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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 드래곤-122화 (122/150)

122화 - 증거

대륙력 759년 4월 7일.

커티스 요새에서의 사건 이후 한 달이 지났다.

제국군은 드래곤을 의식해서인지 움직이지 않았다.

크라우드 왕국에서도 먼저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소문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드래곤은 성격이 더러워서 귀찮게 구는 자들은 전부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지만 이용하려는 자들도 잿더미로 만든다더라.

자신의 가호를 받는 자를 위험하게 만들었다며 크라우드에도 화를 내서 크라우드의 국왕이 드래곤에게 금은보화를 바치기로 했다더라.

<그런데 왜 내 성격이 더럽다는 소문을 내는 건데?!>

카이서스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으나 나는 당당했다.

‘솔직히 거짓말은 아니지 않아? 나도 겪고 들은 게 있는데…….’

<끄응!>

자신의 성격에 대해 말해봐야 본전도 건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은 카이서스가 화제를 돌렸다.

<근데 이 나라의 왕도 꽤나 현명하더구나.>

일국의 국왕이 두려워서 금은보화를 바치기로 했다. 그리 좋지는 않은 소문이다.

하지만 국왕 전하는 드래곤의 이름을 빌리는 일인데 자신이 잠시 굽히는 모습을 보이는 거면 가벼운 대가가 아니냐고 웃으셨지.

조용히 퍼져 나가고 있는 소문은 크라우드와 아버지의 세인트 혼이 일부러 흘린 소문이었다.

드래곤에 대한 두려움을 키우는 동시에 왕마저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환상에 뼈와 살을 입힌다는 계획.

그리고 그 이면에는 크라우드 왕국과 타이런 제국의 치열한 정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드래곤에 대한 것과 마인 생산에 대한 것.

물론 나는 그런 정보전과는 거리가 멀었고 카이서스도 그런 것은 시시한 것이라 생각하여 아는 것이 없었기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두 국가의 대치가 이뤄지고 있는 전장에서 조금 떨어진 도시에 위치한 세인트 혼의 안가에서 나는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드래곤의 진실과 가장 가까운 나는 한동안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이 제국을 속이기 좋을 거라는 아버지의 판단 때문이다.

안가에 숨어 지내는 것은 나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수련을 할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마법사 특유의 탐구욕으로 9서클에 대해 물어오던 대스승님과 아리안 누나에게서 벗어날 수도 있었고 말이지.

안가에까지 따라오지 못해 아쉬워하던 두 사람의 얼굴이 아직도 선명하다.

<아무튼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네 녀석의 서클을 파괴해야 한다는 거다.>

9서클 다음의 경지가 서클 브레이커라는 건 이미 전에 들어서 알고 있던 이야기지만.

‘진짜로 부수라고? 그러면 더 이상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죽잖아!’

심장을 둘러싸고 있는 아홉 개의 서클을 부수란 건 심장을 터뜨리란 소리나 다름없었다.

<이미 서클 브레이커에 대해서는 전에도 말했잖느냐! 서클 브레이커니 당연히 서클을 부숴야지!>

‘아니, 난 그게 더 이상 서클에 얽매이지 않는 그런 경지인 줄 알았지! 무식하게 말 그대로 부수는 것일 줄은 몰랐다고!’

일반적인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카이서스의 미친 소리에 내가 황당해하며 소리쳤다.

아홉 개로 늘어나며 엄청난 마나를 품게 되어버린 서클을 부수라니.

<얽매이지 않으려면 부숴야지! 이제는 알았으니 됐잖느냐!>

‘끄응.’

카이서스의 태연한 대꾸에 나는 침음을 흘리고는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부숴야 하는데?’

<그게 문제란 거다. 나야 드래곤이라 본능적으로 깨부쉈는데… 대충 이런 느낌?>

그렇게 말하며 카이서스는 자신이 서클을 깨부술 때의 느낌을 공유했다.

그리고 그 느낌을 공유받은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정확히 이해할 수 없는 느낌이었지만 인간인 내 기준으로 따지자면…….

몸이 뻐근해서 허리를 쭈욱 폈더니 뚜둑! 하면서 시원해지는 그런 느낌이랄까.

‘이거 진짜 서클을 부술 때의 느낌이 맞아? 자다 일어나서 기지개를 켤 때의 느낌이 아니라?’

<내가 그런 걸 헷갈리겠냐! 아무튼 그 정도로 드래곤과 인간의 차이가 심하단 거다. 그러니까 나도 모르겠다는 거지.>

으음, 이래서야 감도 잡기 힘들 것 같다.

<일단은 9서클에 익숙해지는 것부터 시작하자. 이번에 헬 파이어를 쓸 때 매끄럽지 못했다는 건 너도 느꼈을 테지.>

확실히 지금껏 실력을 감추느라 9서클의 마법을 연습해 볼 기회가 많이 없었다.

아무리 서클이 올라간다 해도 마법이라는 건 쓰면 쓸수록 사용하기가 더 쉬워진다.

자신에게 맞는 방식으로 마나의 미세한 흐름을 조절하거나 운용의 완급을 조절함으로 더욱 빠르고, 강력한 마법을 구사할 수 있다.

<9서클에 오르면서 공간왜곡을 사용할 수 있게 됐으니 여기서도 수련하는 건 문제가 없을 거다.>

카이서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간왜곡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부유한 상인의 저택으로 위장한 안가였기에 내가 머물고 있는 방은 생활하기에는 꽤나 넓었지만 마법을 수련하기에는 턱없이 작았다.

하지만 공간을 왜곡해 버린다면 방의 크기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강대한 마나가 내 몸에서 흘러나오며 주변의 공간을 뒤틀어 늘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저 넓은 방이었던 것이 점점 사방으로 늘어나더니 마침내 수백 배의 공간이 되었다.

“정말 9서클의 마법은 사기 같다니까.”

내가 한 것임에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모습이었다.

<개나 소나 9서클이 되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사람은 개나 소가 아니거든?’

9서클 이하는 개나 소로 격하시켜 버리는 말에 내가 속으로 혀를 차며 말하자 카이서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드래곤이 보기에 대부분의 종족은 별다를 바가 없다만?>

‘나도 인간이었거든?’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하느냐?>

정곡을 찌르는 듯한 카이서스의 물음에 나는 대답 대신 혀만 찼다.

확실히 9서클에 오르면서 내가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다는 것을 더욱 확실히 느끼고 있었으니까.

‘됐고, 뭐부터 해볼까.’

<크크크, 일단은 헬 파이어지.>

생전에 가장 즐겨 썼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여간 꼭 자기 같은 마법만 좋아한다니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정신을 집중했다.

카이서스의 말하기로 서클 브레이커가 되면 9서클의 마법조차 의념만으로 펼칠 수 있다지만 나에게는 아직 한참 모자란 이야기다.

격렬하게 몰아치는 마나의 흐름 속에서 의지대로 마나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해본 일임에도 9서클의 마법은 간단하지가 않아 시간이 한참 걸렸다.

“헬 파이어”

말로 설명하기조차 힘든 복잡하고 난해한 수식과 마나의 흐름 끝에 내 손에 피어난 검은 심연의 불길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쏘아 보냈다.

왜곡된 공간 속의 공기를 뒤흔들며 한참 멀리 날아갔다.

아무리 멀다고 해도 헬 파이어가 타오르기 시작한다면 공간 전체가 화염에 휩싸이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곡된 공간의 벽에 닿기 직전 헬 파이어의 모습이 사라졌다.

왜곡된 공간의 벽면은 아공간들과 연결되어 있었으니까.

지이이잉-!

다른 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헬 파이어가 타오르며 생기는 검은 화염의 폭풍이 공간을 뒤흔드는 것이 느껴졌다.

공간을 뒤흔들 정도의 위력에도 불구하고 카이서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너무 느리고 마나의 소비와 효율이 떨어진다.>

카이서스의 지적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헬 파이어를 시전하기 시작했다.

왜곡된 공간 너머로 보이는 창문으로 붉은 노을이 비칠 때가 되어서야 나는 왜곡시켰던 공간을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후, 9서클을 마스터하려면 한참 걸리겠네.”

카이서스 덕분에 지금껏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 온 나였지만 9서클은 자신이 없었다.

<너무 초조해하지 마라. 마음이 급해질수록 더 안 되는 법이니까.

카이서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나는 손으로 가슴을 만져보았다.

옷 아래로 느껴지는 단단한 비늘의 감촉.

“이게 문제지.”

내게 완전히 융합되어 버린 카이서스의 심장이 언제 폭주할지 모른다는 것.

<…걱정 마라. 우리가 죽는 일은 없을 거다.>

자신을 믿으라는 듯 카이서스가 담담하게 말했지만 나는 쓰게 웃었다.

정신적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기에 카이서스가 품은 일말의 불안이 느껴졌으니까.

“일단 뭐라도 먹고 다시 고민해 보자고.”

9서클의 마법들을 계속 사용하느라 긴장하고 있었던 탓에 잊고 있었던 허기짐이 한 번에 몰려왔다.

문을 열고 안가를 관리하는 세인트 혼 요원에게 먹을 것 좀 가져다 달라고 하려는데 아버지가 문 앞에 서 있었다.

“뭐였는지는 몰라도 다음부터는 미리 말하고 해다오. 요원들도 놀라거니와 안가라는 건 눈에 띄면 안 되니 말이다.”

눈을 살짝 찌푸린 채로 말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나는 당황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에겐 말도 없이 공간을 왜곡시키고 거기서 마법을 마구 써댔으니… 다들 밖에서 놀랐겠네.

공간을 왜곡시켜 버린 탓에 들어와서 확인도 못 했을 테고, 9서클의 마법들로 인한 마나의 격류는 어느 정도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다 눈치챘을 테니까.

“음… 죄송해요. 그런데 여긴 웬일로 오셨어요?”

세인트 혼의 요원들을 지휘하느라 바쁜 줄 알았는데.

“제국이 마인을 만들어내는 곳을 알아냈다.”

그리고 이어진 아버지의 말에 나는 경악했다.

* * *

크라우드 왕궁 깊숙한 곳에 위치한 회의실.

세인트 혼의 요원들이 목숨을 바쳐가며 전해온 정보가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다들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믿기지가 않는구려.”

안경을 고쳐 쓴 백발의 노인이 한숨을 내쉬자 자글자글한 주름들이 더욱 깊어졌다.

나이가 들어 체력이 약해진 탓에 사람들 앞에 모습을 자주 드러내지 않아서 나조차도 거의 본 적이 없었던 아라크난 공작이다.

크라우드에 두 명 있는 공작 중 마일렌 공작이 군대의 총사령관으로서 전장에 나가 있는 것과 달리 아라크난 공작은 재상의 직위를 맡아 국왕을 보필하고 있었다.

스스로 나이가 많아 재상에서 물러나겠다는 것을 국왕 전하가 그의 능력이 아까워서 억지로 붙잡아두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 그가 믿기지 않는다고 한 것은 아버지가 한 말이 아니라 제국이 저지른 일들이었다.

“사람들을 제물로 삼아 황궁에서 마인을 만들어내고 있다니… 정말로 황제가 미친 게로군.”

아버지가 나눠주었던 보고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인상을 쓴 아라크난 공작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당장 이 자료들을 프레첸 제국은 물론이고 다른 왕국들에게도 보내야 합니다.”

보고서에는 황궁으로 끌려가 제물로 사용된 수많은 죄수들과 노예들, 그리고 황궁 지하에서 흘러나오는 마기의 흐름과 황궁에서 나온 마인들이 움직인 경로와 배치 현황까지.

다른 나라들을 움직이기에는 충분한 자료들이었다.

국왕 전하가 굳은 얼굴로 생각하던 중에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이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증거를 모아온 장본인이 그런 말을 하자 다들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크라우드야 이미 타이런 제국과 전쟁 중인 데다 마인의 위험성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들은 아니지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확고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생각해 둔 것은 있소?”

아라크난 공작이 묻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하고 있던 것을 말했다.

“마인의 시체입니다. 저희의 보고서를 확실하게 뒷받침할 수 있는 모든 증거가 거기에 있을 테니까요.”

마인을 만드는 데 사용된 마기와 각종 금기의 흔적.

“하지만 그 마인들은 죽기 직전에 폭발해서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고 들었소만. 어떻게 시체를 확보할 생각이오?”

아라크난 공작이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 핵심을 찌르며 묻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쳐다보았다.

“9서클 대마법사라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다들 나를 쳐다보았다.

“드리안 자작, 가능하겠소?”

진지하게 묻는 아라크난 공작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안가에서 아버지가 찾아왔던 것은 이것을 묻기 위함이었다.

마인의 시체가 폭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가능한가.

확실히는 모르지만 폭발할 때의 마나 흐름으로 보아 폭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카이서스의 대답도 들었다.

내 대답에 아라크난 공작이 고개를 끄덕이곤 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리고 재차 물었다.

“제국 놈들이 먼저 공격을 재개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먼저 공격하기는 힘든 상황임은 알고 계실 터, 그런데 그리 말하신 것은 방법이 있다는 소리겠지요.”

제국은 카이서스를 이유로 몸을 사리고 있고, 우리 또한 전력 차이로 인해 섣불리 먼저 공격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굳이 정면으로 공격해서 시체를 확보할 필요는 없지요. 제국군에서도 마인의 위험성 때문에 따로 주둔하게끔 해두었다고 합니다. 정예들로 정체를 숨기고 마인들의 주둔지를 공격해서 한 놈만 잡고 빠지는 겁니다.”

“제국군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지요.”

아버지와 주고받듯이 이야기를 나눈 아라크난 공작의 눈이 깊어졌다.

“전하.”

아라크난 공작이 국왕 전하께 고개를 숙여 보였다.

지금까지 아라크난 공작은 결정을 내릴 국왕 전하를 대신해 아버지에게 물었던 것이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이야기를 곱씹어보던 국왕 전하가 결정을 내린 듯 눈을 뜨며 말했다.

“속도가 생명일 테니 뛰어난 자들이 필요하겠군. 대신들은 의견이 있다면 말해보라.”

증거를 확보하기 위한 기밀 작전이 승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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