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 바다의 주인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바다에서 누군가가 솟아올랐다.
분명 물속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젖어 있지 않은 고급스러운 의복을 걸친, 눈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머맨이었다.
목소리나 눈가의 주름을 보면 꽤 나이가 있어 보이지만 품이 넓은 옷으로도 감추지 못하는 체격과 근육은 장군인 구스타보다도 컸다.
“오셨습니까, 왕이시여!”
갑자기 등장한 그에게 구스타가 무릎을 꿇으며 예를 취했다.
왕이라는 말에 다들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인어왕은 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타밀레에게 말했다.
“타밀레야, 너무 구스타를 곤란하게 하지 말거라. 다들 걱정하지 않았느냐?”
자상한 그 말에 타밀레는 고개를 숙이며 힘없이 말했다.
“죄송해요, 왕님.”
풀이 죽은 그녀의 모습에 인어왕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무사하니 되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말했다.
“안 그래도 자네를 만나러 온 참이었는데 잘됐군. 우리 타밀레를 보호해 줘서 고맙네. 지난번에도 그렇고.”
“아,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발견했을 뿐인걸요. …그런데 저를 만나러 온 참이었다니요?”
인어왕의 감사에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다 깜짝 놀라 되물었다.
“우리 왕국을 지켜주시는 블루 드래곤 카락스 님께서 그대들을 도와 바다에서 타이런 제국을 몰아내라 하시더군.”
“네?!”
카락스라면 분명 지난번 나를 축복하며 나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던 블루 드래곤이었다.
<엥? 그 짜증 나는 녀석이?>
카이서스도 그 이름에 당황한 듯 어리둥절해했다.
<분명 그 녀석이 바다를 좋아해서 허구한 날 바다에 떠다닌다는 것은 들었는데, 인어왕국의 수호신 같은 걸 하고 있었나?>
‘하지만… 드래곤이 개입하는 건 세계의 섭리를 어지럽히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어?’
<맞아. 그 황제 놈과 루리스가 균형을 깨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균형을 깨선 안 되지.>
‘그런데 어째서……’
<뭐, 간접적으로 개입하는 건 괜찮은 거지. 솔직히 카락스가 한 거라고는 친하게 지내던 애들한테 몇 마디 말만 해준 게 다니까.>
뭐야, 그거… 그 세계의 섭리인가 뭔가 하는 거 너무 대충인 거 아니야?
속으로 어이없어하는 나와 달리 다른 사람들의 얼굴은 크게 밝아졌다.
“바다에서 인어들의 도움을 받는 것만큼 반가운 일이 없지요.”
거의 평생을 바다에서 지냈기에 인어가 바다에서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는 로히테르 제독이 가장 기뻐했다.
그랬기에 제독이 이 소식을 수도 트럼벨에 전하고, 동맹조약을 속전속결로 진행시키는 데 앞장섰다.
* * *
며칠 후, 함대가 주둔 중인 작은 어촌에는 활기가 가득했다.
불리한 전황으로 잔뜩 긴장하고 있던 수병들의 얼굴에도 자신만만한 기색이 보였다.
인어왕국의 군대가 함께한다면 전황을 역전시키기에 충분하니까.
끄응, 다들 긴장을 푼 것은 좋은데 이럴 거면 나와 아리안 누나의 비밀 데이트를 훔쳐보고 소문내는 일은 필요 없지 않았을까?
다들 긴장이 풀려선지 사람들이 지나갈 때마다 나와 아리안 누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웃곤 했다.
“으으, 다들 좋게 봐주는 건 좋은데 너무 과한 관심은 부담스럽단 말이지…….”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하고 있던 중에 누군가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적을 상대로 함께 싸우면 그만인데 인간들은 조약이니 뭐니 하면서 복잡한 절차를 왜 이리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어왕국의 장군 구스타는 전쟁도 시작하기 전에 지친 기색이었다.
구스타의 피부는 온통 연갈색의 비늘로 덮여 있기에 인간의 눈으로는 표정을 읽기 어려웠으나 낯선 일에 지쳐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음… 그건…….”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절차라 그의 말에 대답할 만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거야 인간들은 타인은 물론이고 자신들마저도 믿지 않는 종족이니까. 조약이니 협약이니 그런 강제성이 없으면 서로를 믿고 함께하기가 어려운 거지.>
‘오랫동안 인간을 연구해 온 전문가’라고 혼자 주장하는 카이서스가 그렇게 말했다.
‘아니,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너무 비관적인 것 아니야?’
<말에는 힘이 있지. 그 힘마저도 무시하고 증거가 있어야만 인정하는 인간들이 한둘이냐? 너도 역사 같은 것을 공부한 적이 있다면 알 텐데.>
뭐… 그렇긴 하지만 카이서스의 말을 그대로 들려줄 수는 없었기에 다르게 말했다.
“글쎄요.”
구스타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다른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얼마 전에야 알았습니다만… 라엘 님이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분이시라더군요. 그것도 저희를 지켜주시는 카락스 님께서 직접 인정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어… 뭐, 그렇죠.”
지금까지 그는 나에 대해서 잘 몰랐던 모양이다.
내가 멋쩍어하며 대답하자 그는 나를 관찰하듯 살피며 의아해했다.
“어떤 점을 보고 라엘 님을 인정해 주신 건지 저로서는 모르겠지만 카락스 님께서 그리하셨다면 뭔가가 있는 거겠지요.”
“하, 하하…….”
한마디로 자신이 보기에는 내가 대단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지만 악의는 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협상은 잘 진행되어 가고 있습니까?”
동맹조약에 관한 협상에 대해 물어보자 구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우리가 원하는 것은 카락스 님의 뜻대로 크라우드의 인간들과 함께 제국에 맞서 싸우는 것. 크라우드도 마찬가지니 문제 될 것은 없지요.”
“그런데 카락스 님이 인어왕국을 지켜주시는 계기가 뭔가요?”
<당연히 뭔가 엄청난 보물이겠지! 그 짜증 나는 녀석이 아무 대가도 없이 다른 것들을 도와줄 리가 없어!>
편견과 확신에 가득 찬 카이서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하여간 드래곤이란 족속은 서로를 좋게 말하는 법이 없는 것 같아.
내 물음에 구스타는 흠, 하고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우선 저희 왕국의 이름은 인어왕국이 아닙니다. 아틀란티스라는 어엿한 국명이 있지요.”
“아틀란티스?”
처음 듣는 이름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어왕국에 제대로 된 국명이 있었다면 카이서스가 내게 말해주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카이서스는 잘난 척하면서 남이 알고 싶어 하건 말건 자기가 아는 걸 늘어놓기를 즐기는 녀석이니까.
<넌 대체 나를 어떤 드래곤으로 생각하는 거냐? 일단은 저 이름은 나도 처음 듣는다.>
당혹스러워하는 내 모습에 구스타는 괜찮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모르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저희는 다른 곳과 교류하지 않고 지내왔기에 나라의 이름이 필요 없었으니까요.”
하긴, 지금껏 인어의 나라와 교류했다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지.
“하지만 지난번 크라우드의 왕자님이 무녀님을 구해주신 것을 계기로 간단한 교류나마 하게 되었기에… 카락스 님께서 친히 나라의 이름을 지어주셨지요.”
확실히 이전과는 달리 바깥으로 나선 이상 계속해서 인어왕국이라고 부르기도 이상하지.
“그런데 구스타 님은 불만 같은 건 없으신가요? 어찌 보면 카락스 님이 지시하셨단 이유만으로 제국과의 전쟁에 참전하는 거잖습니까.”
전쟁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나라의 수호신 같은 존재가 지시했다 하더라도 엄청난 힘을 지닌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치른다는 건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것도 자신들을 잘 알지도 못하는 상대를 먼저 공격하는 것은 더더욱.
애초에 전쟁을 좋아하는 호전적인 민족이었다면 지금껏 바다에서 조용히 살고 있지도 않았을 거다.
만일 보통의 나라에서 갑자기 수호신이 시켰다면서 제국에 전쟁을 선포한다면… 아마 반란이 일어나서 백성들의 손으로 국왕의 목이 제국에 바쳐질 거다.
내 물음에 구스타는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아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뭔가 잘못 알고 계신 모양이군요. 그 반대입니다.”
“반대… 라니요?”
뜬금없는 말에 내가 영문을 몰라 하자 그는 순식간에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가 지금껏 조용히 지내왔다고 해서 원한이 없는 건 아닙니다.”
분명 담담한 목소리였으나 눈에서는 끓어오르는 증오가 가득 차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의 모습에 내가 조심스레 묻자 구스타는 분노를 참기 위함인 듯 이를 악물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그의 상어처럼 뾰족한 치아가 무척이나 살벌해 보였다.
“그들은 틈만 나면 우리 동족들을 습격하여 죽이거나, 납치해서 노예로 만들거나… 잡아먹었습니다.”
제국은 아직까지 노예제도가 합법인 나라다.
그리고 인어 고기를 먹으면 장생한다는 미신의 기원 역시도 제국.
대략 어떤 이야기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제국에선 인어 사냥을 막지 않은 것이다.
아니, 오히려 권장하고 지원했겠지.
제국에 속하지 않은 자들은 그저 좋은 돈벌이에 불과했을 테니까.
그것은 지난번 페루스의 일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껏 우리가 참아온 것은 카락스 님께서 우리에게 인간들을 상대하지 말고 힘을 기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카락스 님께서 전쟁을 허락하셨으니……”
말꼬리를 흐리며 다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카락스의 눈에는 여전히 증오와, 희열이 맴돌았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요.”
‘댐으로 물을 잔뜩 모아놨다가 한 번에 터뜨린 거나 마찬가지로군.’
대체 제국은 어디까지 원한을 차곡차곡 적립해 온 거야.
* * *
“허! 생선들이 미쳤나 보군!”
어이가 없다는 듯 소리치며 들고 있던 보고서를 아무렇게나 내던진 황제는 자신의 앞에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남자를 불쾌함이 가득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래서, 물짐승들이 크라우드 놈들과 손을 잡고, 짐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신분인 황제였기에 장생할 수 있다는 인어 고기를 직접 먹어본 적도 있는 그로서는 인어들은 그저 물속에 사는 짐승과 다름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존재들이 자신에게 이를 드러내자 분노한 황제에게 보고를 위해 왔던 신하는 두려움에 더욱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 그렇사옵니다.”
“버러지 같은 것들이 감히…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함대가 어디지? 그쪽으로 합류해서 모조리 쓸어버리라고 해라!”
“예!”
더 있다간 불똥이 자신에게 튈세라 인어의 참전을 보고하러 왔던 신하는 황급히 밖으로 물러갔다.
분노로 얼굴을 찡그리고 있던 황제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이것도 예상한 대로인 것이냐?”
비꼬는 기색이 역력한 말에 기둥 뒤의 공간에 서 있던 자가 조용히 걸어 나왔다.
“저라고 해도 미래를 읽는 능력은 없습니다.”
전혀 당황하지 않고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루리스의 얼굴이 맘에 들지 않는지 황제는 쳇! 혀를 찼다.
“황후를 사용하는 일의 진행 상황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지?”
자신의 반려를 단순한 수단으로 이야기하는 황제의 말에도 루리스는 태연했다.
“이제 막 생산에 들어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언제든 그것들을 실전에 투입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도록 해.”
“예.”
지시를 내리고 돌아서려던 황제는 이내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가 지나기 전에 첫 번째 물건을 볼 수 있으면 좋겠군.”
그저 지나가듯 말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명령이라는 것은 루리스도 알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올해 안에 결과물을 내놓으라는 재촉에도 루리스는 여전히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 모습이 황제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미간을 찡그리곤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짜증 나는 녀석 같으니.”
루리스가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황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루리스가 떠나간 자리를 노려보던 황제는 이내 그를 머릿속에서 지웠다.
‘슬슬 정리할 준비를 해야겠어.’
서로를 믿지 않는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꿍꿍이를 꾸미고 있었다.
* * *
“새해가 되기 전에 플라니아 항을 되찾아야 합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로히테르 제독이 단호하게 말하자 아틀란티스의 병력 지휘관으로 자리에 참석한 구스타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하필 새해가 되기 전으로 못을 박은 것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새해가 되면 다들 고향 생각이 간절해질 텐데, 적들에게 고향이나 다름없는 플라니아 항을 되찾지 못한다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겁니다.”
확실히 로히테르 제독이 지휘하는 북해 함대에는 플라니아 항이 고향인 사람이 많다고 했다.
게다가 북해함대의 거점인 만큼 대부분의 병력이 플라니아 항에 애착이 많을 터였다.
“그리고 첩보에 의하면 제국 2함대가 이곳으로 지원을 오는 중이라 하니 그 전에 승부를 보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이어진 제독의 말에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4함대와 제3 마법병단, 그리고 항구의 지상군들만으로도 머리가 아픈데 또 하나의 함대가 합류한다면 상황이 더욱 악화된다.
어두운 로히테르 제독의 말에 구스타는 뭔가를 생각하듯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아무것도 아니란 듯 말했다.
“그 지원군을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가라앉히는 것이 좋겠군요.”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제국의 함대는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제독의 걱정스러운 말에 구스타는 웃으며 회의실의 창문 밖으로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우리의 고향이고, 우리는 바다의 일부입니다. 아무리 많은 배를 끌고 온다 해도 그들은 바다를 이길 수 없습니다.”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구스타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