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 반제국 동맹
페루스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기쁘면서도 놀라웠다.
제국의 공격으로 마을은 불타 없어졌지만 많은 페루스들이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향을 잃고 떠돌던 중 비슷한 처지의 다른 종족들과 접촉할 수 있었고, 그들은 하나로 뭉쳐서 제국에 대항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것이 고작 4개월 전.
아무리 여러 종족이 뭉쳤다고 해도 커다란 제국을 상대로는 미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이리저리 떠돌다 크라우드 왕국의 구석에 몰래 자리를 잡고 임시 피난처를 마련했다.
그러던 중 그들은 제국이 다시 크라우드와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때 누군가가 제국과 전쟁을 치르는 크라우드 왕국에 도움을 주자는 말을 꺼냈다.
그리고 이내 찬성과 반대로 의견이 나뉘었다.
찬성하는 자들의 말은 제국에게 조금이나마 복수를 할 수 있는 기회인 데다 크라우드 왕국에 도움을 주면 지금 몰래 마련한 거처를 정식으로 인정받을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고.
반대하는 자들의 말은 인간 때문에 고향이 폐허가 되어 떠나야만 하지 않았냐고, 제국이나 크라우드나 같은 인간인데 어떻게 믿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둘로 나뉜 의견은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다 춤추는 강아지풀이 나에 대해서 말했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라면 믿어봐도 괜찮지 않겠냐고.
드래곤이라는 존재는 인간보다 이종족들 사이에서는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던 모양이다.
결국 나를 통해서 크라우드와 접선하기로 했고 나와 면식이 있던 노을빛 바람이 파견되었다.
출발은 한참이나 전이었지만 바깥세상에 혼자 나온 것은 처음인 데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움직이다 보니 얼마 전에야 트럼벨에 도착했다.
트럼벨에 도착하긴 했는데 어디서 나를 찾아야 할지 몰라 헤매던 모습이 너무나도 수상했기에 결국 노을빛 바람은 경비대에 붙잡혔다.
그 덕분에 로라스 왕자가 알게 되었고, 노을빛 바람은 왕자의 도움을 받아 내가 있는 곳까지 올 수 있었다.
라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말이지…….
“어째서 우리만 가는 거야?”
승전의 기쁨으로 떠들썩한 항구를 떠나 한적한 산속을 걷고 있는 것은 나와 아리안 누나, 그리고 안내를 하고 있는 노을빛 바람뿐이었다.
“원래는 너 혼자만 갈 수 있는 거거든? 저 여자 인간은 네 짝이라고 해서 특별히 데려가 주는 거야.”
으스대듯 말하는 노을빛 바람의 모습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들을 이종족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데려갈 수 없다기에 어쩔 수 없이 나와 아리안 누나만이 따라나서기는 했는데 도대체 나더러 어떻게 동맹 협상을 하라는 거야.
물론 노을빛 바람이 로라스 왕자를 만났을 때.
[이종족들과의 협상에 대한 것은 선생에게 일임하겠네. 아바마마께서도 승낙하신 일이야.]
라고 적힌 귀찮은 편지를 받아 온 덕분에 권한은 생겼지만 나는 외교에 대한 건 아무것도 모른다고!
<뭘 걱정하는 거냐? 네게는 이 몸이 있잖느냐.>
‘그래서 더 걱정이거든? 네가 또 무슨 도움 안 되는 헛소리를 해서 나를 헷갈리게 할까 봐!’
<뭐야?! 애초에 이종족들이 너를 믿을 수 있던 것도 내 덕분이지 않느냐!>
‘그래서 이런 잘 알지도 못하는 일까지 맡아버렸잖아!’
카이서스에게 짜증 섞인 투덜거림을 토해내고는 재차 한숨을 내쉬며 노을빛 바람에게 힘없이 물었다.
“그래서 어디까지 가야 해?”
“다 왔어. 저기 보이지? 저기가 바로 우리 피난처의 입구야.”
라고 말하는 노을빛 바람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에는 깎아지른 높은 절벽이 솟아 있을 뿐이었다.
설마 카이서스의 둥지에 있던 것과 같은 환영 결계가 쳐져 있는 건가?
<바보냐? 우리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결계를 만들 수 있는 것들이 제국 놈들에게 털리겠냐?>
그럼 대체 뭐지?
나와 마찬가지로 아리안 누나도 노을빛 바람의 말에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저긴 그냥 절벽이잖아?”
“가까이 가면 너희에게도 입구가 보일 거야.”
입구?
<귀를 기울여 들어봐라.>
카이서스의 말대로 귀를 기울이자 절벽 쪽에서 보통 사람이라면 듣지도 못할 작은 소리가 흐느끼듯 들려오고 있었다.
“어! 절벽에 틈이 있잖아?!”
자세히 보니 절벽에 사람 하나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틈이 있었다.
소리의 정체는 좁은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였다.
절벽의 틈은 바위와 나무에 가려져 보통 사람이라면 정말 가까이 가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게 입구라니, 안내를 받지 않으면 찾아내지도 못하겠네.”
“이젠 어째서 다른 사람들은 못 오게 한 건지 알겠지?”
확실히 아무리 잘 숨겨진 통로라고 해도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의미가 없어질 테니까.
아직 협상을 통해 손을 잡기로 확정한 것이 아닌 이상 피난처의 위치는 숨기는 것이 안전하니까.
“배고프니까 빨리 가자.”
그렇게 말하곤 틈 사이로 쏙 사라져 버린 노을빛 바람을 따라 나와 아리안 누나도 틈 속으로 들어갔다.
보기엔 무척이나 좁은 틈이었으나 막상 들어가 보니 지나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5분 정도 절벽 속을 지나가자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사방이 절벽으로 막힌 넓은 분지에는 이종족들의 도시가 계속해서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정말 절벽에 틈이 나 있던 것이 행운이었군.
<흠, 좀 전의 절벽에 난 틈 말인데. 자연적인 건 아니다. 만들어낸 거지.>
‘뭐? 누가 만든 거라고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는데?’
<드워프 녀석들의 솜씨일 거다. 손재주 하나는 쓸 만한 녀석들이니까. 거기다 엘프의 손도 닿은 것 같던데.>
‘드워프와 엘프라고?’
<예전에 레어를 만들 때 불러다가 도움을 좀 받아서 녀석들의 방식은 조금 알거든.>
음, 보나 마나 강제로 끌고 와서 협박해서 부려먹은 거겠지.
그렇긴 해도 카이서스의 안목만큼은 믿을 만한 것이었기에 나는 앞장서는 노을빛 바람에게 물었다.
“페루스 외의 다른 종족들 중에 엘프와 드워프도 있어?”
“우왓?! 어떻게 알아챈 거야?”
깜짝 놀라워하는 노을빛 바람의 모습에서 카이서스의 말이 정말임을 알 수 있었다.
“그건…….”
내가 카이서스에게서 들은 말을 들려주려는 차에 누군가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늦었구나!”
사자 머리의 말랑 발바닥이 멀리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우락부락한 근육질과 거구는 여전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양 뺨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생겨 있었고 왼팔은 팔꿈치 아래부터가 보이지 않았다.
“당신… 팔이……!”
말을 채 잇지 못하는 내 모습에 말랑 발바닥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때는 미안했다.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인간인 줄도 모르고 무례했군. 일단은 어서 가도록 하지. 너희가 왔다는 소식에 각 종족의 장로님들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재촉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더 이상 그의 팔에 관해 묻지 못하고 뒤를 따라갔다.
마을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동안 우리에 관한 이야기가 퍼졌는지 사람들이 나와서 구경했다.
페루스, 엘프, 드워프, 머리뿐만 아니라 전신이 짐승의 모습을 한 수인 등등.
이곳에 인간이라고는 나와 아리안 누나뿐이었다.
이종족들은 그런 우리를 경계심과 두려움, 그리고 기대가 뒤섞인 복잡한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부담스러운 시선 속에서 얼마나 걸었을까, 우리는 어느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오랜만이오.”
치렁치렁한 옷차림에 쫑긋 솟아 있는 고양이 귀.
지팡이를 손에 든 채로 담담하게 인사를 건네는 춤추는 강아지풀의 모습에 나는 침음을 삼키며 애써 인사를 받았다.
“오랜… 만입니다.”
그녀의 나른하면서도 날카롭던 눈은 회색으로 탁하게 흐려져 있었다.
나의 목소리에서 내 마음을 읽은 듯 춤추는 강아지풀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겠지만 우선은 들어가십시다. 다른 분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오.”
앞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춤추는 강아지풀은 다른 페루스의 부축을 받으며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여러분, 손님이 도착했소이다.”
춤추는 강아지가 건물 안의 넓은 방에 들어서며 한 말에 원형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각 종족의 장로들이 고개를 돌렸다.
대부분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와 아리안 누나를 반겨주었지만 몇몇은 뚱한 표정으로 쳐다만 볼 뿐이었다.
“먼 길을 오느라 피곤하실 것은 익히 알고 있소만… 이분들이 원체 귀공을 만나고 싶어 하시는지라.”
그 말에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자들 중 하나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정말 저 비리비리해 보이는 인간을 드래곤이 가호한다고?”
언뜻 보기에도 뻣뻣해 보이는 수염을 가슴께까지 기른 작은 체구의 사내가 그렇게 말하자 곁에 있던 귀가 길고 훤칠한 사내가 달래듯 말했다.
“바운델 이 친구야, 아무리 그렇게 보인다고 해도 그런 말을 굳이 본인 앞에서 해야겠나?”
분명히 감싸주는 것 같기는 한데 기분이 나쁜 이유는 뭘까.
“게다가 자네도 들었잖아, 북쪽 바다의 지배자 카락스가 저 인간을 보증했다고.”
“그건 비유 자네가 어디서 듣고 와서 해준 말이 아닌가! 옛말에 귀 큰 놈은 믿지 말라는 말이 있던데, 그러고 보니 자네도 귀가 크군!”
“그거야 나는 엘프니까 귀가 큰 것 아닌가!”
“그래서 믿음이 안 간다는 거다!”
“뭐야?!”
<클클, 하여간 엘프와 드워프가 볼 때마다 싸워대는 건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군.>
순식간에 말다툼을 시작한 엘프와 드워프의 모습에 다들 익숙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드렸구려.”
앞은 보이지 않아도 들리는 소리에 춤추는 강아지풀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지팡이로 땅을 가볍게 두드렸다.
“두 어른께선 손님을 계속해서 세워두실 셈입니까?”
소란 중에도 낭랑하게 울려 퍼지는 춤추는 강아지풀의 말에 엘프와 드워프는 그제야 말싸움을 멈추었다.
“험, 험. 일단은 앉으시든가.”
“무례를 저질렀군요. 앉으시죠.”
그제야 우리는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래. 그쪽과 손을 잡으면 우리에게 뭘 해줄 수 있나?”
“네?”
다짜고짜 본론부터 치고 들어오는 드워프 장로의 말에 내가 당황해서 쳐다보자 그는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탕탕 두드리며 재차 말했다.
“우리가 그쪽에 붙으면 뭘 해줄 수 있냐 그 말일세!”
지금은 인사 정도만 나누고 협상은 천천히 진행할 줄 알았는데!
솔직히 나는 협상이나 외교와 같은 능력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무척이나 고민한 결과…….
“그거라면 저와 이야기하시죠.”
지금껏 내 옆에서 가만히 있던 아리안 누나가 끼어들며 말했다.
그렇다.
내가 잘못하는 일이라면 더 나은 사람에게 부탁하면 되는 것 아니겠어?
애초에 왕자에게서 받은 편지의 추신에도 그렇게 하라고 적혀 있었고.
<그럼, 그럼. 다른 놈들을 부려먹으면 되는데 뭐 하러 고생해?>
그건 아니지, 이 자식아!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쓰레기 같잖아!
“뭐? 자넨 뭔가. 우리는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인간과 협상을 하겠다고 한 거네.”
“그 가호를 받는 사람이 제 남자입니다. 이 사람을 대신해서 나서도 될 충분한 자격은 있다고 보는데요. 라엘을 믿고 협상을 하려 하신 거면 라엘이 믿는 저도 믿어주시죠.”
“음? 반려라는 말인가?”
“네.”
아… 단호하게 말하는 아리안 누나 너무 멋져.
이미 반했지만 다시 반할 것 같아.
아리안 누나의 흔들림 없는 시선에 드워프 장로의 시선이 잠깐 흔들리더니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끄응, 반려라면 어쩔 수 없지.”
혹시나 말이 통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는데, 이게 되네?
나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드워프 장로가 혀를 차며 말했다.
“가호를 받는 인간이 어리숙해 보여서 우리 쪽에 좀 유리하게 하려 했는데, 아무래도 글렀나 보군.”
그런 이야기를 왜 굳이 입 밖으로 내는 거지?
협상이고 뭐고 그냥 때려치우자는 것인가?
<음… 저 드워프 녀석… 사람 보는 눈이 정확하군.>
‘납득하지 마! 이 빌어먹을 드래곤!’
드워프 장로가 아리안 누나를 협상인으로 인정하자 다른 종족의 장로들도 하나둘 입을 열며 협상에 끼어들었다.
아리안 누나는 왕자가 보내온 편지에 동봉되어 있던, 양보 가능한 항목과 반드시 챙겨야 할 것 등을 전문가들이 작성해 놓은 목록을 토대로 협상에 임했다.
각 종족의 장로들과 아리안 누나가 평온하게, 때로는 단호하게 협상을 진행하는 것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나… 여기 뭐 하러 온 거지?’
<뭐긴 뭐야. 늘 하던 대로 얼굴마담이지.>
‘넌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가끔은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좋은 거라는 걸 배웠으면 좋겠어.’
<거절한다. 대화할 상대라곤 네 녀석뿐인 내 소소한 취미를 뺏을 생각이냐?>
‘그딴 취미는 가지지 마!’
나는 자리에 얌전히 앉아서 카이서스와 잡담을 나누면서 협상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협상은 무척이나 길게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