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 외전(6)
황제가 주최한 무투대회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참가자들을 격려하고, 우승을 차지한 황태자를 축하한다는 이유로 연회가 열렸다.
실은 자신의 가족들을 황궁에 초대하되 자신의 정체는 대놓고 드러내지 말아줄 것을 요구한 어느 드래곤 때문에 예정 없이 갑작스레 준비된 연회였지만.
갑작스러운 연회였음에도 과연 제국인지라 무척이나 화려하고 성대한 연회였다.
무투대회에서 준결승까지 오른, 우승자인 황태자를 제외한 세 명의 참가자와 그 가족들이 황실의 연회에 초대되었다.
무투대회에서 3위와 4위의 자리를 차지한 참가자들이 1위를 차지한 황태자의 곁에서 얼떨떨한 감정을 애써 감추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무투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덕분에 이곳저곳에서 영입이나 후원 제안이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보다도 황태자와 친분을 조금이나마 쌓아두는 것이 더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걸 그들도 알고 있었다.
그 모습을 파라는 자신도 로이엔틸의 곁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듯 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지금 하려는 것은 장수가 탄 말을 쏘려는 것이기에.
황태자의 권위를 존재하게 만들고, 앞으로 그를 만남에 있어 생겨날 수 있는 방해들을 치워주거나, 혹은 방해할 수도 있는 인물.
파라는 조금은 긴장한 표정으로 자신의 곁에 멀뚱히 서 있던 외삼촌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내가 왜 이러고 있을까, 하는 상념에 잠겨 있던 라엘이 그제야 조카와의 약속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엘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파라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향하는 방향에 서 있던 근위기사들 몇몇이 갑자기 다가오는 두 사람에 표정을 굳히며 제지하기 위해 다가오려 했지만 이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들은 갑자기 아무런 승인도 없이 황제에게 접근하는 연회의 참가자 둘을 막으려 했으나, 누군가의 손짓에 물러난 것이다.
가벼운 손짓 한 번만으로 근위기사들을 물러서게 한 여인, 카리야 프리드리히 타이런 황제가 눈웃음을 지어보 이며 라엘을 맞이했다.
“이런, 오랜만에 보는군요. 갑자기 은퇴하겠다고 자신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감춰달라 하셨던 분이… 이런 자리에 나타나실 줄은 몰랐군요.”
반가워하는 듯하지만 조금은 어이없어하는 기색이 묻어 나오는 카리야의 말에 라엘은 멋쩍게 웃었다.
그녀의 말대로 자신에 대해 모든 정보를 감추고,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돌지 않도록 조치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이 자신이었으니까.
지금도 카리야와 대화를 하다가 자신의 정체가 알려질 만한 말이 실수로라도 나올까 봐 신경을 곤두세운 상태였다.
아무리 아는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에 대해 안다지만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 누군가가 자신에 대해 알게 되면 귀찮아질지도 모르니까.
맘 같아선 마나로 막을 만들어 소리 자체가 퍼져 나가지 않도록 막고 싶었지만 남의 집에 와서 멋대로 구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기에 참고 있었다.
“그게… 제 조카가 황제 폐하를 뵙고 싶다고 해서 말입니다.”
라엘은 조심스레 말하고는 자신의 곁에서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조카를 슬쩍 쳐다보았다.
“편하게 말하시죠. 아무리 제가 제국의 황제라 한들 드래곤에 비하면 보잘것없지 않습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전히 자신에게 존대를 취하는 라엘의 모습에 카리야는 기분이 좋은 기색이었다.
“그런데 조카라면… 이 소녀를 말하는 겁니까? 이 소녀가 나를 만나고자 하는 이유가 뭔가요?”
“그게…….”
‘내 조카가 당신의 아들을 갖고 싶다는데요’라고 차마 말하기 어려웠던 라엘이 주저하는 사이 파라가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 아드님을 제게 주세요!”
자신의 말이 말도 안 되는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아는지 크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결연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와는 별개로 너무나도 예상치 못했던 말의 내용에 카리야의 눈이 커지고, 입이 살짝 벌어졌다.
“무슨……?”
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카리야의 모습에 라엘은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무투대회 전에 제 조카와 황제 폐하의 아드님이 만난 적이 있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제 조카가 아드님께 한눈에 반한 모양이고요.”
라엘의 설명에도 잠시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듯 조금 전에 벌린 입을 다물 생각도 못 하고 멍하니 쳐다보던 카리야가 천천히 표정을 바로잡았다.
“내 아들이 물건도 아닌데 어찌 마음대로 줄 수 있겠느냐?”
황제의 말이라기엔 너무나도 상식적인 말에 파라는 순간 결연한 표정에서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어… 그러니까 걔를 꼬시기 전에 꼬셔도 된다는 허락을 받으려고요?”
마찬가지로 황제에게 하는 말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저렴한 표현이었지만 카리야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거라면 상관없단다. 나는 내 아들이 누구와 친해지건 상관하지 않으니까. 물론 나쁜 영향을 끼치려는 사람이라면 가만두지 않겠지만.”
그 말에 파라가 눈을 반짝였다.
“그럼 결혼도요?”
친분을 쌓는 것과 결혼은 다르다.
황태자가 젊은 날의 열정으로 여러 신분의 사람들과 교류할 수는 있지만 황태자의 결혼상대는 차기 황후에 오를 수도 있기에 수많은 권력자들의 이해관계가 뒤얽히게 되니까.
“흠, 결혼은 조금 이야기가 복잡해지지만… 난 애초에 그 아이가 반려를 정하는 데에 참견할 생각이 없단다. 개인적으로 드래곤의 가족과 사돈이 되는 일이라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말이다. 아, 물론 로이엔틸이 바라야하겠지만 말이지.”
신경 쓰지 않는다기보다 오히려 응원하는 듯한 카리야의 말에 파라는 잔뜩 기뻐하며 해맑게 웃었다.
“가, 감사합니다! 열심히 꼬셔볼게요!”
곁에서 지켜보던 라엘은 대략 정신이 멍해졌다.
‘이게 정말 황제와의 대화인가? 그보다 내 조카는 왜 이렇게 겁이 없는 거야?!’
<크크, 사랑에 눈이 멀면 원래 겁이 없어지지 않느냐. 네 녀석도 아리안을 위해 배때기에 창도 대신 맞아줬으면서.>
아리안에 대한 마음을 자각하기도 전에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졌던 일을 카이서스가 언급하자 라엘이 반박했다.
‘아니, 그때는 본능적으로 움직인 거고, 그거랑 이렇게 처음 만난 황제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건 다르지!’
<흥, 드래곤이 뒷배인데 황제 정도는 옆집 아줌마지.>
의기양양해하며 대꾸하는 카이서스의 말에 라엘은 말을 말기로 했다.
어째선지 카이서스는… 파라의 성격이나 행동이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니까.
파라의 엽기적인 감사 인사에 작게 웃어 보인 카리야가 근처의 기사를 손짓으로 불렀다.
“로이엔틸을 불러오게.”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로이엔틸은 기사를 통해 전해진 모친의 명에 불려 왔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도 이따금 이쪽을 쳐다보았던 로이엔틸은 모친과 함께 있던 파라를 보며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부르셨습니까, 어마마마.”
그러면서도 공손한 태도로 자신에게 인사를 올리는 아들에게 카리야가 말했다.
“로이엔틸, 잠시 이 아이와 바람이나 쐬고 오련? 나는 이분과 잠시 이야기를 할 게 있단다.”
황제인 어머니가 라엘을 향해 이분이라고 칭하자 놀란 듯 당혹해 했지만 이내 순순히 파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피곤하지 않으시다면 저와 정원 산책이라도 하실까요.”
“물론이에요.”
정중하게 권하는 로이엔틸의 말에 파라는 황제 앞에서도 천방지축으로 굴었던 것이 모두 거짓이라는 듯 요조숙녀와 같은 모습으로 손을 맞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라엘은 인간을 초월한 청각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함께 온 분이 대체 누구시기에 어마마마께서 예의를 표하시는 거야?”
“우리 외삼촌, 드래곤이거든! 이 연회도 외삼촌이 부탁으로 우릴 초대하려고 황제 폐하가 열어주셨대.”
‘아니, 그걸 왜 솔직하게 전부 말해주는 건데?! 아무리 알 사람은 다 안다지만 그렇게 내 정체를 털어놓으면 어쩌자는 거야…….’
조카의 가볍기 짝이 없는 입에 라엘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분이……?!”
깜짝 놀라워하는 로이엔탈의 모습에 파라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나랑 사귀면 우리 외삼촌이랑 친해질 수도 있다고?”
아무리 황태자를 꼬시고 싶다지만 외삼촌을 사은품마냥 팔아넘기는 파라의 모습에 라엘은 대체 자신의 누나가 뭘 어떻게 가르친 걸까 고민했다.
로이엔틸과 파라가 연회장을 나서자 좀 전까지도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던 카리야가 조금 지친 표정으로 라엘을 돌아보았다.
“조카분이 꽤…… 활발하군요.”
차마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좋게 돌려 말하는 카리야의 말에 라엘은 부끄러워졌다.
“갑자기 이곳에 나타나셔서 다들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답니다. 당신이 아무리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해도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그저 나타난 것만으로도 가벼운 일이 아니니까요. 그것도 아무런 조짐이나 언질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은요.”
안 그래도 부끄러운 상태에서 자신을 탓하는 말까지 듣게 되자 라엘은 더더욱 미안해졌다.
“정말 미안합니다.”
풀이 죽어선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라엘을 보며 눈앞의 이 사내가 정말로 나라 하나 정도는 혼자 상대할 수 있는 드래곤이 맞는 걸까 생각하던 카리야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로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으실 겁니까?”
이곳에 나타난 것으로 라엘의 선언이 진심인지 의심스럽다는 듯한 말이었다.
그 말에 라엘은 자신의 진심을 다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리 많은 권력과 칭송, 재물을 얻을 수 있다 해도 세상의 수많은 골치 아픈 일들에 얽히는 건 이제 사양이거든요. 그냥 아내와 둘이서 조용히 지내는 게 더 편합니다.”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진심에 카리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황제로서 그동안 수많은 사람의 진심과 거짓을 들어왔던 그녀는 깨달은 것이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드래곤입니다. 아무리 부인의 마법의 경지가 높아져도 인간이라는 한계가 있는 이상 당신의 기나긴 수명의 끝까지 함께할 수 없겠지요. 당신이 아끼는 가족들도 물론이고요. 그 후에는 어찌할 생각입니까.”
진심은 어떤 조건에 따라 시간이 지나면서 변할 수도 있다.
카리야는 자신의 사후에 주변의 사람들을 모두 떠나보낸 드래곤의 마음이 바뀔까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라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말한 것은 자신도 계속해서 생각했던 것이었다.
<쯧, 감히 드래곤을 의심하다니. 건방지니까 대답해 주지 말자.>
라엘의 대답을 이미 알고 있던 카이서스가 툴툴거렸지만 라엘은 입을 열었다.
“꿈을 꿀 겁니다.”
“꿈이요?”
갑자기 뜬금없는 꿈 이야기에 카리야의 눈이 살짝 찡그려졌다.
잠자는 동안에 여러 가지를 보고 듣는 그 꿈?
아니면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을 말하는 그 꿈?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느라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카리야의 모습에 라엘이 멋쩍게 웃었다.
“말 그대로의 꿈입니다. 모두가 떠난 후에 저는 잠에 들어 꿈속에서 그들을 볼 겁니다. 좋은 물건을 구했거든요.”
그 좋은 물건이란 대마수를 처리할 때 사용했던 양들의 수다.
그것을 사용할 생각인 거다.
“잠에 들어서 꿈을 꿀 거라니… 그건 그저 현실에서 도망치는 것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드래곤인 자신이 수명이 끝나 마나로 되돌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길고 긴 시간이 될 것이기에, 죽음 대신 오랜 잠을 택하겠다는 거다.
카리야의 말대로 도망치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도망치는 것도 가끔 도움이 되니까요.”
‘카이서스를 만날 때처럼 말이지.’
라엘이 스스로의 한심함에 집에서 도망치다 카이서스의 둥지에 들어갔던 것을 떠올리자 카이서스는 웃었다.
<내가 도움이 되었다는 걸 너도 인정은 하는구나. 근데 전에도 말했지만 네가 오랜 잠을 들기 전에 내 몸은 만들어주고 자야 한다? 아무리 나라도 잠들어서 아무 반응도 없는 네 녀석을 지켜보기만 하는 건 꽤나 끔찍할 테니까.>
다시 한번 자신의 요구 사항을 상기시켜 주는 카이서스의 말에 라엘은 속으로 웃었다.
‘그게 언제가 되더라도 지금은 아니잖아. 천천히 하자고. 그때까진 지금의 행복을 즐겨야하니까.’
시간이 흘러 주변의 모두가 세상을 떠나고, 자신이 오랜 잠에 든 이후 여러 가지 일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만들어진 몸으로 눈을 뜬 카이서스가 세계의 섭리에서 벗어난 것을 기뻐하며 엄청난 사고를 곳곳에서 치고 다니건, 갑자기 섭리로 인해 잠에서 깨어난 라엘이 잔뜩 짜증 내며 카이서스를 쫓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무 일도 없이 잠만 자다가 마나의 품으로 돌아가 세계의 순환을 거치고, 자신의 인연들을 다시 만날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은 먼 미래의 확정되지 않은 일이기에 라엘은 카리야에게 눈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연회장 내부에 사람들이 많건 말건, 황궁에 마법 사용을 방해하는 결계가 있건 말건, 공간 이동을 사용해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자신의 둥지로 돌아왔다.
“라엘? 벌써 돌아온 거야? 좀 오래 걸릴 것 같다고 하지 않았어?”
갑자기 공간을 가르고 나타난 라엘의 모습에 놀라는 아리안의 모습을 보며 라엘은 웃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