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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 드래곤-144화 (완결) (144/150)

144화 - 뒷이야기

아무것도 없고, 빠져나갈 곳도 없는 공간 속에서 대마수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 있었다.

여전히 꿈을 꾸는 채로.

하지만 대마수의 입가에 미소는 사라져 있었다.

자신의 꿈속 모든 땅을 부수고 불태웠다.

하지만 자신이 갖고자 하는 한 여자. 단 한 명의 여자만큼은 붙잡을 수가 없었다.

손에 닿을 정도로 다 잡았다 싶을 때쯤에는 어느새 눈앞에서 사라지더니 자신을 공격하고 멀리 사라졌다.

‘어째서 그녀는 자신에게 붙잡히지 않는 걸까’라는 고민이 순간적으로 들다가도 그녀의 뒷모습이 보이면 머릿속에 가득 차오른 욕망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던 고민마저 삼켜 버렸다.

하지만 그것이 한 번, 두 번, 수백 수천 번이 반복되자 대마수의 정신은 점점 지쳐갔다.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서 가질 수 없는 상대를 끊임없이 뒤쫓기만 하는 가늠할 수조차 없는 긴 시간 속에서 안 그래도 망가져 있던 놈의 정신은 서서히 무너져 갔고, 마침내 대마수는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 * *

아침 일찍부터 문뜩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느낌에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카이서스가 살고 있었단 것도 알려지지 않았던 이 산은 이전까진 다른 이름으로 불렸었지만 카이서스의 모든 것을 물려받은(드래곤으로서의 능력과 육체, 그리고 둥지까지) 내가 눌러앉은 이후로는 드래곤 마운틴, 그러니까 용산으로 불리고 있었다.

현재 대륙에 모습을 드러낸 다른 드래곤이 없으니 그런 이름이 붙을 수도 있지.

그런데 단순해서 직관적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명칭을 너무 대충 지은 것 같단 말이지.

아무튼 산꼭대기 바로 아래에 지은 저택의 창문 밖으로는 완연한 봄을 맞아 겨우내 쌓여 있던 눈이 녹아내리는 용산의 아침 풍경이 보였다.

잠시나마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느낌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날씨가 좋네요.”

뜬금없는 내 말에 맞은편의 안락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아리안 누나가 내 시선을 따라 창밖을 쳐다보았다.

“그러게. 이제 날이 완전히 풀린 것 같아.”

드래곤인 나는 물론 아리안 누나도 각종 아티팩트 덕분에 추위나 더위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기분상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나와 함께 창밖을 내다보던 아리안 누나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사람들을 만나러 가기 정말 좋은 날이야.”

나는 대마수를 처리한 후 내가 지닌 드래곤의 힘을 자각하고 세상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해 카이서스의 둥지가 있던 산에 집을 짓고 조용히 지내는 중이었다.

원래는 이럴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드래곤이라고 알려진 이후로 사방에서 쏟아지는 관심과 접근은 너무나도 성가실 정도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알고 싶어 했다.

뿐만 아니라 기회만 되면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접근해선 목적을 지니고 친해지려 하거나, 대놓고 뭔가를 부탁하려 했다.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서 각국에서도 그러려고 했다.

평범한 드래곤이라면 귀찮게 구는 상대를 아무런 자비 없이 조져놓겠지만 나는 아직 인간의 사고방식을 지닌 데다 문제를 일으켰다간 나와 인연이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피해가 갈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결국 카이서스의 둥지가 있던 산으로 거처를 옮기곤 외부인의 출입 자체를 금지해 버렸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꾸역꾸역 찾아와서 귀찮게 굴려는 사람이라면 나도 참아줄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내가 이사를 한 이후에는 귀찮게 달라붙는 자들이 없었다.

내가 이사를 한 이후에도 접근해서 귀찮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과 연관된 곳들에게까지 책임을 묻겠다고 엄포를 놨더니 곳곳에서 어중이떠중이들의 접근을 잘 막아주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내가 온화한 성격으로 알려졌다지만 괜한 문제가 생겨서 나와 척지게 되는 것은 바라지 않을 테니 말이야.

카이서스는 이 모든 게 내가 지닌 드래곤의 힘에 가해지는 세계의 섭리일 거라 했다.

정말이지 뭐든지 섭리 하나로 설명이 다 된다니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했다.

그렇기에 나와 아리안 누나가 머물고 있는 드래곤 마운틴에 손님이 찾아오는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물론 내가 초대한 손님이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슬슬 우리도 출발해 볼까…….”

내가 창밖의 하늘을 쳐다보며 시간을 가늠하자 기다렸다는 듯 통신구가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라엘? 우린 다 모였는데 너는 언제쯤 도착하니?

어머니는 드래곤이 되어버린 아들이 오랜만에 온다는 생각에 들뜬 기색이었다.

“이제 출발할게요.”

-응? 그게 무슨 소리니? 이제 출발하면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아?

그나저나 어머니는 아직도 자식의 능력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걱정 마세요.”

나는 통신구를 내려놓고 그대로 머릿속에 외갓집의 위치를 떠올렸다.

그리고 마나를 움직여 공간을 이동하면… 짜잔!

“준비할 필요도 없이 금방 올 수 있으니까요.”

“라엘!”

방금 전까지만 해도 먼 곳에 있어 통신구를 통해 연락하고 있던 아들이 눈앞에 나타나자 어머니는 깜짝 놀라며 내 이름을 불렀다.

얼굴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와락 안아주는 어머니의 모습에 나도 웃으며 마주 안았다.

“이렇게 금방 올 수 있으면서도 왜 지금까지 오지 않은 거야?”

곁에 있던 메이엔 누나가 툴툴거리며 말하자 나를 안아주던 어머니가 눈을 흘기며 쳐다보았다.

“넌 간만에 동생 얼굴을 보자마자 잔소리부터 하는 거니?”

가볍게 타박하는 어머니의 말에 누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엄마는 저번에 술 마시고 라엘 보고 싶다고 눈물까지 보여놓곤.”

누나가 그 이야기를 하자 어머니는 당황한 듯 허둥거렸다.

“얘는 갑자기 무슨 쓸데없는 소릴!”

그래도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아서 서운하셨던 건 사실인 모양이다.

“죄송해요. 앞으로는 자주 올게요.”

“괜찮아. 널 귀찮게 하는 사람들이 우리까지 귀찮게 굴까 봐 그동안 오지 않았던 거잖니.”

나에게 선을 대거나, 뭔가를 부탁하려는 사람들이 가족까지 귀찮게 구는 것을 막기 위해 내가 일부러 드래곤 마운틴에만 있던 것을 어머니는 이해해 주었다.

지금에서야 가족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도 내가 사람들에게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 잦아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 경고와 같은 부탁을 받은 각국의 지도자와 권력자들이 손을 써준 덕분이다.

지금도 저택 인근에는 꽤나 괜찮은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모습을 숨긴 채로 지키고 있었다.

그들의 역할은 어떻게든 나와 인연을 만들어볼 수 없을까 내 가족들을 상대로 기웃대는 사람들을 쳐내는 것.

내게는 훤히 느껴지는 사람들이지만 어중이떠중이들은 간단하게 패대기쳐서 내쫓기에는 충분하다.

이런 조치 등등으로 괜찮을 거란 판단을 내렸기에 이제야 가족들을 만나러 온 거다.

간만에 보는 어머니와 누나가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며 웃던 중 누나의 손을 잡은 채로 뒤에 숨어 있던 서너 살 정도의 여자아이가 눈치를 살피며 쳐다보다 조심스레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파라예요. 외삼촌이세요?”

똘망똘망한 눈으로 쳐다보며 묻는 조카의 물음에 나는 웃으며 몸을 숙여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래. 내가 너의 외삼촌인 라엘 드리안이란다. 많이 컸구나? 네가 갓 태어났을 때는 정말 조그마했는데.”

그 조그맣던 갓난아이가 언제 이렇게 큰 거지?

내가 인사를 받아주자 파라는 환한 얼굴로 쫑알쫑알 말하기 시작했다.

“엄마한테 외삼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어릴 때 외삼촌이 친구들한테 맞고 울면서 돌아오면 엄마가 가서 막 혼내줬다고 했는데 진짜예요? 그럼 외삼촌보다 엄마가 더 세요?”

어린아이의 전혀 배려가 없는 순수한 질문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누나는 그 말이 나올 줄 몰랐는지 당황한 얼굴로 시선을 돌렸고 어머니가 그런 누나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내려쳤다.

“얘는 애한테 무슨 쓸데없는 소릴 한 거야?”

“하, 하하……”

거짓말은 아니었기에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그때 아리안 누나가 고개를 숙여 파라와 눈을 맞추었다.

“안녕? 내가 누군지 알겠니? 네가 갓난아기일 때 내가 안아주기도 했는데.”

아리안 누나의 물음에 파라는 조금 전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듣는 것도 잊고 생각에 잠겼다.

“후우움… 아! 외숙모예요? 엄마가 외삼촌이 자기한테 과분한 미녀랑 결혼했댔거든요!”

아니, 이걸 이렇게 꺾어서 공격한다고?!

애써 화제를 돌린 것이 무의미해지는 예상치 못한 정신공격이다.

정말 아이들의 순수함은… 상대하기가 너무 힘드네.

어머니가 누나의 등짝을 후려치는 소리가 더 커졌다.

파라의 악의가 전혀 없는 공격에 카이서스도 웃으며 말했다.

<아리안만 네 천적인 줄 알았더니, 요 맹랑한 꼬맹이도 네 천적이었군! 크하하핫!>

“일단은 앉아서 이야기하는 게 어떠냐. 언제까지 서서 이야기할 생각이냐?”

외할아버지가 파라를 번쩍 안아 들며 말했다.

귀여운 증조 외손녀 때문인지 외할아버지는 이전처럼 까칠하지 않았다.

간단한 다과와 함께 테이블에 둘러앉은 우리는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내가 사람들에게서 모습을 감춘 이후 세상은 잠시 소란스러웠다.

인간이었으나 드래곤이 되었고, 대륙 전체를 위협할 뻔했던 대마수를 토벌한 영웅이 갑자기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이내 사람들은 이전과 같은 일상을 보내기 시작했고 각국과 여러 사람의 활약으로 내가 원하던 대로 점차 사람들 사이에서 거론되는 일이 줄어들었다.

여러모로 나 때문에 일상을 방해받던 우리 가족도 일상으로 돌아가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내 가족이라는 신분으로 각종 연회의 초대를 받았지만 어머니는 원래 성격이 그런 탓에 대부분의 연회 초대를 거절하고 집에만 있었다.

누나도 초대를 잔뜩 받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연회의 분위기나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이 자신과는 맞지 않다며 밖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다였다.

매형이야 뭐… 늘 그렇듯 자신의 일에 열심히란다.

외할아버지는 후배 학자들의 연구에 가끔씩 조언을 해주고, 증조 외손녀의 재롱을 보며 만족하는 은퇴 생활 중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형, 동생은 타이런 제국과의 전쟁 이후 양지로 올라온 세인트 혼을 관리하고 대륙 각지를 직접 돌아다니며 첩보 활동을 했다.

특히 아버지는 오러 마스터임에도 직접 현장 곳곳을 돌아다닌단다.

어머니는 집안의 남자 셋이 그렇게 곳곳을 쏘다니는 것에 무척이나 걱정이 많았다.

“이러다가 큰아들과 막내아들이 결혼하는 모습은 못 볼지도 모르겠어~”

라는 걱정.

뭐, 안 할 수는 있겠지만 못 하지는 않지 않을까.

내 형제들도 나름 배경이라든가 능력이 받쳐주니까 말이야.

가족들 외의 다른 사람들이라면… 우선 스승님.

스승님은 대마수의 일 이후 스스로 책임을 지시겠다며 적색 마탑주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적색 마탑의 새로운 마탑주가 된 것은 내가 적색 마탑에 처음 갔을 때부터 만났던 칸델 씨.

스승님은 마탑주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 홀로 대륙 곳곳을 여행 중이시라고 했다.

이따금 통신기로 연락해 보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여행을 즐기는 것이 나름대로 마음에 드시는지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로라스 왕자는 드래곤이 된 나에게 예전에 마법을 배웠다는 이력 덕분에 크라우드는 물론 타국에서도 한창 영향력을 키워가며 크라우드 왕위의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다져가는 중이었다.

인어왕국의 인어 공주인 타밀레와도 이따금 만나며 인어왕국과의 교역을 확대해 가며 쏠쏠한 재미를 보는 중이란다.

듣자 하니 로라스 왕자와 타밀레 공주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있다는데… 뭐, 나중에 두 사람의 관계 때문에 뭔가 복잡하고 소란스러운 일이 생길 것 같지만 그건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겠지.

타이런 제국은 카리야 여황과 그 아래의 사람들의 능력이 좋아서인지 전대 황제가 말아먹기 이전으로 순조롭게 복구하는 중이라고 했다.

뭐, 타이런 제3 마법병단장이었던 유리아나 각 마탑의 마탑주 등은… 이따금 직접 봐서 딱히 근황이 궁금하진 않았다.

드래곤 마운틴에 은거했는데 어떻게 직접 봤냐고?

그 마법에 미친 인간들이 마법에 대해 물을 게 있다고 다짜고짜 찾아들 오는데 어쩌겠어?

나름 권력과 능력을 지닌 사람들인 데다 마법사들이라 그런지 다들 똥고집이 있어서 각국에서 말려도 듣지도 않고 말이야.

다짜고짜 찾아올 때마다 드래곤 마운틴에 돌아다니며 죽치게 놔둘 수도 없어서 둥지로 데려와 차나 한 잔씩 대접하고 잘 달래서 보내곤 했었다.

다른 사람들의 근황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었다.

나쁘지 않다.

정말로.

아리안 누나와 단둘이서 알콩달콩 지내는 것도, 가끔씩 밖으로 나와 가까운 사람들을 만나 웃고 떠드는 것도.

나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려 가출했던 시절의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일상.

드래곤의 수명까지 어느 정도 얻게 된 나는 언젠가 가까운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는 것을 보게 되겠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고 드래곤의 정신력은 내가 이겨낼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아리안 누나… 나도 최대한 그녀가 높은 경지에 올라 긴 수명을 얻도록 돕겠지만 언젠가 나보다도 먼저 세상을 떠나겠지.

그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그만큼 나는 더욱 아리안 누나와 함께하는 시간을 행복하고 즐겁게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것이 섭리이니까.

나는 옆에 앉아 있던 아리안 누나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갑자기 손을 잡는 내 행동에 아리안 누나는 잠깐 당황한 기색이었으나 이내 마주 웃으며 손을 잡아주었다.

앞으로 어떤 일을 겪을지 모르겠지만 내 주변 사람들이 함께해 줄 거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 있는 성질 나쁜 드래곤도 함께해 줄 테니까.

<원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함께하는 거지만 말이야. 그런데 갑자기 뭔 쓸데없는 생각이냐?>

카이서스가 의아해하며 묻는 말에 나는 파라의 재롱에 웃음을 터뜨리는 가족들을 보며 웃었다.

‘그냥.’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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