 질문이었다.

초코바가 들어있던 곳은 더블백이다.

그러니 ‘들어갔다’는 곳도 내 더블백 안이겠지.

그럼 몰래 더블백에 들어갔다가 그 S급이 나타난 걸 보고 뛰쳐나왔다는 건데······.

문제는, 그게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점이다.

“진짜 제 더블백에 들어가 있었어요?”

“저, 절대 그 초코바라는 것을 훔쳐먹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마, 물론 맛은 아주 훌륭했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들어갔어요?”

더블백은 생물이 들어갈 수 없다.

더블백 뿐 아니라 어떤 인벤토리도 생물을 넣을 수 없다.

인벤토리 등급이 뭐가 됐든, 몬스터든 펫이든, 그냥 못 들어간다. 예외는 없다. 이건 해가 동쪽에서 뜨는 거랑 같은 수준의 법칙이다.

그런데 어떻게 들어가셨냐고요.

“살곰살곰! 들어갔지!”

“그게 말이 돼요?”

“왜 안 되느냐! 보아라! 살곰살곰!”

말을 마치기 무섭게 고미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렇게!”

그리고 더블백이 움찔거리더니 다시 보송보송한 털뭉치 하나가 그 안에서 엉금엉금 기어나왔다.

뭐야 이거, 무서워······.

엄마······. 해가 서쪽에서 뜨고 있어요.

“어······.”

내가 황망한 표정으로 고미를 바라보자, 녀석이 다시 한번 거만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너도 이렇게 될 수 있다!”

뒤에 생략된 말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쪽을 데리고 나가주면 말이죠?”

“그렇다!”

하지만 나는 선뜻 답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던전내 균열 발생은 지금까지 서너 번 밖에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균열에서 나온 몬스터는 예외 없이 국가급 재난을 빚어냈다.

그런데 내 눈앞에 있는 이 곰은, 그 괴물을 눈 깜짝할 새에 시체로 만들어 버렸다.

당연히 이 녀석이 날뛰기 시작한다면 한두 사람 죽는걸로 끝날 리가 없다. 그런 괴물이 내 말을 순순히 들어줄지도 의문이고.

즉, 이런 녀석을 아무런 생각없이 바깥 세상으로 데리고 나간다는 것은 단순히 무책임이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죄송하지만, 안될 것 같아요.”

물론 이 녀석의 부하가 되면 정말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게 될지도 몰랐다.

로또 이상의 초대박. 게다가 말하는 걸 보아하니 내가 부하 1호인 것 같고. 어쩌면 일주일에 하루를 쉬는게 아니라 일주일에 하루만 일하면서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

······.

일주일에 하루?

책임감? 그게 뭐예요?

양심이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싶어지네.

“이, 이럴 수가······.”

나의 대답을 들은 고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라 잃은 표정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얼굴.

가만히 보니 눈에 눈물까지 맺혔다.

뭐야, 반응이 왜 이래.

죽인다고 길길이 날뛴다면 차라리 받아들이기 쉬울 거다.

애초에 그럴 각오로 한 말이고.

그런데 나 같은 놈은 손가락만 까딱해도 먼지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놈이, 협박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애처럼 운다고?

“흑, 동이 말이 맞았다!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 했는데!”

“어어, 그게 아니라······.”

아니, 이게 무슨··· 내가 나쁜 놈인가 지금?

“으헝! 목숨을 구해줬는데 그깟 간식 좀 먹었다고 도둑 놈 취급을 하고! 부하가 된다길래 권능까지 부여했는데 이제와서! 동이 놈 말이 맞았다! 원하는 걸 먼저 들어주면 안 되는 거였다!”

뭐지 이 황당한 반응은? 동이는 또 누군데.

“아, 아니, 울지 말고, 진정하세요.”

“진정하게 생겼느냐?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던전을 벗어나서 맛있는 것도 먹고 재밌는 것도 좀 하겠구나 싶었는데, 그깟 던전에서 데리고 나가주는 게 뭐가 대수라고! 이 은혜도 모르는 모리배야!”

모, 모리배. 단어 선택이 묘하게 거시기하네.

그보다 던전을 나가고 싶은 이유가 고작 그거라고?

세계 정복도 아니고, 부와 권력, 뭐 이런 것도 아니고, 맛있는 거? 재밌는 거?

뭐지 이 소박하고 순수한 영혼은······.

“그, 일단 이거부터 드시고 얘기 좀 할까요?”

나는 말을 하는 대신 품 안에 들어있던 마지막 초코바를 꺼냈다. 우는 애 달래는 데는 말보다 좋아하는 걸 주는게 최고니까. 대화는 그 다음이다.

“응?”

그러자 언제 가져갔는지 느낄 새도 없이 초코바가 고미의 손바닥 위로 자리를 옮겨갔다.

빠르다·. 아니, 그런 수준이 아니다. 사라지는 걸 느끼지도 못했다. 염동력 같은 거 쓰나?

“나를 데리고 나가 줄 것이냐?”

언제 그랬냐는 듯 눈물을 그치고 초코바를 삼키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직감했다.

이 녀석 묘하게 애 같다. 그리고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 녀석이라면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질 않았다.

“우선 저랑 얘기 좀 해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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