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 외전(3)
다음 날 아침 일찍, 라엘은 혼자 하이넨 밖으로 나선 후 장거리 텔레포트로 트럼벨을 왕복하여 누나와 어머니를 데려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폴리모프로 얼굴과 체형까지 바꾸고, 카터스라는 새로운 가명도 사용했다.
제카스와 카터스 두 이름 모두 적색 마탑에 있을 때 엮인 적이 있는 제임스와 카터의 이름을 섞어 만든 가명이었다.
대충 잘 알려지지 않은 데다 아무렇게나 가져다 쓰기에는 딱인 이름들이었다.
오러나 마법을 익히지는 않았어도 아들에게 선물받은 각종 비약들로 노화를 늦춘 덕분에 딸인 메이엔과 자매처럼 보일 정도인 마를렌이 하이넨에 들어서자마자 눈을 빛냈다.
“하이넨은 처음인데 생각보다 멋지구나!”
낯선 도시의 아침 풍경에 아이처럼 들뜬 모습으로 구경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라엘은 어쩐지 죄스러워졌다.
그의 어머니가 여행을 다닌 것은 아마도 이번이 처음일 테니까.
남편과의 사랑의 도피로 타향에 정착했던 것은 여행이라 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건강과 젊음에 도움이 되는 비약만 챙겨 드렸는데… 이제는 가끔 여행도 보내 드려야겠네.’
텔레포트를 맘껏 사용할 수 있는 자신이 나선다면 편안하고 즐거운 여행이 가능할 거다.
라엘은 어머니와 누나를 데리고 파라와 데스웬이 있는 여관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추가로 합류 의사를 밝힌 이후 단체 손님이 주로 이용하는 별채를 통으로 빌렸다.
커다란 거실 하나에 여섯 개의 방이 딸린 별채는 여관 본 건물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서 다른 손님들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각자의 방에 짐을 풀기도 전에 거실의 소파에 누워서 뒹굴던 파라를 발견한 메이엔이 격하게 소리쳤다.
“파라, 너! 엄마 말도 무시하고 멋대로 가출이나 하고!”
오붓한 가족 모임의 시작을 알리는 가출 소녀에 대한 어머니의 불호령에 딸은 최선을 다해서 반박했다.
“하지만 엄마가 무조건 안 된다고 그랬잖아!”
“딱 한 번 허락을 구했을 뿐이잖니! 정말로 허락을 맡고 참가하고 싶었으면 나를 설득하려는 노력이라도 몇 번 더 해봤어야지!”
파라의 변명에 더욱 화가 난 듯 소리치는 메이엔의 말에 라엘은 황당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겨우 한 번 물어보고 그대로 가출한 거였어?!’
“아무리 생각해도 허락받는 것보다는 용서받는 게 더 쉬울 것 같아서……”
눈치를 살피는 듯하면서도 당당하게 말하는 딸의 모습에 메이엔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정말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아이라니까. 당당할 뿐만 아니라 결단력과 판단력도 좋군!>
‘진짜 드래곤들은 다들 저런 사고방식인 건가?’
지금껏 오랫동안 함께 지냈음에도 이해가 가지 않는 드래곤들의 사고방식에 대해 라엘이 진지하게 고민하는 동안 메이엔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딸을 쳐다보았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재차 화를 내며 무어라 말하려는 메이엔을 데스웬이 말리고 나섰다.
“파라는 내가 잘 타이를 테니 그만 진정하도록 해라.”
부친의 말에 메이엔은 더욱 황당해하며 못 미더운 표정이 되었다.
“아버지가요?”
라엘은 우리 강아지라고 말하던 데스웬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그런 사람이 외손녀를 진심으로 혼내는 것이 쉬울까?
아무래도 자신만 몰랐을 뿐 외손녀에게 너무도 약한 데스웬의 또 다른 모습을 다른 가족들은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다.
“후후, 그래도 네가 어릴 때 사고 친 것들에 비하면 가출 정도는 양호한 편이잖니.”
데스웬을 응원이라도 하듯 마를렌이 끼어들어 메이엔의 옛이야기를 언급했다.
“엄마!”
어찌나 당황했는지 얼굴이 빨개져선 소리치는 메이엔의 말에 마를렌은 그저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모친의 말에 라엘도 어린 시절의 누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이를 먹어가며 온화하고 성격 좋은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지만 10대 초반의 그녀는 그야말로 질풍노도 그 자체.
또래 아이들을 주먹으로 휘어잡고 골목대장의 역할을 하며 일일이 세기도 어려울 정도의 사고를 치고 다녔었다.
당시에 아직 어렸던 라엘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면 마를렌이 기억하고 있을 사고의 종류와 횟수는 그보다 많으리라.
마를렌이 꺼내어 든 ‘너 어릴 때는 이것보다 더 심했잖아’ 카드에 메이엔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물러났다.
외조부모의 도움으로 엄마의 꾸중에서 벗어난 파라는 안심했는지 밝은 표정이 되었지만 라엘은 그런 그녀를 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누나는 분노가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나중에 더 큰 분노를 표출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나중에 더 크게 혼날 조카가 안쓰럽기는 하지만 일단 지금은 아니었기에 라엘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이제는 한 아이의 어머니임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처럼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딸을 보며 웃음을 지어 보인 마를렌이 외손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파라야, 이 할머니도 네 엄마의 걱정에는 동감이란다. 큰 대회에 참가해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칠 것 같으면 언제든 그만둬야 한단다? 높은 순위보다는 네가 다치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니까 말이다.”
파라가 걱정되기는 마찬가지지만 괜히 잔소리하는 것처럼 느껴질까 싶어 돌려서 말하는 아내의 모습에 데스웬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음을 흘렸다.
“파라의 실력이면 어지간한 녀석들은 상대조차 안 될 거요. 그럭저럭 쓸 만한 사위에게 어릴 때부터 검을 배운 데다, 내게서도 틈틈이 배웠으니 말이오. 게다가 타고난 재능도 뛰어난 편이지. 걱정하는 건 이해하지만 당신 남편의 안목을 믿고 너무 걱정하지는 말아주오.”
파라의 실력을 믿으라는 데스웬의 말에 마를렌은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당신 안목이 여전한지 확인부터 해야겠는걸요? 제국의 수도는 처음인데, 당신의 안목이라면 좋은 기념품을 골라주겠죠?”
데이트 겸 쇼핑을 하러 가자는 사랑하는 아내의 말은 오러 마스터인 남자조차도 얼굴을 순간적으로 굳게 만들고 말았다.
하지만 정보조직의 수장답게 재빨리 표정을 관리한 그는 웃으며 그 말을 승낙했다.
“당신과 함께라면 얼마든지.”
“후후,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요. 메이엔, 너도 같이 가자꾸나.”
자신도 데려가려는 모친의 말에 메이엔은 파라를 슬쩍 흘겨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저도 아버지의 안목을 확인해 봐야겠으니.”
모녀가 외출 준비를 하기 위해 각자의 방으로 향하자 데스웬은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필요한 것만 미리 정해두고 그것만을 단숨에 구매하는 데스웬 같은 남자의 입장에서 이것저것을 한참을 구경하고, 고르고, 걸쳐보고, 비교하고, 고민하는 등등의 과정을 거치는 두 모녀의 쇼핑은 무척이나 힘겨운 행위였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사랑하는 아내와 외손녀에 대한 그의 희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곧 모녀의 쇼핑에 따라나설 아버지를 안쓰럽게 쳐다보던 라엘이 문뜩 생각난 것을 물었다.
“그런데 카리야 황제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무투대회 같은 걸 주최했대요?”
살짝 힘이 빠져 있던 데스웬이 아들의 물음에 흠, 하고 잠깐 생각하는 소리를 내더니 말했다.
“간단하게 말해서 아들의 명성을 높여주기 위해서지.”
제국의 황태자를 위한 무투대회.
라엘이 은거하고 얼마 후 카리야 황제는 중앙 정치에서 멀리 떨어진 변경백의 아들과 혼인을 올렸다.
대마수의 그릇이었던 루리스가 마인을 사용해 황궁의 학살을 벌였을 때 전대 황제뿐만 아니라 몇 안 되는 황족들도 대부분 죽어버렸었다.
서둘러 후사를 봐야 한다는 신하들의 재촉을 받으면서도 황제로서는 남편을 신중히 골라야 했다.
황실의 권력을 노리지 않으면서도 자신에게 도움이 될 가문.
그런 의미에서 카리야가 선택한 남편의 가문이 제격이었다.
변경백 가문이기에 중앙의 권력과 거리는 멀지만 변경백이기에 지닐 수 있는 강한 군사력은 황제의 권위를 뒷받침해 줄 수 있으니까.
그 의도대로 황제의 남편은 일선에는 거의 나서지 않고 내조했고 남편의 부친인 변경백은 황제의 충성스러운 지지자로서 힘을 보탰다.
아무튼, 황제는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임신을 했고 1년 뒤에 지금의 황태자를 낳았다.
십수 년이 흐른 지금 개최된 무투대회가 그 황태자를 위한 것이라니.
그러고 보니 파라에게서 무투대회에 대해 들었을 때 이상한 점을 몇 가지 느꼈던 라엘이었다.
황제가 직접 주최하는 제국 무투대회라는 거창한 이름과는 달리 참가는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청소년들만이 가능했다.
대외적으로는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유망주를 발굴하고 지원하기 위함이라고 했지만…… 사실 황제가 아들의 이름을 널리 알리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무투대회까지 열어가며 황태자의 명성을 높이려 한다니… 꽤나 믿음직한 아들인가 보네요.”
“듣자 하니 현역 황실 기사들과의 대련에서도 밀리지 않는다더구나.”
“확실히 좋은 성적을 거둘 자신이 있으니 무투대회까지 연 거겠죠.”
제국 황실 기사와도 겨룰 정도의 실력이면 또래들 수준에서 우승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카리야 황제나 제국의 고위층들이 미처 생각지 못한 게 있다면 아들을 띄워주려는 무투대회에 내 외손녀 파라가 참가한다는 거지.”
“황태자를 띄워주려고 개최한 무투대회에서 파라가 우승하면 재미있기는 하겠네요. 그런데 파라가 우승까지 할 수 있을까요?”
“이미 황태자는 물론 무투대회에 참가할 만한 아이들의 실력은 파악해 뒀다.”
우승을 노리기에 충분하다고 확신에 차서 말하며 씨익 웃어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에 라엘도 마주 웃어 보였다.
<쯧, 애들 노는 대회에 어른들이 유치하게 뭐 하는 건지…….>
카이서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혀 차는 소리를 내며 한심해했지만 원래 인간 남자들이란 나이가 먹어갈수록 더 유치해지곤 하는 존재였다.
두 사람의 음흉한 미소도 잠깐, 이내 쇼핑하러 갈 준비를 마치고 거실로 돌아온 마를렌과 메이엔이 데스웬의 팔을 양옆에서 붙잡았다.
조금이나마 피로를 나누기 위해 데스웬이 라엘에게 함께 가자는 듯한 시선을 보냈으나 조금 전 의기투합하며 웃던 라엘은 냉정하게 시선을 피했다.
꼼짝없이 쇼핑에 끌려가게 된 데스웬은 전장에 나서는 듯한 비장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남들이 보기엔 부부와 딸의 오붓한 외출이지만 말이다.
세 사람이 별채를 나서자 외조부모의 도움으로 꾸중에서 벗어나자마자 피곤하단 핑계로 자신의 방으로 도망쳤던 파라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외삼촌, 엄마 나갔어요?”
“그래. 네 외할머니와 함께 외할아버지를 쇼핑에 끌고 가셨지.”
쇼핑에 끌려간 아버지의 행운을 빌어주는 라엘의 모습에 파라는 환한 표정이 되었다.
“헤헤, 그럼 적어도 해가 진 이후에나 돌아오시겠네요.”
참고로 아직 점심때도 되지 않은 오전이었다.
거의 한나절을 쇼핑할 것이라 예측하는 파라의 모습에 라엘은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파라는 희희낙락하며 방에서 자신의 돈주머니를 챙겨 나왔다.
“그럼 저도 하이넨 구경 좀 하고 올게요!”
“곧 있을 무투대회 준비는 안 하고?”
“외삼촌은 휴식을 취해주는 것도 중요하다는 거 몰라요? 준비는 내일부터 할 거에요. 게다가 외할아버지도 오늘은 힘들 테니 내일부터 도와달라고 하려고요.”
핑계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오러 마스터인 데스웬의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많은 도움이 될 테니까.
“그래, 다녀오렴. 나는 숙소를 지키고 있을 테니까.”
어머니와 누나의 쇼핑에 따라가는 것도, 말괄량이 조카의 도시 탐험에 따라가는 것도 피곤할 것이 분명했기에 라엘은 숙소에 남는 것을 택했다.
“엄마랑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돌아오기 전에 올게요!”
라고 말하며 숙소를 나선 파라였으나 해가 진 이후 메이엔과 마를렌, 데스웬이 돌아왔을 때도 파라는 돌아오지 않았다.
라엘이 미리 걸어둔 마법으로 파라의 상태와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걱정은 하지 않았으나 왜 늦는지 다들 궁금해했다.
그리고 해가 지고도 한참이 지나 달이 떠올랐을 때쯤 숙소로 돌아온 파라는 잔뜩 흥분한 기색으로 다짜고짜 소리쳤다.
“반드시 우승하고 말 거에요!”
무투대회에 참가한 이상 우승을 노리는 것은 이상할 게 없지만 나갈 때와는 달리 잔뜩 흥분한 기색인 파라의 모습에 라엘과 그의 부모, 누나는 어안이 어리둥절해했다.
의아해하는 가족들의 시선에도 파라는 아무런 설명 없이 열망에 가득 찬 눈으로 투지를 불태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