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 외전(4)
다부진 체격에 강인한 얼굴의 사내, 겉으로는 청년처럼 보이지만 일단은 청소년에 속하는 그는 자신의 앞에 선 가녀린 체구의 소녀를 보고 코웃음을 치며 자신의 승리를 직감했다.
빠악!
하지만 그 직감은 대결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자신의 목검을 가볍게 쳐내고 머리통을 후려갈긴 소녀의 목검에 의해 박살이 나버렸다.
참가자들의 안전을 위해 각자가 사용하는 무기와 동일한 모양, 무게로 만들어진 목검은 비록 날이 서 있지 않다고 해도 제대로 맞으면 그 충격이 가볍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오랜 시간을 강해져서 이름을 떨치겠다는 일념으로 수련에만 전념하느라 여자 친구도 ‘안’ 만들었을 정도였으나 파라의 상대는 될 수 없었다.
우정과 노력을 표어로 삼는 소설들도 내용을 들여다보면 실제로는 혈연과 재능, 운이 가장 중요한 것과 같은 이야기였다.
그를 쓰러뜨린 파라라는 이름의 소녀는 어릴 때부터 왕실기사인 아버지와 오러 마스터인 외할아버지의 재능을 물려받고 그들에게서 수련을 받아왔다.
게다가 드래곤 외삼촌이 선물한 진귀한 영약들을 어릴 때부터 먹어왔기에 그녀가 다룰 수 있는 마나의 양은 또래의 아이들이 결코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다.
혈연과 재능, 그리고 스스로의 노력까지 더해 버렸기에 상대로서는 이길 방법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원래 많은 것을 준비하고 뼈를 깎는 노력을 해봐야 노력에 재능과 혈연을 더하고, 즐기기까지 하는 사람 앞에선 단순한 엑스트라가 될 뿐인 것이다.
겉으로는 가녀린 소녀처럼 보이는 파라가 자신보다 머리통 두 개는 커 보이는 건장한 근육질의 소년을 단숨에 쓰러뜨리자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 엄청난데!”
“저 누나 멋있어!”
관객들은 물론 소리증폭 아티팩트를 이용해 해설하던 진행자들도 칭찬을 늘어놓았다.
[대단합니다! 파라 아마렛 선수! 가녀린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강력한 힘으로 순식간에 상대를 쓰러뜨립니다!]
[체격을 생각했을 때 저런 움직임과 힘은 단순한 근육에서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저 선수, 벌써부터 마나를 사용해 신체를 강화할 줄 아는 것 같습니다.]
나이에 비해 뛰어난 실력에 놀라워하는 해설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파라는 전혀 기뻐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뚱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찾듯 환호성을 내지르는 관중들을 살필 뿐이었다.
하지만 결국 찾고자 하는 바를 찾지 못했는지 시합장에서 완전히 내려왔을 때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예선전 마지막 시합까지 멋지게 이겨놓고 왜 그리 표정이 안 좋아?”
시합장 바로 아래에서 파라를 기다리고 있던 라엘이 그 모습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으응… 그게요…….”
파라가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자 라엘이 재차 물었다.
“혹시 저번에 시내에 다녀왔을 때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외출을 했다가 늦게 귀가해선 우승하겠다고 투지를 불태운 날 이후, 파라는 무투대회 시작 직전까지 외할아버지를 붙잡고 수련에만 집중했다.
지금의 이상 행동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 없음을 눈치챈 라엘이 묻자 파라는 뭔가 답답한지 끄으응, 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 모습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나 싶어 라엘이 눈을 가볍게 찌푸렸다.
“무슨 문제인지는 몰라도 네 엄마 앞에서 묻기 전에 내게 먼저 말해주면 도와줄게.”
메이엔까지 언급하며 말하자 그제서야 파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 대기실에 가서 얘기해 줄게요.”
비록 파라의 대결은 순식간에 끝났다지만 대회장 내에 마련된 다른 시합장에서는 다른 참가자들이 아직 대결하는 중이었다.
관중들의 환호성으로 주변이 온통 시끄러운 데다 보는 눈도 많았기에 찬찬히 이야기를 나누기엔 그리 좋지 않은 환경이었다.
실내에 마련된 참가자 대기실에 들어오고 나서야 파라는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게… 그날 돌아다니면서 시내를 구경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떤 남자애가 곤란해 보이더라고요.”
노점상 앞에서 뭔가를 사려는 모양이었지만 돈이 모자란지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고 했다.
곁에 가서 은근슬쩍 상황을 살피니 그 금액이 그리 큰 금액이 아니었기에 파라는 자기가 대신 모자란 돈을 내주며 소년을 도와줬다고 했다.
<보나 마나 그 남자애가 꽤 잘생겼던 모양인데?>
‘시끄러. 듣고 있는 중에 방해하지 좀 마.’
라엘 역시도 그 이유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카이서스에게 조용히 하라며 타박했다.
자신의 자식은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정을 주었던 조카가 이성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이야기를 듣는 건 조금 낯선 기분이었다.
아무튼 파라의 도움으로 마음에 든 물건을 살 수 있었던 소년도 시내에 나온 것은 처음이라고 했기에 둘은 같이 다니며 시내를 구경했다.
또래라서인지 아니면 성격이 잘 맞는 편이어서인지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시내를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걔가 마음에 들어서 제가 사귀자고 했거든요.”
‘갑자기?!’
사귀자고 말은 했지만 사실 파라가 한 말은 정확히 ‘너 내 거 할래?’였다.
<음, 그렇지. 마음에 드는 것을 쟁취하려면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나가야지!>
전혀 도움도 안 되고 일반적이지도 않은 카이서스의 중얼거림은 당연히 라엘에게 무시당했다.
“그런데 걔가 ‘무투대회에 참가한다고 했지? 그럼 거기서 네가 우승한다면 생각해 볼게.’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귀가하자마자 반드시 우승하고 말겠다고 소리친 것이었다.
조카가 우승에 열의를 불태운 이유를 듣게 된 라엘은 어이없음에 머리에 손을 얹고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래서 관중석에 그 아이가 있는지 찾아봤던 거야?”
“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안 보여서…….”
그렇게 말하며 표정이 어두워지는 조카의 모습에 라엘은 조금 전까지 조카가 무슨 일에 엮인 게 아닐까 걱정한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설마 우승하면 사귀겠다고 해놓고선 제가 우승하지 못할 거라 확신하곤 보러 오지도 않는 걸까요?”
소년은 우승한다면 생각해 보겠다고 이야기했음에도 우승하면 당연히 사귀게 될 거라 생각하는 파라였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구나.’
<원래 사랑이란 단숨에 빡! 하고 찾아오는 거니까. 너처럼 어영부영 지내다가 ‘어? 사랑하는 거 같은데?’라고 하는 녀석도 있지만 말이지.>
‘시끄러.’
평소처럼 카이서스에게 매몰차게 대답한 라엘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보러 오지 않더라도 우승하고 나서 찾아가면 되지 않을까? 우승하는 모습을 그 아이가 직접 보지 않아도 상관은 없잖니.”
이렇게 그 소년을 찾는 것에 정신이 팔리면 제대로 된 실력도 발휘 못 하고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라엘은 파라를 무투대회에 집중시키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일리가 있는 그 말에 파라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우승하고 나서 찾아봐도 늦지 않아요. 안 되면 외할아버지의 힘을 빌려서라도 찾으면 되니까요!”
대륙에서 손꼽히는 정보조직을 사적으로 이용해서라도 자신의 맘에 든 남자아이를 찾겠다는 조카의 당찬 포부에 라엘은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외손녀 바보가 된 자신의 아버지라면 외손녀가 좋아하는 남자아이 같은 건 제대로 찾아주지도 않을 것 같았다.
대충 ‘우리 외손녀한테 연애는 아직 이르다!’라는 틀에 박힌 구시대적인 말 같은 걸 하면서 말이다.
“좋았어! 그럼 당장 돌아가서 외할아버지한테 검을 봐달라고 해야겠어요!”
어차피 예선전은 끝났기에 본선 시합까지는 하루 정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다른 본선 진출자들을 확인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대진표상 파라가 속했던 조가 가장 첫 번째였기에 본선 진출도 가장 먼저 결정이 났다.
이제 곧 다른 본선 진출자들을 가리는 시합이 벌어질 터였다.
본선에 진출할 다른 선수들의 시합을 보고 가는 게 낫지 않겠냐는 라엘의 말에 파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시합을 봐봐야 오히려 마음만 심란해질 것 같아요.”
본인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검사도 아닌 라엘이 뭐라 더 말할 수 없었다.
“그래. 그럼 돌아가자.”
관중석에서 구경하고 있던 다른 가족들과 함께 숙소로 돌아가며 파라는 다짐했다.
꼭 그 남자애를 가지고 말 거라고!
* * *
무투대회가 진행되어 가며 넓은 대회장 내의 여러 시합장도 하나둘 숫자를 줄여갔고 본선 진출자가 네 명만이 남은 지금은 단 하나의 커다란 시합장만이 대회장 중앙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치러지던 첫 번째 준결승전의 승자가 결정되었다.
[파라 선수! 우승 후보 중 한 명이었던 오스틴 선수를 쓰러뜨리고 결승에 진출합니다!]
눈을 즐겁게 하는 대결 끝에 처음에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가녀린 소녀가 우승 후보 중 하나를 꺾고 승리하자 관중들이 대회장 전체가 울릴 정도로 크게 환호를 내질렀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거친 숨을 내쉬는 상대에게 가볍게 목례로 인사를 하고 내려오는 파라의 얼굴에는 관중들의 환호로 인한 기쁨이나 흥분 같은 것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저 내일 치를 결승전에서도 승리하겠다는 결연함뿐.
마치 원수와의 결투를 앞둔 듯한 조카의 결연한 모습에 라엘은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얼굴 좀 풀어라. 아무리 그래도 관중들에게 인사 정도는 해주지 그래?”
그렇지 않아도 관중들이 파라를 향해 환호와 함께 열렬히 소리치고 있었다.
“파라! 이쪽 좀 봐줘!”
“언니! 제 꽃을 받아줘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지만 특히나 열광적인 것은 또래의 여자아이들이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관심과 인기에도 파라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내일도 이겨서 그 남자애를 찾을 생각밖에 없어요.”
단 한 사람만을 향한 엄청난 열정과 욕망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그 상대가 대체 어떻게 생겼을지 라엘이 궁금해하는 사이 다음 준결승전의 참가자들이 시합장 위로 올라갔다.
별생각 없이 그들을 쳐다보다 그중 한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파라의 표정이 기괴하게 찡그려지더니 이상한 소리를 냈다.
“흐엑?!”
“…응? 무슨 일이야?”
대체 그 상대인 소년은 어떻게 생겼을까, 정말로 파라가 우승해서 찾아간다면 엄청 당황할 것 같은데, 혹시 우승하지 못하더라도 준우승이니 절반은 성공했으니까 일단 만나는 것부터 해보자고 생떼를 부리는 건 아닐까 등등의 생각을 하고 있던 라엘이 뒤늦게 파라의 반응을 알아챘다.
라엘은 의아해하며 파라와 파라가 쳐다보고 있는 참가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파라가 쳐다보고 있는 참가자는 어두운 금발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지닌 미소년이었다.
‘음, 뭔가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네.’
<그거 남자들이 엄청 잘생긴 남자의 외모를 평가할 때 쓰는 말이라는 거 알지?>
라엘과 카이서스는 영문을 몰라 쓸데없는 소리만 나누고 있었다.
마침 그 소년도 파라를 쳐다보고는 조금 난감한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이익!”
잠시 후 파라는 화가 난 듯 말도 없이 이 악무는 소리만 내며 힘을 가득 준 걸음으로 대기실로 향했다.
라엘은 황급히 파라의 뒤를 따라가며 생각했다.
‘설마 저 소년이?’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건 이제 좀 깨달을 때가 되지 않았냐? 대체 이런 뻔하디뻔한 상황에 언제까지 설마거릴 거야?>
카이서스의 한심해하는 목소리는 무시하며 라엘은 힐끗 뒤돌아보았다.
난감해하며 파라를 쳐다보던 소년은 어느새 고개를 돌린 채 시합장 위로 올라서고 있었다.
* * *
분노에 가득 차 씩씩대고, 차마 가족들이 머무는 건물에서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분만 삼키던 파라의 폭풍 전야와 같던 밤이 지나갔다.
자신을 속인 소년이 패배할지, 아니면 분노에 찬 자신이 패배할지는 결과가 말해줄 것이다.
그리고 올라선 결승전 시합장.
“날 속였어?!”
결승에 진출한 두 사람을 소개하는 해설의 말이 나오기도 전에 파라는 자신의 앞에 선 소년을 향해 이를 갈며 물었다.
“속이지는 않았어. 그저 나도 무투대회에 참가한다는 말만 하지 않았을 뿐이지.”
소년은 어제와 같이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파라에게 담담히 말했다.
“너어……”
그 모습에 더욱 눈을 찡그린 파라가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제1회 황실배 무투대회의 결승전! 결승까지 올라온 뛰어난 실력의 참가자들을 다시 한번 소개하겠습니다!]
음성증폭마법으로 대회장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해설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와아아아-!”
“파라! 멋있어!”
“로웬! 꼭 이겨! 당신에게 잔뜩 걸었다고!”
참가자들에 대한 응원과 동경과 환호를 비롯한 갖은 소리 속에서 해설자의 참가자 소개가 이어졌다.
[크라우드에서 온 아름다운 소녀 파라 아마렛! 왕실 기사인 아버지에게 어릴 때부터 검을 배웠다고 합니다!]
외할아버지인 오러 마스터 데스웬에게도 가르침을 받았지만 해설진에선 알아내지 못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 상대는!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은, 모든 것이 비밀에 감춰진 미소년 검사 로웬!]
로웬이라는 이름의 소년을 쳐다보던 라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제 지나가듯 봤을 때는 몰랐지만 지금 제대로 보니 소년의 얼굴에서 아는 얼굴이 보였다.
‘누가 봐도 카리야의 아들이네.’
[그러게.]
아버지에게 타이런 제국의 황태자가 무투대회에 참가한단 소리는 들었지만 파라와 약속했다던 그 소년이 신분을 숨긴 그 황태자였을 줄이야.
애초에 황태자를 위해 열린 무투대회에서 결승에 오른 사람이니 너무나 당연한 거지만 말이다.
‘설마 했던 게 또 역시나라니.’
<네 녀석의 설마에는 어떤 힘이 실려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 크크.>
라엘은 난감한 표정을 지은 채 아마도 황태자일 것이 확실한 소년과 마주 선 채 검을 뽑아 드는 조카를 쳐다보았다.
파라에게 부담되지 않게 응원하겠다며 관중석에 있는 세 사람 중 데스웬은 분명히 황태자를 알아봤을 거다.
라엘에게 황태자가 대회에 참가한다고 말해준 것도 그고, 관중석에서도 카리야의 모습이 보이는 소년의 얼굴도 또렷하게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니까.
‘파라가 정체를 숨긴 황태자에게 한눈에 반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이시려나.’
<모르긴 몰라도 엄청나게 재밌을 거다.>
낄낄거리며 나중 일을 기대하는 카이서스의 목소리를 들으며 라엘은 파라와 로웬이라는 가명을 사용한 황태자를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