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 드래곤 로드
“그런 이유로 이놈은 내가 데려갈 테니 그렇게 알아둬.”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던 아리안 누나가 카락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얼떨떨해하는 순간.
카락스가 내 뒷덜미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커다란 마나의 흐름과 함께 시야가 뒤바뀌었다.
…뭐야, 나 납치당한 거야?!
준비는커녕 대답하기도 전에 카락스가 다짜고짜 공간이동으로 끌고 온 것을 깨달은 나는 항의했다.
“적어도 준비할 시간 정도는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항의라고 해봐야 상대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 최대한 부드럽게 말한 거지만.
최대한 눈치를 보며 말했음에도 카락스는 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준비할 게 뭐가 있다고 그러는 거냐? 네가 자리를 비우는 것은 곁에 있던 여자에게 알아서 하라 했으니 다른 자들을 걱정하게 할 일도 없을 거고.”
그건 그렇지. 어차피 공간이동으로 순식간에 도착했으니 여행에 필요한 것을 챙길 필요도 없지.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리안 누나니 내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자리를 비운 것을 다른 사람들이 납득하게끔 잘 전달해 줄 거다.
“그러니 칭얼대지 말고 로드께 인사나 드려라.”
카락스는 귀찮다는 듯 내 뒤를 향해 눈짓하며 말했다.
설마, 내 뒤에 드래곤 로드가 있다는 거야?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것과 동시에 황금빛으로 번뜩이는 커다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헉!”
신기해하며 나를 쳐다보는 그 눈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자 파충류 특유의 세로로 길게 찢어진 눈동자를 지닌 황금빛의 눈도 뒤로 물러났다.
그제야 나는 간신히 상대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이전에 봤었던 카이서스의 본체보다도 커다란 크기의 골드 드래곤.
드래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드래곤의 로드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인사를 건네자 드래곤 로드의 몸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의 수십 배에 달하는 크기의 몸체가 빠르게 줄어들더니 오히려 나보다도 작아졌다.
잠시 후 내 앞에는 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금발 머리의 소년이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서있었다.
“네가 카이서스의 힘을 얻은 아이로구나.”
비록 어린아이의 외모를 했으나 기나긴 시간을 살아온 드래곤 로드의 연륜이 그대로 느껴지는 분위기였다.
“네, 라엘 드리안 입니다.”
“드래곤을 이끄는 로드인 바사라다. 만나서 반갑구나.”
나도 많은 수의 드래곤을 만나본 것은 아니지만 눈앞의 로드는 다른 드래곤들과는 달리 성격이 더럽지 않아 보였다.
마치 자상한 할아버지와 같은 분위기랄까.
물론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풍기는 분위기나 말투가 그렇다는 거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 드래곤들의 로드이기에 말을 아끼며 눈치를 살폈다.
그런 내게 로드는 계속해서 말했다.
“카이서스와 어울리느라 고생이 많겠구나. 그 녀석이 멍청한 짓을 한 탓에 네게 얹혀살게 되었다 들었다.”
“하, 하하…….”
불쌍하게 보는 듯한 로드의 시선에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힘없이 웃음만 흘렸다.
<아니, 고생은 무슨! 이 녀석이 내 덕분에 얼마나 잘나가는데! 야! 저 영감탱이한테 헛소리하지 말라고 전해!>
당연히 카이서스의 헛소리는 전하지 않았다.
“그래, 카이서스도 내 말을 듣고 있을 테지? 다른 이의 몸에 얹혀사는 느낌은 어떻더냐?”
유쾌하게 웃으며 놀리는 로드의 모습에 내 안의 카이서스가 잔뜩 화를 내며 소리쳤다.
<젠장, 저 영감탱이는 대체 언제 죽는 거야? 볼 때마다 남의 속이나 긁어대는 영감탱이는 빨리 죽어버리기나 하지.>
로드에게 하는 말이라기엔 너무나도 불경한 말을 내 머릿속에서 크게 떠들어대는 카이서스의 목소리에 나는 절로 눈을 찌푸렸다.
내가 눈을 찌푸리는 모습에 로드는 더욱 크게 웃었다.
“껄껄, 안 봐도 뻔하지. 카이서스가 잔뜩 화가 난 모양이구나. 어차피 고놈 열받으라고 한 말이니 신경 쓰지 말거라.”
내가 전해주지도 않았음에도 자신의 말을 짐작하는 로드의 반응에 긴장이 조금은 풀렸다.
그제야 나는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로드가 본모습을 하고 있었던 만큼 공간은 무척이나 넓었다.
벽 곳곳에는 환한 빛을 내는 보석이 주변을 밝혔고 바닥에는 대체 얼마나 되는 사람과 시간이 들었을지 모를, 드래곤 사이즈의 거대한 카펫이 깔려 있었다.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놀랄 정도로 커다란 카펫이었다.
거기다 성인 남자 여럿이 붙어야 감싸 안을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커다란 향로 등등.
드래곤의 크기에 맞춰 만들어진 물건들이 주변에 보였다.
아마 저것들을 드래곤이 직접 만들었을 것 같지는 않고… 인간이나 엘프, 드워프와 같은 종족들에게 선물로 받아낸 물건들이겠지.
드래곤 로드의 둥지 깊숙한 곳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던 중에 혼자서 한참 화를 내던 카이서스가 조금 가라앉았는지 한숨 쉬듯 내게 말했다.
<망할 영감탱이… 그래서 뭐 때문에 부른 건지나 물어봐.>
로드가 나를 부른 이유가 궁금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로드시여, 그런데 저는 무슨 일로 찾으셨습니까?”
내가 조심스레 묻자 가볍게 웃어 보인 로드가 슬쩍 건네듯 물어왔다.
“아이야, 드래곤의 사명과 세계의 섭리라는 것에 대해 알고 있느냐?”
모를 리가 없지.
지금까지의 무슨 문제만 생기면 카이서스가 떠들어댔던 것이 그거다.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네. 카이서스에게 들었습니다.”
“흠, 그 녀석이 그래도 그것들을 알려준 걸 보니 적어도 아무 생각이 없진 않았던 모양이구나.”
고개를 끄덕여 보인 로드는 지금까지의 온화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무겁고 진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열댓 살짜리 어린아이의 얼굴임에도 보는 이로 하여금 무서울 만큼 긴장되게 하는 표정이었다.
“너는 인간의 몸으로 드래곤의 힘을 얻었기에 섭리나 사명에서 벗어났다. 그렇기에 네게 그 힘을 가질 자격이 있는지 확인해 보려 한다. 섭리와 사명에 구속되지 않은 힘이 문제라도 일으키면 곤란하니 말이다.”
아니, 이제 와서 갑자기?!
드래곤의 힘을 얻었다기엔 나는 아직 서클조차 부수지 못했는데?
순간 불안해진 나는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저… 혹시 제가 카이서스의 힘을 가질 자격이 없다면요?”
“힘을 거둬 가야겠지.”
아주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대답하는 로드의 모습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드래곤들만의 비술 같은 걸로 내게서 카이서스의 힘만 쏙 빼 가지는 않을 거다
분명 가장 쉽고 빠른 방법으로… 내가 카이서스의 힘을 쓰지 못하게 하겠지.
죽어버리면 더는 힘을 쓰지 못할 테니까 말이야.
<죽이기까지는 않을 거다. 일단은 반쪽이나마 너도 동족이니… 대충 늙어 죽을 때까지 어디엔가 가둬두겠지.>
그게 더 안 좋거든?!
드래곤 로드가 직접 나선 일이니 일이 간단하게 풀릴 거라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이런 일이 되어버리다니.
드래곤의 심장으로 정신력이 나름대로 강해진 나조차도 이 상황에선 침착해지기 위해 몹시 애를 써야 했다.
“자격은 어떻게 검증하는 겁니까?”
“곧 알게 될 것이다.”
아무래도 로드는 당장은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카락스는 나를 이곳에 데려온 이후 자신의 할 일은 끝났다는 듯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료하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결국 나는 이 자리에 있는 드래곤들 중 나머지 하나에게 묻는 수밖에 없었다.
‘로드의 시험은 어떤 거야?’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로드가 말하는 자격 같은 건 처음 들어본다고. 애초에 드래곤이 아니면서 드래곤의 힘을 지니게 된 건 네 녀석이 처음이니까.>
혹시나 했는데 평소처럼 도움이 전혀 안 되는군.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로드에게 물었다.
“언제 제 자격을 실험하시는 겁니까?”
“바로 지금.”
“…네?”
곧 알게 될 거라는 말이 진짜 말 그대로 곧이란 소리였어?!
그의 말에 당황한 내가 뒤늦게 되묻는 것과 동시에 내 머릿속으로 뭔가가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고통스럽다거나 괴로운 느낌은 전혀 없이, 그저 순간적으로 멍한 기분이었다.
<뭐야, 이 영감탱이! 갑자기 무슨 짓이야?!>
카이서스조차도 당황했는지 어쩔 줄 몰라 하며 나밖에 듣지 못할 외침을 내질렀다.
이게 로드의 시험?
내게 뭔가를 한 것 같기는 한데 대체 어떤 식으로 시험이 진행되는 거지?
내 정신을 조작해서 나조차도 모르고 있던 내면의 본성을 드러내게 하는 건가?
아니면 나를 극한까지 몰아붙여서 어떻게 나오는지 확인하는 건가?
잔뜩 긴장한 채로 곧 닥쳐올 알 수 없는 일을 기다리고 있자니 카이서스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
<뭘 멀뚱멀뚱 가만히 있어? 저항하거나 화를 냈어야지!>
응?
이해할 수 없는 카이서스의 말에 내가 의아해하는 사이 로드는 어느 정도 만족했다는 듯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음! 굳이 힘을 거둘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대체 뭘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시험이 끝났다는 건가?
정말? 이게… 끝?!
상황이 판단되지 않아 혼란스러워 하는 내게 카이서스가 힘없이 말했다.
<아무리 로드라도 멋대로 기억을 읽으려 하면 거부했어야지. 일단은 반쪽이기는 해도 나의 것을 이어받은 동족 취급이니 반항한다고 바로 죽이지도 않았을 텐데.>
카이서스의 말을 잠시 곱씹어보던 나는 뒤늦게야 그 말뜻을 이해하곤 경악했다.
“제 기억을 읽었다고요?!”
내가 깜짝 놀라며 로드에게 확인하듯 묻자 카이서스는 그제야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기억을 읽히고 있다는 것 자체를 몰랐었던 거냐? 확실히 알고 있다기엔 너무 태평했지.>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던 의문의 기운이 바로 내 기억을 읽어내던 로드의 마법이었던 모양이다.
‘아니 그런 걸 내가 어떻게 알겠냐고?! 기억을 읽는 마법이라니,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고!’
<하여간 인간 놈들의 마법 수준이란… 끄응, 그러고 보니 나도 네 녀석이 9서클이 되면 서클 브레이크의 경지에 속한 마법들을 알려주려 했었는데 깜빡하고 있었군.>
녀석의 말을 들어보면 기억을 읽는 마법은 서클 브레이크에 속한 마법 같은데, 당연히 카이서스가 미리 알려주지 않은 지금의 내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래, 네가 어떤 존재인지 파악하는 데 가장 빠르고 쉬운 방법은 지금까지 해온 행동과 생각을 읽어내는 것이니까.”
내 물음에 담담하게 대답하는 로드의 모습에 나는 맥이 탁 빠져 버렸다.
힘을 지닐 자격을 확인하는 길고 힘겨운 시험 같은 건 없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난다고?
조금 전까지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내가 한심해져 한숨을 길게 내쉬던 중 문뜩 떠오른 생각에 멈칫했다.
“저, 혹시 지금까지의 제 모든 기억을 읽었다는 건 혹시… 제 개인적인 사생활… 그러니까 말도 안 되긴 하지만 다른 사람과의 은밀한 기억조차도 다 읽으셨습니까?”
에이, 아무리 자기중심적인 드래곤들이라 해도 그렇고 그런 기억까지는……
“아, 네가 지금 만나고 있는 첫 번째 여인과 보낸 즐거운 시간들을 말하는 것이냐? 내가 읽은 것은 너의 행동들과 생각들이지 행동하는 모습 하나하나를 살핀 것은 아니니 안심하도록 해라.”
그러니까 내가 아리안 누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것은 읽었어도 그 모습까지 본 것은 아니란 소리네.
그나마 다행이긴 하지만 전혀 기분 좋은 소리는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기억을 읽으시는 건 너무하셨습니다.”
“음, 그래도 그 덕에 네가 드래곤의 힘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걸 쉽게 증명할 수 있었잖느냐.”
“적어도 먼저 물어보셨어야죠. 게다가 카이서스의 말을 들어보니 기억을 읽는 것은 아무리 로드시라도 함부로 해선 안 되는 일 같습니다만.”
<맞다! 아무리 로드라도 멋대로 기억을 읽으려 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고말고!>
“으음, 그건 그렇다만……”
아무래도 내가 인간이었단 사실 때문에 로드도 별생각 없이 한 일인 듯하다.
드래곤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자신들이 멋대로 해도 문제없는 존재에 불과하니까.
그렇기에 드래곤의 힘을 이어받게 된 나라는 인간을 대하다 실수를 한 거겠지.
“내 잘못을 인정하도록 하마.”
로드 역시 그것을 깨달았는지 순순히 사과를 건넸다.
보통 인간의 높으신 작자들은 무슨 문제가 생기면 잘못을 전가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데 드래곤은 그렇지 않네.
아니, 잘못을 하더라도 처벌할 수 있는 건 같은 드래곤뿐이라서인가.
게다가 로드라면 잘못을 인정하더라도 처벌할 수 있는 존재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남의 기억을 마음대로 훔쳐본 로드를 벌하는 건 무리겠지만 적어도 뭔가를 요구할 수는 있겠지?
그와 동시에 로드에게 요구해야 할 것이 머릿속에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