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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 드래곤-108화 (108/150)

108화 - 유리아

유리아는 주변을 슥 둘러보더니 이내 투덜거렸다.

“제독이란 사람이 손님 접대를 이렇게 해도 되나? 이야기를 하러 온 사람을 계속 세워둘 셈인가? 그리고 마실 만한 것도 줬으면 하는데.”

너무나 당당하게 손님 접대를 요구하는 그녀의 말이 기가 찬지 로히테르 제독은 허! 하고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지 들어나 봅시다. 이쪽으로 올라오시구려!”

제독의 말에 유리아는 수병들의 경계 가득한 시선을 받으며 홀로 함교로 올라왔다.

이내 함교에 준비된 의자들 중 하나에 앉은 유리아는 느긋한 태도로 근처의 장교에게 말했다.

“차는 됐고, 당연히 술은 있겠지? 괜찮은 걸로 하나 가져와.”

자신을 하인 취급 하는 말에 장교가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로히테르 제독이 눈짓하자 눈만 찌푸린 채 술을 가지러 갔다.

“마법병단장이나 되는 분이 노를 저을 사람 하나만 데리고 직접 올 정도면 꽤나 중요한 이야기일 터. 이야기해 보시오.”

장교가 가져온 술잔을 받아 든 유리아는 자신이 말하기에도 멋쩍은지 머리를 긁적이더니 말했다.

“그쪽과 이쪽의 전력 차이가 꽤 심한데 그냥 물러나는 건 어때?”

그러자 다들 그런 말을 들었을 때의 당연한 반응을 격하게 보였다.

“미친 소리를 하는군!”

“아무리 대마법사라고 해도 이곳에서 그따위 소리를 하다니! 제정신인가?”

잔뜩 살벌해진 분위기에도 유리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지 태연하게 술잔을 홀짝이며 말했다.

“뱃사람들은 독한 술을 좋아한다더니, 정말이네. 혀가 마비될 정도야. 그래도 뭐, 나름 괜찮네.”

“술에 대한 감상은 관심 없으니 무슨 의미인지나 말해보시오.”

손을 슬쩍 내저어 부하들의 분노를 잠시 억누른 로히테르 제독의 말에 유리아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니, 솔직히 나는 그다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거든. 이런 전쟁에 위험하게 우리 애들 투입시키는 것도 싫고. 하지만 그쪽에서 공격해 오면 우리도 싸울 수밖에 없어서 말이야.”

다들 로히테르 제독 때문에 화를 참고 있긴 하지만 눈으로는 온갖 욕을 하고 있었다.

뭐, ‘먼저 쳐들어온 주제에 자기 부하들이 다치는 건 싫다는 거냐!’라고 말하고 싶은 거겠지.

“애초에 귀국이 침략해 오지만 않았더라면 서로 싸울 일은 없었을 거요. 플라니아 항구는 우리 왕국의 영토,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다시 되찾아 올 거요.”

단호한 로히테르 제독의 말에 유리아는 끄응, 하고 침음을 흘렸다.

“이래서 이런 무의미한 전쟁 같은 건 반대했던 건데.”

뭔가 이상한 유리아의 말에 나도 모르게 끼어들어 물었다.

“그렇게 말하시는 분이 왜 마법병단을 이끌고 오신 겁니까!”

그 말에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 애송이는 이런 머리로 어떻게 대마법사의 수준에 오른 거지?”

<내 말이.>

그런 말에 쓸데없이 공감하는 카이서스에게 뭐라고 해주고 싶었으나 유리아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제국의 군인인 나더러 황제에게 항명하라고? 그랬다간 아무리 나라고 해도 최소 옷을 벗어야 하거든? 아니, 요즘 들어 분위기가 살벌하니 목이 떨어질 수도 있겠네.”

“하지만 당신은 마법병단장이잖습니까. 황제를 설득하면……”

“우리 황제에게 그런 소리가 통할 것 같나? 너도 당해봤으니 잘 알 텐데.”

“아.”

그 설명에 그제야 나는 그녀가 한심하게 쳐다보았던 이유를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제가 대마법사의 수준에 올랐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화제를 돌리기 위해 다른 것을 물었더니 유리아는 또다시 한심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지난번 전투에서 네가 한 짓을 들으면 누구나 알 수 있을걸? 나도 귀라는 게 있어서 그런 이야기는 들을 수 있어서 말이지.”

확실히 지난번에도 비슷한 말을 했었지.

더 할 말이 있냐는 듯 나를 쳐다보던 유리아가 다시 로히테르 제독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이 상황에선 우리도 물러날 수가 없다는 거지.”

다들 태연한 유리아의 말에 분노를 억누르고 있던 와중에도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던 로히테르 제독이 문뜩 물었다.

“아무리 봐도 항복을 권유하러 온 것은 아닌 것 같고… 무슨 속셈이오?”

제독의 물음에 유리아는 잔에 남아 있던 술을 마저 마시고 유리아는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는 않나?”

장교 중 하나가 그녀의 말에 무어라 말하려 하자 로히테르 제독이 가볍게 손짓했다.

“다들 물러나 있어라. 마법지원단분이 함께 있어주실 테니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장교들 대부분이 못마땅한 표정이기는 해도 군말 없이 함교에서 내려가자 로히테르 제독이 이제 됐냐는 듯 팔짱을 끼며 유리아를 쳐다보았다.

유리아는 살짝 눈을 감는 듯하더니 잠시 후에 눈을 떴다.

아마 주변에 엿듣는 이가 없는지 확인한 거겠지.

“난 말이지, 아무 원한도 없는데 전쟁을 하고 싶지는 않거든. 만약 우리가 불리해지게 되면 우리 마법병단은 곱게 보내줬으면 좋겠어. 궁지에 몰리면 쥐도 문다는데, 나와 우리 애들이 물면 얼마나 아프겠어? 그 말을 전하러 왔지.”

그 말에 다들 당혹함을 숨기지 못했다.

저 말은 상황이 불리해지면 자기네들은 후퇴해 버리겠다는 뜻이었다.

“병단장이라는 자가 그런 말을 적에게 해도 되는 건가? 이 자리의 사람들 중에서 누가 제국에 밀고라도 하면 어쩔 셈이지?”

로히테르 제독 또한 어이가 없어하며 묻자 유리아는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흥, 내가 이번 전쟁에 의욕이 없는 것쯤은 황제도 이미 알고 있어. 게다가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녀의 말에도 다들 이해할 수 없어하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아, 걱정 마. 반대로 그쪽이 물러난다면 내가 다른 사람들을 힘으로라도 설득해서 곱게 돌려보내 줄 테니까. 그럼 난 이만 가보겠어.”

하지만 적진까지 찾아와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게 흘러 나가면 아무리 마법병단장이라 해도 무사하지 못한다.

이미 이에 대한 변명이나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거겠지.

당당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선 유리아는 자리를 뜨기 전에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어차피 얻을 것 없는 전쟁, 서로 돌이킬 수 없는 원한은 생기지 않도록 적당히 하자고. 우리 애들이 불타 죽거나 녹아내리거나 하면 나 잔뜩 열받아 버릴지도 모르니까 말이야.”

자신까지 적으로 돌리지 마라, 뭐 그런 뜻인가?

하지만 대마법사인 그녀와 그녀의 마법병단을 사정 봐줘 가면서 상대하라니, 그건 무리라고.

유리아가 내려가자 함교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무슨 속셈일까요.”

“속을 알 수가 없군요.”

다들 혼란스러워하며 유리아의 속셈을 파악하려 해봤으나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로히테르 제독은 내려가 있던 장교들이 함교로 돌아오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일단은 배를 돌려라. 여기서 계속 제국 함대를 견제해 봐야 항구에서 나올 기미는 보이지 않으니 돌아가서 방법을 강구해야겠다.”

“예!”

우리는 동향을 살피고 제국 함대가 항구에서 나오면 전투까지 벌일 생각으로 나왔으나 혼란스러움만을 더한 채로 돌아갔다.

* * *

크라우드 북해의 함대를 통솔하는 로히테르 제독이 플라니아 항을 되찾기 위한 거점으로 삼은 곳은 함대의 규모에 비하면 항구라고 부르기에도 초라한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함대의 병력이 모두 배에서 내려 휴식을 취하기엔 규모가 작은 탓에 일부만이 육지에서 보급을 담당했고 나머지는 모두 선상에서 휴식을 취하며 출전을 기다렸다.

선상 경험이 적은 나를 비롯한 마법사들도 바다에 적응하기 위해 대부분의 시간은 배 위에서 보냈으나 로히테르 제독의 배려로 잠은 육지에서 잘 수 있었다.

나야 카이서스의 피 덕분인지 뱃멀미를 거의 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

조금씩 익숙해져 가기는 해도 처음에는 다들 속이 울렁거려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골골거렸으니까.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 가운데 작전회의는 연일 이어졌다.

주제의 대부분은 제국 함대를 항구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었다.

플라니아 항구는 원래부터 무역은 물론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였던 만큼 방어가 철저했기에 어떻게든 제국 함대를 밖으로 끌어내야 했으니까.

주변에서 끌어모은 지상병력과 함께 움직인다 해도 플라니아 항을 등에 업은 제국 함대를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애초에 항구를 빼앗긴 것도 후방으로 침투한 특수부대 등이 비밀 통로와 배수로를 통해 잠입하여 안팎으로 양동작전을 벌였던 것이었다.

플라니아 항은 한창 전쟁이 벌어지던 중인 국경지대와는 떨어져 있었던 데다 전쟁 발발 전부터 후방에 특수부대가 침투해 있었을 거라 예상치 못했기에 당했던 일이었다.

아마 제국군은 이미 항구의 방어를 크라우드의 병력이 주둔했었을 때보다도 철저히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제국 함대만으로도 벅찬 상대인데 항구에서 지원하는 발리스타와 투석기까지 더해진다면… 크라우드의 북해함대는 산산조각이 날 것이 분명했다.

플라니아 항은 육지 안으로 오목하게 들어간 만의 안쪽 깊숙이에 있기에 공격자를 바다에 가두고 육지에서 공격할 수가 있었다.

“후… 좋은 의견이 나오질 않는군.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도록 합시다.”

며칠 사이 안색이 많이 안 좋아진 로히테르 제독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기함 내에 위치한 대회의실의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명장이라 해도 이런 상황은 무척 어려워 보였다.

좋은 계책을 떠올리지 못해 힘들어하는 참모들도 지친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갔다.

절반은 드래곤인 덕분에 몸은 피곤하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는 나도 피곤했다.

빨리 배에서 내려 숙소로 돌아갈 생각을 하는데 로히테르 제독이 나를 불렀다.

“드리안 자작.”

“네?”

“우리의 실수로 인해 고생하게 해서 미안하구려.”

“아, 아닙니다. 변변한 도움도 되질 못하는걸요.”

“하하, 드리안 자작의 존재만으로도 휘하 병력의 사기에 도움을 준다오. 그동안 많이 고생했으니 오늘이라도 여유롭게 쉬시오.”

“다들 고생하고 계신데 저만 여유를 부리는 건 좀…….”

“하하, 그대처럼 많은 관심을 받는 이는 가끔 여유로움을 보여줘야 한다오. 그래야 병사들의 불안감이 조금은 줄어들지 않겠소? 마침 함께 오신 아리안이라는 마법사가 연인이라 하셨던가? 여유로움을 보여주기에는 연인의 데이트가 가장 좋겠군. 비록 이곳이 별 볼 일 없는 어촌이긴 하나 조금만 걸으면 괜찮은 곳이 있지. 조금 춥기는 해도 겨울에 즐기는 밤바다는 각별하다네.”

쉬지도 않고 단숨에 길게 말을 쏟아내는 로히테르 제독의 모습에 나는 뭐라 대답하지도 못했다.

어느새 배에서 내린 내 손에는 제독이 취사병에게 시켜서 준비한 간단한 먹을거리와 뱅쇼 한 병이 든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아리안 누나와 야경을 즐기며 식사를 하라니, 이 시국에?!

하지만 제독의 말에 나름대로 설득력은 있었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될 대로 되라지 뭐.

기껏 준비해 준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으니까.

배에서 내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밤 소풍 물품을 챙겨준다며 제독에게 붙잡혀 있었던 탓에 다른 사람들은 먼저 숙소로 돌아간 터였다.

아리안 누나도 요즘 피곤해 보였으니 벌써 잠들었으면 어쩌지?

그런 걱정을 하며 아리안 누나가 숙소로 사용 중인 피난을 간 주민의 집으로 향하니 다행히도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니 마침 자려던 참이었던 듯 잠시 조용하던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누구… 라엘?”

이런 늦은 시간에 찾아온 손님에게 조금의 불쾌함을 내비치던 목소리는 이내 나를 확인하고는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라도 있어?”

걱정을 담아 묻는 아리안 누나의 모습에 나는 멋쩍게 손에 든 바구니를 들어 보였다.

“그… 벼, 별이 아름다운데 같이 보러 가지 않을래요?”

<거 무척 괜찮은 멘트로군. 한 547년쯤 전이면 말이야.>

아오, 이놈의 드래곤은 이런 상황에도 쓸데없는 소리야?

그보다 그 애매하게 그럴싸해 보이는 숫자는 뭔데?

카이서스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아무 숫자나 부른 건지 아니면 진짜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내 말에 아리안 누나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더니 배시시 웃어 보였다.

하지만 이내 곤란한 표정이 되었다.

“나도 너와 함께라면 좋지만… 지금은 조금 시기가 안 좋지 않을까?”

당연히 전쟁 중에 데이트나 하자는 소리니 마음에 걸릴 만도 하지.

“그게, 제독이 권해주더라고요. 아무리 전쟁 중이더라도 긴장의 끈을 너무 오래 놓지 않으면 좋지 않다면서요. 이것도 제독님이 준비해 주신 거예요.”

내 손에 들린 바구니가 로히테르 제독의 선물이란 말에 아리안 누나의 두 눈에 갈등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이내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그럴까?”

<하여간 이 녀석이나 저 녀석이나, 귀는 얇아선…….>

머릿속에서 혀를 끌끌 차는 카이서스의 목소리가 들리긴 했으나 기분이 좋아져서인지 아무렇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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