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 대마수
쿵-! 쿵-!
그것은 자신 안에서 울리는 커다란 소리에 천천히 눈을 떴다.
누군가 듣는다면 그 거대한 소리와 불길함에 곧장 정신을 놓아버릴 정도의 소리.
하지만 그것은 그 소리가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자신의 심장박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막과 혐오스럽게 꿈틀거리는 두꺼운 혈관과도 같은 것들.
그것은 자신을 둘러싼 막을 날카로운 손톱을 뻗어 찢어내기 시작했다.
두꺼운 막이 찢겨져 나가며 바깥의 빛이 새어 들어오자 그것의 샛노란 눈동자가 바깥을 응시했다.
그어어-
지금껏 자신을 품고 있었던 고치 밖에서부터 흘러 들어오는 바깥의 공기에 낮게 울음소리를 흘린 그것은 이내 고치의 막을 완전히 찢어버리며 바깥으로 발을 내디뎠다.
쿵!
발을 내딛는 것과 동시에 엄청난 마기로 인해 공기가 진동하며 울리는 소리를 냈다.
집채만 한 크기의 그것은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었으나 인간의 모습은 아니었다.
머리 위에는 한 쌍의 뿔이 기괴하게 뒤틀린 채로 솟아 있었다.
마치 전설로 전해지는 타이탄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전설 속의 타이탄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역겨운 모습이었다.
그것의 전신에서는 검은 마기가 끊임없이 꿀렁이며 형체만을 드러내 보일 뿐 피부나 세세한 외견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꿀렁이는 마기가 마치 그것의 얼굴이 녹아내린 듯 보이게 했다.
제대로 보이는 거라고는 검게 꿀렁이는 마기 사이에서 보이는 샛노란 두 눈과 반쯤 벌린 입 사이로 보이는 새까만 공허뿐이다.
치이이익-!
온몸에서 끊임없이 꿀렁이는 마기가 조금씩 흘러나와 근처의 대지를 검게 물들이고 초목을 썩어 문드러지게 했다.
샛노란 눈을 굴리며 주변을 둘러보던 그것은 자신의 부패한 영혼에 느껴지는 허기에 낮은 울음소리를 흘리며 본능적으로 허기를 달래줄 먹잇감이 가득한 방향을 응시했다.
[배가… 고프다…….]
마기에 영혼이 부패해 자신을 잃어버린, 루리스라는 이름을 지녔었던 대마수는 근처에서 느껴지는 수많은 영혼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배가… 고프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대마수는 점차 속도를 높이더니 이내 바다로 뛰어들어 섬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저 자신의 썩어가는 영혼의 허기를 채우기 위해 다른 영혼들을 흡수하려는 본능뿐이었다.
넘쳐나는 힘으로 파도의 저항마저 짓누르며 빠르게 나아가던 대마수가 마침내 육지에 도달했다.
온몸에 들끓는 열기로 몸의 물기를 증발시키고, 거칠게 몸을 흔들어 남아 있는 소금기마저 털어낸 대마수는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덩치에 빠른 속도로 달리다 보니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땅이 울렸다.
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자들 중 프레첸의 궁정마법사 휴메인이 기가 찬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드래곤의 대마법사 말대로군요. 정말로 클레멘스 방면으로 곧장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 말에 그의 곁에 서 있던 프레첸 제국 황실 기사단장 리카르도도 눈을 살짝 찡그리며 말을 더했다.
“실컷 패주고 도망치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는데… 생각보다 만만찮겠어.”
멀리서도 느껴지는 대마수의 강대한 마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리카르도는 이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이름 좀 있다 하는 자들만 불러 모은 이유가 이것 때문이니까.”
그렇게 말한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갑시다.”
직급이나 실력 모든 면에서 이 자리에 모인 오러 마스터들의 리더나 다름없는 그가 땅을 박차며 말하자 이미 준비를 끝마치고 있던 기사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은 오러 마스터들이 어떤 명마조차 따라잡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대마수 역시 그들의 접근을 알아차렸는지 눈동자를 굴려 그들을 잠깐 쳐다보았다.
하지만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는지 이내 자신이 노리는 곳을 향해 계속해서 달렸다.
“고얀! 마수 주제에 우리를 무시하다니!”
놈이 자신들보다 본능을 우선시하는 모습에 선두에 서서 달리던 리카르도가 노기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검을 휘둘렀다.
오러가 넘실거리는 그의 검이 달리고 있던 대마수의 다리를 베었다.
“…이게 무슨?!”
거대한 나무와 같은 다리를 단숨에 베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움직임에 지장이 생기게 할 생각으로 첫 공격부터 한껏 오러를 담아 휘둘렀다.
그럼에도 그리 깊은 상처를 입히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 검은 피가 꿀렁이며 흘러나오던 상처조차 순식간에 아물어 버리며 아무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가죽이 질긴 것으로도 모자라 재생력도 지랄이군!”
제대로 된 공격이 먹혀 들어가지 않자 리카르도가 대마수의 반격을 대비해 재빠르게 뒤로 빠지며 소리쳤다.
그러나 대마수는 그런 그를 신경 쓰기는커녕 아무 일 없다는 듯 계속해서 움직일 뿐이었다.
“저, 저 망할 마수 놈이!”
리카드도 역시 대마수가 자신을 아주 개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분통에 차 소리쳤다.
제국의 황실 기사단장이자 대륙의 오러 마스터들 사이에서도 손에 꼽히는 그가 이런 무시를 당할 일은 없었으니까.
“어떻게 할까요.”
자신들보다 뛰어난 오러 마스터인 리카르도가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못한 모습에 함께 왔던 오러 마스터 중 하나가 긴장하며 물었다.
그 말에 리카르도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뭘 어쩌긴 어쩌겠나. 우리가 맡은 역할은 놈을 유인하는 것이니 저놈의 시선을 끌어야지. 아무리 피부가 질기고 재생력이 뛰어나도… 일단 베이기는 하니까. 한곳을 집중적으로 계속해서 노리다 보면 놈도 계속 무시하진 못하겠지.”
한마디로 때린 곳을 또 때린다는 계획이었다.
아무리 질긴 가죽이라도 오러에 베이긴 베인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같은 곳을 계속 공격해서 큰 상처를 입힌다는 거다.
그래 봐야 조금 전의 재생력을 생각한다면 금방 아물어 버리겠지만 그들의 목적은 유인.
놈이 신경질 내며 시선을 돌리는 것 정도면 충분하단 거다.
“우릴 무시한 것을 후회하게 해주세!”
사실 무시당한 것은 아직 리카르도 혼자였으나 상관없었다.
리카르도가 대마수에게 들으라는 듯 우렁차게 소리치며 재차 오러가 휘감긴 검을 마수의 다리를 향해 휘두르고는 곧장 뒤로 빠졌다.
그의 뒤를 이어 곧장 달려온 타이런 제국의 황실 부기사단장이 리카르도가 벤 곳을 그대로 똑같이 베고 뒤로 빠졌다.
그리고 그 뒤를 또 다른 기사들이 이어서 베고 뒤로 물러나는 식으로 계속해서 같은 곳을 베어갔다.
리카르도의 공격에 베인 직후 대마수의 상처는 빠르게 아물어갔으나 계속해서 이어지는 공격에 아무는 속도보다도 빠르게 상처가 커져가기 시작했다.
점점 커져가는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피가 늘어나자 그제야 통증을 느낀 듯 대마수는 자신의 발치에서 깔짝대는 인간들을 샛노란 눈으로 힐끗 쳐다보았다.
부우웅!
한참 대마수의 뒤를 쫓으며 다리를 번갈아가며 공격하던 리카르도가 다급히 소리쳤다.
“조심들 하게!”
자꾸만 자신의 다리를 건드리자 화가 난 듯 대마수가 달리던 와중에도 긴 팔을 날파리 내쫓듯 휘둘렀다.
그러나 대마수가 가볍게 휘두른 공격조차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엄청난 속도로 휘둘러지는 커다란 손바닥에 다들 황급히 뒤로 몸을 날렸다.
막 공격하기 위해 달려들던 차례의 기사도 황급히 피하려 했으나 대마수의 손끝에 스치고 말았다.
“크헉!”
오러로 몸을 보호한 데다 겨우 손끝에 스친 것에 불과함에도 쉘던 왕국의 기사는 속이 진탕된 듯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브라운 경!”
그 모습에 다들 경악하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빠르게 전진하는 대마수의 속도에 의해 뒤에 남겨진 브라운은 땅에 쓰러진 채 움찔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오러를 견딜 정도로 질긴 가죽에 이어 최상위권의 오러 마스터를 단숨에 전투 불능으로 만들어 버렸다.
“브라운 경은 지원부대가 도와줄 걸세! 우리는 계속해서 놈을 자극한다!”
순간 흔들리는 오러 마스터들을 향해 힘껏 소리친 리카르도가 빠르게 아물어가는 대마수의 다리를 향해 재차 공격을 가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타이런 제3마법병단장 유리아가 혀를 차며 말했다.
“오러 마스터들이 단체로 달라붙어도 저런 상황이라니… 그쪽의 제자가 어째서 소수 정예여야만 한다고 했는지 알겠네.”
숫자가 많을수록 대마수로 인한 피해만 늘어날 테니까.
유리아는 입에 물고 있던 담배의 연기를 훅 불어내고는 대답을 기대하듯 근처에 있던 카밀라를 쳐다보았다.
유리아의 말에도 카밀라는 어두운 표정으로 멀리 보이는 대마수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 모습에 유리아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다른 마법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슬슬 우리도 움직이죠.”
“그러지.”
프레첸의 녹색 마탑주, 휴메인이 고개를 끄덕이곤 스태프를 들어 올렸다.
그의 스태프의 끝에 녹색의 기운이 서리는 것과 동시에 다른 자들의 스태프와 완드에도 각자의 마법이 깃들기 시작했다.
“놈은 우리 생각보다도 빠르니 거리 유지에 주의하게!”
휴메인이 쏘아 보낸 녹색의 구체가 달려가던 대마수의 얼굴을 뒤덮었다.
질기고 튼튼한 가죽이라면 몰라도 대마수조차 눈은 약점인 모양이다.
얼굴을 뒤덮은 산성마법이 샛노란 눈으로도 스며들자 대마수가 고통스러운 괴성을 토해냈다.
그 뒤를 이어 날아온 번개와 바위로 이루어진 창, 얼음 덩어리가 대마수의 어깨와 머리 위, 가슴팍을 두드렸다.
[그아아!]
대마수는 손을 빠르게 휘저어 얼굴을 덮은 산성과 어깨를 뒤덮은 뇌전, 머리 위의 바위 조각과 가슴을 덮은 서리를 털어냈다.
그 짧은 시간에도 대마수의 피부와 눈은 빠르게 아물어가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크게 상처를 입지 않은 모습이었으나 대마수의 기세가 조금 바뀌었다.
자신을 공격하는 날파리들을 무시하고 배를 채우러 갈 생각이었으나 자꾸만 화가 났다.
게다가 주변의 날파리들은 수는 적었지만 무척이나 맛있어 보였다.
만찬이 차려진 곳으로 가는 도중에 집어 먹으면 괜찮을 듯한 식전 요리.
[그아아아!]
대마수는 울부짖으며 가장 가까운 곳의 날파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조심하십시오!”
계속해서 다리를 공략하고 있던 오러 마스터들이 비명과도 같은 경고를 내질렀다.
막 대마수의 다리를 베고 물러나려던 리카르도가 이를 악물었다.
좀 전의 일로 놈의 공격이 얼마나 강한지는 이미 깨달았으나 그는 피하기만 할 생각이 없었다.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오러를 휘두르려던 순간.
콰앙-!
검붉은 빛을 띠며 날아온 화염이 휘둘러지던 대마수의 오른팔에 부딪치며 폭발했다.
지옥의 화염이라 불리는 헬파이어에 대마수의 공격이 주춤한 사이 리카르도는 무사히 오러를 휘둘러 놈의 팔에 작은 상처를 남기고 뒤로 물러날 수 있었다.
자신을 방해한 자를 찾기 위해 고개를 돌린 대마수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일변했다.
[그어어어어!]
자신을 향한 공격들을 그저 귀찮다는 듯 쳐내며 꿋꿋하게 클레멘스를 향해 나아가던 대마수가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놈의 움직임이 바뀌었네!”
가장 가까이에 있었기에 먼저 이변을 눈치챈 리카르도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알렸다.
가까이 붙어 있던 오러 마스터들이 대마수의 공격을 대비해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놈이 제대로 된 반격을 시작한다면 가장 위험한 것은 붙어 있던 그들이었으니까.
하지만 대마수는 방향만 바꿨을 뿐 여전히 그들을 무시하고 달렸다.
“저, 저 망할 짐승이! 언제까지 우릴 무시할 셈이냐!”
기가 찰 정도로 깔끔한 무시에 프레첸의 황실 기사단장으로서 리카르도는 정당한 분노를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대마수가 움직이는 방향이 더 문제였다.
“놈이 마법사들을 향해 가고 있소!”
지금껏 묵묵히 대마수만 공격하고 있던 타이런 황실 부기사단장이 다급히 소리쳤다.
그의 말대로 놈이 향하는 곳은 마법사들이 있는 방향.
자신들을 우선 공격할 거란 생각에 잠시 떨어진 틈에 대마수를 놓치고 만 오러 마스터들이 황급히 다시 놈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바로 곁에 있던 오러 마스터들은 무시하고 자신들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오는 대마수의 모습에 대마법사라 불리는 사람들도 기겁했다.
“아니, 저 미친놈은 왜 오러 마스터들은 놔두고 이쪽으로 달려드는 거야?!”
유리아가 빠르게 가까워지는 대마수의 모습에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치며 조금이나마 발을 묶기 위해 마법을 시전했다.
그 판단은 그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기에 대마법사라 불리는 자들의 강력한 마법 여러 개가 대마수를 향해 날아갔다.
하지만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대마수는 두 팔을 휘둘러 마법을 쳐내면서 계속해서 다가왔다.
“음, 계획과는 다르긴 해도 유인은 확실히 할 수 있겠군. 다들 약속 장소로 이동하세!”
녹색 마탑주 휴메인이 당황하는 다른 사람들을 추스르며 소리쳤다.
유인을 맡은 것은 오러 마스터들이고 마법사들이 지원하는 계획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마수가 달려들 때를 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점차 다가오는 대마수의 모습에 마법사들은 공격을 멈추고 각자의 발밑에 있던 마법진을 발동했다.
하나둘 밝은 빛과 함께 마법사들이 자리에서 모습을 감췄다.
갑자기 노리던 대상이 사라지자 멈칫하던 대마수는 이내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 듯하더니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