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 수면의 질
한참 발광하며 점점 진하게 마기를 뿜어내던 루리스가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그 와중에도 내가 쏟아내는 마법이 놈을 노렸지만 어느새 주변을 가득 채운 마기가 나의 마법들을 집어삼키며 상쇄시켰다.
“전부… 죽인다. 나를 밀어내는 모든 것들을… 죽인다… 죽인다……”
어느새 광채가 사라져 버린 두 눈으로 루리스는 멍하니 죽인다는 말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뿜어져 나오는 마기는 점점 주변을 잠식해 들어가더니 내가 있는 곳 근처까지 뻗어왔다.
계속해서 날리는 마법도 마기에 파묻혀 버리자 나는 공격을 멈추고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저놈 대체 뭘 하자는 거야?”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진하고 끈적거리는 마기에 내가 짜증을 내며 말하자 카이서스는 침음을 흘렸다.
<이거, 고치를 만들려는 모양인데.>
“고치?!”
고치라면 애벌레가 번데기로 변하면서 만들어내는 껍데기 같은 것 아냐?
<가만있다간 죽을 것 같으니 보호막을 두르고 그 안에서 더욱 마기를 키워서 강해지려는 거지. 몸속의 작은 틈에서 흘러나오는 마기라도 놈이 계속 꾸역꾸역 흡수한다면… 상대하기 힘든 괴물이 되어버리겠는데.>
“계속해서 마기를 흡수한다고? 그런 게 어디 있어? 계속 강해진단 소리잖아!”
어차피 루리스는 내 말을 들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닌 것 같은 데다 너무 어이없어서 소리 내어 카이서스에게 말했다.
기껏 루리스를 찾아내서 해치우려 했더니 갑자기 폭주해서 강해지는 중이라니!
<무한히 흡수하는 건 아니지만… 고치를 깨고 나올 즈음엔 이성 없는 괴물이 되어 미쳐 날뛸 거다. 마계 놈들은 좋다고 신나서 놈에게 마기를 먹이로 내어주겠지. 마계에 한 발 걸친 놈이 대륙에서 날뛰면 날뛸수록 마계가 이 세상에 손을 댈 수 있는 게 많아질 테니까.>
한마디로 완전히 괴물이 되어버리는 대가로 강해진다는 소리다.
“그 전에 저 고치를 깨버리고 놈을 해치우는 건?”
<무리다. 저 마기의 보호막은 외부의 것을 막는 게 아니라 저 안에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걸 없애는 힘이라서 공격도 통하지 않아. 최소 드래곤 다섯은 모여야 저 고치를 박살 낼 수 있겠지만… 아직 섭리가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후, 그러니까 저놈이 준비를 다 마치고 나올 때까지 구경만 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네.”
맥이 빠진 나는 힘없이 중얼거리며 루리스가 있던 곳을 쳐다보았다.
안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검은 마기의 구슬은 더 커지지 않았지만 이미 얼마 전에 봤던 드래곤 로드와 비슷한 크기였다.
아무리 내가 카이서스의 능력을 지니게 되었어도 저 마기를 모두 흡수한 루리스였던 괴물을 상대할 수 있을까?
고민에 잠겨 있는 나에게 카이서스는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뭘 멍청하게 구경만 하고 있으려는 거냐?>
“네가 말했잖아. 내 능력으로는 저 보호막을 부수지 못한다고.”
내가 투덜거리며 말하자 카이서스는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크크, 귀찮은 놈을 꼭 죽일 필요는 없지 않겠어?>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은 놈의 보호막을 깰 수 없지만 놈이 괴물이 돼서 보호막을 나오면 방법이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마기를 다 흡수해서 괴물이 되면 나도 상대하기 힘들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굳이 죽이지 말자는 소리지.>
“대체 무슨……”
점점 뜻을 알 수 없는 말에 내가 화를 내려는 차에 카이서스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계획이 있으니 걱정 마라. 일단 준비부터 하러 가볼까? 우선은……>
엄청난 속도로 쉴 틈 없이 쏟아져 나오는 카이서스의 계획이 담긴 의념에 나는 당황하며 소리쳤다.
“자, 잠깐만! 대체 뭘 할 생각이야?!”
내가 카이서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건가?
카이서스가 늘어놓는 계획이란 것을 들으며 시시각각 표정이 변해가는 내 얼굴은 아무도 볼 수 없다는 게 다행이다.
무척이나 볼만했을 테니까.
‘와 미치겠네. 이걸 이렇게 해결하겠다고?’
<크크크, 애초에 옆집 놈들이 쓰레기를 보냈는데 대신 버려주는 것도 짜증 나지 않냐? 적어도 놈들도 열받게는 해줘야지.>
음산한 웃음을 흘리는 카이서스의 목소리는 꽤나 사악하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그래서 어떤 걸 준비해야 한다고?’
<크크, 일단은… 쓰레기를 담을 용기부터 준비해야겠지? 대륙 북쪽 끝으로 가자. 거기 쓸 만한 물건을 지닌 녀석이 있거든.>
이제 자신을 잃어버린 루리스는 그냥 쓰레기 취급이군.
그나저나 카이서스가 녀석이라고 부르는 상대에 대해 조금의 반가움이 느껴지는데.
‘대륙 북쪽에 누가 있는데?’
<흰둥이가 있지.>
잠깐만… 어째선지 그 말을 듣자마자 급 불안해지는데?
‘흰둥이라니… 설마?’
카이서스가 상대를 부르는 호칭에서 뭔가를 떠올려 버린 내가 불안해하며 묻자 카이서스는 웃음을 터뜨렸다.
<뭐 해? 빨리 출발해! 준비해야 할 게 많다!>
즐겁다는 듯 희희낙락하는 카이서스의 목소리를 들으니 싫다고 했다간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귀찮게 쫑알댈 기세였다.
“알았어, 가면 되잖아…….”
나는 힘없이 중얼거리며 북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카이서스가 흰둥이라고 부르는 드래곤은 대체 어떤 드래곤일까.
나는 카이서스가 알려준 좌표로 공간을 이동했다.
흰둥이라는 별명을 가진 드래곤의 둥지에서 떨어진 숲속.
하얀 눈에 덮인 싸늘한 바람이 부는 침엽수림이었다.
드래곤의 둥지에 허락 없이 함부로 들어가는 건 같은 드래곤이라도 쉽게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거기다 드래곤들은 보통 자신의 둥지에 온갖 보호마법을 떡칠해 두니까.
침입을 막는 공간이동 차단마법부터 다른 존재의 접근을 알아차리는 경계마법 등등.
그래서 둥지에서 먼 곳으로 공간이동을 했지만 손님의 등장을 알아챈 둥지의 주인이 곧장 날아왔다.
“흠? 동족의 냄새가 나긴 하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로군. 자넨 누구지?”
빠르게 하늘을 날아온 백발의 미남은 나를 보곤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어왔다.
그의 머리는 노화로 세어버린 흰머리가 아니라 윤기가 넘치는 백발.
눈에 뒤덮인 주변의 풍경과 잘 어울리는 머리색이다.
화이트 드래곤인가?
설마 화이트 드래곤이라고 흰둥이라고 한 거였어?
‘유치하긴.’
<뭐가? 직관적이고 딱 어울리는 별명이잖아.>
나는 카이서스의 말에 한숨을 내쉬곤 눈앞의 흰둥, 아니, 화이트 드래곤에게 말했다.
카이서스가 내 안에 있다는 것.
그리고 괴물이 되어가는 루리스를 상대하기 위해 카이서스가 내놓은 계획과 그것을 위해 요구하는 물건의 이름을 들은 순간 그는 눈가를 찡그리며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흠, 돈 건가.”
“네, 네?”
설마 원을 그리면서 움직이는 행동을 말하는 것은 아닐 테고, 미쳤냐는 뜻으로 묻는 건가?
내가 눈치를 살피며 되묻자 금발 미남의 모습으로 폴리모프를 하고 있던 화이트 드래곤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네 안에 있다는 카이서스 놈이야 원래 그랬다지만 너도 만만치 않구나. 갑자기 찾아와서 내 수집품을 달라고 하다니. 게다가 그 수집품이 양들의 수다라고? 그게 뭔지나 알고 있나?”
“아뇨, 카이서스가 대략 어떻게 할지와 필요한 것들만 알려주고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알려준다고 해서… 헉?!”
카이서스에겐 흰둥이라 불리는, 화이트 드래곤 셰르만은 내가 갑자기 놀라서 숨을 삼키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나? 카이서스 놈이 뭔가 이상한 말이라도 했는가?”
“아뇨, 예상보다 셰르만 님은 다른 드래곤들과는 조금 다른 성격인 것 같으셔서요.”
말투부터가 다르다.
내 말에 잠깐 눈을 찌푸리던 셰르만이 조용히 물어보았다.
“지금까지 자네가 만난 드래곤들이 누군가.”
“어… 카이어스와 카락스 님, 아슈트반 님이랑 로드 님이요.”
내 말에 잠시 침묵하던 셰르만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그런 동족들만… 모든 드래곤이 그런 건 아니니 오해는 하지 말아주게.”
그 말인즉슨, 모든 드래곤이 성격이 나쁜 게 아니라, 내가 만난 드래곤들만 성격이 나빴다는 소리다.
<아니다! 저 흰둥이의 말을 믿지 마라! 나는 동족 중에서는 평범한 성격이다! 저 녀석은 겉으로만 멀쩡할 뿐이야!>
셰르만이 멀쩡해 보인다는 말은 자기 성격이 좋은 편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거네.
“그래서 양들의 수다가 뭔가요?”
“흠, 그 물건은… 쾌적하게 수면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아티팩트지.”
“…네?”
순간 내가 뭔가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묻자 셰르만은 무척이나 즐거운 목소리로 자랑하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나를 불어 넣으면 양들의 울음소리가 흘러나오는 아티팩트라네. 그 울음소리를 듣다 보면 제 아무리 예민해진 사람이라도 긴장이 풀리며 잠들고 쾌적한 수면을 할 수가 있지! 내가 백여 년 전에 힘들게 구한 물건이다.”
“아, 그러니까… 수면 기능이 있는 오르골이란 소리네요.”
“아니,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양들의 수다는 드래곤에게도 영향을 끼칠 정도니까! 게다가…….”
그 뒤로도 한참이나 떠들어대는 셰르만의 모습에 나는 카이서스에게 몰래 말했다.
‘네 말대로 정말 드래곤들은 전부 성격이 이상하구나.’
<그래! 저놈도 멀쩡하진 않다! 핫핫하!>
그 성격 이상한 드래곤들 중에 자기도 포함된다는 걸 잊은 건가?
“…그래서 이 양들의 수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너도 알겠지?”
한참이나 이어진 양들의 수다에 대한 예찬이 끝나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충 쉬지도 않고 그가 떠들어댄 시간이 1시간이 넘었다.
그도 어쩔 수 없는 드래곤이라 성격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탓에 하던 말을 끊을 수가 없어서 멍하니 고개만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예! 엄청 대단한 물건이라는 것을 이제 잘 알겠습니다.”
잘 모르겠다고 했다간 다시 교육이 시작될지도 모른단 생각에 나는 생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을 힘차게 내뱉었다.
“음! 그래. 그런 대단한 물건을 다짜고짜 달라고 하니 내가 어이가 없었던 거네. 그러니 내가 양들의 수다를 줄 생각이 없다는 것도 잘 알겠지?”
첫 준비물을 구하는 것부터 문제가 생기자 나는 침음을 흘렸다.
애초에 드래곤에게 다짜고짜 자신의 수집품을 달라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니까.
소유물에 대한 집착은 카이서스를 통해서 이미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미 죽은 후인데도, 심지어 자신의 힘과 심장을 이어받은 나에게조차 보물을 아까워하곤 했으니까.
한마디로, 드래곤들은 무진장 쪼잔하다는 거다.
<쯧, 하여간 쪼잔한 잠탱이 같으니. 좋은 일에 쓴대도 이럴 줄 알았지.>
자기가 내게 했던 말이나 태도는 까맣게 잊은 듯 어이없는 말을 내뱉은 카이서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사이언티의 거처를 알려줄 테니 양들의 수다를 달라고 해.>
사이언티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카이서스가 시키는 대로 말했다.
“양들의 수다를 주는 조건으로 사이언티의 거처를 알려주겠다는데요?”
양들의 수다는 절대로 줄 수 없다는 듯 단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셰르만의 표정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뭣이? 그 사이언티? 침대는 사이언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침대를 잘 만든다는 그 엘프 장인 말인가?!”
뭔가 했더니 침대였냐…….
카이서스가 왜 셰르만을 잠탱이라고 불렀는지 알 것 같다.
이 드래곤, 수면의 질을 향상하는 데 미친 드래곤이다.
“분명히 그자는 실종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으음… 분명 그 엘프의 침대는 최고이긴 한데… 으음…….”
와, 미친… 아티팩트와 침대 장인의 위치를 놓고 고민할 줄이야.
역시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게 일반적인 드래곤이군.
한참을 고민하던 셰르만은 침음을 흘리며 힘겹게 대답했다.
“끄응, 양들의 수다가 좋긴 하지만 그동안 너무 많이 써서 내게는 효과가 약해지기도 했으니… 좋아. 교환하도록 하겠네.”
카이서스가 말한 침대 장인의 위치를 전해 듣고 셰르만이 자신의 보물 창고에서 꺼내 온 것은 손때가 묻은 낡은 오르골이었다.
그는 오르골을 내게 건네면서도 아쉽다는 듯 손에 힘을 쉽게 빼지 못하며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껴줘야 하네, 꼭!”
“음, 알겠습니다.”
드래곤이라는 존재가 오르골 하나에 보이는 처량한 모습에 나는 떨떠름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살짝 두 눈에 물기까지 보이며 배웅하는 셰르만을 뒤로하며 그의 둥지를 나섰다.
<좋아, 하나는 구했군. 이제 다음 물건을 찾으러 가자!>
‘그런데 넌 왜 침대를 만드는 장인의 위치 같은 걸 알고 있는 거야?’
<그야 언젠가 저 녀석한테 필요한 걸 뜯어내려고 그 엘프 장인을 잡아다가 숨겨놓은 게 나다! 드래곤에 비하면 짧기는 해도 엘프도 나름 수명이 긴 편이니까 뒀다가 쓰면 좋을 것 같았거든!>
와, 역시 이 자식이 제일 이상한 드래곤이었어.
영문도 모르고 오랜 시간 잡혀 있었을 엘프 장인을 불쌍하게 여기며 나는 카이서스가 말한 다음 물건을 찾으러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