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 퍼져가는 어둠.
대륙력 759년 6월 10일.
타이런 제국과 크라우드 왕국의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제국이 인간을 마인으로 만들어 전쟁에 투입했다는 이야기는 두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사람들도 있었으나 크라우드 왕국은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확보하고 있었다.
타이런 제국과 크라우드 왕국에 속하지 않은 마탑의 탑주들이 크라우드 왕국을 방문해 마인의 시체를 확인하고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마인임을 확인해 주었으니까.
모니카 황후를 구해 오는 동안 그사이에 마탑주들을 데려와서 공증까지 받아내다니.
마탑주쯤 되는 분들은 쉽게 움직이기 힘들 텐데, 아버지는 대체 어떻게 그분들이 직접 오게 만든 거지?
아버지는 마법사 특유의 지식욕을 이용했다고는 하는데…….
확실히 지금껏 없었던, 만들어진 마인의 시체를 직접 확인하는 거라면 마법사로서 욕심이 날 만도 하지.
아무튼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마법의 권위자들이 공증한 바, 마인을 만들어낸 제국에게 각국의 비난이 쏟아졌다.
특히, 모니카를 감금하고 생명력을 착취했다는 사실에 파이썬 왕국이 가장 분노했다.
황후가 되었었지만 지금은 다시 파이썬 왕국의 공주 신분을 되찾은 그녀로 인해 제국이 마인을 만든 것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었다.
마인의 몸에 흐르는 아트라오의 기운, 그것은 확실히 모니카 공주가 빼앗긴 것이었으니까.
무척 쇠약해져 있던 탓에 회복을 위해 아직 트럼벨에 머무는 중인 모니카 공주도 지금은 많이 회복했다지만 파이썬 국왕은 당장에라도 제국에 선전포고를 할 기색이라 했다.
제국에 속아서 보냈던 공주가 제물로 쓰이다 죽을 뻔했으니까.
파이썬 왕국이 아니더라도 다른 왕국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진실이 밝혀지지 않았다면 크라우드 왕국 다음에는 자신들의 영토에 마인들이 들어왔었을 테니까.
우리나라는 물론 주변의 모든 국가가 타이런 제국에게 이번 일에 대해 해명하라며 압박을 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제국을 상대로 압박을 가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겠으나 이번엔 달랐다.
인간을 마인으로 만들었다.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예전에 나타난 아바툴이나 언데드 로드처럼 마계에서 넘어오거나, 마계의 기운에 오염되는 것으로 태어나는 마물들은 한번 나타날 때마다 엄청난 재앙과 죽음을 몰고 왔다.
그렇기에 마물에 속하는 존재가 나타날 때마다 대륙의 모든 국가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힘을 합쳐왔다.
그런 마물을, 인간이 만들어내서 전쟁에 동원했다.
대륙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런 제국의 강대함은 무시할 수 없었기에 직접적으로 제국에 공격을 가하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직까지는.
제국이 전쟁을 계속 이어나가거나 조금이라도 수상한 행동을 보일 경우 다른 나라들도 행동을 시작할 터였다.
“제국은 아직까지 조용하죠?
창밖을 바라보던 내가 고개를 돌려 서류를 보고 있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나처럼 아버지도 사신들에게 이번 일에 대해 설명하기 위한 증인으로 왕궁에 머물고 있었다.
“놈들도 당황스러울 거다.”
아버지는 내 물음에 대답하면서도 계속해서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크라우드에 협력하며 크라우드와 세인트 혼에서 모아온 정보를 확인하고 취합하는 중이었다.
열심히 일하는 건 좋은데 왜 하필 내 방에서 일하시는 거야?
내가 속으로 투덜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일부는 마인에 대해 알고 있었겠지만 대부분은 전혀 몰랐을 거다. 그리고 마물을 적대하는 건 제국 놈들이라도 마찬가지니……”
마물들은 국적을 가리지 않으니 제국이라 해서 역사상 마물로 인한 피해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나라들보다 제국이 마물에 의해 피해를 입은 역사가 많다.
일단은 땅덩어리가 넓으니까.
“…아마 지금은 우리와 다른 나라들의 음해니 뭐니 하면서 병사들과 백성들을 추스르고 있겠지만… 진실을 깨닫게 되면 제국은 내부에서부터 흔들릴 거다. 황제 놈이 멍청한 짓을 저지른 셈이지.”
역사상 유명한 영웅들의 업적들 중에는 마물을 토벌했다는 것이 많았다.
그 영웅 중에는 타이런 제국의 건국황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릴 때부터 들어온 영웅들의 업적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사악한 마물들을 자신들의 나라가 만들어냈으니 동요할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며칠 후.
타이런 제국의 황제가 죽었단 소식이 전해졌다.
* * *
주르륵-
입을 멍하니 벌린 탓에 마시고 있던 과일주스가 입에서 그대로 흘러내렸다.
“화, 황제가 죽었다고요?!”
간신히 정신을 차린 내가 되묻자 갑자기 집으로 찾아와 소식을 전달해 준 아버지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뿐만 아니라 황궁에 있던 자들의 절반 이상이 죽었다. 고위급의 귀족들과 관료들도 여럿 죽었다고 확인되었어.”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에 골치가 아픈 것은 아버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예요?”
황궁에 있던 사람 절반 이상이 죽고 그 과정에서 고위급의 귀족들과 관료들, 심지어 황제마저 죽었다.
단순한 사고 같은 것일 리가 없다.
혹시 반란이라도 일어난 건가?
난폭한 데다 무자비하기 짝이 없는 황제 놈의 성질머리를 생각해 봤을 때 결코 허황된 추측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반란은 아니었다.
“수십 마리의 마인들이 황궁에서 닥치는 대로 살육을 벌였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황실근위기사들과 황실 마법사들도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는구나.”
“네? 황제를 죽이고 황궁에서 학살을 일으킨 게 마인이라니요?”
순간적으로 아버지의 말에 나는 한 번 더 충격을 받았다.
마인들을 만들고 조종한 것은 제국인데 제국의 최고 권력자가 마인들에 의해 죽었다고?!
“끄응, 나도 그래서 골치가 아프다. 분명 마인을 만들어낸 것은 황제가 지시한 것이라 알고 있는데……”
수많은 정보를 다루는 아버지조차도 이번 일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골치가 아픈 거겠지.
“결국 마인들을 통제하지 못한 모양이네요.”
마물을 인간이 통제하는 것은 역시 무리였겠지.
아무리 황제가 막강한 권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마물을 다루는 데 실패하고 오히려 당해 버리고 만 거다.
어쩌다 황궁 한복판에 마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내가 한숨과 함께 내뱉은 말에 아버지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황실에 나타난 마인들은 학살뿐만 아니라 황실 비고도 약탈하고 사라졌다.”
“…예?”
제어를 벗어나서 폭주한 마인이 마성에 젖어 살육과 피에 미쳐 날뛰는 것뿐만 아니라 약탈까지 하고 사라졌다고?
짐승이나 다름없는 그놈들이 보물들은 무슨 필요가 있어서?
애초에 황실의 보물들을 숨겨둔 비고라면 쉽게 찾기도 힘들고 들어가기도 힘들 텐데 마인들이 어떻게 찾아내서 들어간 거지?
또 미쳐 날뛰던 마인들이 제국의 병력에 토벌당한 것이 아니라 사라졌다는 것은 달아났단 소린데, 그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살육에 대한 본능으로 가득한 마인들이라면 마지막 한 마리가 죽을 때까지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날뛰다 죽으면 죽었지 도망치지 않았을 텐데.
이해가 가지 않는 의문들로 인해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쯧쯧, 요즘은 좀 눈치가 생겼나 했더니… 당연히 마인들을 조종하던 놈의 소행이지.>
혀를 차며 한심해하는 카이서스의 탄식에 그제야 눈치챘다.
“…루리스.”
칼라마쉬의 서를 통해 황제에게 마인들을 안겨줬던 사내.
실제로 마인들을 조종했던 것은 황제가 아니라 바로 그다.
황제가 아무리 많은 것을 지녔다 해도 직접 마인들을 만들고, 조종할 능력은 없었으니까.
그 사내의 이름을 탄식하며 내뱉자 아버지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럴 거다.”
하지만 어째서?
루리스가 제국을 먼저 버릴 이유는 없다.
제국의 그늘 아래에 있으면 많은 것을 많은 것을 할 수 있으니까.
거기다 학살과 약탈을 할 이유도 없다.
다른 나라들뿐만 아니라 제국도 확실히 적으로 돌린 셈이니까.
어째서 그런 짓을 저지른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아 머릿속으로 루리스의 속셈을 추측해 보려는데 아버지가 말을 계속해서 이었다.
“문제는 놈들이 황궁 비고의 수많은 보물들 중에서도 마도구들만 모두 훔쳐 갔단 것과 놈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파악도 되지 않고 있다는 거다.”
아버지의 말을 듣고 나서야 루리스의 계획을 조금이나마 눈치챌 수 있었다.
황실 비고에 있는 것들은 제국이 건국 때부터 모아둔 진귀한 보물 중에서도 진귀한 것들이었을 터.
그 황실 비고에 있던 마도구들이라면 얼마나 강력한 마법과 마나를 품고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루리스라면 황제의 곁에 있는 동안 황실 비고의 위치도 파악했을 거고, 만들어질 때부터 마법을 품고 있던 마인들이라면 마도구들을 파악하기에도 용이했을 거다.
황실 비고의 마도구들에 담긴 강력한 마법과 마나를 이용해서 꾸미는 것이라면…….
<골치 아프게 됐어.>
카이서스의 중얼거림과 함께 나는 입을 열었다.
“마계의 문!”
내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친 말에 아버지의 얼굴이 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굳어버렸다.
대륙 전체에 퍼진 비밀 암살집단 세인트 혼의 수장인 아버지라면 제국이 적색 마탑과 청색 마탑에게 빼앗았던 칼라마쉬의 서에 대해서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마인 따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 마계의 문을 열 수 있는 책이라는 것 또한.
“루리스가 황실 비고에서 챙겨 간 마도구들을 이용해 마계의 문을 열 거란 말이냐.”
“확실하진 않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아요.”
내 말에 카이서스도 동의하며 대답했다.
<적어도 좋은 곳에 쓰려고 가져간 건 아니겠지.>
내 말에 아버지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은 놈들의 위치부터 파악하는 게 급선무이겠구나.”
아무리 대륙 곳곳에 눈과 귀를 두고 있는 세인트 혼이라지만 단서도 없이 놈들의 은신처를 찾기란 쉽지 않아서인지 목소리에는 고민이 가득했다.
<칼라마쉬의 서가 있다곤 하지만 추적자들의 시선을 피하며 마계의 문을 여는 건 그리 금방 할 수 없을 거다. 그러니 넌 일단 서클을 부수는 것에나 집중하도록 해. 마계의 문이 열리는 걸 막는 것보다 너와 내 저승길을 막는 게 더 중요해.>
나도 서클을 부수고는 싶지만 감도 안 잡히는데 어쩌라는 건지… 정작 본인도 속 시원하게 설명하지 못하면서 말이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카이서스가 한 말을 아버지에게 전달해 주었다.
물론 서클 브레이크에 대한 것은 빼고.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다는 것은 다행이지만 쉴 틈은 없을 것 같구나.”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 확실히 모르는 이상 정보를 모으고, 대비해야 하니까.
“적어도 제국과의 전쟁은 끝나겠네요.”
황제는 물론이고 고위 귀족들과 관료 여럿이 죽었다면 제국도 더 이상 전쟁을 이어갈 수 없겠지.
서둘러 다음 황제를 정하고 혼란을 가라앉혀야 하는 상황에서 전쟁이나 하고 있을 틈은 없으니까.
크라우드 왕국도 애초에 전쟁을 원치 않았던 데다 전쟁이 길어져 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
이번 전쟁은 곧 끝날 것이 분명했다.
“곧 바빠질 테니 그 전에 네 엄마나 만나러 가거라. 보나 마나 걱정하고 있을 거다.”
전쟁터에 자식을 보냈으니 당연히 걱정하고 계실 테지만 어머니가 걱정하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닐 텐데.
그런 시선으로 아버지를 쳐다보자 아버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완 달리 나는 지금도 바빠서 말이다. 루리스와 마인들이 향한 곳을 찾아야 하니까. 거기다… 지금 네 엄마가 있는 곳으로 가는 건 지금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야 할 것 같구나. 그러내 나 대신 안부나 전해주렴.”
정말로 일이 바빠서 어머니에게 얼굴 비칠 틈도 없는 걸까, 아니면 외할아버지에게 봉변이라도 당할까 봐 그런 걸까.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는 내 시선에 아버지는 작게 헛기침을 해 보이곤 방을 나섰다.
그렇게 어머니가 걱정되시면 그냥 눈 한번 꼭 감고 찾아가시면 될 텐데 말이지.
설마 외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이기라도 하진 않을 텐데 말이야.
<네 부모보다는 너부터 걱정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너, 모니카 공주를 구해 온 후에 아리안에게 연락은 했냐?>
‘아…….’
카이서스의 말대로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지 못하는 걸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