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머릿속 드래곤-127화 (127/150)

127화 - 집

내가 왔다는 소식에 어머니는 현관 앞까지 달려 나와 나를 맞이했다.

“라엘! 다친 곳은 없지? 그동안 식사는 잘 챙겨 먹었어?”

내 몸 여기저기를 살피는 어머니의 옷차림이 편하고 가벼워 보이는 것을 보니 낮잠이라도 주무시고 계시던 모양이었다.

“마를렌, 남들 시선도 좀 신경 쓰지 그러냐. 이리도 품위가 없어서야.”

뒤이어 나온 외할아버지가 어머니의 옷차림을 지적하며 말했다.

하지만 언짢다거나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날 보는 시선부터가 이전과는 달리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처음에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을지는 몰라도 지금은 손자로서 인정했기 때문이겠지.

“아버지도 참~ 어차피 담장 때문에 밖에선 보이지도 않잖아요.”

어머니의 말대로 저택을 둘러싼 정원과 담장 때문에 대문 밖에선 현관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외할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드래곤의 대마법사란 칭호를 받은 이 녀석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 게냐?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두 분의 환대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간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와 아버지의 안부를 전했다.

아버지가 실은 오러 마스터였다던가, 여러모로 바빠서 오지 못한다는 말에 어머니는 이해한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얘도 참, 네 아빠가 그러는 게 하루 이틀이니?”

어머니는 나도 걱정했겠지만 아버지에 대해서도 걱정했을 텐데.

심지어 아버지는 편지만 보냈을 뿐 몇 년간 어머니 앞에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정말이지 어머니는 어쩌다 아버지 같은 사람한테 반하신 건지.

대신 화를 낸 것은 외할아버지였다.

“흥, 내 집에 그놈이 들어오게 해준다더냐? 만일 그놈이 왔다면 머리통을 후려갈기며 내쫓았을 거다.”

아마 그게 아버지가 여기 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만.

“아버지도 이젠 그이를 인정해 줄 때가 됐지 않아요? 증손녀도 할아버지는 봐야죠.”

“맞아요. 파라도 증조할아버지랑 할아버지가 싸우면 슬퍼할 거예요.”

“끄응…….”

어느새 파라를 안고 들어온 누나까지 그렇게 말하자 외할아버지는 침음을 흘렸다.

외손녀의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증손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외할아버지는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놈이 오거든 내쫓지는 않으마.”

한풀 꺾이긴 했어도 못마땅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어머니는 만족스러워보였다.

아무리 단호한 외할아버지라도 귀여운 증손녀 앞에선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 모습에 작게 웃음을 흘리던 메이엔 누나가 슬쩍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그런데 아버지야 그렇다 쳐도 아리안은 왜 같이 오지 않은 거야? 혹시 싸우기라도 했어?”

메이엔 누나는 당연히 나와 아리안 누나가 함께 올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마 아리안 누나는 아직 전선에 있을 거야.”

나야 모니카 공주를 구한 직후 곧장 트럼벨로 왔지만 아리안 누나는 아니었다.

“응? 아마라니?”

“음… 그게 사실 모니카 공주를 구해 온 후로 아직 연락을 못 해봤거든.”

“뭐? 미쳤니?!”

내 말에 누나가 어이없다는 듯 소리치자 자고 있던 파라가 잠에서 깬 듯 칭얼거렸다.

황급히 파라를 어르는 누나를 대신해 어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면 못써. 나야 네 아빠가 원래 그런 걸 아니 괜찮다지만 아리안은 서운해할지도 모르잖니.”

얼굴도 안 비치고 연락도 제대로 하지 않는 아버지와 비교를 당하니 내가 엄청 잘못했다는 게 느껴진다.

외가에 오기 전 카이서스가 했던 말에 아리안 누나에게 연락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그동안 연락을 까먹고 있었던 변명을 생각하느라 미루고 있었는데.

아리안 누나도 나를 많이 걱정했겠지?

<네 녀석이 무사히 공주를 구출해서 돌아왔다는 건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듣긴 했을 테니 걱정은 안 하겠지. 다만 연락도 안한 걸 화내고 있을걸?>

‘으, 어떡하지?’

<당장 연락해서 닥치고 미안하다고 해. 구질구질하게 변명하는 것보다 제대로 사과하는 게 나아.>

음, 카이서스 입에서 사과라는 말이 나오니 그다지 신빙성이 가지 않기는 하는데… 일리가 있긴 해.

<…너 나랑 생각을 공유한다는 건 잊기라도 한 거냐?>

카이서스의 어이없어하는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는 내게 누나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부터 아리안 눈치를 보는 걸 보니 결혼하면 꽉 잡혀 살겠는데?”

“겨, 결혼이라니? 아직 거기까지는… 그리고 눈치를 본다니 무슨 소리야?”

당황한 내가 애써 침착하려 하며 대답하자 메이엔 누나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흥, 누굴 속이려고? 얼굴에 다 보이잖니.”

‘카이서스, 정말이야?’

<만일 너도 지금 거울을 봤으면 아무 말도 못 하고 인정했을 거다.>

끄응, 내 생각보다도 당황했던 모양이다.

“아리안한테 잘해줘. 누구처럼 바쁘다고 얼굴도 자주 안 비치고 그러면 안 돼.”

아버지 얘긴가 싶었지만 누나의 얼굴에 깃든 감정을 보니 매형 이야기인 모양이다.

왕실의 근위기사인 매형 루밀리온은 많이 바쁜 모양이었다.

전쟁 중에도 그렇고 전쟁이 끝날 것이 확실해진 지금도 임무에 소홀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다음에 만나면 누나가 서운해하더라고 말이라도 전해줘야겠네.

잠시 언짢은 표정을 짓던 누나는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리안에게 선물이라도 하나 하는 건 어때? 괜찮은 드레스 같은 거 말이야.”

<아무래도 드레스는 네 누이가 갖고 싶은 거 같은데?>

‘기억해 뒀다가 매형한테도 전해줘야겠네.’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매형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져서 실소를 머금었다.

그러다 문뜩 생각했다.

내가 아리안 누나에게 뭔가 선물 같은 걸 해준 적이 있던가?

<쯧쯧, 사귀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차여선 징징대는 모습이 눈에 선하구나.>

‘그게 무슨 재수 없는 소리야?’

<인간들이란 표현을 해주지 않으면 모른단 말이지. 그리고 여자에게 있어서 애정을 표현하는 최고의 방법은 선물이라고!>

‘그게 무슨 시대에 뒤떨어진 꼰대 같은 소리야? 나의 아리안 누나는 그렇지 않아!’

<너 그 아이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자주 해줬냐? 소심해서 그런 기본적인 것도 안 했으면 선물으로라도 표현했었어야지.>

다른 건 몰라도 표현에 대한 말은 반박할 수 없었다.

심지어 제대로 표현하기는커녕 연락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으니…….

아리안 누나에게 미안해졌다.

외가에서 담소와 함께 점심 식사까지 마친 나는 후 집으로 돌아왔다.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는 통신구를 꺼내어 들었다.

다른 통신구와의 공명을 알리는 진동이 몇 번 정도 울렸다.

아리안 누나가 통신을 받지 못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통신이 연결되었다.

“아, 아리안 누나. 연락이 늦어서 미안해요.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마인과 9서클에 대해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미처 연락할 생각을 못 했어요.”

거짓은 아니다.

마인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고 자료로 만드느라 나를 만나러 멀리서 찾아온 다른 마탑의 마법사들과 마법에 대한 토론과 교류를 했으니까.

일단 카이서스의 지식을 바탕으로 마인에 대해 가장 많이 파악하고 있는 것도 나였고, 인간으로서 9서클에 올라선 것도 나였다.

마인에 대한 것을 자료로 만드는 데는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다른 마법사들과 이야기하는 데 꽤나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내가 올라선 9서클의 경지에 대해 듣기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나를 만나러 온 마법사들은 쉽게 돌아가는 일이 없었다.

더 높은 경지의 마법사라면 목숨마저도 거는 것이 마법사.

경지상승에 대한 욕망은 경지가 높은 자들일수록 더 강했고 타국의 마탑에서 온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고위급의 마법사들이었다.

고위 마법사들이다 보니 문전박대하기도 어려운 터라 손님으로 맞이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진이 빠질 정도로 끈질긴 사람들이었다.

통신이 연결되자마자 사과부터 하는 내 모습에 아리안 누나는 피식 웃어 보였다.

-알아, 나도 네가 9서클이라는 걸 알자마자 엄청 귀찮게 굴었잖아. 다른 마법사들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겠지 뭐.

아리안 누나나 대스승님에 비하면 비교도 안 될 정도였지만.

아리안 누나나 대스승님처럼 나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은 나를 배려해서 조심했지만 그들은 완전히 눈이 뒤집혀선 9서클의 경지를 엿보려 했다.

아무튼 다행히 아리안 누나는 내가 걱정한 것과는 달리 그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해 주는 모양이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커티스 요새는 어때요?”

내 물음에 그녀는 음… 하고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조용하지 뭐. 제국군이 물러간 건 아니지만 공격해 올 기미도 없고. 너는 어때?

“황제가 죽었단 소식에 다들 난리가 나서 그 틈에 외가에 들렀다가 이제 집에 온 참이에요.”

제국 황제의 사망과 황궁에서의 학살이 벌어졌다는 대사건.

주변국 모두가 이번 일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을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정신이 없었다.

나도 그 핑계로 손님들의 방문을 거절한 거다.

-잘됐네. 아, 우선 통신은 끊을게.

“네? 그게 무슨……?”

잘됐다는 말에 내가 의아해하며 물었으나 어느새 통신은 종료되어 있었다.

뭐가 잘됐다는 거지?

<자기는 바쁜데 너는 놀고 있다고 느껴서 화난 거 아니야? 가끔 여자는 속마음과 정반대의 말을 한다고. 화가 잔뜩 났는데도 화나지 않았다고 하는 식으로 말이야. 잘됐다고 하는 게 비꼬는 것일 수도 있지.>

‘아, 제발 좀 사람 불안하게 하는 말은 자제해 줄래?’

아리안 누나가 갑자기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어버린 데다 카이서스의 말까지 듣고 나니 뭔가 불안해졌다.

끄응, 역시 다시 통신을 걸어서 아리안 누나의 기분을 확인해 볼까?

하지만 다시 통신을 걸어서 확인했다가 추궁하는 것처럼 느끼면 어쩌지?

<어휴, 이 소심한 자식…….>

카이서스가 한심해하거나 말거나 통신구를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고민하고 있던 도중 손님의 방문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손님인가?

분명 현관에 한동안 손님은 거절한다고 적어뒀는데 초인종을 울리다니.

대체 누구야?

안 그래도 아리안 누나에 대한 고민으로 머리가 복잡하던 나였기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아래로 내려간 나는 약간의 불쾌감을 드러내며 현관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한동안 손님과 만날 수 없다고… 어?”

현관문을 열어젖히며 투덜대던 나는 문 앞에 서있던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곤 어안이 벙벙해졌다.

“음… 나 돌아갈까?”

“그, 그럴 리가요! 아리안 누나는 당연히 예외죠!”

나는 당황해서 손을 내저으며 대답하곤 아리안 누나를 안으로 들였다.

“누나가 대체 어떻게 여길… 커티스 요새에 있는 것 아니었어요?”

“지금도 요새에 있다고는 하지 않았었잖아? 요새 일이 많이 여유로워진 덕분에 나는 먼저 복귀하기로 했어. 다른 분들도 조만간 돌아오실걸?”

확실히 요새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하긴 했지만 아직도 요새라는 말은 없었지.

“나는 한 시간쯤 전에 도착해서 이 근처에 여관을 잡고 짐을 풀고 쉬고 있었는데 네가 통신을 걸어온 거야. 그러곤 여기로 곧장 달려온 거지.”

말 그대로 달려왔는지 지금도 약간 숨이 거친 그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 모습에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눈에 보였다.

요즘 한창 더워지는 시기인데 전력으로 달리기까지 했으니 꽤나 더울 터였다.

주변의 마나를 움직여 실내의 온도를 낮춰주었다.

순식간에 시원해지는 주변의 공기에 아리안 누나가 작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

시원해졌다고는 해도 이미 흐르고 있는 땀이 금방 마를 수는 없었기에 아리안 누나는 손등으로 이마를 스윽 문지르며 땀을 훔쳤다.

“그런데 여관을 잡다니요? 건너편에 누나가 지내던 집이 있지 않았어요?”

분명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집을 빌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 월셋집 말이지? 전쟁터에 나가는데 돈만 내고 방을 비워두긴 좀 그래서 계약을 해지했거든. 어차피 짐이랄 것도 얼마 되지 않아서 굳이 방을 빌리고 있을 필요도 없었고.”

하긴 나야 이 집을 아예 사버려서 괜찮다지만 계속해서 비워둘 집을 빌리는 것도 그렇긴 하지.

그 말에 납득한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아리안 누나는 집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긴 여전하네. 그런데 예전이라면 몰라도 9서클의 대마법사가 사는 곳이라기엔 너무 허술한 거 아니야?”

<옳은 말이다! 이 몸을 품은 녀석이 지내는 곳이 고작 이런 초라한 곳이라니.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너에게는 왕조차 함부로 못 하는데. 번듯한 저택 하나쯤은 달라고 해봐. 안 주고는 못 배길걸?>

‘됐거든?’

“집은 작아도 이곳을 둘러싼 결계들을 확인해보면 허술하진 않을걸요.”

내가 트럼벨에 돌아오자마자 집에 설치한 결계는 허락 없이는 집 안에 들어올 수조차 없게 가로막고, 집에 가해지는 공격을 반사한다.

최소 8서클 이상 되는 능력을 지니지 못하면 내 허락 없이는 집에 흠집조차 내지 못할 거다.

나를 귀찮게 하거나 노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9서클임이 알려진 이상 내가 원하건 원치 않건 나를 경계할 자들이 있을 테니까.

그 외에 클린 마법까지 상시 적용 중이라 따로 청소할 필요도 없고, 일정 온도를 유지하는 마법까지 걸려 있어 언제든 쾌적한 환경을 유지한다.

겉보기로는 평범한 집처럼 보일지라도 9서클 대마법사의 손길이 닿았으니 어지간한 대저택보다 안전하고 편안하다는 거지.

물론 마법과 결계를 설치하고 적용하는 데 카이서스의 보물창고에서 가져온 재료들이 없었더라면 아무리 9서클인 나라도 힘들었겠지만.

<망할 놈, 그 재료들을 고작 이런 누추한 곳에다가 써버리다니.>

카이서스는 아직도 크고 호화로운 대저택에 미련이 남는 듯해 보이지만 뭐 어때, 난 이 집이 마음에 드는데.

내 집에 걸려 있는 각종 마법과 결계들을 설명해 주자 아리안 누나는 혀를 내둘렀다.

“하긴 9서클 대마법사의 집이라는 것부터가 평범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곤 다시 집 안을 둘러보던 아리안 누나가 슬쩍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남는 방 하나만 내어줄래?”

“그야 물론… 네?!”

갑작스러운 아리안 누나의 말에 나는 별생각 없이 대답하다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며 쳐다봤다.

“그럼 잘 부탁해.”

아리안 누나는 밝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같이 살겠다는 거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