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 요청
갑작스러운 가족 상봉에 끼어들지도 못하고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 중 말레온 경이 조심스레 헛기침을 하며 말을 걸었다.
“지난번에는 고맙다는 말도 못 했구려. 데스웬 공이 도와준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소.”
말레온 경이 고개까지 숙여 감사 인사를 하자 아버지는 담담하게 고개를 마주 숙이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별말씀을. 정 고마우시거든 다음에 괜찮은 술이나 대접해 주시면 됩니다.”
자신의 행동을 전혀 내세우지 않는 듯한 아버지의 반응에 말레온 경은 허허 웃으며 말했다.
“괜찮은 술로 되겠소? 아주 끝내주는 술을 준비하리다!”
호탕한 남자와 진중한 남자가 서로에게 웃어 보이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흠, 우리 아버지에게 사교성이라는 게 있기는 있었나 보다.
부모님과 말레온 경이 이야기를 나누고, 몇몇 사람들이 거기에 끼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내게 조심스레 말이라도 걸어보려는 순간.
“하이만 크라프트 크라우드 국왕 전하와 마리아 크라프트 크라우드 왕비 마마, 그리고 로라스 크라우드 왕자 저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국왕 전하 내외와 로라스 왕자의 등장에 모두가 행동을 멈췄다.
내게 말을 걸려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고개를 숙이며 연회장에 들어서는 국왕 일가를 맞이했다.
잠시 후, 자리에 앉은 국왕 전하가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고개를 들라.”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들며 연회장 안쪽에 마련된 상석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국왕 전하와 왕비 마마를 뵙습니다.”
국왕 내외 말고도 로라스 왕자도 있기는 했지만 국왕과 같은 수준의 예를 받기에는 아직 일렀다.
“이번 연회를 주최한 이유가 뭔지는 다들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오.”
연회를 연 이유를 따로 알리지는 않았으나 그 이유를 모르는 사람은 여기에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저절로 내게로 집중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에 동의라도 하듯 국왕 전하의 시선도 내게 향했다.
“우리 크라우드의 영웅이자 인간 최초로 9서클에 도달한 드래곤의 대마법사… 라엘 드리안 자작, 앞으로 나와주겠는가?”
국왕이 고작 자작을 대하는 태도라기엔 너무나 조심스러웠으나 아무도 이상해하지 않았다.
모두가 조용히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국왕 전하께 라엘 드리안이 인사 올립니다.”
한쪽 무릎을 꿇어 예를 취하며 인사를 올리자 국왕 전하는 몹시 흡족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친애하는 드리안 자작, 고개를 드시게.”
무척이나 친근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건넨 국왕 전하는 연회장 내부의 사람들의 면면을 하나하나 둘러보며 읊조리듯 말하기 시작했다.
“일전의 논공행상에 드리안 자작이 개인 사정으로 자리를 비웠었지. 공로가 몹시도 크니 지금이라도 상을 내려야 할 텐데… 9서클 대마법사에게 있어 작위를 올려주는 것은 큰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네.”
가장 높은 작위인 공작조차도 9서클 대마법사에 비하면 권위가 낮다고 할 수 있었다.
드래곤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들은 제외한다면 현시점에서 대륙 전체를 통틀어 유일한 9서클의 대마법사이니까.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설명해 주듯 이야기한 국왕 전하는 다시 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작위든 재물이든 영지든, 그대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가장 좋겠지. 그러니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보게. 최대한 그대가 원하는 대로 될 수 있도록 내 힘써보지.”
원하는 것을 말하라는 국왕 전하의 말에 놀랐는지 침 삼키는 소리가 연회장 곳곳에서 들려왔다.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9서클의 대마법사인 내가 무엇을 요구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수도 있었으니까.
안 그래도 엄청난 영향력을 지니게 된 내가 높은 작위나 영지까지 얻는다면 크라우드 왕국의 권력구조 자체가 재편성될 수도 있다.
<후후, 드디어 제대로 된 대접을 받는군! 쓸데없는 작위니 뭐니 그딴 것 말고 보물이나 내놓으라고 해라! 내가 예전에 듣기로 크라우드 왕가에 전해져 내려오는 보물 중에 아주 괜찮은 게…….>
원하는 대로 주겠다는 말에 카이서스는 흡족했는지 자신이 갖고 싶은 것에 대해 늘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카이서스가 원하는 대로 재물을 요구할 생각도 없었고 다른 사람들이 우려하는 대로 높은 작위나 영지를 가지는 일에도 관심이 없었다.
재물이야 카이서스가 모아둔 것이 있고 권력 같은 건 골치 아프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 것을 느끼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쟁을 꾸미고 마인들을 만들어낸 자의 뒤를 쫓는 것에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작위도, 재물도, 영지도 아닌 뜬금없는 것을 포상으로 요구하자 다들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었다.
누군가는 내 말에 다른 의미가 있나 생각하기도 하고 다른 이는 내가 쫓는 자가 누군지 생각하고 있겠지.
<어차피 놈이 마계의 문을 열려 하면 마기가 숨길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나올 텐데 그걸 찾으면 되지 뭐 하러 굳이…….>
카이서스는 뭔가 뜯어낼 기회를 날리는 게 아쉽다는 듯 투덜거렸지만 나는 그 정도로 마기가 흘러나올 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이 없었다.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르니 최대한 빠르게 루리스를 막을 거다.
다들 조용히 기다리는 가운데 국왕 전하가 내 말에 대답했다.
“그 루리스라는 자를 말하는 모양이군. 전쟁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군. 그자가 또 뭔가를 꾸미고 있는 건가?”
거의 확실한 이야기지만 마계의 문과 같은 이야기를 함부로 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그저 입을 다물었다.
내 침묵에 국왕 전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의 흑막이자 마인을 만들어낸 루리스라는 마법사를 찾으란 명을 내리도록 하지. 그러면 되겠는가?”
“감사합니다, 전하.”
“나중에 따로 이유는 말해주게나.”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국왕 전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사람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다들 편히 먹고 마시고, 즐기도록 하라.”
“예, 전하!”
악단이 음악을 연주하자 사람들은 제각기 친분이 있거나, 친분을 쌓고 싶은 사람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나 역시 국왕 전하의 앞에서 물러나 원래 있던 자리로 향했다.
사람들의 화제는 대부분 방금 전 있었던 국왕 전하와 나의 대화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루리스를 쫓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 권력에 관심이 없는 건지 등등의 이야기들.
특히나 내가 루리스를 쫓는 이유에 관해서는 별의별 추측이 다 나왔다.
루리스가 훔쳐 갔을 거라 추정되는 타이런 황실의 보물을 노리는 거다, 포로로 잡혀 있던 동안 받았던 수모의 복수를 위해서다 등등.
뭐라 떠들어대건 어차피 마계의 문에 대해 발표할 생각이 없으니 상관없는 일이었다.
다만 조금 굳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아리안 누나에게는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위험한 문제야?”
가까이 다가온 아리안 누나는 남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물었다.
이미 타이런 제국에서 쫓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나서는 모습에 자신이 모르는 문제가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저 아이가 바보도 아닌데 네가 이런 뜬금없는 일을 벌이면 당연히 뭔가 있다는 걸 눈치채겠지.>
국왕 전하께 요청한 것 자체가 즉흥적이었던 것인 데다 마계의 문에 대해서도 말해주지 않았기에 아리안 누나도 내가 루리스를 뒤쫓는 이유에 대해서는 모른다.
하지만 루리스에 대해서는 아리안 누나도 어느 정도 알고 있기에 내가 이렇게 왕국의 힘을 빌려서까지 그를 뒤쫓으려 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리안 누나에게는 먼저 말해뒀어야 했는데, 국왕 전하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즉흥적으로 대답하다 보니 아리안 누나에게 미리 말하지 못했다.
“우리 잠깐 바람 좀 쐴까?”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말하기 곤란하다는 것을 알기에 아리안 누나는 내 손목을 붙잡고는 비어 있는 테라스로 이끌었다.
아리안 누나가 테라스의 출입문을 닫고 커튼까지 쳐버렸다.
거기에 나는 마나의 막을 쳐서 누구도 엿듣지 못하게 했다.
왕궁 전체에는 함부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결계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서클 브레이크의 마법은 그런 것에 구애되지 않는다.
마나가 우리 주변을 둘러싼 것을 느끼자마자 아리안 누나는 매서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추궁했다.
“이제 말해봐. 왜 또 네가 나서야 하는 건데?”
아무래도 조금 전엔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캐묻고 싶은 것을 참고 있었던 모양이다.
“미리 말했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조만간 말…….”
내 변명이 길어질 듯하자 아리안 누나는 눈을 찌푸리며 말을 끊었다.
“보나 마나 안 좋은 이야기라서 말하는 걸 미루고 있던 거겠지. 됐으니까 무슨 일인지나 말해봐.”
음, 역시 아리안 누나는 나에 대해서 너무 잘 안다니까.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루리스가 마계의 문을 열려 한다는 것과 드래곤들이 내게 그걸 막는 일을 맡긴 것을 말해주었다.
“드래곤들, 너무 당연하다는 듯 남을 부려먹는 것 아냐?”
<아니, 뭐 부려먹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런 거지.>
‘드래곤들’에 속하는 카이서스가 그 말에 찔리는지 아리안 누나에겐 들리지 않을 변명을 늘어놓았다.
“후… 마계의 문이라니, 전쟁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런 위험한 게…….”
“걱정하지 마요. 열리기 전에 막아내면 되니까요.”
내 대답에 아리안 누나는 무슨 헛소리냐는 듯 나를 째려보았다.
“그 일을 네가 해야 한다는 게 걱정인 거야.”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한 아리안 누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말했잖아. 무슨 일이건 너와 함께하겠다고. 앞으로는 그런 일이 생기면 내가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게 곧장 말해줬으면 해.”
괜히 신경 쓰이게 해 미안했던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와 동시에 아리안 누나는 다시금 매서운 눈으로 쳐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더 숨기는 건 없는 거지?”
나중에 뒤져서 나오면 하나당 한 대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 살벌함에 나는 순간 흠칫 떨었다.
분명 뭔가 하나라도 말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걸리면 엄청나게 큰일이 생길 것 같았다.
절로 지금까지 아리안 누나에게 말하지 못한 게 있나 생각하려 애썼다.
<이 아이에게 하는 것의 반만 내게 해봐라.>
내가 아리안 누나를 대하는 태도와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다른 것에 대해 카이서스가 투덜거렸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사랑하는 사람과 남의 몸을 빼앗으려던 놈을 대하는 태도가 같으면 그게 더 문제라고 생각 안 해?’
결코 유쾌하지 못했던 첫 만남 때를 언급하며 말하자 카이서스는 어울리지 않게 꿍얼거렸다.
<대체 언제까지 그때 일을 가지고 우려먹을 셈이야? 사과의 뜻으로 내가 준 것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대로 두면 제대로 삐질 것 같은 기색이라 살짝 달래줘야겠다.
‘알았어. 앞으로 조심할게.’
<쯧, 세상에 너처럼 나를 막 대할 수 있는 녀석은 없을 거다.>
내가 굽히고 들어가니 툴툴거리긴 해도 조금은 기분이 풀린 모양이다.
카이서스를 달래고는 다시 아리안 누나에게 숨기는 것이 있나 생각해 보았다.
내 안에 카이서스가 있다는 것도 말했고, 반은 인간이고 반은 드래곤이 되었단 것도 말했고… 음, 좋아.
“네, 없어요.”
그제야 눈에서 힘을 뺀 아리안 누나가 옆으로 달라붙더니 팔짱을 끼며 말했다.
“연회의 주인공이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면 다들 궁금해하겠지? 이만 들어가자.”
<흠, 대놓고 네 녀석이 자기 거라는 걸 보여주려는 생각인가 본데?>
키득거리는 카이서스의 말에 나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 반대이기도 하거든?’
펼쳐놓았던 마나의 막을 거둬들이고는 테라스를 나서자 역시나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집중되었다.
후, 정말이지 인기가 많다는 것도 피곤하다니까.
…그런데 뭔가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전이랑은 다른 것 같은 느낌인데?
<그야 한창 때인 데다 그렇고 그런 사이의 남녀가 아무도 없는 테라스에 들어갔다가 나왔으니까.>
어, 설마?!
아리안 누나를 돌아보니 얼굴이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조금 전에는 내게서 무슨 일인지 듣는 것에 열중하느라 미처 인지하지 못했지만 진정한 지금은 단둘이서 테라스에 있다 온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은 듯했다.
누나는 그럼에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당당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음, 뭐 사실 생각해 보니 우리가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건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데다 지금도 드러낼 생각이었으니… 상관없으려나?
나는 팔짱 끼고 있던 손을 빼내 아리안 누나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내게 더 가까이 당겼다.
감싸 안는 내 손길에 잠시 놀란 표정으로 쳐다보던 아리안 누나는 이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크크, 자기 딸을 붙여보려던 것들이 여럿 실망하는구나.>
카이서스는 언제 삐졌었냐는 듯 아쉬워하는 주변의 몇몇 사람들을 구경하며 즐거워했다.
맘껏 즐기라던 국왕 전하의 말대로 나는 아리안 누나와 연회를 즐기기로 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몹시 오랜만에 함께 춤을 추는 것도 보였다.
뭐, 나쁘지는 않네.
나는 잠시나마 골치 아픈 일들을 잊으려 애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