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 보이는 어둠
협상은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해서 이어졌다.
확실히 내가 협상했다면 낭패를 봤을 거야.
머리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이해한다고 해도 분위기라든가 무게감에 나도 모르게 실수를 하고 말았을 거다.
지켜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터라 잠시 바람이나 쐴 겸 밖으로 나왔다.
딱히 제지를 하진 않았지만 아직 협상이 끝난 것도 아닌데 아예 건물 밖으로 나가기는 좀 그랬다.
다행히도 복도 끝에 창문이 나 있는 데다 근처에 긴 의자도 놓여 있어서 거기 앉아 바람을 쐬었다.
눈을 살짝 감은 채 바람을 느끼던 도중 귓가에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탁탁탁탁탁.
무언가로 바닥을 쉴 새 없이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뜨고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춤추는 강아지풀이 손에 든 가느다란 막대기로 주변을 훑고 두드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귀공께서도 안에만 있자니 답답하셨나 보오.”
“아, 춤추는 강아지풀 님. 자리를 비우셔도 되나요?”
“후후, 협상은 다른 장로들께서 잘해주실 거라오. 그러니 잠시 나와서 귀공과 이야기를 나눈다고 한들 문제 될 일이야 있겠소?”
여유롭게 옆에 앉으며 웃어 보이는 것을 보니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제가 먼저 말을 건 것도 아닌데 어떻게 저라는 걸 알고 말을 건 거죠?”
분명 그녀는 앞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말을 걸기도 전에 나라는 걸 알고 먼저 말을 걸었다.
그 말에 춤추는 강아지풀은 작게 웃어 보였다.
“후후, 눈이 멀었다 하여 후각까지 잃은 것은 아니외다.”
아,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만났을 때도 영혼의 냄새라는 말을 했었지.
그것을 떠올리니 문뜩 의아해졌다.
“당신은 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에 대해서 잘 아는 듯 대해주셨죠. 그것도 그 영혼의 냄새라는 것 때문인가요?”
내 물음에 가만히 뿌연 눈을 깜빡이던 춤추는 강아지풀은 조금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음… 혹시 귀공께서는 절망하는 자의 눈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지?”
<음, 역시 그거였나.>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 중얼거리는 카이서스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뭔데?’
카이서스가 대답하기도 전에 춤추는 강아지풀이 빙긋 웃어 보였다.
“역시, 귀공과 함께하는 존재께서는 알고 계신 모양이구려.”
그러니까 그게 대체 뭐냐고?!
<뭐 대충…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미래를 본다니, 그런 엄청난 능력을 지니셨다는 말입니까?!”
카이서스의 말에 내가 깜짝 놀라 묻자 춤추는 강아지풀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엄청나지요. 하지만 그리 좋지만은 않소이다.”
“네?”
내가 어리둥절해하며 되묻자 춤추는 강아지풀은 담담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절망하는 자의 눈은 자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미래의 일을 단편적으로 보여준다오. 하나 만일 미래를 바꾸거나 막으려 한다면 파멸만이 기다릴 뿐.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보았던 것을 기다리는 것뿐이기에 주시자의 눈이라 불리는 게지요.”
뭐야, 그건… 행복한 미래라면 모를까, 끔찍한 미래를 봐도 아무것도 못 한다는 소리야?
<그래. 그래서 절망하는 자의 눈이라고 부르는 거다. 지금껏 나타났던 그 능력의 소유자들은 바꿀 수도 없는 끔찍한 미래를 계속해서 보는 것에 절망해서 미쳐 버리곤 했으니까.>
‘뭐야, 그게. 바꾸려 해도, 바꾸지 하지 않아도 결국은 절망한다니. 뭐 그런 개같은 능력이 다 있어?’
<그런 의미에서 이 페루스 아이는 대단하구나. 분명 자신의 고향이 불타는 것을 포함해서 많은 것을 보았을 텐데도 절망하지 않다니. 그래서 나도 저번에 봤을 때 절망하는 자의 눈을 지니고 있다곤 생각도 못 했지 뭐냐.>
“그럼 지난번 저를 만나기 위해 제국의 사람들을 마을에 들어오게 한 것도…….”
“그러하오. 단편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미래에서 귀공이 우리와 함께하리라는 것을 보았기에… 어차피 마을의 최후를 막을 수 없다면 귀공이라도 만나보고 싶었소이다.”
그제야 나는 그날 장로들이 내게 했던 말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그때 장로님들은 모든 걸 다 알고서……”
“그러하오. 그리고 그분들께서는 본녀가 보았던 모습대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였다오.”
“아……”
그날 대화했던 장로들 모두 희생했다는 말에 나는 무어라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이 어찌 될지 알면서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럼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알고 있습니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춤추는 강아지풀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진정 알고 싶으신 게요? 알면서도 피하지 못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두려운 일이라오.”
이미 멀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향한 춤추는 강아지풀의 두 눈이 나를 응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만일 내가 앞으로 피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을 미리 알게 된다면… 페루스 장로들처럼 태연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 없을 거다.
침묵 속에서 내 생각을 읽은 듯 춤추는 강아지풀이 걱정 말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소용없는 물음이외다. 내가 보았던 가장 먼 미래는 여기까지였으니. 탈출 중에 독에 의해 시력을 잃은 이후로는 더 이상 미래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오.”
그녀의 말에 순간적으로 안심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행이네요… 아! 죄송합니다. 그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눈이 멀게 된 것은 상식적으로 전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내 사과에 춤추는 강아지풀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괜찮소이다. 그토록 보기 싫었던 피할 수 없는 일들을 이제는 안 봐도 되니 나로서도 기쁜 일이라오.”
두 눈을 잃었음에도 기뻐할 정도로 끔찍한 예지 능력이라니.
나로서는 도저히 짐작할 수조차 없는 고통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던 중에 춤추는 강아지풀이 두 귀를 쫑긋 세워 보였다.
“아, 이제야 협상이 끝난 모양이구려. 우리도 이만 들어가십시다.”
자리에서 일어나 앞장서는 춤추는 강아지풀을 따라 다시 협상장으로 들어서니 이미 안은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으아! 계속해서 머리 굴리는 것도 힘들구만! 맥주나 한잔해야겠어!”
“무슨 소린가? 자네는 협상 내내 투덜거리기만 했잖은가!”
“네 녀석은 바보냐? 그게 다 상대를 압박하기 위한 이 몸의 계획이었다는 거다!”
협상 도중에도 그랬지만 협상이 끝난 이후에도 엘프와 드워프의 장로는 으르렁대고 있었다.
“후후, 저 두 분은 평소에도 저러시니 신경 쓰지 마시구려.”
웃음을 흘리며 지나가는 춤추는 강아지풀의 말이 사실인지 두 장로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태연해 보였다.
드워프와 엘프의 말싸움은 쉽게 보기 힘든 광경이었기에 신경 쓰지 않기가 어려웠으나 애써 무시하며 아리안 누나에게 다가갔다.
본국의 전문가들이 여러 상황을 상정해서 작성해 준 서류 수십 장을 외워둔 그녀였음에도 협상을 마치니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고생 많았어요.”
“후, 협상 내용에 관한 것보다 저 사람들 비위 맞춰주는 게 더 힘들었어. 특히 저 드워프 영감님 말이야.”
다른 사람들에게 들릴세라 작게 소곤거리는 아리안 누나의 모습에 나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인간을 그다지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니까요. 협상 상대가 믿을 만한지 확인하고 싶었겠죠.”
이종족의 장로들은 협상 내내 아리안 누나가 보여준 진지한 모습에 믿을 만한 인간이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인간이라는 허울뿐인 내가 협상에 임했다면 분명 저쪽에서 실망했을 거야.
그러므로 나의 판단은 틀린 게 아니었다는 거지.
<뭐… 할 말은 많다만 이번에는 참아주마.>
나는 아리안 누나가 정리해 둔 가칭 이종족연합과 크라우드 왕국의 동맹협정서의 초안을 확인했다.
초안은 간결했다.
크라우드 왕국이 이곳과 주변의 산과 숲을 이종족연합의 자치구역으로 제공해 주는 대신 이종족들은 지식과 능력, 생산품 중 일부를 대가로 지급하고, 외부의 적과 함께 맞서 싸운다는 것.
영토를 내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종족연합이 피난처로 삼은 이곳은 애초에 인적이 드문 험한 산맥인 데다 대가로 받는 것들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거기다 크라우드 왕국에 비하면 이종족연합의 병력은 무척 적은 수이지만 지금처럼 제국이라는 강대한 적과 싸우는 지금 그들의 능력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일단 이 협정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협정서를 트럼벨로 보내서 승인을 받는 것이 우선이지만 말이다.
단번에 승인이 날 수도 있고, 몇 가지 조항을 추가하기 위해 협정서가 이곳과 트럼벨을 몇 번 오갈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한동안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단 거다.
비록 지금도 전쟁 중이기는 하지만 항구를 떠나기 전에 들은 소식에 의하면 제국의 공세가 주춤하며 전선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고 하니… 조금은 여유를 가져도 되겠지.
“협정이 완료될 때까지 저희가 잠시 신세를 져도 될까요?”
근처에 있던 춤추는 강아지풀에게 묻자 그녀는 웃으며 되물었다.
“어찌 우리가 손님을 박대하겠소?”
그렇게 드워프가 지은 건물에서 머무는 경험을 하게 된 것까지는 좋았지만…….
“…방을 하나만 내어줬네요.”
나는 방 안에 하나만 있는 큰 침대를 보며 침음을 흘렸다.
<아까 그 녀석들에게 이 아이가 네 반려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같은 방에서 지낼 수 있게 배려해 주는 게 당연한 거지.>
그건 알지만… 적어도 물어봐 줬으면 좋았을 텐데.
아리안 누나도 당혹해하지 않을까 싶어서 옆을 돌아봤는데…….
“누, 누나?”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아리안 누나의 두 눈이 보였다.
말 그대로 코앞이었기에 그녀의 숨결이 내 뺨을 간질였다.
“당연히 한방으로 줘야지. 넌 따로 잘 생각이었어?”
음… 당연한 건가?!
멍해진 나를 보며 미소를 지어 보인 아리안 누나는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 후의 일은 뭐… 손만 잡고 자지는 않았다.
* * *
대륙력 759년 2월 17일.
“일전에 도망쳤던 이종족들이 크라우드에 붙었다지.”
연병장이 내려다보이는 단상에 앉아 술잔을 만지작대고 있던 황제의 말에 그의 곁에 서 있던 루리스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거기다 그들의 요청에 대륙 각지의 다른 이종족들도 도움을 주기 위해서 모인다지요.”
루리스의 대답에도 황제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분노가 아니라 비웃음이었다.
“흥, 그래 봐야 우리에게 위협조차 되지 못하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숫자의 패배자들이지. 그에 비하면 짐의 새로운 군대는……”
잔을 기울여 술을 들이켜면서도 연병장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눈이 웃고 있었다.
연병장에 도열한 백여 명의 기사는 전신을 검은 갑옷으로 가리고 있었으나 투구의 사이로 보이는 붉게 충혈된 눈만은 가리지 못했다.
하나하나가 흉흉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그들은 심약한 자들을 보는 것으로도 공포를 느낄 것이었다.
“…무척 마음에 들어.”
술잔을 내려놓으며 그렇게 평가한 황제는 고개를 돌려 루리스를 쳐다보았다.
“그러니 이제 슬슬 저것들을 선보여야겠지. 충격과 공포의 첫 등장을 위하여 한동안 공세를 늦췄던 것이니까 말이야.”
자신이 집행자라는 이름을 하사했음에도 벌써 잊어버린 것인지 저것들이라 부르는 황제는 검은 기사들의 등장에 크라우드의 군대가 맞이할 충격과 공포를 떠올리는 듯 흡족하게 웃어 보였다.
“루리스! 저것들을 즉시 전선으로 투입시키도록. 그리고 생산에도 차질이 없도록 해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황제의 명에 고개를 숙여 보이는 루리스의 입가에는 자그마한 미소가 맴돌았다.
바로 다음 날, 황제의 새로운 특수부대는 전선을 향해 떠났다.
백여 명의 검은 기사가 배치된 곳은 제국군 2군단장 프레이 마리우스가 사령관으로 있는 르메인 평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