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 연애 중
“잠시만 기다려 줄래? 밤에는 더 추우니까 뭐라도 더 껴입어야 할 것 같아.”
음, 추위라… 확실히 지금은 겨울이니까.
망할 제국, 하필이면 겨울을 코앞에 두고 전쟁을 일으키다니.
전쟁을 치르는 데 있어 겨울은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특히 안 그래도 세찬 이곳의 바닷바람은 칼바람이 되어 춥다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할 정도였다.
나야 카이서스의 둥지에서 가져왔던 로브가 있다 보니 미처 생각을 못 했다.
지금 내가 적색 마탑의 붉은 로브 대신 입고 있는 것은 카이서스의 둥지를 나오며 입었던 보온 기능이 있는 겉으로는 특색이 없는 검은 로브.
빌헬름 요새 전투 이후 세르바인 님의 조언에 따른 것이다.
다음부터 제국은 분명 나를 노릴 텐데 적색 마탑의 상징인 불타는 듯 붉은 로브는 적의 눈에 띄기 쉽다며 다른 것이 있으면 갈아입도록 권했으니까.
잠시 후에 문을 열고 나온 아리안 누나는 평소처럼 로브 위에 털이 두툼한 외투를 두른 채였다.
털이 풍성한 것이 보온은 괜찮아 보였으나 부피라든가 무게가 꽤 되어 보였다.
아리안 누나는 멋쩍은 듯 웃어 보였다.
“데이트라고 생각하니 예쁜 옷을 입고 싶긴 한데 가져온 옷 중에 지금 날씨에 입을 만한 건 이런 것뿐이네.
보통은 전쟁터에 올 때 실용성 없는 예쁜 옷들은 챙겨 오지 않으니까.
좋아, 다음에 카이서스의 둥지에 가게 되면 로브는 물론이고 예쁘고 실용성 있는 옷이 있나 찾아봐야겠어.
아리안 누나라면 어떤 옷이든 잘 어울리겠지.
카이서스라면 분명히 그런 걸 가지고 있을 거야.
<아니, 로브야 그렇다 치고 왜 내가 여자 옷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데? 분명 있기는 하지만 왜 당연하다는 듯 챙기려는 거냐?>
어이없어하는 카이서스의 말에 나는 당연한 사실을 말해주었다.
‘네 것은 내 것 내 것도 내 것>
이미 내 안에만 존재할 수 있는 카이서스의 물건들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말이지!
<허! 처음에 만났을 때는 이 정도로 양아치는 아니었는데.>
‘어떤 망할 드래곤 덕분이지 뭐.’
간만에 카이서스에게 한 방 먹여준 나는 로히테르 제독이 알려준 길을 떠올리며 앞장섰다.
‘어디 보자… 여기가 맞겠지?’
제독이 알려준 길을 따라가자 나타난 곳은 어촌에서 조금 떨어진 바닷가였다.
머리 위로 펼쳐진 검은 실크 같은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 아래로는 파도가 잔잔하게 치는 바다가 끝없이 달빛에 비치고 있었다.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풍경 속에서 들리는 것은 듣기 좋게 철썩이는 파도 소리뿐.
등 뒤에는 작은 숲이 펼쳐져 있어 이 작은 공간 전체를 우리가 독차지한 듯한 기분이었다.
“와… 겨울의 밤바다는 처음인데 좋네. 조용하고, 야경도 예쁘고.
“확실히 그러네요.”
바구니 안에 들어 있던 담요를 바닥에 펼쳐서 깔고 앉았다.
바다를 보며 앉은 우리는 바구니 안의 샌드위치와 뱅쇼를 꺼냈다.
따뜻하게 데워두었던 샌드위치와 뱅쇼는 아무리 바구니에 넣어뒀어도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그래도 아리안 누나와 함께 먹어서인지 맛있었다.
아니, 제독의 요리사가 솜씨가 좋은 건가?
그나마 뱅쇼는 끓인 지 얼마 안 된 것을 가져와서인지 은은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후… 이런 풍경과 분위기라면 아무리 추워도 다시 오고 싶을 것 같아. 물론 너도 함께.”
그렇게 말하며 웃으며 나를 돌아보는 아리안 누나의 입에서는 하얀 김이 흘러나왔다.
지금 로브를 벗으면 춥겠지?
음, 아무리 내가 로브 때문에 추위를 안 탄다고 안에 셔츠 한 장만 입는 건 좀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잠시 스치고 지나가는 와중에도 나는 이미 로브를 벗어 아리안 누나의 어깨에 얹어주고 있었다.
보온 기능이 있는 내 로브가 몸을 덮자 금방 따스해지는 것을 느낀 것인지 아리안 누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후후, 누나의 반응을 보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이 날씨에 셔츠 한 장 차림은 추울 줄 알았는데, 나의 반은 드래곤이라서인지 그리 심하게 춥지는 않았다.
“이러면 네가 너무 춥잖아.”
아리안 누나는 오히려 내 걱정을 하며 다시 로브를 돌려주려고 했다.
“괜찮아요. 카이서스의 일부가 제 안에 있어서인지 그렇게 춥지는 않거든요.”
“그래도 보는 내가…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괜찮다고 하는데도 불편해하던 아리안 누나는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몸을 움직였다.
자신의 어깨가 내 가슴팍에 닿을 정도로 가깝게 달라붙어서는 로브를 나와 자신의 몸 위로 덮었다.
“이렇게 가까이 붙으면 되잖아. 둘이서 쓰기엔 로브가 조금 작긴 해도 붙어 있으면 더 따뜻할 거야.”
가까이 붙은 정도가 아니라 아리안 누나가 내 품에 기대다시피 안긴 모습이었다.
무척이나 가까운 탓에 숨결이 그대로 느껴졌다.
방금 전 마셨던 뱅쇼와 같이 달짝지근하면서도 아리안 누나만의 매력이 담긴 체향.
그 향기에 이끌려 나는 나도 모르게 향기가 흘러나오는 곳을 향해 입을 가까이 가져갔다.
그런데.
“저기, 저기! 지금 뭐 하려는 거야? 입술에 입술을 갖다 대는 건 어떤 전통 같은 거야?”
“히이이익?!”
갑자기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바람 새는 비명을 지르며 아리안 누나에게서 떨어졌다.
황급히 소리가 난 곳을 보니 우리가 앉은 곳 근처의 바다 위에 순진한 얼굴의 여자가 있었다.
몇 년 전에 로라스 왕자의 여름 피서를 따라갔을 때 만났던 물고기의 것과 같은 하체를 지닌 머메이드.
분명 인어왕국의 무녀라는 타밀레였다.
“그, 그러니까 이건……”
어째서 이 인어 무녀가 여기에 있는 거지?
분명 겉모습은 성인이지만 속은 어린아이라고 했었지.
보아하니 키스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뭐라고 말해야 하지?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을 하며 설명하려는 나의 말을 끊으며 타밀레가 계속해서 물었다.
“그리고 저기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은 친구야?”
사람들?
엄청나게 불길한 그 말에 깜짝 놀라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째서 몰랐는지는 몰라도 등 뒤의 숲과 근처의 바위 뒤에서 멋쩍은 헛기침이 들려왔다.
“흠, 흠! 들킨 모양입니다.”
“젊은이들의 사랑을 보고 있자니 이 몸도 젊어지는 것 같군.”
“전장의 긴장도 풀리고 좋지 않습니까.
어어… 익숙한 목소리들이 많이 들리는데.
설마 마법으로 기척을 숨기고 단체로 구경하고 있었을 줄이야!
아리안 누나와 단둘만의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에 들떠서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같다.
“어, 어째서 다들 구경하고 계신 겁니까?!”
마법지원단의 다른 마법사들은 물론이고 로히테르 제독과 몇몇 장교들이었다.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책임자의 부담감이 얼마나 막중한 줄 아는가? 가끔 이런 좋은 모습도 보며 쉬어줘야 하는 걸세!”
크윽, 그렇게 당당하게 남의 데이트를 훔쳐보는 일을 정당화하다니!
단 둘만의 시간을 보내라더니 아주 잔뜩 끌고 오셨네!
“허허, 제자의 데이트를 훔쳐보자니 팔불출 같기도 하지만 재미있는 걸 어쩌겠느냐?”
웃음을 터뜨리는 세르바인 님의 말에 내게 어깨를 기대고 있던 아리안 누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머리를 파묻었다.
‘으으, 다른 사람들이 있었으면 말을 해줬어야지!’
나야 아리안 누나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지만 내 몸의 감각을 공유하는 카이서스라면 눈치채고 있었을 거다.
<내가 왜? 딱 봐도 재미있어 보이는데 뭐 하러 흥을 깨?>
끄으으, 하여간 도움이 안 되는 녀석 같으니.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할지 고민하던 중 자신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반짝이는 눈으로 기다리는 타밀레가 보였다.
“그런데 무녀님은 여기는 무슨 일이십니까?”
“근처에서 헤엄치면서 놀고 있다가 저번에 봤던 너가 있어서 왔어!”
“그, 그렇군요. 그럼 다른 분들도 같이 계신 겁니까?”
지난번의 일도 있으니 무녀를 지키는 인어왕국의 병력이 따라왔겠지.
으으, 점점 조금 전의 일을 구경한 사람이 늘어난다고 생각하니 무섭군.
“아냐! 말 안 하고 혼자 놀러 왔어!”
아니, 이게 더 무서운 일이다.
무녀가 사라진 것을 눈치챈 인어왕국의 군대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다니고 있겠지.
“제독님! 수많은 머맨들이 함대를 향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으으윽! 역시나!
멀리서 수병 하나가 허겁지겁 달려와선 갑자기 나타난 머맨들에 대해 알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큰 문제가 생길 것이 분명했기에 나는 다급하게 움직였다.
내면은 확실히 어린애이기는 하지만 겉으로는 어른.
게다가 고귀한 신분이니 헐벗은 것이나 다름없는 타밀레를 그냥 안을 수가 없어서 로브로 감싸곤 안아 들었다.
“와!”
들어 올려진 타밀레는 영문도 모르고 신나서 환호했다.
“머맨들이 나타난 곳으로 안내해 주세요!”
“네? 아, 네! 이쪽입니다!”
보고를 하러 왔던 수병이 나의 말과 행동에 당황하다가 이내 앞장섰다.
수병 뒤를 따라 도착한 내가 바다 위를 보자 눈에 보이는 광경은 말 그대로 개판이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5분쯤 전이었다.
어촌 앞에 정박하고 있는 우리 전함 주변으로 스케일 아머를 입고 삼지창을 손에 든 수많은 머맨들이 함대 가까이에 접근해 있었다.
“멈추시오! 당신들이 무슨 목적으로 다가오는지는 모르겠으나 더 이상 접근한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소!”
기함 은빛구름호의 선교에서 자리를 비운 로히테르 제독을 대신해 부함장이 소리쳤다.
그 말에 머맨들은 멈춰 서며 말했다.
“우리는 인어왕국의 군대요! 길을 잃은 인어를 찾으러 왔으니 길을 열어 주시오!”
머맨들 사이에서 들린 외침에 곧장 부함장이 소리쳤다.
“인어라니! 그게 누구인가!”
“…그건 말할 수 없소!”
누구를 찾는지는 뻔하지.
인어왕국의 무녀라는 중요한 인물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없으니 타밀레에 대해서 말하지 못한 거다.
“어림없는 소리! 이 뒤로는 우리 크라우드 왕국의 영토다! 인어를 찾는다는 그런 믿을 수 없는 핑계로 군대를 우리 영토에 들어서게 할 순 없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다.
머맨들의 군대는 아무리 봐도 단순한 미아를 찾으러 온 무리처럼 보이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반드시 찾아야 하오!”
그 외침이 들린 직후 머맨들이 다시 움직이려 하자 부함장도 소리쳤다.
“우리가 있는 한 못 지나간다!”
실종 아동 하나 찾는 일이 왜 이렇게 커지는 거야.
더 내버려 두면 서로 감정이 상할 것이 분명하기에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바다를 향해 소리쳤다.
“타밀레 님은 여기 있어요!”
곁에 있던 사람들이 다들 귀를 틀어막을 정도로 소리를 질렀더니 한참 떨어진 바다 위에서도 들린 모양이다.
내가 곁에 내려놓은 타밀레를 저쪽에서도 머맨들도 발견한 듯했다.
그리고 아까부터 소리치던 머맨이 엄청난 속도로 헤엄치며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무녀님! 무사하십니까!”
엄청난 속도로 헤엄쳐 와선 뛰어올라 뭍에 착지한 머맨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난번에도 봤던 인어왕국군의 장군인 구스타였다.
“응! 재미있는 것도 많이 보고 좋았어! 구스타도 알지? 지난번에 본 인간 왕자님이랑 같이 있던 마법사야!”
이런 상황에도 마냥 해맑은 타밀레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구스타가 한숨을 내쉬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당신은… 그때 그 마법사군요. 타밀레님을 어째서 데리고 계셨는지 설명 좀 해주시겠습니까.”
“저 그것이……”
내가 조금 전의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말을 잇지 못하자 구스타가 눈을 살짝 찡그렸다.
“여기 있는 연인이 비밀 데이트를 하는 것을 그쪽의 인어 아가씨께서 구경하고 있었다오.”
“으아앗! 제독님!”
이렇게 다들 모여 있는 곳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시다니 부끄럽게!
그 말에 나와 타밀레를 번갈아 쳐다보던 구스타도 대충 상황을 이해한 듯 들고 있던 삼지창을 내렸다.
이래선 오늘 나와 아리안 누나의 밀회가 소문나는 건 시간문제다.
“한데… 이 인어 아가씨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우리 함대와 전투도 불사하려 했던 거요?”
웃으며 말하던 로히테르 제독이 금세 표정을 바꾸어 구스타를 노려보며 굳은 목소리로 물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함대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던 만큼 감정이 상한 모양이었다.
“귀국의 함대를 불쾌하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무녀께선 본 왕국에 그만큼 소중하신 분인 터라.”
“음… 무녀라는 것이 정확히 어떤 직책인지는 모르겠으나 귀하신 분임은 알겠소. 다른 나라의 영토 앞까지 군대까지 끌고 와서 찾으려 할 정도니 말이오.”
이해한다는 듯 말했지만 그 속에는 그렇다고 군대를 이끌고 영토를 침범하려 했던 것에 대한 언짢음이 숨어 있었다.
“그런데 무녀님이 어째서 이곳까지 혼자 오신 겁니까?”
“혼자 오신 것은 아닙니다. 저희와 함께 근처까지 오셨다가……”
말을 채 잇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대충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갔다.
잠시 한눈판 사이에 타밀레가 혼자 놀러 간 거겠지.
“그러면 인어왕국의 군대가 무녀님까지 모시고 이곳까지는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그 이유는 내가 말해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