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 가족 상봉
로드에게 불려 간 내가 한 달이나 연락도 없이 돌아오지 못했던 것에 대해 무척이나 걱정하고 있던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리고 나서야 나는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루리스나 마계의 문, 서클 브레이크 등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었기에 한 달간의 알리바이를 만들어내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드래곤의 가호를 강화하기 위한 의식 때문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이 어디 있느냐?>
‘네가 제안한 변명거리보단 훨씬 낫거든?!’
세상에, 어머니에게 대놓고 한 달 동안이나 기절해 있느라 연락을 못 했다고 말하라는 정신 나간 드래곤이 대체 어디 있담?
“그나저나 라엘 덕분에 왕실의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구나.”
차를 마시던 어머니가 한 말에 메이엔 누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예전엔 어머니가 우리 남매들 중에서 가장 많이 걱정하던 게 라엘이었는데 말이에요.”
“라엘이 예전에는 어땠는데요?”
내 옆에 앉아 있던 아리안 누나가 예전의 내 이야기에 궁금하다는 듯 끼어들자 메이엔 누나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쏟아냈다.
“라엘이 마법을 익히기 전에는 여러 곳에 일을 배우러 갔었거든. 그런데 어찌나 소질이 없던지 일을 배우러 갔던 곳마다 됐으니까 이제 다른 일을 알아보란 소리를 들었다니까.”
부끄러운 과거 이야기를 멋대로 늘어놓는 메이엔 누나에게 내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어머니가 먼저 말했다.
“흠… 사실 너도 만만찮게 내 걱정거리였거든? 이런 왈가닥을 대체 누가 데려갈까 하고 말이야.”
“아, 어머니도 참!”
당혹해하는 메이엔 누나의 모습에 우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며칠 후에 있을 연회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내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왕궁에서 연회의 초대장이 날아왔다.
카이서스가 이전의 행사들에서 내 모습을 내보이지 못했으니 내가 돌아왔단 소식에 꽤나 급하게 이번 연회를 준비했을 거라고 했지만…….
뭐, 나를 내보이기 위한 거든 뭐든 가족까지 초대받았다는 것에 나를 신경 써주는 것 같아서 나쁘진 않다.
이야기 주제가 내가 아닌 자신의 과거로 넘어가자 메이엔 누나는 다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어머니! 이제 슬슬 라엘과 아리안의 옷이나 맞추러 가요.”
“응? 갑자기 옷은 왜?”
나는 물론 아리안 누나도 뜬금없는 그 말에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내 물음에 메이엔 누나는 쯧, 하고 가볍게 혀를 차곤 말했다.
“너희, 연회 때도 평소처럼 로브를 입고 갈 생각이지?”
“물론이지. 이 로브는 여러 가지 기능이 있는 데다가 마탑의 예복이기도 하거든.”
“마탑 소속의 마법사에게 있어 마탑 로브는 가장 좋은 예복이죠.”
나와 아리안 누나가 그렇게 대답하자 메이엔 누나는 물론이고 어머니마저 기가 차다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아니, 마법사가 로브를 입는 게 뭐가 어때서?
“후, 라엘이야 예전부터 대충 입고 다녔으니 그렇다 쳐도 아리안 너까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는 어머니에게 메이엔 누나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마법사들은 우리와 사고방식 자체가 다르다니까요. 보나 마나 쟤네는 데이트할 때도 로브 입고 할걸요?”
“에이, 설마…….”
누나의 말에 설마 그러겠냐는 듯 말하던 어머니는 나를 슬쩍 보고는 또 말을 끝맺지 못했다.
아니, 데이트할 때도 로브를 걸치고 하긴 했지만… 로브가 편해서 입고 다닌 게 그렇게 큰 죄였나?
지금 입은 로브만 해도 온도 유지 기능은 기본이고 방어마법도 걸려 있는 로브인데.
“이참에 너희 둘 다 평상복도 몇 벌 맞추는 게 좋겠구나.”
쐐기를 박는 어머니의 말에 메이엔 누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희끼리만 가는 거면 모를까, 우리도 함께 가는데 로브나 입고 연회에 참석하는 걸 두고 볼 것 같아? 두 사람 다 마법사이기 전에 젊은 남녀에 걸맞게 좀 꾸밀 줄도 알아야지.”
어머니나 메이엔 누나는 누가 뭐라 해도 나와 아리안 누나에게 멋들어지고 예쁜 옷을 입혀서 연회에 함께 갈 생각인 듯했다.
특히 메이엔 누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긋지긋한 로브를 벗겨 버리고 말겠다는 듯한 기세였다.
내가 로브를 걸친 모습만을 봤으니 지겹기도 하겠지.
아리안 누나도 새 옷을 맞추는 게 그리 싫지만은 않은 기색이었기에 나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과하게 고르지는 말아줘.”
“후흐, 걱정 마. 어머니랑 내가 잘 골라줄 테니까.”
음흉한 웃음을 짓는 메이엔 누나의 모습을 보니 절대 금방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예상대로, 평소에는 연이 없던 고급 의상점에 끌려들어 간 나와 아리안 누나는 진이 빠질 정도로 수많은 옷을 입어봐야 했다.
* * *
“적색 마탑의 마법사이자 드래곤의 대마법사이신 라엘 드리안 자작님과 모친이신 마를렌 네팔렌 부인, 누이이신 메이엔 네팔렌 부인, 그리고 청색 마탑의 마법사이신 아리안 양께서 입장하십니다!”
연회장 입구에 서 있던 시종이 우리의 도착을 알리며 소리쳤다.
어머니나 누나 모두 외할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이유는 아버지나 매형이 데릴사위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어머니를 데리고 야반도주한 아버지는 외할아버지께 인정받지 못해서 어머니가 성을 그대로 사용하는 거지만.
팡파르와 함께 연회장의 문이 열리자 아리안 누나가 에스코트를 위해 내민 내 팔 위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아리안 누나는 평소의 푸른 로브나, 가끔 입는 블라우스와 치마가 아니라 제대로 된 드레스 차림이었다.
짙은 파란 색의 이브닝드레스에 카이서스의 소장품이었던 루비 목걸이와 귀걸이, 메이엔 누나의 도움으로 은은하게 화장까지 하니 귀족가의 우아한 아가씨처럼 보였다.
한껏 꾸미고 드레스를 걸친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아리안 누나는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다.
“긴장하지 마요. 누나는 누가 봐도 아름다우니까요.”
나의 격려에 아리안 누나는 긴장이 풀린 건지 풋, 하고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긴장한 건 너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너도 멋지니까 긴장 풀어.”
청색 마탑 마법사의 고집으로 파란색 드레스를 고른 아리안 누나와는 달리 나는 검은 연미복을 걸쳤다.
아무리 그래도 새빨간 연미복을 입을 수는 없었으니까.
의상점 주인 말로는 최신 유행 하는 디자인에 장인의 손길로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자수를 새겨 넣은 명품이라는데… 솔직히 난 모르겠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가 이런 거지, 크크.>
“나와 어머니가 열심히 골라줬으니 잘 어울리는 게 당연하지. 자, 어서 들어가자.”
메이엔 누나가 웃으며 나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나와 아리안 누나가 팔짱을 낀 채로 연회장 안에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우리에게 향했다.
이 자리는 사실상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밝히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와 아리안 누나가 긴장한 것은 익숙하지 않은 옷차림보다 그 이유가 더 강했다.
대부분의 시선은 나를 우선적으로 살폈다.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다는 9서클의 대마법사.
어지간한 고위 귀족은 물론이고 이제는 국왕 전하마저도 내게 함부로 하지 못할 거라는 소리도 나온다.
나와 아리안 누나의 관계로 적색 마탑과 청색 마탑을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등등.
<마치 들개 무리에 둘러싸인 것 같구나. 엉덩이를 물리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어.>
저마다의 생각과 의도로 나를 쳐다보는 시선들을 보며 카이서스가 언짢아하며 말했다.
드래곤으로서 두려움과 경외의 시선만 받아왔던 그로서는 각종 욕망과 질투, 호기심이 뒤섞인 이곳의 시선들은 그저 역겨울 뿐이었다.
<딱 한 번만 저것들에게 눈 깔라고 말해주면 안 되겠냐?>
‘말이 되는 소릴 해라. 그랬다간 내가 미쳤다는 소문이 엄청난 속도로 퍼질걸?’
<흥! 이제 너는 맘만 먹으면 나라 하나쯤은 혼자서도 상대할 수 있다는 걸 잊은 거냐? 그깟 남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쓸 필요 없다.>
‘너처럼 제멋대로 살던 드래곤이라면 모를까, 나는 인간으로 계속 살아가고 싶다고. 공포의 대상이 되긴 싫어.’
‘뭘 쳐다봐?’라고 하면서 왕궁 한복판에서 깽판을 쳤다간 드래곤의 대마법사가 아니라 다른 별명을 얻고 괴물 취급이나 받을 거다.
내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대답한 말에 카이서스는 평소의 투덜거리거나 빈정대는 말투가 아닌 냉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인간으로 살아가겠다고? 네가? 능력부터 수명까지 모든 게 다 인간의 틀을 벗어났는데?>
차갑고 무심하게 사실만을 말하는 카이서스의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내게 카이서스는 계속해서 말했다.
<언제까지 헛된 꿈을 꿀 셈이냐. 언젠가 모두 너의 힘을 깨닫게 될 거고 지금과는 다른 시선을 받게 될 거다.>
그동안 내가 스스로 깨닫기를 바랐으나 그러지 못했기에 카이서스는 지금 냉정하게 말하는 것이다.
나는 함께 연회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아리안 누나의 얼굴을 슬쩍 바라보고는 카이서스에게 대답했다.
‘알아. 하지만 알고서도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있는 한은 인간으로 남아 있고 싶어.’
<…쯧. 예전이나 지금이나 멍청한 자식 같으니.>
그렇게 말한 카이서스는 삐지기라도 했는지 침묵해 버렸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나를 훔쳐보고 있었지만 정작 다가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의 위상이 커져 버린 탓에 함부로 다가오지도 못하는 거다.
물론 전부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하하! 그동안 잘 있었나! 커티스 요새 공방전 이후로는 처음이군!”
“말레온 경께서도 부상이 나으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함께 커티스 요새의 전투를 치르고, 제국의 오러 마스터와 마인들에 의해 부상을 입었던 말레온 경이 웃으며 다가와 인사를 건네자 나도 마주 웃어주며 인사했다.
내가 그때의 부상을 언급하자 그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요즘 들어 날이 흐리면 조금씩 쑤시긴 하지만 이만한 게 다행이지! 자네 부친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처럼 돌아다니지도 못하는 신세였을 테니 말이야! 하하하!”
말레온 경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모습에 용기를 낸 건지 주변에서 눈치를 살피며 보고 있던 사람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왔다.
“우린 바람 좀 쐬고 올게.”
여러 사람들의 인사를 받아주느라 바쁜 내 모습에 어머니와 메이엔 누나는 웃으며 멀어졌다.
사람들로 복잡해진 주변이 나도 불편한데 어머니는 오죽했을까.
창가로 향하는 어머니와 메이엔 누나의 모습을 확인하며 사람들과 계속해서 인사를 나누던 나의 귀에 어떤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저 부인이 드래곤의 마법사의 모친인가?”
“젊을 때 어떤 남자와 야반도주를 했다가 몇 년 전에 딸만 데리고 돌아왔다던데.”
남의 부모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것에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트럼벨로 돌아온 이후, 몇 년 동안 연회와 같은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꺼려왔다고 했다.
아버지와의 야반도주나 그런 이야기를 멋대로 떠들어대는 사람들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어머니와 함께 참석한 첫 연회에서 저딴 소리가 나오다니.
나는 잠시 주변의 사람들과 아리안 누나에게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최대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더라도, 힘을 쓸 때는 써야지.
서클 브레이커가 되면서 얻게 된 능력으로 주변의 마나로 그들을 짓눌러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가 마나를 움직이기 전에 그들의 뒤에서 누군가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아내에게 무슨 관심이 그렇게나 많으신지 모르겠군요.”
기척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들려온 살기 섞인 목소리에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귀족들이 흠칫 놀라며 돌아보았다.
“으악! 깜짝이야! 당신은 누구요?!”
두 남자 중 하나는 깜짝 놀라더니 기분 나쁘다는 듯 소리쳤지만 다른 한 사람은 갑자기 끼어든 사람을 알아본 모양이다.
“당신은……!”
그러곤 황급히 그의 정체를 같이 있던 자에게 귓속말로 알려준다.
이번에 모습을 드러낸 결사단의 수장이자 전쟁에서 공을 세운 새로운 오러 마스터.
갑자기 나타난 아버지의 정체를 알고는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흠, 흠! 불쾌하셨다면 사죄드리겠소.”
애써 태연한 척하며 아버지에게 사과하더니 이내 불안했는지 한마디를 덧붙인다.
“아드님이 오해하시는 일이 없으면 좋겠소이다.”
내 어머니의 남편이라는 건 내 아버지라는 소리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오러 마스터라든가 하는 것보다는 내가 더 신경 쓰이나보다.
그들의 말에 아버지는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하다 대꾸조차 않고 돌아서서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들의 사과에 대꾸조차 않는 아버지의 모습에 불쾌하다는 듯 노려보던 두 귀족은 아버지가 향하는 곳에 내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 두 사람은 찔리긴 하는지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자리를 피했다.
그들의 한심한 모습을 눈에서 지우고는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비밀조직의 수장이 이렇게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도 괜찮아요?”
내가 묻는 말에 아버지는 평소와 같은 말투로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어차피 곧 은퇴할 생각이었다. 언제까지 네 엄마를 걱정시킬 수는 없으니까.”
아버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어머니와 메이엔 누나가 있는 테라스였다.
“오실 거면 연락 주시지 그랬어요. 함께 입장했으면 좋았을 텐데.”
“나도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이제 막 도착한 거다.”
“은퇴하실 거라면서 바쁘시네요.”
“은퇴하기 전에 인수인계하는 것도 일이니까.”
“형이랑 동생은요?”
그 둘만 있으면 아주 오랜만에 온 가족이 다 모이는 셈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 물음에 고개를 저었다.
“은퇴하는 건 나지 루엔과 티엘은 아니다. 전쟁으로 인해 결사단의 그림자를 드러내고 크라우드와 연을 맺기는 했지만 전체를 드러낼 수는 없는 법이지.”
“흐응, 당신은 그 일을 그만두는데 루엔과 티엘은 계속 그 일을 하게 둘 거라고요?”
테라스에 갔던 어머니가 어느새 아버지의 곁으로 다가와 웃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웃는 얼굴 속에 숨겨진 분노를 파악했는지 잔뜩 긴장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비밀결사의 수장이자 오러 마스터인 아버지라도 어머니에겐 못 이기는 모양이다.
예전에도 그래 왔고, 지금도 여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