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 외전(5)
[관중 여러분들의 환호, 함성과 함께! 시이자아악-! 하겠습니다아아아!]
활력 넘쳐나는 목소리로 길게 소리쳐 외치는 해설자의 말과 함께 결승전이 시작되었다.
직전까지도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파라였으나 시합이 시작되자마자 침착한 모습으로 검을 겨누었다.
순식간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정을 되찾은 파라는 로웬을 응시하며 빈틈을 노리려 했다.
하지만 정체를 숨겼건 어쨌건 로웬 역시 자신의 실력으로 결승전까지 올라왔다.
파라는 로웬의 빈틈을 찾아내기 어려웠고, 로웬 역시 마찬가지였다.
긴장 속에서 서로를 견제하며 응시하고 있던 두 사람 중에서 먼저 움직인 것은 파라였다.
“하압!”
중단으로 힘차게 검을 휘둘러 오는 파라의 공격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던 로웬이 자신의 검을 쳐올리며 막아냈다.
파라의 검을 막아내자마자 손목의 회전을 이용해 검의 방향을 바꾼 로웬이 그대로 다시 공격해 들어갔다.
파라 역시도 그 공격을 가볍게 쳐내고는 다시 공격을 이어갔다.
서로의 공격을 막고 반격을 가하며 공방을 이어나가는 두 사람의 모습에 관중들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와아아! 대단해!”
“우왓! 제대로 눈으로 좇기도 어려울 정도야. 이게 정말 현역이 아닌 젊은 유망주들의 실력이라고?”
[과연 결승전에 올라올 정도의 실력자들입니다! 두 사람 모두 거세게 검을 휘두르지만 눈빛은 침착하기 그지없어요!]
해설자가 칭찬을 하며 떠들어대거나 말거나 두 사람의 팽팽한 접전이 계속해서 이어질수록 파라의 기세가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야! 애초부터 너 나랑 사귈 생각 같은 건 없었던 거지?! 애초에 본인이 우승할 거라고 생각해서! 내가 우승할 거라니까 우습게 보였어?!”
원래부터 그다지 침착하고 인내심 많은 성격이 아니었던 파라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뭔가 앞뒤가 맞지 않은 말을 외쳤다.
그 말에 로웬은 자신의 어깨를 노리고 휘둘러져 오는 검을 몸을 상체만을 뒤로 눕혀 피하며 쓰게 웃었다.
“딱히 그런 건 아냐. 그저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해 줄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말했을 뿐이지.”
“그러니까 결국 나를 무시한 거잖아!”
자신의 말을 전혀 들을 생각 없이 소리치며 거칠게 검을 휘둘러 오는 파라의 모습에 로웬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강하게 검을 휘둘렀다.
캉!
고작 목검이 서로 부딪친 것임에도 그 목검들에 실린 힘 때문에 쇳덩어리들이 부딪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너를 무시했던 것은 아니야! 나도 진심으로 네가 즐거웠으니까.”
자신이 즐겁다니 이게 무슨 개소리지?!
짜증이 치밀어 올라 머리에 약간 열이 올라있던 파라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뭐가 즐거웠다는 건데?!”
“말 그대로 너와 이야기하고, 이렇게 검을 맞대는 것도 즐겁다는 거지.”
그렇게 말하며 로웬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 뭐?!”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검을 휘두르던 것이 흐트러지자 로웬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자신의 검을 파라의 목 근처에 가져다 댔다.
비록 목검이지만 승패를 결정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미안, 나도 반드시 우승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어서. 하지만 너와 함께 뭔가를 하는 것들이 즐겁다는 건 진심이야.”
미안하다는 듯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하는 로웬의 모습을 파라는 으으, 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쳐다보았다.
<아, 끝났네. 저건 완전히 반한 것 같은데? 전처럼 간단하게 사랑에 빠진 수준이 아니야.>
파라의 모습을 보며 카이서스가 혀 차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비록 졌음에도 로웬을 보며 살짝 넋이 나가있던 파라가 이내 씨익 웃어 보였다.
“나와 함께하는 게 즐겁다는 거는 아직 너랑 사귈 가능성이 있다는 거네?”
거의 집착에 가까운 수준으로 사귈 것을 강요하는 듯한 파라의 말에 로웬은 말없이 웃었다.
[아! 드디어 결착이 났습니다! 승자는 바로……!]
승자와 패자가 결정된 순간에 잔뜩 흥분한 해설자가 승자의 이름을 외치려 했으나 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네? 갑자기 무슨… 네? 예?!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해설은 갑자기 다가온 누군가에게 놀라운 소리를 들은 듯 경악하며 되묻는 말만 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느 정도 진정한 해설이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승자 발표를 했다.
[어… 여러분, 그러니까… 조금 전에 승리하신, 이번 무투대회의 우승자는… 우리 타이런 제국의 로이엔틸 타이런 황태자십니다! 저도 방금 전달받은 소식에 따르면 무투대회에서 황태자님의 신분 때문에 다른 참가자들이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까 봐 신분을 숨기셨던 거라고 합니다!]
조금씩 떨리던 해설자의 목소리는 마침내 흥분으로 인해 격정적인 외침으로 바뀌었다.
그 말에 관중들 모두가 조용해졌다가 이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경기 때보다도 더 커진 환성이 대회장을 뒤덮었다.
“와아! 황태자 저하 만세!”
“정말 위대하십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보통의 사람들로서는 멋진 모습을 보여줬던 우승자가 사실은 황태자라는 것을 알게 되면 놀랄 만도 하다.
특히나 타이런 제국의 국민들이라면 더욱 흥분할 테고, 이 무투대회장에는 제국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와아아아!”
귀를 울릴 정도로 커다란 환호성에다가 자기가 점찍은 소년이 황태자라는 소리에 파라는 얼떨떨해하며 서 있었다.
그런 파라를 보며 황태자 로이엔틸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래도 나를 갖고 싶어?”
그 말에 잠시 생각하던 파라는 욕망과 탐욕이 가득히 묻어 나오는 음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와, 마음에 든 남자를 가지면 제국의 황태자비 자리도 공짜로 따라온다니 엄청 끝내주잖아. 더욱 더 너를 갖고 싶어졌어.”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사람을 물건마냥 갖고 싶다니.
<그렇지, 그 정도는 되어야 조카지!>
그 말에 카이서스가 흡족하다는 듯 말하자 라엘이 발끈했다.
‘네 조카가 아니라 내 조카거든?!’
어쩐지 황당하다 싶을 정도의 당돌한 그 대답에 로이엔틸도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는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역시 너와 이야기하다 보면 즐거워.”
서로 좋아 보이는 둘의 분위기에 근처에서 전부 다 지켜보고 있던 라엘은 혀를 차며 고민했다.
과연 다른 가족들이 파라가 반한 소년이 제국의 황태자라는 소리를 들으면 어떻게 반응을 할까.
특히 아직까지도 주적으로 타이런 제국을 손꼽는 정보집단의 수장이며, 외손녀를 끔찍이도 아끼는 자신의 아버지가 보일 반응을 잠깐 생각해 본 라엘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난 아무것도 모르는 걸로 해두자.’
아버지가 자신의 정보망을 통해 알아내건 우연히 알게 되건,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해두기로 했다.
하지만 고작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모른 척하겠다는 라엘의 다짐은 어림도 없는 소리가 되고 말았다.
“외삼촌! 생각해 봤는데 장군을 잡으려면 말부터 쏘라는 말이 있잖아요. 아무래도 걔를 얻으려면 우선은 그 주변부터 공략하는 게 좋을 것 같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황궁에 가서 걔 주변 사람들을 만나볼 방법이 없을까요?”
무투대회장을 떠나 숙소로 돌아와서도 파라가 계속 심각한 표정이기에 우승을 하지 못한 것 때문에 실망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그녀의 엄마와 외조부모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뜬금없는 말에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결승전의 패배 때문에 침울해 있던 거라 생각했던 조카가 사실은 어떻게 하면 그 남자애를 꼬실까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라엘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파라가 원한다는 걔가 대체 누구를 말하는 거냐? 라엘, 너는 뭔가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외손녀가 누군가를 원한다는, 그리고 그 원하는 사람이 타이런의 황궁과 관련이 있다는 말에 제국을 적대하는 외손녀 바보 오러 마스터가 자신의 아들을 향해 살기 섞인 시선을 보냈다.
고작 외손녀가 관심을 가진 사람이 생겼다는 말치고는 너무나도 격한 반응에 라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때는 그저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의 어쩐지 한심한 모습에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네가 순순히 말할래 아니면 내가 직접 알아볼까?’라고 눈으로 묻는 모습에서 압박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아버지는 조직을 동원해서라도 결국 알아낼 터, 라엘은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이 보고 알게 된 것들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 직후 터져 나온 데스웬의 외침은 무척이나 단호했다.
“절대 안 된다!”
외손녀 앞에서는 소리도 지르지 않던 사람이 약간의 분노까지 담아 소리치자 다들 깜짝 놀라며 쳐다보았다.
“내가 타이런 제국, 특히 황가 놈들을 얼마나 혐오하는데 그 황태자란 놈에게 우리 파라를 보낼 수는……!”
결연한 목소리로 결사반대를 외치던 데스웬의 입을 막은 것은 그의 아내, 마를렌이었다.
“애가 좋다는데 왜 반대부터 해요?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아버지에게 우리 결혼을 반대받았던 걸 잊은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결국 어떻게 했었죠?”
네팔렌 백작은 데스웬과 마를렌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두 사람은 사랑의 도피를 해버렸다.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 데스웬은 움찔하며 목소리를 줄였다.
“아니, 그래도… 타이런 제국의 황태자는 좀… 게다가 내가 가만히 있어도 그쪽에서 가만히 있을 리도……”
“흐음?”
조심스레 변명과 같은 말을 고민해 가며 내뱉던 데스웬이었으나 마를렌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쳐다보자 입을 다물었다.
나이가 들수록 남편의 기가 죽고, 아내의 기세가 살아난다는 부부가 있다더니 라엘의 부모가 딱 그런 부류인 모양이었다.
사랑의 도피까지 해놓고 세인트 혼의 활동을 하느라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고 바깥을 떠돌았던 죄책감과 아내에 대한 여전한 사랑 때문에 그는 진심으로 언짢아하는 아내를 이길 수 없었다.
단순한 숨소리와 미간의 움직임만으로 오러 마스터를 제압해 낸 마를렌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외손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파라는 그 아이가 어째서 마음에 드는 거니?”
“그야… 말도 잘 통하고 같이 있으면 즐겁고… 결정적으로 얼굴이 딱 제 취향이거든요.”
그 결정적인 이유라는 게 데스웬과 라엘이 듣기에는 어이가 없는 것이었지만 마를렌과 메이엔은 흡족한 표정이었다.
“우리 외손녀는 역시 똑똑하구나.”
그렇게 말한 마를렌은 오러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덕에 여전히 나이에 걸맞지 않게 미중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남편의 얼굴을 보고는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 여보?”
마치 얼굴 때문에 결혼한 거라는 듯한 아내의 반응에 데스웬의 표정이 난해하게 변했지만 그리 큰 관심을 얻지는 못했다.
“라엘.”
마를렌은 아들의 이름을 가볍게 부르고는 잠시 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진행시키렴.”
집안 최고 권력자가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자 라엘은 반쯤 울상을 지었다.
“아니, 저는 지금 평범한 마법사로 신분을 감추고 있는 중인데 어떻게 파라와 함께 황궁에 들어갈 일을 만들겠어요?”
라엘이 황급히 자신이 괜한 소란과 시선을 피하기 위해 신분을 감추는 중임을 언급하며 말하자 메이엔이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어차피 어느 정도 너를 아는 사람들은 다들 눈치채고 있을걸?”
너무나 자신만만한 메이엔의 말에 데스웬이 긍정하듯 말을 덧붙였다.
“타이런 제국이 루리스에게 놀아난 전적이 있다고는 해도 바보들은 아니니 모를 리가 없겠지. 경계 대상인 오러 마스터가 가족과 함께 입국했는데, 감시가 붙는 건 당연한 거고, 네가 아무리 이름을 바꾸고 모습을 바꿨어도 네 정체를 짐작했을 거다. 그저 너를 괜히 귀찮게 할까 봐 모른 척해주고 있는 거겠지.”
차근차근 설명하듯 말하는 부친의 모습에 라엘은 잠깐 생각하더니 주변의 마나에 정신을 기울였다.
그러자 지금까지 왜 몰랐나 싶을 정도로 확연히 느껴지는 기척들 몇몇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신들이 있는 여관을 지켜보는 것이 느껴졌다.
오러 마스터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에 근접한 자들의 수준.
“아니, 감시받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왜 말하지 않았던 거예요?”
라엘이 황당하다는 듯 묻자 데스웬은 음, 하고 침음을 흘렸다.
“나야말로 네가 정말로 정체를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냥 귀찮은 일을 피하려고 정체를 대놓고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고 지켜보는 눈들이 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을 줄 알았는데.”
쯧쯧, 하고 혀만 차지 않았을 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데스웬의 모습에 라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분명 최선을 다해 정체를 잘 감췄다고 생각했는데.’
<거봐라, 내가 뭐랬냐. 금방 정체가 들킬 거라고 했잖느냐.>
카이서스의 말이 진실이었기에 더욱 기분이 나쁜 라엘이었다.
그리고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시선의 주인 중 하나에게 지금의 모습 그대로 접근해 황궁에 말을 전해달라 한 라엘은 순순히 그러겠노라 대답하는 상대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추측은 모두 사실이었던 거다.
라엘은 지금까지 폴리모프로 모습을 바꾸고 가명까지 만들어서 정체를 완벽하게 숨겼다고 자신한 자신의 행동 모두가 전혀 쓸모없고 바보 같은 짓이었음을 깨닫고 탄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