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 다른 하늘
대륙력 759년 1월 1일.
점령군의 통제에서 벗어난 기쁨과 새해를 맞이하는 들뜬 마음으로 플라니아 항구 전체가 축제 분위기였다.
해는 저물어가고 있었지만 곳곳에 밝혀진 불빛에 비친 거리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곳곳에 모닥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워대느라 추위마저 느끼기 어려울 정도였다.
제국 함대가 두고 가야 했던 물자를 넉넉하게 푼 덕분에 시민들과 병사들은 주머니 걱정 없이 먹고 마시며 즐겼다.
“어이! 이번에 댁들이 큰 활약을 했다지? 한 잔 받으라고! 설마 인어라고 해서 술을 못하는 건 아니겠지?”
한창 술기운이 올라 있던 시민이 지나가던 머맨 병사를 향해 소리쳤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먹을거리를 들고 도시를 구경 중이던 머맨 병사는 시민의 외침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 그것 참 흥미로운 말이군! 어디 그쪽은 얼마나 술을 잘 마시나 볼까!”
호쾌한 머맨 병사의 대답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어이! 술 대결이다! 술 더 가져와!”
술 대결이라는 소리에 주변에서 술을 마시던 다른 시민들과 병사, 그리고 머맨들이 몰려들어 이윽고 커다란 술판이 차려졌다.
함께 싸운 전우여서인지 술기운 때문인지 그들은 종족의 차이는 신경 쓰지도 않는 듯했다.
머메이드들도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수로에서 몸을 내민 채로 꼬치구이와 음료를 먹으며 지나가던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이참! 그러니까 선량한 사람들을 홀려서 물속으로 끌고 가서 죽인다는 건 헛소문이라니까요?! 그건 아주 나쁜 사람들한테 복수할 때만 쓰는 방법이라고요! 아시겠어요?”
“아, 넵.”
술을 조금 마셨는지 조금 상기된 얼굴로 말하는 어느 머메이드를 유약한 인상의 남자는 시선을 어디로 둘지 몰라 하면서도 상대해 주고 있었다.
시선을 피하면서도 그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게 수면 위로 드러난 머메이드의 상체는 일반적인 인간의 상식으로는 너무 과감한 차림새니까.
“생각보다 다들 잘 어울리고 있네.”
떠들썩한 거리를 함께 걷고 있던 아리안 누나가 웃음 가득한 환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게요. 서로 많은 게 다르다 보니 금방 친해지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같은 적을 상대로 함께 싸운 데다 애초에 이곳의 사람들이 바다 사람이라 내륙 사람들에 비해 인어에 익숙했을 거고.
거기에 술까지 더해진 덕분에 이런 광경이 가능한 거겠지.
설마 다들 술이 깨고 나면 언제 이랬냐는 듯 서먹해지는 건 아니겠지?
나는 순식간에 술통을 비워내는 사람들을 슬쩍 쳐다보았다.
아리안 누나 또한 웃고 떠드는 두 종족들을 묘한 시선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치, 나도 처음에는 친해지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어. 살아온 환경도, 성격도 많이 달랐으니까.”
“그렇죠? 아무래도 종족이 다르다 보니…….”
웃으며 맞장구치는 나를 돌아본 아리안 누나가 멋쩍게 웃어 보였다.
“저 사람들 말고 우리를 말하는 거야.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해?”
그녀의 말에 나는 아, 하고 작은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때 서로의 인상은 그리 좋지 못했다.
아리안 누나는 계속 차가운 분위기여서 나는 쉽게 말조차 붙이지 못했었으니까.
“정말이지, 그때는 저와 누나가 이런 관계가 될 줄은 몰랐죠.”
내가 추억을 떠올리며 웃자 뭔가를 결심한 듯한 아리안 누나가 진지하게 물었다.
“관계라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나는 너와 서로 사랑하는 연인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어. 너도 그렇게 생각해?”
갑자기 직접적으로 확인해 오는 질문에 나는 살짝 쑥스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망설임 없이 내뱉은 내 대답에 아리안 누나는 흡족하다는 듯 웃었다.
“이런 날에 대부분의 연인들은 말이지…….”
그렇게 운을 뗀 그녀는 내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곤 뒷말을 속삭였다.
귓가에 숨결과 함께 속삭여진 그녀의 말에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나는 이내 그 뜻을 깨닫고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넌 참 이 아이를 만나서 다행인 것 같다. 이렇게 먼저 끌어가 주지 않으면 넌 평생 진도도 못 나갔을 텐데 말이야.>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나를 놀리는 카이서스의 목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신경 쓸 수가 없었다.
오늘 아침에 갈아입은 속옷이 낡지는 않았던가?
품속의 마법 주머니에 향수로 쓸 만한 게 있나?
처음엔 분위기라는 게 중요하다는데 분위기는 어떻게 잡아야 하지?!
우리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면서도 손은 꼭 붙잡은 채로 근처의 여관으로 향했다.
이런 날인지라 많은 여관에 빈 방이 없었으나 다행히도 가장 비싼 최고급 방 하나는 구할 수 있었다.
* * *
새해를 맞아 들뜬 분위기로 가득한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바이엔이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벌써 새해네.”
이곳은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하건만, 멀리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가 그치질 않는다.
“새해라고 다들 들떠서는 술이나 마셔대다가 눈 맞아선 으슥한 곳이나 가겠지.”
새해 첫날에 혼자여서인지, 아니면 다른 곳과는 너무 비교되는 황후궁의 침울한 분위기 때문인지 바이엔의 입에서는 절로 투덜거리는 말이 튀어나왔다.
비록 혼잣말이긴 해도 황후의 앞에서 할 만한 소리는 아니었기에 이내 흠칫한 바이엔이 조심스레 모니카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모니카는 바이엔의 말은 듣지 못했는지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볼 뿐이었다.
그 모습에 바이엔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철판이 덧대어진 마차의 문짝을 뜯어서 휘두를 정도의 괴력을 지녔던 그녀는 날이 갈수록 쇠약해져 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새해라서 외롭다고 혼잣말로 투덜대는 건 괜찮은데 그런 불쌍하단 눈으로 쳐다보는 건 그만둬 줄래?”
혼잣말을 듣지 못한 게 아니라 그냥 무시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던 모양이다.
모니카가 슬쩍 째려보며 그렇게 말하자 바이엔이 찔끔하며 눈을 깔았다.
“죄, 죄송합니다.”
“됐어, 너도 알잖아. 내가 황후라고 해봐야 제대로 된 취급도 못 받고 있다는 걸.”
자조하며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는 모니카의 말에 바이엔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새해 선물 하나도 없는 건 좀 너무하네. 내 친정에서는 선물을 보냈을 텐데 말이지.”
선물이 없는 게 아니라 들어온 선물마저도 전달해 주지 않은 거다.
투덜거리며 말하던 모니카는 바이엔을 보며 말을 이었다.
“당신도 뭔가 아는 거 없어? 왜 나를 황후랍시고 앉혀놓고 이런 대우를 하는지 말이야.”
새해라서 기분이 조금이나마 들뜬 것은 모니카도 마찬가지일까, 평소에는 서로 하지 않던 질문을 했다.
“그건…….”
모니카의 물음에 바이엔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을 흐릴 뿐이었다.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어째서 타국의 공주를 황후로 맞이해 놓고는 없는 사람처럼 대하며 가둬두기만 하는지.
황후궁 전체에 감도는 이 불쾌한 분위기는 대체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은 바이엔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대답을 하지 못하는 바이엔의 모습에 모니카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미안, 안 그래도 그쪽은 윗선에 미운털이 박혀 있는 모양인데. 내가 더 곤란하게 해선 안 되겠지.”
모니카의 말에 바이엔은 침음을 삼켰다.
자신이 오기 전에 이곳에서 황후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눈치챈 지는 오래였다.
사법부의 관료로 일하는 동안 입을 다무는 법은 배웠어도 눈과 귀는 계속 열어두었으니까.
시녀들의 두려움과 곳곳에서 느껴지는 시선들.
해야 할 일이 아니면 나서려고 하지조차 않는다.
“도움이 되질 못해서 죄송합니다. 저도 들은 것이 없어서요.”
다들 모니카와 대화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듯했지만 바이엔은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눴다.
애초에 말벗을 하라며 보내진 데다가 이제 윗분들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어졌으니까.
자신이 아는 상부의 사람들은 한 번 버린 사람을 다시 쓰는 일은 없었다.
이미 이곳으로 버려진 이상 완전히 잊히거나, 아니면 사라지거나.
‘애초에 나도 이곳에서 멀쩡히 벗어날 수는 없겠지.’
황후를 이렇게 대하는 이유가 뭔지는 몰라도 윗선에서는 이 일을 외부에 알리기 싫을 것이다.
그리고 예로부터 비밀을 지키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생각에 잠겨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는 바이엔에게 모니카가 말했다.
“그나저나, 아무리 내게 신경을 안 쓴다고 해도 남자를 말벗으로 붙여주다니. 너무한 것 같지 않아?”
새해를 즐기는 사람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바깥에서 들려와서인지 모니카는 평소엔 참아오던 불만을 토해냈다.
그녀의 투덜거림에 바이엔은 난감한 듯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황후 마마, 사실 저도 여자입니다.”
어차피 이제 와서 성별을 숨길 이유도 없어졌기에 바이엔은 모니카의 착각을 정정해 주기로 했다.
“뭐?!”
그 말에 피곤함으로 눈을 반쯤 감고 있던 모니카가 간만에 눈을 크게 뜨며 바이엔을 쳐다보더니 어딘가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지만… 없잖아?”
자신의 가슴 쪽을 향하는 듯한 시선에 어째선지 심기가 불편해졌으나 바이엔은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오랫동안 숨겨오느라 습관적으로 눌러놨을 뿐입니다.”
사실 본인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가슴을 압박하는 붕대를 풀어도 큰 차이는 없다.
“음…….”
설명에도 불구하고 모니카가 미심쩍은 듯 쳐다보자 바이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벗어서 보여 드릴 수도 없고 난감하군요.”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모니카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대로 손을 뻗었다.
“굳이 귀찮게 벗겨보는 것보다 직접 만져보면 알겠지.”
점점 쇠약해져 가는 모니카의 어디서 그런 움직임이 나온 것인지 바이엔은 피할 새도, 막을 틈도 없었다.
“흐억?!”
남의 사타구니에 손을 쑥 들이댄다는 파렴치한 범죄에 바이엔은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지만 모니카의 손은 이미 그녀의 사타구니를 훑고 지나간 후였다.
“어? 진짜 없네.”
“무, 무슨 짓입니까!”
놀라워하는 모니카의 모습에 바이엔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뭐긴, 확인해 본 거지. 같은 여자끼리니까 괜찮잖아.”
모니카가 태연하게 대꾸하자 바이엔은 격하게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같은 여자끼리라도 전혀 괜찮지 않습니다! 거기다 혹시나 제가 남자였다면 어쩌시려고 그랬습니까?”
황당해하며 묻자 모니카는 어깨를 으쓱거리곤 무심하게 대답했다.
“내 기분이 조금 더러워지고 여길 감시하는 놈들이 널 없앴을지도.”
그러곤 또 다른 생각이 들었는지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니면 내가 다른 남자의 몸을 만지작거리건 말건 신경조차 쓰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녀의 말에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당장 오늘 밤에 열릴 새해맞이 연회에서도 황후를 찾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추행에 대한 항의는커녕 위로를 하게 생긴 바이엔은 차마 뭐라고 더 말하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주방을 살펴보다 괜찮은 걸 찾았는데, 같이 드시겠습니까?”
바이엔이 말하는 괜찮은 것이 무엇인지 눈치챈 모니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짓을 하네.”
이미 예상한 반응에 바이엔은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금방 가져오죠.”
동병상련의 두 사람은 누군가에 대한 험담으로 의기투합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모니카의 몸이 약해져 있는 탓에 이전처럼 많이 마실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 * *
밤이 깊었음에도 흥겨운 분위기가 가득한 거리를 걸어 우리는 숙소로 돌아갔다.
“어디를 갔다가 이제 오는 건가? 손님이 기다… 음?!”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어째선지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세르바인 님이 무어라 말하다가 뭔가를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왜 그러시죠?”
딱히 잘못한 것은 없지만 당황하며 묻자 세르바인 님은 나와 아리안 누나를 번갈아 보더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흠, 흠. 아무것도 아니네.”
그러곤 슬쩍 시선을 피하는 것이… 뭐, 뭐지?
<쯧쯧, 내가 전에 말한 적 없던가? 넌 얼굴에 다 티가 난다니까.>
아니, 아무리 티가 많이 나도 보자마자 뭔가 일이 있었다는 걸 눈치챈다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나와는 달리 아리안 누나는 태연하게 말을 돌렸다.
“손님이라니요?”
음, 역시 여관에서 본 아리안 누나의 당황해서 허둥거리는 모습도 색달라서 좋았지만 이런 평소의 모습도 좋다니까.
<그런 오글거리는 생각은 미리 경고하고 해주면 안 되냐?>
‘너야말로 남의 생각에 함부로 끼어들지 말아줄래?’
세르바인 님은 아리안 누나의 말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이유를 떠올리곤 대답해 주었다.
“그래. 멀리서 온 손님이 라엘 군을 만나고 싶다는구나.”
나를 만나러 온 손님이라는 말에 카이서스와 속으로 으르렁대는 것을 멈추었다.
“제게 손님이요?”
나를 찾아올 만한 손님이 있던가?
의아해하던 와중 누군가가 2층의 난간에서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이제 온 거야? 한참 기다렸다고.”
입을 크게 쩌억 벌리며 인사를 건네는 털이 북슬북슬한 얼굴에 나는 놀라서 입을 벌리고 말았다.
“살아 있었구나!”
내 말에 이전보다 많이 자란 페루스 소년의 길쭉한 입이 히죽 웃음을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