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 내 집이 최고
같이 살겠다는 아리안 누나의 말은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바로 그 다음 날 오전부터 여러 물건들이 배달오기 시작했으니까.
그릇과 컵, 포크와 나이프 같은 식기류와 이불과 베개 같은 침구류 같은 소소한 것에서부터 침대나 장롱, 의자 같은 큼직한 가구류까지.
어제 내게 함께 살겠다고 선언하듯 말한 아리안 누나가 그대로 나가서 주문했던 물건들이다.
“제가 승낙하기도 전에 짐부터 들여놓으면 어떡해요?”
인부들이 짐마차에 싣고 온 가구들을 내려 집 안으로 들이는 모습에 내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아리안 누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되물었다.
“그럼 내 부탁을 거절할 거야?”
으윽, 이건 사기야.
저렇게 웃으며 쳐다보는 아리안 누나의 얼굴을 보면서 어떻게 안 된다고 말하냐고.
내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자니 가구들을 배달해 준 인부들 중 가장 선임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배, 배달 확인 부탁드립니다.”
약간은 긴장한 듯한 표정으로 아리안 누나에게 말한 그는 확인 서명을 받으며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하실 말씀이라도?”
내가 의아해하며 묻자 그는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저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대마법사님을 뵙는 건 처음이라 실례를 하고 말았습니다.”
그 말에 나는 쓰게 웃었다.
내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만 내가 사는 곳이 여기라는 사실은 은연중에 널리 퍼져 있었다.
딱히 비밀로 하지 않았던 데다 드래곤의 대마법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무척이나 컸으니까.
“괜찮아요. 사람들의 생각보다 젊어서 그런지 다들 그러더라고요.”
자신의 사과를 살갑게 받아주는 내 모습에 뭔가 용기가 생긴 건지 그는 궁금하던 것을 하나 물어왔다.
“저 그런데… 대마법사님 같은 분이 사시긴 너무 평범한 집 아닙니까요?”
그 말에 서명을 마친 확인증을 돌려주려던 아리안 누나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아리안 누나도 어제 드래곤의 대마법사가 살기엔 부족하지 않느냐고 물어봤었으니까.
보통 귀족이나 고위급 대마법사쯤 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함부로 했다간 대부분 안 좋은 꼴을 당할 텐데, 용케도 물어보네.
<그야 네 얼굴에서부터 만만함이 드러나 보이니 그런 거지.>
‘선량함이라고 포장하려는 노력이라도 좀 해라.’
<내가 왜 굳이?>
‘언제는 나더러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말라더니!’
<그야 주제도 모르는 것들에게 무시당하지 말란 거지.>
에휴, 말을 말아야지.
카이서스와 이야기하느라 내가 잠시 말을 하지 않자 중년 인부는 내가 자신의 물음을 불쾌해한다고 생각했는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변명했다.
“죄송합니다! 불쾌하셨다면 용서해 주십쇼. 혹시나 대마법사님을 노리는 흉악한 놈들이 있진 않을까 해서……”
확실히 내 집에 침입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놈들이 없진 않겠지.
일단 대마법사의 집에는 보물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훔치려는 도둑도 있을 테고, 내 존재를 위협으로 느낀 누군가가 암살을 시도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제국에서 모습을 감춘 루리스가 나를 제거하려 할 수도 있겠지.
걱정을 이해한 내가 고개를 주억거리자 내가 불쾌해하진 않는다는 걸 깨달은 듯 그가 말을 이었다.
“드래곤의 대마법사님은 우리 크라우드의 보물이시잖습니까. 만에 하나 다치기라도 하실까 봐……”
내가 보물이라니!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말이다.
내가 그 말에 당혹해하자 곁에 있던 아리안 누나가 웃으며 중년 인부의 말을 보태주었다.
“몰랐어? 다른 나라는 몰라도 우리 나라에서 네가 가장 인기가 좋대.”
<무려 9서클의 대마법사인 데다 드래곤과도 연관되어 있으니까. 게다가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영웅이니까. 아마 네가 이 나라의 왕이 되겠다고 맘만 먹으면 네 편을 들어줄 놈들이 꽤나 많을 거다.>
웃음을 터뜨리며 말하던 카이서스는 문뜩 뭔가 생각났는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니 괜찮은데, 이런 초라한 집 말고 왕궁에서 사는 건 어떠냐? 땅따먹기 좀 하고 난 후에 황궁에서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미쳤냐? 반란 같은 건 싫거든?’
<쳇, 귀찮은 거겠지.>
사실 본인도 그럴 생각은 없었으면서 투덜거리는 카이서스를 애써 무시했다.
인부에게 집을 둘러싼 결계나 마법에 대해선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건 마지막 안전장치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이 주변에 저를 지키는 사람들이 쫙 깔려 있거든요.”
주변에 지나던 사람들이나 보이지 않는 곳들에서 움찔하는 기색이 느껴진다.
숨는다고 숨어봐야 드래곤의 감각을 벗어날 수는 없지.
크라우드 왕국에서도 대마법사인 나를 주택가 사이에 아무렇게나 살게 내버려 두는 게 불안했는지 집을 옮길 것을 권했지만 내가 거절했다.
그래서 내 집을 둘러싼 집들을 모조리 사들여 호위들이 거주하게 한 걸로도 모자라서 근처에도 사람들을 배치해 두었다.
아마 세인트 혼의 요원들도 있을 거다.
트럼벨이 통째로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는 이상 9서클의 나를 들키지 않게 해치는 건 어렵다고 말했는데 말이지.
‘에휴, 다들 너무 걱정이 많다니까. 어떻게 된 게 다들 내 집만 보면 걱정인지…….’
<그러니까 좀 제대로 된 곳에서 살면 여러 놈들 고생하지 않고 좋지 않냐! 왜 굳이 이런 조그마하고 별 볼 일 없는 집에 계속 살겠다고 고집을 부려선!>
‘그래도 내가 처음으로 갖게 된 내 소유의 집이잖아. 어쩐지 애착 같은 게 생겨서 말이지.’
실제로 이 집에서 생활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긴 해도 말이지.
게다가 커다란 저택이나 탑 같은 데서 살자니 적응도 힘들 것 같고.
아무리 내가 지금은 드래곤의 대마법사니 뭐니 해도 호화로운 데서 살아본 거라곤 로라스 왕자에게 마법을 가르치며 잠시나마 왕궁에 식객으로 있을 때뿐이라고.
<쳇, 뼛속까지 소시민 녀석 같으니.>
‘꼬우면 평범한 소시민이었던 나 말고 왕족이나 고위귀족의 몸을 뺏으려고 하지 그랬어?’
<끄응!>
“아아! 그렇군요! 역시 대마법사님이 지내시는 집이니 그렇겠죠.”
나름대로 납득을 한 듯한 중년 인부는 아리안 누나에게 받은 확인증을 손에 들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가구들을 배달해 준 인부들까지 떠나자 아리안 누나가 주문한 물건들의 배달이 모두 끝났다.
“자, 받을 물건들도 다 왔으니… 일단 점심부터 먹을까?”
점심을 먹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었으나 아침부터 배달 온 물건들을 받고, 정리하느라 아직 식사를 하지 않은 터였다.
하지만 지금부터 식사 준비를 하자니 식재료를 사 오는 것부터 해야 했기에 그냥 나가서 사 먹기로 했다.
근처에 자주 가던 식당으로 아리안 누나와 함께 갔다.
“오늘의 정식으로 주세요.”
“저도 같은 걸로.”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아리안 누나의 표정을 조심스레 살폈다.
내가 자주 들르는 식당이라는 말에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누나, 혹시 필요한 거라도 있어요?”
“응? 갑자기 무슨 소리야?”
뜬금없는 내 물음에 아리안 누나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지난번에 카이서스가 선물이라도 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던 말.
그 후로 계속 아리안 누나가 기뻐할 만한 선물을 생각해 봤지만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아리안 누나가 갖고 싶은 걸 선물하고 싶어서요.”
<…어휴 이 모자란 놈… 그걸 본인에게 대놓고 물어보면 어쩌자는 거냐?>
한심해하는 카이서스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준비된 음식을 테이블에 내려놓던 점원조차 한심해하는 눈으로 쳐다본다.
뭔가 잘못한 기분에 내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자니 아리안 누나는 오히려 환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내가 원하는 선물을 해주려고? 고마워! 그런데 지금 당장 말고 다음에 말해도 괜찮지?”
“네. 뭐든지 괜찮아요.”
내 대답에 아리안 누나는 더욱 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안 누나가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다행은 무슨 다행이야? 오히려 더 큰일 난 것 같은데.>
‘뭐가? 아리안 누나가 어떤 대단한 선물을 받고 싶어 하더라도 9서클의 대마법사로서 어떻게든 구할 수 있지 않겠어? 정 안 되면 네 둥지의 보물을 좀 빼서 쓰면 되겠지.’
<인마, 내 둥지의 보물을 왜… 후, 아니다 됐다.>
둥지의 보물을 쓴다는 말에 발끈하려던 카이서스는 이내 한숨을 내쉬곤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대체 뭐가 큰일이라는 거야?
언제는 드래곤의 힘을 이어받은 자로서 자신감을 가지라더니.
나는 카이서스가 우려하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로 식사를 마치고 식당을 나섰다.
거리를 걸으며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황제가 사망한 덕분에 전쟁이 곧 끝난다는 이야기가 퍼져서인지 거리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여유로웠다.
전쟁 발발 이후에 가득하던 긴장감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과 곳곳을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
전쟁 이전과 같은 평화로운 모습이 보기 좋다.
아이들은 전쟁놀이를 하는지 제각기 손에 나무칼이나 막대기를 들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뭔가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핫하! 사악한 제국 황제야! 이 드래곤의 대마법사님이 쓰는 마법 맛 좀 쬐끔만 보거라!”
“야! 언제까지 내가 나쁜 황제 해야 하는 거야! 나도 드래곤의 대마법사님 할래!”
“뭐? 네가 가위바위보에서 져서 그런 거잖아!”
역할 문제로 말다툼을 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대략 정신이 멍해졌다.
애들이 내 흉내를 내고 있잖아?
아니, 그보다 내가 왜 제국 황제를 죽인 사람이 되어 있는 건데?!
<제국 황제를 죽인 게 마물들이란 정보는 아직 퍼지지 않은 모양이지. 게다가 애들이란 원래 제멋대로 끼워 맞추거든.>
아이들이 하는 말을 들으며 어이없어하는 내 모습에 아리안 누나가 실소를 머금었다.
“후후, 다들 너를 좋아해.”
“으으, 빨리 집으로 돌아가요.”
아이들이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은 좋지만 쑥스럽기도 했다.
“어린이들의 영웅은 부끄러움도 많네~”
“아, 그러지 마요, 누나.”
장난스레 놀리는 아리안 누나에게 투덜거리며 집으로 돌아간 나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아직 저 멀리 보이는 나의 집, 그곳에서 강대한 마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어… 집에 온갖 결계와 마법이 펼쳐져 있어서 안전하다고 하지 않았어?”
아리안 누나 역시 그 마력을 느낀 것인지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녀에게 있어서 내 집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소름이 끼칠 정도겠지.
내가 걸어둔 결계를 모두 무시하고 집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존재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일단 물러나서 지원을 불러야 하나?
그랬다간 피해 규모가 장난 아니게 커질 텐데.
시내의 주택가에서 9서클 마법사인 나조차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존재와의 정면 승부를 벌인다면 적어도 이 근방은 확실히 박살 날 거다.
긴장한 채로 고민하고 있던 내게 카이서스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괜찮으니까 일단 집으로 들어가자.>
카이서스에게서 느껴지는 감정은 귀찮음과 짜증.
허락도 없이 집에 침입한 불청객에 대한 정체를 알고 있는 모양이다.
적어도 그 존재가 적이 아니라는 것도.
‘누군지 알아?’
<너도 만나본 녀석이다.>
짜증스레 말하는 카이서스는 상대의 정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싫다는 기색이었다.
“음, 일단은 들어가 보죠. 적은 아닌 모양이니까요.”
나는 그렇게 말하곤 집으로 다가가 갔다.
내 말에도 아리안 누나는 걱정됐는지 뭐라 말하려다 포기하고 뒤따라왔다.
조심스레 현관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눈에 보인 것은……
“카락스 님?!”
일전에 호기심으로 찾아왔던 블루 드래곤, 카락스가 인간의 모습으로 팔짱을 낀 채로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리 침입자들을 막기 위해 결계들을 도배해도 드래곤은 좀 반칙이지!
“내가 기다렸는데 어딜 갔다 온 게냐.”
“네?”
아니, 온다는 것도 몰랐는데 기다리고 있단 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내가 억울한 상황의 연속에 황당해하고 있는 사이 아리안 누나가 긴장하는 기색으로 내게 조심스레 물었다.
“저분, 혹시 드래곤이신 거야?”
최대한 작게 말한 것이었으나 드래곤인 카락스가 듣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래, 내 정체에 대해 눈치챘다면 소란 피우지 마라.”
아리안 누나는 자신이 끼어들 일이 아니라는 것을 모를 리 없었기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카락스 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조금은 진정한 내가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며 묻자 카락스는 별것 아니라는 것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로드께서 너를 만나보시겠단다.”
“…네?”
그러니까, 카락스가 말하는 로드라는 게 설마… 드래곤 로드를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엥? 그 영감탱이 아직도 살아 있었어?>
조금 놀랐다는 듯 말하는 카이서스의 반응을 보니 드래곤 로드는 드래곤들 사이에서도 나이가 엄청나게 많은 듯하다.
드래곤은 나이가 많아질수록 더욱 강대한 힘을 지닌다 했으니… 어쩌면 이 세상의 최강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드래곤 로드가 대체 나를 왜 만나려 하는 거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믿기지 않는 말에 멍해진 나를 카락스는 그저 귀찮은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