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 구출
실험대 위에 놓인 마인의 시체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랜스터 경의 창에 양 관자놀이가 깔끔하게 관통당해 죽었음에도 아직도 마인의 몸에서 느껴지는 마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더욱더 진해졌다.
“좀 전까지는 몰랐는데 마기가 정말 독하군.”
마인이 살아 있을 때는 마기를 느끼지 못했다던 랜스터 경이 마인의 시체에서 느껴지는 마기에 불쾌해하며 말했다.
“마인의 몸속에 새겨진 수많은 마법들이 마인이 죽으면서 힘을 잃었고, 그 마법 중에 마기를 숨기던 마법도 있었던 겁니다.”
아무리 강력한 제국이라도 마인을 만들어내서 사용한다는 사실은 숨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마기를 숨길 수 있도록 만들고, 죽으면 폭발하도록 한 거지.
설마하니 손도 대지 않고 자폭마법을 해체해 버리는 방법 같은 건 생각도 못 했을 거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그래 봐야 9서클 앞에선 너무나 허무하게 박살 나버리는 상식이지만.
나와 대스승님, 세르바인 님은 지독한 마기에 눈을 찡그리면서 마인의 시체를 살피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이런 역겨운 방식으로 마법을 새겨 넣을 수도 있군.”
“그러게 말입니다. 한데 라엘 군은 뭘 확인해 보려는 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대스승님의 말에 공감하던 세르바인 님이 내게 물었다.
원래라면 마기가 흩어지기 전에 마인을 봉인해 둘 셈이었다.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게도 진실을 알릴 때 증거로 사용하기 위해서.
마기를 줄줄 흘려대는 마인의 시체만큼 확실한 증거는 없으니까.
하지만 봉인 대신 실험대에 올려놓은 이유는 단 하나.
‘이걸 살펴봐야겠다고 한 이유가 뭐야?’
트레이스로 마인의 자폭마법을 해체하던 때 이상한 것을 느꼈던 카이서스가 마인의 시체를 자세히 살펴보자고 했기 때문이다.
<음…….>
생각에 잠긴 듯 침음을 흘리는 카이서스의 목소리에 나는 짜증을 냈다.
‘뭐가 문제인 건데?’
멀리서 트레이스로 조작했던 것과는 달리 직접 손을 대고 마인의 정보를 읽는 중이었다.
손에 닿는 끈적끈적한 마기의 감각이 정말이지 기분 나빴다.
‘대체 뭐…….’
물음에도 대답 없는 카이서스의 반응에 내가 재차 짜증을 섞어 말하려던 때였다.
<이거, 그 모니카인가 하는 여자의 기운이 섞여 있다.>
‘…뭐?’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 이름이 여기서 갑자기 왜 나와?
나는 경악하며 마인의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마기를 다시 확인했다.
끈적거리고 불쾌한 마기 속에 뭔가 다른 기운이 있었다.
“…미친.”
확실히 카이서스의 말대로 그 기운에서 느껴지는 것은 모니카였다.
지금은 제국의 황후가 된 파이썬 왕국의 공주.
호위하느라 내가 그녀와 가까이 있었던 적이 있기에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기운이 마기에 섞인 채로 마인의 몸에 깃들어 있었다.
<그 여자… 어쩐지 이것들이 마기를 잔뜩 품고 있음에도 육신이 붕괴되지 않고 있더라니.>
‘자세히 말해줘.’
카이서스가 뭔가를 알아챘다는 것은 정신의 공유를 통해 알 수 있었으나 그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기에 정확한 내용은 직접 듣는 수밖에 없었다.
<마계에 속하지 않은 존재들에게 마기는 독이나 다름없다. 마기에 중독되면 육체가 붕괴되기 시작하지만 이것들은 멀쩡하다.>
‘그 이유가 모니카 황후 때문이라고?’
<그래. 아마도 그 여자는 아트라오였던 모양이다.>
‘아트라오?’
<그래. 나조차도 이야기로만 들은 체질의 인간이다. 주변의 마나를 계속해서 자신에게 끌어당긴다는 말도 안 되는 존재. 나도 먼 과거에만 몇 번 등장했다고 들어서 생각조차 못 했었는데… 이제야 알겠군.>
마차의 문짝을 뜯어서 휘둘러 대던 모습.
그녀는 마법도, 검술도 익히지 않았다고 했다.
카이서스조차도 그녀에 대해서 놀라워했었다.
하지만 내 처지가 처지였기에 그 이유에 대해선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런 존재였다니.
‘주변의 모든 기운을 끌어당긴다니. 그런 사람이 마법이나 무술을 익힌다면 엄청난 괴물이 되었을 텐데 어째서 아무도 몰랐던 거야?’
<아트라오는 일반적인 체질이 아니라 마나 수련법을 익힐 수 없다. 그저 튼튼하고 신체 능력이 뛰어난 것처럼 보이지. 애초에 인간들에게는 전해지지 않은 전설과도 같은 존재일 텐데, 그놈들은 그 여자가 아트라오라는 걸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지?>
아트라오의 존재를 알아내고 모니카가 아트라오라는 것까지 알아낸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카이서스도 보는 것만으로는 그녀가 아트라오라곤 생각조차 못 했으니까.
나는 마인의 몸 내부를 계속해서 확인하며 카이서스와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마인에 그녀의 기운이 느껴지는 게 그 아트라오의 특성 때문이란 거야?’
<음, 그럴 거다. 아트라오의 생명력을 뽑아 소량이나마 주입한다면… 육체가 붕괴하지 않고 마기를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모니카 황후를 제국에서 빼돌릴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마인을 만들어내지 못하겠네?’
<그럴 가능성이 높지. 그놈들이 나조차도 모르는 다른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은 이상.>
카이서스의 말에 나는 마인을 살피던 것을 멈추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마인에 대해 세상에 알리는 것을 조금 더 늦춰야 할 것 같아요.”
다들 뜬금없는 나의 말에 의아해하는 기색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마인에 대해 알려지게 되면 제국에게서 모니카를 빼돌릴 기회가 없어질 테니까.
* * *
파이썬의 공주였던 모니카를 어릴 때부터 모셔온 시녀, 파렐.
그녀는 자신이 갇힌 감방에 무릎을 꿇은 채로 기도하고 있었다.
‘부디 모니카 님이 아프지는 않으셔야 할 텐데…….’
자신의 주인이 황후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갇히고 말았다.
모니카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무런 정보도 알 수 없기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기도하는 것뿐.
한참 기도하고 있던 도중 복도 끝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자신을 관리하는 간수들 중 하나.
어째서 자신이 갇힌 건지, 모니카에게는 아무 일 없는 건지.
여러 가지를 간수들에게 물었으나 아무런 대답도 않는 그들과 대화하는 것은 이미 포기한 그녀였다.
덜컥.
감방의 문틈 사이로 식사가 담긴 식판을 집어넣은 간수가 다시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다시 자신의 주인을 모시려면 살아남아야 했기에 파렐은 기도를 멈추고 식판을 집어 들었다.
식사는 빵 한 조각과 묽은 스튜가 다였지만 이제는 익숙해졌다.
식판 위의 빵을 들어 반으로 쪼개던 파렐의 눈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빵 사이에서 반으로 접힌 종잇조각이 떨어졌다.
조심스레 종잇조각을 펼친 파렐은 작은 글씨로 빼곡히 적힌 글을 읽어 내려갔다. 글을 읽던 그녀의 눈이 찡그려졌다가 이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그리고 이내 적힌 대로 종잇조각을 입에 넣고 꿀꺽 삼킨 그녀의 눈이 결의로 가득 찼다.
* * *
-말도 안 돼! 너무 위험한 일이야. 거기다 선생이 직접 참여하겠다니, 말이나 되는 소린가!
통신구 너머로 보이는 왕궁 회의실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로라스 왕자가 말도 안 된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저하, 드리안 자작의 말대로 모니카 황후를 빼내지 않는다면 제국의 마인 생산이 계속될 겁니다. 게다가 그녀가 제국에 잡혀 있는 이상 파이썬 왕국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을 겁니다.
이미 제국에 심어둔 세인트 혼의 요원들에게서 전해진 정보를 통해 모니카의 상황도 알아낸 후였다.
또한 마인을 조종하던 마법사의 입에서 모니카의 생명력이 지속적으로 갈취되고 있다는 것도 아버지의 적극적인 심문을 통해 알아냈다.
제국에서 위기를 느낀다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상황.
-그건 알지만 제국 황궁에는 마법을 방해하는 결계가 있잖소. 아무리 선생이 9서클의 대마법사라고 해도 만일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될 거요.
현재 인간 중에서 유일한 9서클 마법사는 크라우드 왕국에게 있어 큰 힘이 되어줄 터였다.
그런 9서클 마법사를 허무하게 잃어버린다면…….
다들 로라스 왕자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침음을 흘렸다.
“왕자님, 걱정 마십시오. 저는 황궁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겁니다. 제 역할은 침투조가 모니카 황후를 황궁에서 빼내 오면 그들과 함께 제국을 탈출하는 거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황궁에 직접 들어가지 않는다 해도 놈들의 추적을 뿌리치고 제국을 벗어나는 것은 힘들지 않겠나. 놈들도 순순히 보내줄 리가 없으니까.
제국의 게이트는 당연히 사용할 수 없을 테고, 기껏해야 말을 타고 달리는 수밖에 없다.
로라스 왕자의 수심 어린 표정과 말에 나는 씩 웃어 보이며 품속의 마법 주머니에서 꺼낸 물건을 보여주었다.
“제 뒤에 누가 있는지 잊으셨습니까?”
꺼내 든 물건의 정체에 대해 내가 말해주기 시작하자 의아해하며 쳐다보던 로라스 왕자는 물론 자리에 있던 다른 신료들의 얼굴에도 감탄이 떠올랐다.
* * *
끼익-
감방의 철문이 열리며 나는 듣기 싫은 소리에 구석에 앉아 있던 파렐의 눈이 문으로 향했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단검을 손에 쥐고 있는 검은 복면의 사내가 무심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살벌한 모습에도 파렐은 전혀 겁먹은 기색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시작하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복면인의 담담한 대답에 파렐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이 모시던 공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마저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파렐이 복면인의 뒤를 따라 감방을 나갔다.
감옥의 복도를 따라 이동한 두 사람은 복도 끝에서 멈춰 섰다.
복도 끝의 벽면을 복면인이 몇 번 만지작거리자 벽이 그르릉-하고 울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두 사람이 그 안으로 사라지고 다시 벽이 닫히자 감옥 내부에는 피 냄새만이 은은하게 맴돌았다.
대체 이들이 누군지, 황궁 내부의 감옥에 설치된 비밀 통로는 어떻게 아는지는 알 수 없었기에 파렐은 불안함에 걸음을 옮기면서도 침을 꿀꺽 삼켰다.
혹시나 자신을 이용해서 모니카에게 해가 될 짓을 하려는 함정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불안한 생각이 행동에도 영향을 주었는지 파렐의 걸음이 잠깐이나마 느려졌다.
하지만 속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테니까.
파렐의 걸음이 잠깐 느려졌었음을 눈치챘음에도 복면인은 아무런 티를 내지 않았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조용하게 통로를 이동하던 중 복면인이 걸음을 멈춰 섰다.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는 것으로 조용히 하란 뜻을 전한 복면인이 아까처럼 벽면을 만지작거리며 조작했다.
아까처럼 작은 소리와 함께 열린 벽의 앞에 서 있는 사람들 중 하나의 얼굴을 발견한 파렐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모니카 님…….”
이전보다 훨씬 마른 모습의 모니카를 본 파렐이 울먹였다.
“파렐도 고생이 많았던 모양이네.”
갇혀 있는 동안 꾀죄죄해진 시녀의 모습에 힘없이 웃어 보이는 모니카의 눈에도 물기가 차 있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주변의 감시자들을 처리하긴 했지만 금세 눈치챌 겁니다.”
모니카의 뒤에 있던 또 다른 복면인이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아니, 잠깐만요. 대충 무슨 일인지는 들었는데 우릴 빼내러 온 사람이 겨우 2명인 건가요?”
바이엔이 당혹해하며 묻는 말에 파렐을 안내해 온 복면인이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도 데려가야 하나?”
“모니카 황후께서 함께 가시겠다고 하시더군.”
모니카와 함께 있던 복면인의 말에 파렐을 데려온 복면인의 눈이 찌푸려졌다.
“부탁해요.”
그녀가 부탁한다고까지 말하자 복면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모니카를 황궁 바깥으로 빼내야 했으니까.
모니카가 누군가에게 마인과, 그것들을 위해 생명력을 착취당하는 자신의 신세, 그리고 탈출 계획을 전달받은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그제야 자신이 감금된 이유를 알게 된 그녀는 그들의 도움을 받아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자신으로 인해 고생한 파렐과 그동안 정이 많이 든 바이엔을 두고 갈 수 없었기에 그녀들도 데려가 줄 것을 요구했다.
“당신들은 대체 누군데 황궁의 비밀 통로도 알고 있는 거지?”
갑자기 자신들을 구해준다며 접근한 정체불명의 집단.
어차피 이제 잃을 거라고는 목숨밖에 없기에 함께 탈출하자는 모니카와 함께하기로 했지만…….
바이엔은 극비인 것이 분명한 황궁의 비밀 통로를 알고 있고, 감시자들을 들키지 않고 해치운 복면인들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건 나중에 알게 되도 늦지 않습니다. 저희는 모니카 황후님만 구하러 왔을 뿐이니 믿지 못하겠으면 여기 남아도 상관없지만 제압해 둘 수밖에 없습니다.”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묶어두거나, 여차하면 죽이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파렐을 데려온 복면인의 말에 바이엔은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쳇, 알았어. 협조하면 되잖아. 그런데 당신 목소리…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서두르시죠. 감시자의 교대 시간이 되기 전에 황궁을 빠져나가야 합니다.”
바이엔의 말을 무시하며 비밀 통로로 안내하는 복면인의 말에 모니카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