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 준비
-…그가 마계의 힘을 얻었다고 했나요?
타이런 제국의 새로운 황제인 카리야가 통신구 너머에서 심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회의장의 넓은 탁자 위에는 타이런 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와도 연결된 통신구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두 개의 제국과 다른 왕국들의 지배자들이 모으는 회담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대륙 전체에 명성이 퍼진 내가 마인을 만들어낸 작자가 마계의 힘을 직접 받아들여 괴물로 변하는 중이라는 것을 알렸기에 회담은 빠르게 성사될 수 있었다.
그것도 여러 나라의 지배자들을 빠르게 한자리에 모이게 할 수 없었기에 여러 개의 통신구를 이용해서 화상회의를 하기로 한 것이다.
-마계의 힘이라니, 말로만 들어서는 어느 정도의 위험인지 짐작하기 어렵군.
카리야 황제의 말에 뒤이어 말을 한 것은 프린델 왕국의 국왕.
프린델은 루리스가 일을 벌였던 타이런 제국이나 크라우드 왕국과는 무척이나 떨어진 남쪽의 왕국이었기에 아직까지는 크게 위협을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9서클의 마법들은 물론 브레스에도 맞설 수 있을 정도더군요. 아마 지금도 일국의 군대는 혼자서도 상대가 가능할 겁니다.”
나라 하나를 상대할 수 있을 거란 말에 여러 사람의 얼굴에 불신의 기색이 떠올랐다.
-개인이 나라를 상대하는 것이 가능하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놈은 마계의 힘을 끌어다 쓰고 있습니다. 이미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었기에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마계의 힘에 적응해서 더 강해질 테죠.”
인간이 아니란 나의 말에 지금껏 듣고만 있던 또 다른 제국, 프레첸 제국의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처럼 말인가? 브레스라니… 그것은 드래곤들의 전유물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야.
약간의 의심이 섞인 눈초리로 묻는 황제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입을 다문 채 나를 쳐다보았다.
어차피 더 이상은 감출 생각도 없었긴 하지만 직접 밝히려니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실 저는 드래곤의 가호를 받은 게 아니라 힘 그 자체를 받은 겁니다. 브레스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것도 그 때문이고요. 절반은 드래곤에 가까워졌으니 지금 하신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전 아직은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절반은 드래곤이나 다름없다는 고백에 다들 놀란 기색이 역력했지만 프레첸 제국의 황제는 가슴께까지 내려오는 새하얗게 센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인반룡이라… 그렇군. 드래곤이 직접 그대를 보증했다던 것은 들었으니 거짓은 아니겠지.
블루 드래곤 카락스가 모습을 드러내며 나에 대해 보증해 줬던 일을 언급한 프레첸 황제가 재차 물었다.
-드래곤의 힘을 지닌 그대라면 놈을 상대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텐데? 게다가 그자는 혼자, 자네가 주변의 도움을 받는다면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나.
아무래도 프레첸 제국은 이번 일에 그리 적극적으로 나서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지난번 우리와 타이런 제국의 전쟁 때도 그랬고, 프레첸 제국은 외부의 일에 참견하기 싫어하는 거인과 같은 곳이었다.
“그가 고치를 깨고 나온다면… 아무리 드래곤의 힘을 지닌 저라도 상대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제가 도움을 청하는 것이고요.”
드래곤의 힘으로도 상대를 자신하지 못한다는 말에 각국의 지도자들은 침음을 흘렸다.
이전의 전쟁을 지켜본 자들은 모두 내 힘에 경악했다.
그런 나조차도 어려워하는 적이라니 얼마나 강할지 가늠하기 어렵겠지.
“놈은 이미 이성을 잃고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본능만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서둘러 놈을 처치하지 않는다면 대륙 전체가 위험해질지도 모르죠.”
물론 그 상황까지 가게 되면 섭리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된 드래곤들이 나서겠지만… 그 전에 대륙 곳곳이 파괴될 거다.
덧붙인 나의 말에 이미 그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은 타이런 제국의 카리야 황제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자… 이제는 이성을 잃은 마수가 되어가고 있다 했던가요? 그 대마수에 대한 경고만을 위해 이런 자리를 마련했을 리는 없고, 무엇을 바라는 건가요?
제국의 황제치고는 나긋나긋한 말투이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는 상대를 꿰뚫어 보는 듯한 힘이 실려 있었다.
대마수라, 이성을 잃고 마수가 되어가는 놈에게 딱 어울리는 명칭이군.
<저 아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숙하더니 이제는 그럭저럭 황제 행세를 하게 됐구나.>
이전에 비하면 무척이나 달라진 카리야의 분위기에 카이서스가 살짝 감탄했다.
타이런의 전 황제가 루리스에게 살해당하기 전에도 황위를 찬탈할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이니까.
“놈이 고치를 깨고 나올 때쯤엔 완전하게 변이된 이후일 겁니다. 그때 저를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도움이라… 어떻게 말인가?
프레첸의 황제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어쩌다 보니 왕국의 국왕들은 뒷전이고 두 제국의 황제들이 주도하는 셈이로군.
뭐, 일단은 제국들의 권위가 그만큼 강하니까.
-그대가 말한 대로라면 드래곤의 힘으로도 상대가 힘든데 우리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겠나?
“놈을 상대하는 건 제가 하겠지만 놈을 유인해서 시간을 끌어줄 실력자들이 필요합니다.”
-유인과 시간벌이라… 그것조차도 위험한 일일 테니 실력이 뛰어난 자들이 여럿 필요하겠군.
“예. 각국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내 말에 각국 국왕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흐음.
그 모습에 프레첸의 황제는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대도 보았다시피 그런 실력자들을 내놓는 건 쉬운 일이 아니네. 만에 하나 그런 실력자들을 여럿 잃게 되면 그만큼 국력에 피해를 입게 되는 셈이니 말이야.
그의 말대로 탐탁지 않아 하는 기색의 국왕들이 보였다.
쯧, 아무래도 루리스가 마계의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마계의 힘만을 받아들이면서 세계의 섭리가 끼치는 영향이 줄어든 모양이다.
상식적으로 자신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적을 상대하는 위험한 일에 자국의 최정예들을 선뜻 내놓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뛰어난 실력자들을 내놓았다가 다치거나 죽어서 돌아오면 그만큼 국력의 손실을 입게 된다.
내가 요구하는 것은 수백, 수천의 병사들보다 큰 가치를 지닌 오러 마스터나 고위 서클의 마법사들.
최상위급에 속한 인력들은 아무리 각국의 황제와 국왕이라도 함부로 내어줄 수 없는 존재들이다.
“각국의 지도자들께서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압니다. 그렇기에 하나 약속드리겠습니다. 각국에서 지원해 주실 분들이 최대한 무사히 돌아가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만일 누군가 다치거나 죽는다면 그분이 속한 곳에 제가 빚을 갚도록 하겠습니다.”
사상자가 발생하면 내가 그만큼의 보답을 하겠다는 말의 뜻을 눈치챈 듯 다들 신중하게 생각에 잠겼다.
보통 사람이 보답하겠다면 별로 깊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나는 드래곤의 힘을 지닌 존재.
다들 생각에 잠겨 있는 와중 프레첼 황제는 그리 생각할 것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지원을 보내도록 하지. 프레첼 제국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실력자들로 보내도록 하지.
제국의 이름까지 걸었으니 어중이떠중이를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가장 강하게 나를 떠보는 듯 압박하던 프레첼 황제가 가장 먼저 수락하자 조금 당황스럽긴 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프레첼 제국에 큰 은혜를 입었군요.”
-후후, 아닐세. 이참에 드래곤의 힘을 지닌 자네와 친분을 만들어두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여긴 것뿐이네. 게다가… 괜히 자네에게 밉보여서 악감정을 갖게 하긴 싫거든. 나는 평화롭게 제국을 다스린 성군이 되고 싶지 드래곤의 힘을 지닌 자를 적으로 돌린 암군으로 남고 싶지는 않으니. 게다가 아무리 우리 제국의 황궁이라 해도 메테오나 브레스 같은 규격 외의 공격을 막아낼 수는 없다네, 허허!
황제는 가벼운 농담처럼 웃으며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다른 왕국의 국왕들로서는 심각해질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막말로 내가 미쳐서 그들을 적으로 삼는다면 제국도 아닌 그들의 왕국은 나를 막을 방법이 없을 테니까.
당연히 난 그럴 생각도 없지만.
-우리 쪽도 찬성이에요. 그 작자, 아니, 그것을 해치우는 일이라면 타이런 제국도 힘을 보태겠어요.
루리스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타이런 제국으로서는 당연하다 싶은 반응이었다.
카리야 황제까지 그렇게 말하니 다른 국왕들의 표정은 뭐라 말하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드래곤의 힘을 지닌 자와 두 제국의 황제를 상대로 자신들만 그럴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 간이 큰 국왕은 없을 테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 크라우드 왕국은 라엘 자작의 요청에 이미 준비를 하고 있소이다.”
내가 속한 곳이 크라우드기에 지금껏 가만히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우리 국왕 전하까지 그렇게 말하자 통신구 사이로 눈치를 살피던 다른 왕국의 국왕들도 반쯤 포기한 표정이 되었다.
그렇게 고치에서 나올 대마수를 유인하고 시간을 끌 유인조가 준비되기 시작했다.
카리야 황제는 루리스에 대한 복수 때문에라도 반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프레첼의 황제가 나를 떠보는 듯하다가 적극적으로 지지한 덕분에 일이 쉬워졌다.
‘프레첼 제국에서 협조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는데.’
각국의 수장들과 전문가들이 협약의 세세한 부분을 논의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생각하자 카이서스가 낄낄대며 말했다.
<프레첼 황가에는 드래곤의 피가 조금이나마 섞여 있으니까. 아무래도 너에게 친근함을 느낄 수밖에 없겠지.>
‘…엥?! 그런 건 처음 듣는 이야긴데?’
프레첼 제국의 황실이 드래곤의 핏줄이었다는 비밀을 들은 내가 깜짝 놀라며 묻자 카이서스는 재차 웃었다.
<그야 당사자들도 모를 테니까. 옛날에 프레첼 제국을 세운 놈은 사실 어떤 드래곤이 유희 중에 낳은 자식이었거든. 그 녀석은 자신의 혈통도 모른 채 영웅이 되어 제국을 세웠고… 그 녀석의 후손도 드래곤의 피가 조금이나마 흐르는 탓에 커다란 제국을 다스리면서도 주변을 함부로 침략하지 못한 거지.>
드래곤에게 가해지는 섭리의 영향이 후손에게도 이어져서 세계를 어지럽힐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단 건가?
어쩐지 프레첼 황가의 비사를 이야기하는 카이서스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애정.
‘어… 혹시 설마 그 드래곤이……?’
그러고 보니 프레첸 황제의 머리는 노화로 인해 하얗게 세었지만 군데군데 프레첸 황가의 상징과도 같은 타는 듯 새빨간 머리색이 남아 있었다.
<크크크크.>
대답 대신 웃음만 흘리는 카이서의 반응에 나는 살짝 마음이 복잡해졌다.
프레첸 황제가 협조적으로 나온 이유가 설마하니 내게서 낯선 조상의 느낌을 받아서 같은 이유일 줄이야.
통신구를 통한 정상회담에서 결정은 금방 내려졌으나 세세한 부분을 정하는 것은 조금 시간이 걸릴 듯했다.
다들 자국의 정예는 최대한 아끼고 타국의 뛰어난 정예들을 내놓게 하고 싶을 테니까.
결국 그런 견제들 때문에 각국은 최대한 정예들을 내놓을 수밖에 없을 거다.
그건 각국이 알아서 할 일이니 나는 협약에 관한 것은 각국의 전문가들에게 맡겨두고 밖으로 나왔다.
놈이 고치를 깨고 나오면 금방 알아챌 수 있도록 준비도 해뒀고, 놈에게 쓸 함정도 재료를 마저 모아서 준비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 전에…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리안 누나는 볼일이 있어 어디로 나갔는지 집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흠, 저녁거리라도 사러 나간건가.
나는 거실 중앙에 놓아둔 의자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서스의 심장이 내 몸에 완전히 녹아든 이후로는 피로를 느낀 적이 없었지만 지금은 무척이나 피곤했다.
몸의 피로가 아닌 정신의 피로.
정신 또한 드래곤을 내 몸에 받아들이며 한층 성장했다고는 해도 아직 절반은 인간이니까.
평범한 가출 소년이었던 내가 드래곤을 만나 그의 힘을 얻고, 마탑주의 제자가 되어 전쟁에서 영웅이 되었다.
그리고 대마법사가 되고 그 위의 경지에까지 올라선 대륙을 위협하는 마인들을 저지했다.
그리고 이젠 그 마인들을 만들어낸 자가 대마수가 되어가고 있고, 나는 그것을 막으려 한다.
정말이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냐고.
나는 새삼 지금까지 내게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지쳐서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있던 나의 등 뒤로 누군가 천천히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