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 커티스 요새
이젠 이종족들의 임시 피난처가 아니라 공식적인 이종족들의 땅으로 인정받은 요새도시 이드라실을 떠났다.
세르바인 님에게 르메인 평야에서 일어난 일, 그리고 마법지원단은 커티스 요새로 이동 중이니 곧장 합류하라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드라실에서 지내는 동안 엘프와 수인족들에게 말 타는 법을 배운 데다 말도 선물받은 덕분에 우리는 빠르게 커티스 요새로 이동할 수 있었다.
상식적으로 승마를 익힌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먼 거리를 말을 타고 달리는 건 무척이나 힘든 일이지만 나는 카이서스로 인해 신체 능력이 향상되어서인지 괜찮았다.
앞서가던 아리안 누나가 뭔가 발견한 듯 말을 멈춰 세웠다.
“저기 보이는 게 커티스 요새인 것 같은데… 우리가 너무 늦은 걸까?”
뒤따라 말을 멈춘 내가 곁으로 다가가자 아리안 누나가 불안해하며 물었다.
멀리 보이는 커티스 요새의 주변에는 검은 연기가 쉼 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뇨, 아직 늦지는 않은 것 같아요.”
아리안 누나의 눈에는 너무 멀어서 연기만 보였겠지만 내 눈에는 아직까지 요새 곳곳에 휘날리는 크라우드의 국기가 보였다.
“그래도 서두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미 몇 번의 공격이 있었는지 요새 주변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내 말에 아리안 누나는 입술을 작게 깨물고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앞서 달려가는 아리안 누나를 따라 나도 말을 달렸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커티스 요새의 처참한 모습이 더욱 자세히 보였다.
원래라면 굳건했을 요새의 성벽은 곳곳이 격렬한 전투의 흔적으로 허물어지기 일보 직전처럼 보였다.
“누구냐! 멈춰라!”
굳게 문이 닫힌 요새에 다가가자 성벽 위에 있던 경계병이 경계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마법지원단 소속의 적색 마탑의 라엘 드리안 자작과 청색 마탑의 아리안입니다!”
정체를 밝히자 잠시 성벽 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란이 들렸다.
뭐 대충…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니 뭐니 하면서 떠드는 거겠지.
<전에는 부끄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 하더니 이젠 그러려니 하는구나.>
‘너는 모를지도 모르지만 인간이란 적응하는 생물이거든…….’
그럼에도 신기해하며 쳐다보는 시선이나 과한 기대감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기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 잠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드래곤의 대마법사님!”
“…흐엑?!”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호칭의 등장에 나도 모르게 괴상한 소리를 내고 말았다.
<뭐, 지난번에 네가 볼케이노를 쓴 걸 본 놈들이 많으니… 대마법사라고 부를 거라곤 예상했다만… 드래곤이라는 이름을 너무 아무렇게나 붙이는 것 같아서 드래곤으로서 뭔가 기분이 좀…….>
천하의 카이서스조차 그 호칭에 떨떠름해하는 분위기였다.
거기다 경계병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벽을 넘어서까지 요새의 소란이 들려왔다.
지금이 전쟁 중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도망치고 말았을 거다.
아리안 누나도 내 마음을 안다는 듯 말없이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요새의 두꺼운 문 사이로 난 작은 창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얼굴을 내밀었다.
“맞아! 드래곤의 대마법사야! 어서 문을 열어!”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얼굴.
“타키온 씨?”
처음으로 참전했던 전쟁에서 나와 함께 후방으로 이송되었던 마법사 타키온이었다.
요새의 두꺼운 문이 천천히 열리자 타키온이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라엘! 아리안! 오랜만이야! 아, 이제는 드리안 자작님이라고 불러 드려야 하나?”
반갑게 인사를 건네다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는 타키온의 모습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처럼 편하게 대해주세요. 여기서 타키온 씨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군인이 전쟁터에 있는 건 당연한 일이지.”
웃으며 이야기하는 말에 그제야 그가 우리와 달리 직업군인이었다는 게 기억났다.
“오랜만에 만나서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일단 안으로 가세, 기다리는 분이 계시니 말이야.”
우리는 타고 온 말을 근처에 있던 병사에게 인계하고는 타키온의 뒤를 따랐다.
그런 우리를 보며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드래곤의 대마법사님이야?”
“대마법사가 한 명 더 왔으니 상황이 좀 더 나아질지도 몰라.”
한 명 더라고 말하는 걸 보니 이미 세르바인 님은 도착해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또 다른 병사의 말이 뒤이어 들려왔다.
“하지만 그놈들은 괴물이잖아.”
잔뜩 공포에 질려 목소리마저 떠는 병사의 말에 다른 병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반응에서 뼛속 깊이 박힌 공포가 느껴졌다.
“상황이 무척 좋지 않다고 듣기는 했습니다만… 그렇게 심한가요?”
조심스레 물어본 말에 타키온은 걸음은 멈추지 않은 채 쓴웃음을 지으며 돌아보았다.
원래부터 삭은 얼굴이긴 했지만 지금 보니 이전보다 훨씬 지치고 상한 얼굴이었다.
“르메인 평야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검은 괴물들 때문이지. 제국군이 공격해 올 때마다 보이는 그것들 때문에 다들 미쳐 버릴 지경이야.”
“그렇게 강한가요? 그들의 수는 적다고 들었는데.”
내 말에 타키온은 순간 멈칫했다.
“백 명, 고작 백 명의 검은 괴물들이 르메인 평야에서 칠천 명에 가까운 병사들을 죽였어. 그 모습을 보고 다들 공포에 질려 도망치기 바빴지. 나도 후퇴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도망치지 않고 버티는 게 고작이었어.”
타키온도 그때 르메인 평야에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를 떠올리듯 순간적으로 몸을 잘게 떠는 타키온의 모습에 아리안 누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설마, 그들이 전부 오러 마스터라도 된다는 건가요?”
바로 옆에 있던 아리안 누나가 믿을 수 없어하며 물었다.
혼자서 100여 명을 상대할 수 있는 기사들이라면 오러 마스터 외에는 생각나지 않으니까.
하지만 타키온은 고개를 무겁게 흔들었다.
“그건 아닐 거야. 그때나 지금이나 오러를 쓰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직접 상대해 본 오러 마스터들도 놈들이 오러 마스터는 아닌 것 같다고 했거든.”
“오러 마스터도 아닌데 100명이 칠천 명이나 되는 병사를 해치웠다니, 믿을 수 없어요. 대체 그들은 뭐죠?”
“나라고 어떻게 알겠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대. 심지어 제국에 심어둔 간자들조차 그들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고 하더라고.”
그렇게 강력한 부대가 지금껏 알려지지 않다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 뭔가 수상했다.
뒤이은 타키온의 말은 의심을 부채질하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르메인 평야에 있던 오러 마스터인 다리온 경이 놈들 중 하나를 상대해서 쓰러뜨렸더니… 자폭했다고.”
“네? 자폭이요?”
잘못 들었나 싶어 내가 되물어보았지만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 그 폭발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다리온 경이 필사적으로 오러를 끌어올려 막았음에도 크게 다쳐서 후방으로 이송됐어.”
‘카이서스, 혹시 이거……’
<그래. 나도 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놈들이 또 칼라마쉬의 서를 이용한 모양이다.>
아바툴의 둥지와 언데드 로드 이후에 잠잠하다 싶더라니.
“오러 마스터가 아니면 상대하기도 힘들 정도인 데다가 폭발까지 한다니, 그게 괴물이 아니면 대체 뭐야?”
치를 떨며 말한 타키온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더니 다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때마침 제국 놈들이 물러난 틈에 도착해서 다행이야. 놈들이 공격 중이었다면 여기 들어오는 것도 불가능했었을 테니까 말이야.”
“그런 괴물 같은 자들이 있으면서 제국은 어째서 물러났을까요. 적어도 요새를 포위하고 있을 줄 알았어요.”
아리안 누나의 말에 타키온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게 이상하단 말이지. 놈들은 한번 공격해 올 때마다 하루 정도만 죽어라 공격하곤 물러간단 말이지. 정찰병의 말에 의하면 꽤나 멀리까지 물러가서 휴식을 취하곤 다시 공격해 온다는데…….”
단 하루만 공격하곤 물러간다고?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카이서스, 그 검은 괴물들이라는 것에 대해 뭔가 짐작 가는 건 없어?’
<나라고 해서 그런 이야기만 듣고는 모르지.>
당연히 나 역시도 고민해 봐야 지금으로서는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요새 내성의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지휘실에 도착했다.
“들어가 보게. 나는 하던 일을 해야 하니 이만 가보겠네.”
그렇게 말하곤 타키온은 왔던 길을 돌아갔다.
조심스레 문을 열자 심각한 분위기로 이야기하던 세 사람이 말을 멈추곤 이쪽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아는 사람이었고 한 사람은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어서 오게, 두 사람 다 늦지 않게 왔군.”
인사를 건네느 세르바인 님의 옆에 있던 아는 사람이 슬쩍 웃어 보였다.
“늦었구나.”
“대스승님? 여긴 어떻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등장에 내가 깜짝 놀라 묻자 키린토 대스승님은 혀를 차며 대답했다.
“네 스승이 도와달라고 사정해 대지 뭐냐. 늘그막에 이 뭔 고생인지… 쯧!”
투덜거리는 대스승님의 말에 세르바인 님이 웃으며 말했다.
“그 덕분에 홍염의 대마법사라는 멋진 칭호도 얻으셨잖습니까.”
아무래도 대스승님이 일선에 나서며 은둔이라는 칭호 대신 홍염이라는 칭호가 붙은 모양이다.
“멋지긴? 제자의 제자가 얻은 칭호에 비하면 초라할 뿐이지. 이 녀석은 무려 드래곤의 대마법사라잖나.”
불쾌해하기보다 즐거워하며 말하는 대스승님이었지만 듣는 나로서는 부끄러울 뿐이었다.
“으으, 그 호칭이라면 저도 오늘 들었어요. 대체 그런 이상한 호칭이 누구에게서 나온 건지는 몰라도 정말이지……”
내가 한숨까지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자 대스승님이 말했다.
“누구긴 누구야 나지.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녀석이니 그 호칭 말고 어울리는 것이 뭐가 있겠느냐?”
“…정말 멋진 작명 센스라고 생각합니다!”
섣불리 뒷말을 내뱉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황급히 소리쳤다.
어쩐지 내 칭호에 대해서 너무 즐거워하며 말하신다 싶더라니.
<내가 말할 수만 있었더라면 좀 전까지 네 녀석의 머릿속에 있던 ‘이런 유치한 호칭을 지어준 사람’에게 하려고 했던 말을 해줬을 텐데.>
‘그 뒷일은 생각만 해도 무섭거든?’
그때 우리들의 대화에서 소외되어 있던 또 다른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이 친구가 요즘 소문이 자자한 그 드래곤의 대마법사라고요?”
건장한 체격의 중년 남자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머리는 하얗게 세었지만 군살 하나 없는 몸과 피부는 젊은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나는 말레온라고 하네. 사상 최연소라고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나 어린 친구일 줄은 몰랐군.”
웃음을 터뜨리며 말하는 그의 이름을 듣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혹시 금빛 사자라는 호칭을 지니신 말레온 바커스 경이십니까?”
내 물음에 그는 멋쩍다는 듯 머리를 긁적여 보였다.
“이제는 금빛이 아님에도 그렇게 불리기는 한다네. 아무리 노화가 늦춰졌다고 해도 머리가 세는 것은 어쩔 수 없더군.”
젊은 시절 금발을 휘날리며 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오러 마스터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보다 옆에 있는 아름다운 여성분은 누구신가? 혹시?”
능글맞은 목소리로 묻는 말에 대답한 것은 세르바인 님이었다.
“허허, 저의 제자라오.”
“이런! 내가 실례를 한 모양이오! 미안하오. 하하!”
말레온 경이 웃음을 뜨리며 아리안 누나에게 사과를 하자 세르바인 님이 웃으며 재차 말했다.
“실례는 아니지요. 말레온 경이 생각하셨던 그런 관계는 맞으니 말입니다, 허허.”
“호오! 그랬던 겁니까? 적색 마탑주의 제자와 청색 마탑주의 제자가 그런 밀접한 관계라니, 두 마탑의 관계는 앞으로도 걱정이 없겠군요!”
“장래가 유망한 젊은 사람들의 연애는 언제 봐도 즐거운 일이지요.”
우리의 연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대스승님이 혀를 차며 말했다.
“거 애들이 부담스러울 테니 그 이야기는 그쯤 하고, 좀 전에 했던 이야기나 이 아이들에게 말해주게.”
대스승님이 그렇게 말해준 덕분에 나와 아리안 누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몰래 내쉬었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 젊은 사람의 연애에 관심을 가지면 자연스레 결혼은 언제 할 거냐, 자녀 계획은 어떻게 되느냐 같은 이야기까지 끝도 없이 이어지니까 곤란하단 말이지.
“음, 조금 전에 했던 이야기라면… 확실히 두 사람 모두 고급 전력인 이상 자세히 알아두는 것이 좋겠지요.”
대스승님의 말에 말레온 경이 침음을 흘리며 중얼거리듯 말하고는 나와 아리안 누나를 쳐다보았다.
“지금 이곳엔 나를 제외하고 두 명의 오러 마스터가 더 있네. 내가 개인 수련에만 집중한 탓에 전략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터라 그 두 사람이 작전을 수립하고 지휘를 하느라 바쁘지.”
부끄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여 보인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우리 셋이서 그 검은 괴물들을 막고는 있네만 무척이나 상황이 좋지 않아, 자리를 잘 잡아서 두세 놈씩 상대한다 쳐도 제 몸을 돌아보지 않고 덤벼들어서 위험한 데다 죽인다 해도 폭발해 버리니……”
대스승님과 세르바인님을 돌아본 말레온 경이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키린토 님과 세르바인 님이 지켜주셨으나 위험하기 짝이 없었네. 자네의 힘이 더해진다면 조금은 상황이 나아지겠지만… 그런다 해도 상황이 힘든 건 마찬가질세.”
“또 뭔가가 있다는 건가요?”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아리안 누나가 조심스레 물어본 말에 또 다른 누군가가 대답해 주었다.
“시간이 문제라는 거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대답하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대스승님을 봤을 때보다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