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 폭풍 전야
빌헬름 요새에 도착해 여독을 풀 새도 없이 전투를 치르고, 뒷정리가 끝나자마자 우리는 다시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아무리 빌헬름 요새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고는 해도 아직 여유를 부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빌헬름 요새에서 과하다 싶을 정도의 환호를 받으며 떠난 우리가 향한 곳은 크라우드 서쪽 해안의 항구들 중 하나인 플라니아 항이었다.
원래는 크라니아 북부 무역의 중심이 되는 무역항이자 해군함대가 주둔 중인 곳이었으나 지금은 타이런 제국의 깃발이 꽂혀 있었다.
문제는 규모가 큰 무역항인 만큼 각지로 연결되어 있는 통행로가 잘 닦여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곳은 국경과는 거리가 있는, 크라우드 왕국 내부였다.
제국군이 이곳을 완전히 차지하고 해상으로 병력을 수송해 오기 시작하면 문제가 더욱 심각해졌다.
크라우드 왕국 내부에서 또 하나의 전선이 형성되고, 제국군이 국경의 크라우드 군을 앞뒤로 합공할 수도 있게 되어버린다.
그렇기에 크라우드 왕국은 한시라도 빨리 플라니아 항을 탈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라는 것이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항구 탈환 작전의 총지휘관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대체 제국이 무슨 수를 썼기에 플라니아 항을 빼앗긴 거요? 내가 알기론 제독의 함대가 지키고 있었다고 들었는데.”
세르바인 님의 물음에 크라우드의 북해함대를 지휘하는 로히테르 제독이 어두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면목이 없소이다. 제가 어리석어 놈들의 전략에 당하고 말았소.”
제국의 대규모 함대가 플라니아 항을 목표로 접근 중이라는 첩보에 로히테르 제독은 그에 맞서 함대를 이끌고 나가 해전을 벌이는 결정을 내렸다.
이 주변의 바다에 대해서는 로히테르 제독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셈이었다.
해류와 조류에 따라 함선의 수가 적더라도 충분히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바다라는 것은 바닷물의 흐름에 따라 많은 것이 갈리기에 로히테르 제독의 그런 판단은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국의 함대는 주변을 맴돌며 우리 함대의 신경을 긁어놓았고, 그러던 중 갑자기 항구가 제국군의 손에 함락되고 말았다.
“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제국의 함대를 견제하고 있었는데 어째서 항구가 함락되었단 겁니까?”
무례라는 것은 알지만 너무 이해가 가질 않았기에 끼어들며 물었다.
내 물음에 로히테르 제독이 분을 감추지 못하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 분노는 나를 향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전쟁 전에 상인들로 위장해 흩어져서 넘어왔던 제국의 군대가 인근에 매복했었다는군. 그놈들이 우리 함대가 항구를 비운 사이에 점령해 버렸네. 급히 돌아와 항구를 되찾으려 했으나 항구의 제국군과 우리 뒤로 접근해 오는 제국 함대를 동시에 상대하기는 무리였기에 함대를 후퇴시킬 수밖에 없었네.”
“전쟁을 벌이기 이전부터 제국군이 이 일대에 잠입해 있었던 거요?”
놀란 세르바인 님의 말에 로히테르 제독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놈들은 우리가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오래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했던 거요.”
적국 영토 내의 항구를 손에 넣으면 전쟁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으니까.
당연히 빼앗은 항구를 다시 내주지 않기 위해 준비를 했을 터.
항구 탈환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인근의 군사들도 우리 함대와 함께 항구 탈환에 투입될 예정이오. 거기다 빌헬름 요새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신 여러분까지 이곳에 와주었으니……”
로히테르 제독이 결연한 얼굴로 말하던 도중 누군가가 급히 임시 지휘부에 뛰어 들어왔다.
“제독! 급보입니다!”
허둥지둥거리는 장교의 모습에 로히테르 제독이 눈을 찌푸렸다.
제독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끼어드는 것을 보니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닌 모양이었다.
“대체 또 무슨… 보고하라!”
“항구를 점령한 제국 4함대에 제3 마법병단이 합류했다고 합니다!”
“뭣이?!”
갑작스러운 좋지 않은 소식에 로히테르 제독은 물론 우리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제3 마법병단이라면 분명 내가 지난번에 만나봤던 유리아 발더스가 병단장으로 있는 마법사 부대였다.
그 여자가 여기에 오다니, 안 그래도 쉽지 않은 전황이 더욱 악화되어 버렸다.
내가 만나본 유리아 발더스는 결코 만만해 보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휘관 전원을 소집해라.”
로히테르 제독도 그 사실을 잘 아는지 심각한 목소리로 장교에게 말하고는 우리를 돌아보았다.
“함께 가십시다. 여러분의 도움이 절실하오.”
아무래도 여기서도 후방지원 같은 맘 편한 일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 * *
“그 한 놈 때문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드래곤이 뒤를 봐주건 말건 놈을 죽여 버려!”
이미 점령한 항구에 제3 마법병단까지 투입했다는 소식에 황제는 잔뜩 못마땅해하며 소리쳤다.
그곳 대신 다른 곳으로 제 3 마법병단을 투입했다면 더 기분 좋은 소식이 들려왔을 텐데.
그의 짜증은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다는 그 애송이를 견제하기 위해 제3 마법병단을 급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눈앞의 남자에게 향했다.
황제의 언짢은 기색을 마주하고도 담담한 얼굴로 서 있던 루리스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안 그래도 이미 시도해 봤습니다만… 저희 쪽 암살자들 모두 그놈 주변에 접근조차 못 했다고 합니다.”
“뭐라?”
제국이 보유한 암살자들은 결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다.
정예 암살자들 모두가 실패했다는 말에 황제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되물었다.
“살아서 빠져나온 자의 말로는 자신들과 비슷한 자들이 그놈의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고 합니다.”
“흥, 크라우드 놈들도 그놈을 지키려 노력하는 모양이군. 어쩔 수 없지, 놈을 처리하는 일은 알아서 진행해.”
“예.”
얌전히 대답하고는 그대로 물러나 밖으로 사라지는 루리스를 쳐다보던 황제는 뭐가 또 마음에 안 드는지 혀를 쯧, 차고는 돌아섰다.
“그 여자는 지금 어떻지?”
그의 물음에 보이지 않는 곳에 몸을 감추고 대기하고 있던 호위가 몸을 굽히며 대답했다.
“평소와 같이 행동하고는 있으나 점점 잠에 빠지는 시간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 대답에 황제는 그제야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그거라도 제대로 되어가고 있다니 다행이군.”
“한데……”
말꼬리를 흐리는 호위의 반응에 또다시 황제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또 뭐냐!”
“황후가 거처에서 얌전히 있을 테니 말동무를 붙여달라고 합니다.”
“하, 주제도 모르기는! 그렇게 이야기가 하고 싶거든 거기 있는 놈 아무나 붙잡고 이야기하면 되지 않나.”
“자신과 친해지더라도 죽이지 않을 사람을 요구했습니다.”
“…쯧!”
아무래도 지난번에 모니카가 어떤 시녀와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 모습을 보고 꼴 보기 싫다고 치워 버리라 한 것 때문에 그런 모양이었다.
“그렇게 해줘라. 그것이 미쳐서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그렇지, 지난번에 문제를 일으켰다던 그 남자 행세를 하는 계집이 좋겠군. 지난번에 봐서 면식도 있을 테고, 나름대로 머리를 굴릴 줄 아는 것이니 허튼짓도 하지 못할 테니 말이야. 그리고 황후에게 똑똑히 전해. 또다시 헛소리를 하면 주변을 싹 갈아 치워주겠다고.”
“명을 따르겠습니다.”
단순한 인원 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닌 살벌한 내용에도 호위는 담담하게 대답하고는 물러갔다.
* * *
바이엔 라터스는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았다.
1년쯤 전부터 근신 처분을 받아 원래의 일에서 모두 손을 떼야만 했다.
볼모로 붙잡아두고 이런저런 일에 이용하던 라엘이 갑작스레 혼수상태에 빠져 크라우드로 돌려보내야 했던 일.
그 관리의 책임을 모두 자신에게 뒤집어씌우는 상부의 결정에 반발하다 평소 쌓여 있던 감정이 폭발해 상관과 말다툼을 벌이고 말았다.
그 일이 예상보다 커져서 위쪽까지 보고가 들어갔고 지금까지 계속 근신에 처해져 있었다.
계속해서 근신을 유지시킨 채로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다가 뜬금없이 입궁시키더니 시녀 복장을 입히다니.
게다가 심지어 근신 이후의 첫 명령이 황후의 말벗을 하라는 것이다.
황후의 말벗이라면 무척이나 큰 영예다.
제국에서 황제 다음으로 고귀한 신분을 곁에서 모시는 데다, 그런 고귀한 신분 옆에 있으면 자연히 권력도 손에 들어오게 되니까.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말이다.
바이엔은 잔뜩 긴장한 채로 안내를 하는 시종의 뒤를 따라 황후가 기거하는 제2 궁전의 복도를 걸었다.
“…똑똑하신 분이니 말하지 않아도 잘 아시겠지만 언행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보아하니 자신을 안내를 하고 있는 자는 일반적인 시종이 아닌 모양이다.
‘제정신인 시종이라면 이런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그나저나…….’
시종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바이엔은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이 정말로 제국의 황후가 지내는 궁전이라고?’
궁전에 들어섰을 때부터 계속해서 느껴지는 이상한 느낌.
마치 버려진 곳처럼 음산하고 어두컴컴한 분위기다.
황후의 거처라기보다 마치……
‘유폐지 같은 모습이군.’
“도착했습니다. 문을 열 터이니 예를 지켜주십시오.”
어느 문 앞에 멈춰 선 시종이 자신을 돌아보며 주의를 주듯 말하자 바이엔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내 문이 열리자마자 바이엔은 시종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보통 사람이라면 깜짝 놀라 흐트러졌을지도 몰랐을 모습이었다.
실제로 바이엔도 모니카의 모습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 소리를 낼 뻔했으니까.
‘지난번에 봤던 그 드센 여자는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무식할 정도로 철판이 들어간 마차의 문짝을 들고 휘둘러 대던 공주는 완전히 사라지고,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지치고 절망한 여자만이 자신의 앞에 앉아 있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떨리는 눈동자만큼은 감추지 못하는 바이엔의 모습을 보며 모니카는 힘없이 웃어 보였다.
“당신이 올 줄은 몰랐네. 나와 면식이 있어서 나름대로 신경 써준 건지, 아니면 뭔가 잘못이라도 한 거야?”
그 말에 황후의 앞이라는 것도 잊은 건지 작게나마 이를 가는 바이엔의 모습에 모니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네. 당신에게도, 또 나에게도.”
씁쓸하게 말하는 모니카의 모습에 바이엔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처음부터 이름뿐인 황후일 거라 알고는 있었지만 이건 좀 심하잖아.’
대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인지는 지금 알 수 없는 바이엔이었으나 하나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윗선에서는 자신을 버리는 패로 골랐다는 것.
* * *
나는 훤히 펼쳐진 바다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큰 배는 처음 타봅니다.”
나의 순수한 감탄에 근처에 있던 로히테르 제독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실 거요. 아무리 드래곤의 가호를 받으시는 분이라 해도 전함을 타실 일은 거의 없으셨을 테니.”
전함 중에서도 제독이 함장으로서 지휘하는 기함인 만큼 은빛구름호는 바다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컸다.
은빛구름호의 주변은 크고 작은 전함들이 호위하며 함께 가고 있었다.
몇백 명이 탑승 가능한 커다란 전함이 수십 척에 작은 함선은 백여 척에 달한다.
크라우드의 북쪽 바다를 지키는 함대의 위용.
하지만 제국함대는 숫자도 문제지만 마법병단과 튼튼한 방비를 갖춘 거점까지 점령했다.
멀리 떨어진 플라니아 항구와 그 주변의 제국함대를 망원경으로 살피던 로히테르 제독이 별안간 얼굴을 찡그리며 의아해했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나는 곧장 그가 쳐다보고 있던 방향을 보며 눈에 힘을 주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망원경으로 간신히 보일 거리에서 무언가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넓은 바다에서 타고 다니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조그마한 조각배에 눈에 띌 정도로 큰 하얀 깃발을 내걸고 있었다.
“제독, 어떻게 할까요.”
로히테르 제독의 반응에 급히 망원경을 들었던 장교도 그 모습을 확인하곤 물었다.
잠시 침음을 흘리던 로히테르 제독이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싸울 의지는 없어 보이는 군. 오게 두어라.”
잠시 후 은빛구름호 앞에 도달한 조각배에서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로히테르 다미힐 제독님과 라엘 드리안 자작을 만나고자 하니 승선을 허가해 주시길 바라오!”
조각배에서 들려온 외침에 함교의 누군가가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비겁하게 항구를 뺏은 놈들이 이제 와서 만나자니,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아무 꿍꿍이도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지만…….
로히테르 제독 외에도 내 이름을 말했다는 것이 더 마음에 걸린다.
로히테르 제독은 내 쪽을 한번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했다.
“승선을 허가한다. 다들 경계를 늦추지 말도록.”
로히테르 제독의 허락에 줄사다리를 내려주자 제국군의 사람들이 갑판으로 하나둘 올라왔다.
마지막으로 올라온 여자의 얼굴을 확인하자 나는 물론 세르바인 님과 로히테르 제독을 비롯한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아는 얼굴들이 많네. 다들 잘들 지내셨나!”
제국의 제3 마법병단장 유리아 발더스는 갑판에 올라서자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며 함교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마치 길 가다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태도에 장교, 병사 할 것 없이 모두가 적의를 드러냈다.
“이쪽은 대화를 하러 온 거니까 다들 진정들 하시지? 당장 싸우겠다는 거야? 그러다 죽는다고.”
“감히 여기서 우리를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는 거냐!”
장교 중 하나가 욱하는 성질을 못 이기고 소리치자 그녀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대꾸했다.
“아니, 내가 죽는다고. 아무리 나라도 만만하지 않은 사람들이 가득한 배 위에서 싸울 생각은 없거든? 거기다 나는 수영은 영 젬병이라, 배가 가라앉기라도 하면 우리 편이 구하러 오기도 전에 가라앉아 버릴 거라고.”
어이없다는 듯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 다들 맥이 빠진 건지 말을 잃었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적개심을 드러내기도 조금 힘들지.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전투가 벌어진다면 이 커다란 전함은 확실히 가라앉을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의 뜻을 놓치지 않은 로히테르 제독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온 거요, 유리아 마법병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