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 드래곤-137화 (137/150)

137화 - 괴물

떨어져 내리는 유성으로 섬 자체가 박살 나며 모든 게 끝이 났다.

수많은 제물들과 마물들, 그리고 반쯤 열리던 마계의 문까지 엄청난 속도로 떨어져 내리는 압도적인 파괴력 앞에 모두 박살이 나버렸다.

루리스와 그가 준비하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며 모든 일이 끝났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 아리안 누나와 기뻐하면 되는 것이다.

라는 거였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쪽에서도 이쪽의 공격을 눈치챈 건지 소름 끼칠 정도로 가득하던 마기가 눈에 보일 정도로 실체화되며 섬 위로 모여들었다.

떨어져 내리는 운석과 치솟아 오른 마기가 충돌했다.

소리는 없었다.

‘파스스’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운석과 마기는 서로 맞닿으며 사라져 갔다.

하지만 소리가 조용한 것과는 달리 엄청난 힘의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소리까지 삼키며 주변을 뒤흔드는 파동에 섬 주변의 파다가 거센 파도를 일으키며 요동쳤다.

<저만한 마기라니,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야?>

카이서스가 황당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주변을 온통 뒤흔들던 것이 가라앉자 루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기가 가장 진하게 느껴지는 섬의 중앙에 만들어진 제단 위로 루리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로 통일되지 않은 색상의 일반적인 미적감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모습의 제단이었다.

아니, 저걸 제단으로 볼 수나 있으려나?

수많은 아티팩트들을 그저 쌓아두기만 한, 마치 아티팩트의 무덤과 같은 모습이었다.

루리스는 자신의 위치가 발각된 것과 방해를 받았다는 것에 몹시 불쾌한 듯한 표정이었다.

하늘 높은 곳에 있는 내가 잘 보이지 않을 텐데도 마나의 흐름으로 내가 있는 곳을 알아챈 모양이다.

물론 내 눈에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놈의 표정까지도 똑똑히 보이지만 말이야.

놈은 뭔가 하고픈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어림도 없지.

나는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며 친목을 나눌 생각이 전혀 없었다.

손끝에 피어난 심연의 검은 불길이 루리스를 향해 날아갔다.

자신을 향한 헬파이어의 불길에도 루리스는 코웃음을 쳤다.

조금 전 메테오를 막아냈을 때처럼 마기가 실체화되며 움직였다.

<역시 저놈 짓이었나. 안 본 사이에 꽤나 마기의 사용에 능숙해진 것 같은데……>

인간인 루리스가 당연하다는 듯 마기를 다루는 모습에 카이서스는 뭔가 생각에 잠긴 모양이었다.

나도 이해가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전까지만 해도 루리스가 마계의 힘을 조금이나마 다루긴 했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텐데.

아티팩트들로 쌓아올린 저 제단 때문인가?

나는 계속해서 루리스에게 헬파이어를 쏘아 보내며 더블 캐스팅을 사용했다.

내 손끝에 맺힌 또 다른 검은 불길은 루리스가 아니라 그가 딛고 서 있는 아티팩트의 제단을 향해 거침없이 날아갔다.

“이미 늦었다!”

내가 제단을 노리는 것을 알아챈 루리스는 탁한 목소리로 비웃으며 제단을 향한 공격을 무시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지옥의 겁화는 수없이 쌓여 있던 아티팩트들을 덮치고는 녹여 버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향한 지옥의 겁화를 마기로 막아내면서도 비어버린 발밑을 마기로 받쳐 허공에 떠오른 루리스는 꽤나 여유로운 기색이었다.

<설마, 저 제단은 이미 껍데기만 남은 건가?!>

카이서스의 경악처럼 아티팩트의 제단은 헬 파이어에 녹아내리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녹아내리고 있는 수많은 아티팩트들에서는 품고 있던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루리스가 늦었다고 말한 것은 이미 아티팩트로 쌓아 올린 제단의 힘을 모두 사용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마계의 문이 열린 건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거지?’

헬파이어로 모든 것이 녹아내려 초토화된 루리스의 주변에는 차원을 연결하는 문도, 마물의 모습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래에 있는 루리스에게 전해지도록 목소리에 마나를 실어 말했다.

“무슨 짓이라… 이미 알고 있지 않나?”

비웃듯이 이죽거리는 루리스의 모습에 순간 짜증이 났지만 나는 애써 참았다.

“마계의 문을 열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문처럼 보이는 게 보이지 않아서 말이야.”

“후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건 아니지.”

알 수 없는 대답에 내가 눈을 찌푸리자 루리스는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크게 휘둘렀다.

“모르겠으면 느껴봐라!”

그의 손짓에 따라 거대한 마기가 꿈틀거리며 나에게로 몰아쳤다.

마법이나 기술 같은 것이 아닌, 그저 힘을 휘두르기만 할 뿐인 순수한 폭력.

그 단순한 폭력에 실린 힘을 눈치챈 나는 얼굴을 굳혔다.

“앱솔루트 실드!”

한 번의 시전과 두 번의 사용.

완성된 더블 캐스팅으로 펼쳐낸 두 개의 방어 마법이 펼쳐지며 내게 휘둘러지는 마기를 막아냈다.

“크윽!”

하지만 두 겹의 앱솔루트 실드로도 그 힘을 완벽하게 받아넘기기는 것이 어려웠다.

실드 너머로 전해져 오는 충격에 나는 작은 신음을 흘렸다.

도대체 타이런 제국의 황궁에서 그 난리를 치고 사라진 이후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서클 브레이커인 나조차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위력.

당황하는 나에게 루리스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 들려왔다.

“전부터 의문스러웠다. 아무리 드래곤이 돌봐준다고 해도 인간이 저렇게 강해질 수 있는 건가? 사실 처음부터 인간이 아니었던 것은 아닐까.”

스스로에게 묻듯 말하던 루리스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아무리 뒤를 캐어봐도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지.”

당연한 일이지.

내가 태어나서 자란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만 봐도 금방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재능이 뒤떨어지던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이렇게 바뀔 수 있었을까.”

그렇게 말한 루리스는 히죽 웃어 보였다.

“나는 들을 수 있었다. 네가 드래곤의 가호 따위가 아닌, 힘 자체를 받은 것이라는 걸.”

그걸 어떻게… 그보다 들었다니, 대체 누구에게?

내가 놀라거나 말거나 루리스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나도 결정했다. 문을 열어 마족들을 불러내는 것보다 내가 직접 그들의 힘을 받아내기로. 내게 진실을 알려주고 힘을 빌려주기로 한 존재도 그게 더 재미있을 거라더군.”

그의 말에 카이서스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망할! 마족 놈들이 수작을 부렸군! 만약 그렇다면 세계의 섭리도 작동하지 않을 수 있어. 저놈의 근본은 너처럼 원래부터 이 세계에 속했던 놈이니까.>

나처럼 힘만을 받는 거라고?!

그렇다면 조금 전 부서진 제단은 마계의 문이 아니라… 마계에서 힘을 끌어오고 받아들이기 위한 제단이었던 건가!

긴장감으로 침을 꿀꺽 삼키는 나를 보던 루리스의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두 눈 전체가 검게 물들어가는 그의 몸 전체에서 실체화된 마기가 연기처럼 일렁였다.

“괴물이 되어버렸군.”

음산한 웃음과 검은 눈,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마기에 대한 감상을 말하자 루리스는 낮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괴물이라, 말이 좀 심하군. 나는 나약한 인간으로 남는 것을 그만뒀을 뿐이다.”

“솔직히 네가 인간보다는 삶을 그만둬 줬으면 좋겠지만… 스승님이 네놈의 지금 모습을 보면 더 슬퍼하실 테니 보실 수 없게 해야겠네.”

흔적도 없이 지워 버리면 스승님이 저놈의 꼬락서니를 보고 슬퍼하실 일도 없겠지.

스승님을 언급하는 내 말에 그는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 이상한 일이야… 이전에는 그 여자를 가지기 위해 뭐든지 하려 했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참 바보 같았어. 그 여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가지면 되는데 말이야.”

스승님을 노리고 칼라마쉬의 서를 훔치는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짓을 저질러 온 놈이 이제 와서 그 모든 일들을 부정한다고?

루리스의 이해가 가지 않는 말에 내가 의아해하자 카이서스가 설명해 주듯 말했다.

<저 자식, 힘에 완전히 잡아먹힌 거다. 마기에 손을 댄 놈들의 마지막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말이야. 이제는 루리스가 아니라 다른 뭔가로 봐도 될 거다. 아직 인간이었을 때는 네 스승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 섬에 온 거겠지만 말이야.>

마기에 오염되어 껍데기만 루리스이고 다른 존재로 바뀌었다는 건가.

‘솔직히 이해는 가지 않지만 어느 드래곤에게 몸을 빼앗긴 것과 비슷한 건가?’

<흠, 흠! 그것과는 좀 많이 다르지만… 아무튼 저놈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변질되어 버린 거다.>

‘변질이라, 어쨌건 확실한 건 지금 이 자리에서 저놈을 이 자리에서 없애는 게 좋을 것 같네.’

<그래, 저놈이 어떤 마족에게 힘을 받은 건지는 몰라도 힘을 얻은 지 얼마 안 된 지금 처리해야 한다. 새로운 힘을 능숙하게 다루게 되어버리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테니까.>

카이서스의 심장을 얻고, 처음부터 마법을 익히며 차근차근 적응해 온 나와는 달리 루리스는 마기로 인한 힘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없앤다.

의지를 담아 스태프를 루리스에게 향했다.

스태프의 끝에 파괴적인 마나가 맺히더니 일직선으로 쏘아졌다.

일반적으로 브레스라 불리는 드래곤의 상징이자 강대한 서클 브레이크.

키이이잉!

순수한 파괴의 결정체는 소리마저도 부수듯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알아갔다.

자신을 향한 강력한 파괴의 광선에 여유로운 표정을 지어 보이던 루리스의 얼굴도 순간적으로 굳었다.

“큭!”

짧은 신음을 터뜨리며 루리스가 다급하게 마기를 끌어올렸다.

실체화된 마기를 갑옷처럼 뒤덮은 루리스에게 브레스가 직격했다.

키이이잉!

파괴 그 자체, 브레스는 서클 브레이커인 나조차도 10초가량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그 10초는 인간을 벗어나 마족에 가까워진 루리스조차도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브레스의 섬광이 사그라들고 난 후 드러난 루리스의 모습은 꼴사나울 정도였다.

옷가지는 대부분이 재도 남지 못하고 사라진 데다 마기로 몸을 보호했음에도 전신의 피부는 물론 팔 한 짝과 무릎 아래가 녹아내려 있었다.

역시 브레스야, 성능이 확실하네.

그보다 나는 입에서 내뿜는 것이 아니니 브레스라고 말하긴 좀 이상하려나.

거친 숨을 몰아쉬는 루리스를 내려다보며 잠시 다른 생각을 하다가 이내 다시 마나를 움직였다.

팔 하나와 다리 절반이 사라졌다고는 해도 봐줄 생각 따위는 없었다.

다른 생각이나 하며 놈에게 쉴 틈을 줄 수는 없지.

하지만 잠시 동안의 딴생각으로도 루리스는 마기를 창처럼 만들어선 내게 던졌다.

몸 곳곳이 녹아버린 탓에 꽤나 고통스러울 텐데.

아니면 인간을 포기하며 통증 같은 것도 없어진 건가?

나는 마나를 움직여 피해냈다.

드래곤의 심장과 피를 이어받았음에도 오러 마스터들과 같은 부류에 비하면 내 운동 신경은 꽤나 뒤떨어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서클 브레이커가 된 지금, 나 자신이 마나와 하나이기에 마나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쳇!”

자신의 일격을 피해낸 나를 향한 루리스의 혀 차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나저나 저 자식, 인간 같지 않게 된 것은 외형만이 아니었네.

그 짧은 시간에 루리스의 몸이 빠르게 원래대로 재생되고 있었다.

녹아내린 팔과 다리가 검게 꾸물거리며 새로 돋아나고 전신의 피부는 부글거리며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재생력으로 유명한 트롤조차도 저 정도는 아닐 거다.

살점을 꿈틀거리며 재생하고 있는 루리스의 모습이 꽤나 혐오스러웠던 터라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공격을 이어나갔다.

완전한 드래곤이라면 모를까, 반쪽짜리인 나로서는 연속해서 브레스를 사용할 수 없었다.

대신 9서클에 속하는 마법들을 다중으로 펼쳤다.

9서클을 동시에 여러 개 사용하다니, 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수준이지만…….

이상하게도 놈을 보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라 이전에 시도도 못 해봤던 것들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흠, 세계의 섭리가 전력으로 움직이지는 않아도 거부감 정도는 느껴지게 하는 건가? 일단은 절반 정도는 다른 세계에 속했으니까.>

드래곤들이 나설 정도로 섭리를 건드린 건 아닌데 혐오감이나 분노를 불러일으키게 만들 정도는 된다는 건가?

게다가 나 역시 절반은 다른 세계의 존재를 적대하는 드래곤에 속했으니…….

‘어쩐지 기분 나쁜데, 세계의 섭리가 내 감정까지도 건드리는 것을 제대로 느끼니 뭔가 조종당하는 것 같잖아.’

<네 녀석이 지금 느끼는 그 감정을 우리 드래곤은 아득한 시간 동안 느껴왔다. 뭐, 그래 봐야 네 녀석은 본래의 감정을 조금 더 자극받는 정도에 불과하니 진정해.>

‘남의 감정을 멋대로 건드리는데 진정할 수 있겠냐?’

카이서스에게 투덜거리는 와중에도 내가 펼친 9서클의 마법들은 루리스의 사방에서 몰아치고 있었다.

헬파이어의 검은 불길부터 시작해서 아래에서 터져 오르는 용암, 하늘에서 화염에 휩싸여 쏟아지는 유성우.

레드 드래곤의 심장에 반응하는 불길이 사방에서 춤추듯 몰아쳤다.

사방에서 자신을 향해 몰아치는 화염에 루리스는 마기를 잔뜩 뿜어내며 발악하듯 휘둘러 댔다.

하지만 아무리 마족의 힘을 얻게 된 그라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9서클 마법의 폭풍을 막아내는 것은 아직 힘겨워 보였다.

“큿!”

신음과 같은 소리를 내며 그는 순간적으로 마기를 한층 더 거세게 내뿜었다.

“모든 걸… 모든 걸 버려가며 얻은 힘이다!”

이를 악물고 마기를 뿜어내던 루리스가 악을 쓰듯 소리치기 시작했다.

<미친놈의 헛소리 같은 건 귀담아듣지 말고 빨리 해치워 버려!>

나도 카이서스와 같은 마음이었기에 더욱 거세게 몰아쳤지만 루리스의 기세가 점점 심상치 않게 변해갔다.

“왜 나를 방해하는 거냐! 어째서! 어째서 왜 난 행복할 수가 없는 거지?! 왜!”

평소와는 다른, 격하기 그지없는 광기를 뿜어내는 놈의 모습에 나도 순간적으로 멈칫해 버릴 정도였다.

<이런 망할! 마기에 잡아먹히긴 했어도 어느 정도는 통제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아니었나.>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미친 듯 발버둥 치며 마기를 사방으로 흩뿌리는 루리스의 행동에 식은땀을 흘리며 공격하던 내가 다급히 카이서스에게 물었다.

갑자기 또 무슨 일이 생기려는 거야?!

<말 그대로다. 저 녀석이 마기에 잡아먹히긴 했어도 주도권은 잡고 있는 줄 알았더니…… 살짝 건드린 것만으로 폭주해 버린 거다.>

포, 폭주?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제정신을 잃고 날뛰기 시작한 루리스를 응시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