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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 드래곤-106화 (106/150)

106화 - 볼케이노

요새의 성벽 너머로 몰려드는 제국군을 응시하며 나는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최대한 내 본실력을 감출 수 있도록 느리고, 길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주변에서 크게 요동치는 마나에서 무언가를 느낀 세르바인 님이 놀라워했다.

“허어! 정말 대단하군. 첫 번째니 강하게 나갈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이건 전혀 예상치 못했군!”

8서클인 세르바인 님도 내가 지금 펼치려는 마법의 수준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런 세르바인 님을 납득시킬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을 끈 후에야 나는 스태프의 끝을 창 밖으로 뻗었다.

“볼케이노!”

잠시 동안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러나 요새를 향해 가까워져 오던 제국 병사들은 발아래에서부터 느껴지는 이상을 느꼈다.

“지, 지진이다!”

“마법이다!”

적들과 격돌하기 직전에 느껴지는 땅의 진동에 제국군은 당황하며 속도가 느려졌다.

“뭣들 하는 거냐! 대형을 유지해라! 머뭇거리지 말고 돌격……”

용감하게 소리치던 어느 지휘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어느 제국 병사의 발밑에서부터 거칠게 터져 나온 용암이 주변에 있던 모두의 몸을 후끈하게 만들었으니까.

“으아아아악!”

터져 나온 용암에 단숨에 목숨을 잃은 자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폭발하듯 비산하는 용암에 맞아 신체의 일부, 혹은 전체가 녹아버리거나 불타기 시작한 자들은 찢어질 듯한 비명을 내질렀다.

“끄아아악!”

“살려줘!”

순식간에 용맹한 제국의 군사들 사이에 비명과 공포가 가득 찼다.

창검이나 화살이 아닌 용암 폭발이라는 상상치도 못한 재앙 앞에서 대부분의 병사들은 견디지를 못했다.

전장 한복판에서 터져 나와 녹아내리는 용암에 다들 조금이라도 떨어지려고 애썼다.

한가운데에서 터져 나온 용암을 피해 다들 도망치다 보니 제국군의 전열이 흐트러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뒤로 물러나! 물러나서 전열을 재정비한다!”

용암의 피해를 입지 않은 지휘관들이 말 위에서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며 부대를 추스르려 했으나 이쪽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이젠 우리 차례일세!”

얼음으로 만들어진 창이 적군의 머리 위로 날아가고 땅이 뒤흔들렸다.

거센 바람을 버티지 못하고 넘어지며 부딪치거나, 서로의 무기가 서로를 찌르기까지 했다.

갑자기 푹 꺼진 바닥에 떨어지며 단단한 돌에 부딪치고, 돌로 만들어진 가시에 찔렸다.

하나하나가 대단한 마법사들이다 보니 그들이 한 번에 쏟아내는 마법들은 요새 앞의 지형을 바꾸어 버릴 정도였다.

제국의 마법사들도 꿀렁꿀렁 솟아오르는 용암이 가장 큰 문제라 여겼는지 최우선으로 막기 위해 노력했으나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얼음 칼날에 자신들의 몸을 지키기에 급급할 뿐이었다.

보통의 마법사가 아닌, 8서클의 대마법사가 만들어낸 얼음덩어리의 폭풍이니까.

“이거야 원, 자네가 적진 한복판에 화산을 만들어놓은 탓에 내 마법으론 주변 정리밖에는 할 수 없지 않나.”

내가 만들어낸 용암의 열기는 세르바인 님의 장기인 냉기 마법과 상성이 좋지 않았다.

그 탓에 세르바인 님은 겉으로 투덜거리면서도 흡족해하는 모습이었다.

제국군이 용암과 각종 마법으로 잔뜩 약해진 모습에 빌헬름 요새 수비대의 사기가 올라갔다.

“지금이다! 저 지긋지긋한 놈들을 몽땅 쓸어버리면 한동안은 맘 놓고 푹 잘 수 있어!”

누군가의 외침에 다른 병사들도 호응하며 함성을 내질렀다.

“가자!”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분이 우리와 함께 싸운다!”

“다 죽여 버려!”

그동안 제대로 쉬지 못했던 탓인지 잔뜩 악에 받친 목소리였다.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듯한 병사들의 기세에 텔 대장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돌격 대형으로! 나가서 적들을 박살 낸다!”

그래도 막무가내로 뛰쳐나가기보다는 진형을 갖추고 난 후에 요새 문을 열었다.

좌절과 피로로 가득하던 요새의 병력은 이제 그 원인이었던 적들에 대한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마법으로 진형이 무너지고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는 적군의 상태는 요새 병력의 분노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크윽! 요새의 겁쟁이들이 뛰쳐나왔다! 방패병 앞으로!”

용암과 강풍, 무너져내리는 땅 등 재앙과 같은 마법들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제국군은 요새 병력에 대응하기 위해 움직였다.

요새의 병력이 기세등등하게 돌격했으나 제국군에서도 순순히 당하지는 않았다.

재앙과도 같은 강력한 마법들에는 맥을 추리지 못했지만 평범한 백병전이라면 대응이 가능했으니까.

각종 대형 마법에 진형이 무너지고 많은 피해를 입던 중에 이루어진 요새 병력의 공격에도 제국군은 수적 우세와 더 좋은 무장 등을 이용하여 버티고 있었다.

아마 시간이 더 흐르면 우리의 마법도 한계가 있으니 조금씩 잦아들 테고, 지금은 높아진 사기와 분노로 몰아붙이는 요새의 병력들도 그동안 쌓여 있던 피로로 기세가 꺾일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제국군에 반격의 기회가 생긴다는 거다.

뭔가, 더욱 제국군을 몰아붙일 방안이 필요했다.

나 역시도 다른 마법사들과 함께 계속해서 마법을 쏘아 보내고 있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아군의 피해는 늘어갔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더 할 수 있는 게 뭐지?’

아까 전에 세르바인 님에게 나의 역할을 들었던 것 때문에 부담감이 나를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의 고민을 조용히 관망하고 있던 카이서스는 피식하고 웃는 듯한 소리를 냈다.

<뭐, 크라우드 왕국 녀석들도 바보는 아니니 너무 부담 갖지 마라. 아무렴 지금 상황에서 가장 쓸 만한 축에 속하는 너를 벌써부터 버리겠냐?>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카이서스에게 묻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멀리서 무언가의 소리가 들려왔다.

부우우우-!

낮은 뿔피리 소리를 내며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한 무리의 기마병들.

선두가 들고 있는 깃발에는 크라우드 왕국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지원군이다!”

“와아아아-!”

더욱 사기가 올라서 외쳐대는 요새 병사들의 외침에 제국군은 자신들의 등 뒤에서 나타난 기마들을 보곤 충격에 빠졌다.

“말도 안 돼! 지원군의 움직임은 전혀 없었는데!”

제국군 지휘관 중 하나의 경악하는 외침이 제국군의 당혹스러움을 대변하고 있었다.

힘겹게 버티고 있던 상태에서 등 뒤에 나타난 기마 병력의 존재는 전투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 뻔했다.

숫자는 비록 제국군의 수에 비하면 무척이나 적은 삼백 정도밖에 되지 않는 숫자였으나 전원이 전신 갑옷으로 무장한 정예 기마병들이었다.

거기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기마병을 막아설 창병도 없는, 혼란에 빠진 제국군의 등 뒤였다.

기마부대가 제국군의 후미와 격돌하는 소리는 이미 한창인 전투의 소음과 폭발음, 땅이 뒤집히는 등의 소음에 묻혀 버렸으나 그 모습만큼은 멀리서도 보일 만큼 격렬했다.

잔뜩 속도를 높인 채로 달려온 중갑 기마부대의 파괴력에 제국의 병사들은 피보라를 일으키며 이리저리 날아갔다.

기마부대가 한바탕 휘젓고 다시 뒤로 빠진 자리에는 이리저리 짓밟힌 시체들만이 가득했고 그 모습은 안 그래도 궁지에 몰린 제국군에게 더욱 큰 충격이 되었다.

앞에서는 평생 볼 일도 없었을 엄청난 마법들과 악에 받친 적군, 그리고 뒤에서는 마갑까지 완전히 갖춘 정예 기마부대.

아무리 수적 우위를 유지하고는 있다 해도 제국군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것을 전장의 병사들은 놓치지 않았다.

“항복하지 않으면 드래곤이 너희를 모두 산 채로 잡아먹을 거다!”

“맞아! 산 채로 으적으적 씹어 먹을 거다!”

“목숨이라도 건지고 싶으면 무기를 버려!”

황당한 소리였으나 발밑에서 갑자기 화산이 폭발하는 일을 겪은 제국군으로서는 공포에 질릴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드래곤이 잡아먹을 거라니, 정작 우리로서는 조금 황당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대체 드래곤을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그러게 말이야. 인간 고기는 좀 누린내가 심하다고. 게다가 저런 자질구레한 인간들은 마나도 지저분해서 맛이 역겹단 말이다.>

‘…야, 그걸 어떻게 아는 건데?!’

<예전에 누가 맛보라고 주더라고. 좀 전에 말했다시피 내 입에는 영 아니라서 그 후로는 거의 안 먹었지만.>

거의라고?!

으음, 아무래도 더 묻지 않는 게 이로울 것 같다.

계속해서 일어난 일들로 궁지에 몰린 제국 병사들 중 일부가 무기를 떨구자 그 흐름은 이내 전체로 퍼져 버렸다.

제국 지휘관들은 계속해서 병사들을 독려하며 전투를 이어나가려 했으나 이미 전의를 상실한 후였기에 소용이 없었다.

절반에 가까운 제국군이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며 크라우드의 승리로 끝났다.

나머지 제국군이 후퇴하는 모습을 보고 다들 환호성을 내질렀다.

지휘실 내부에 있던 나와 다른 마법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자, 수고들 했네만 아직 끝난 건 아닐세. 부상자가 늘었을 테니 서둘러 도와주러 가세나.”

원래 이곳에 온 목적을 상기한 마법사들은 지휘실을 나섰다.

“흠,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다른 사람들이 다 나갔음에도 내가 나가지 않고 남아 있자 세르바인 님은 짐작 간다는 듯 물어왔다.

“저 기마부대들은 어떻게 때맞춰서 온 겁니까? 제국군의 공격은 요새에서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것 아니었습니까?”

와준 것은 고맙지만 때맞춰서 올 수 있었던 것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제국군의 공격 직후 지원 요청을 했어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도 지원을 오는 게 적어도 하루 이상은 걸렸을 터였다.

그런데 반나절도 아니고 몇 시간 만에 도착하다니.

내 물음에 세르바인 님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자네에게 큰 역할을 맡기는데 다른 사람들이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겠나? 자네도 아는 집단에서 협력해 준 덕에 제국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또 적들은 물론 아군에게도 들키지 않게 정예 병력을 이 근처에 미리 이동시켜서 대기하고 있게 할 수 있었네.”

내가 아는 집단? 혹시……?

“그 단체의 이름도 아십니까?”

“세인트혼이라 하던데, 나도 이름은 알고 있던 곳이지만 이번에 보니 능력이 아주 좋더군.”

끄응, 그래서 아버지가 이 근처에 오셨던 거였나.

확실히 암살단이면 정보 수집이라든가 이동 흔적을 지우고 몸을 숨기는 것은 전문이니 많은 도움이 되었겠지.

“지원군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미리 말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하하, 자네를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꽤 중요한 일이라네. 되도록 자세한 건 모르는 사람이 적을수록 적지. 자네도 다른 사람들에겐 말하지 말게나. 많은 사람이 알수록 효과는 떨어지기 마련이니 말일세.”

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세르바인 님은 이내 호기심 가득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자네. 대체 8서클은 언제 된 건가?”

당연히 물어볼 줄 알았기에 나는 미리 준비해 둔 답변을 내놓았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드래곤 덕분에 간신히 발만 걸친 수준이죠. 아까 전의 볼케이노도 드래곤이 선물해 준 이 스태프가 아니었다면 무리였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사용했던 스태프를 들어 보였다.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 장식 사이에 붉은빛을 띠는 커다란 보석이 껴져 있는, 겉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스태프.

“음, 그러고 보니 이전에 봤던 것과는 다른 것이군. 드래곤이 준 스태프라… 혹시 한번 살펴봐도 되겠나?”

나는 흔쾌히 스태프를 세르바인 님에게 건네주었다.

“제가 아니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드래곤이 손을 써둔 터라 따로 특별한 점은 못 느끼실 겁니다.”

당연히 뻥이다.

“확실히 드래곤의 스태프라면 아무 조치 없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간다면 위험할 수 있으니 말이야. 그래선지 내게는 그저 뛰어난 스태프이기는 해도 특별한 점은 없는 것처럼 보이는군.”

이리저리 스태프를 살펴보던 세르바인 님은 조금 실망한 듯 내게 다시 돌려주었다.

드래곤의 스태프라면 마법사로서 당연히 흥미가 생겼을 텐데 아무것도 못 느끼면 실망할 만도 하지.

정말이지 드래곤은 편하다니까.

뭘 내세우든 드래곤이 했다고 하거나 드래곤이 알려준 거라고 하면 다들 납득하니까.

<넌 대체 드래곤을 뭐로 생각하는 거냐?>

‘뭐긴 뭐야. 만능 핑계거리지.’

<끄응, 절대 다른 드래곤 앞에서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온갖 끔찍한 방법으로 괴롭힘을 받을 테니까.>

“그렇지. 자네가 활약한 덕에 일이 잘 풀렸으니 좀 쉬고 있게나.”

“제가 활약이라뇨. 세르바인 님이 제국의 마법사들을 묶어주신 데다 요새의 병사들도 잘 싸워줬고… 거기다 ‘때마침’ 나타난 지원군 덕분이죠. 저도 나가서 돕겠습니다.”

내가 힘 빠진 목소리로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하자 세르바인 님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가 처음에 활약해 준 덕분에 전장의 분위기를 우리 쪽으로 끌고 올 수 있었던 거네. 게다가… 자네가 지금 밖에 나가면 병사들이 자네에게 감사를 표하며 죄다 몰려올 거네만?”

아까 전에 병사들이 내게 보였던 과다하다 싶을 정도의 기대감과 관심을 떠올렸다.

지금처럼 전투에 승리해서 한껏 고양된 상태에서 내가 나타나면 아까전의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거다.

“여기 있는 게 오히려 도와주는 셈이군요.”

내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세르바인 님은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조금씩은 익숙해지는 게 좋을 걸세.”

세르바인 님이 나가자 나는 다시 바깥을 바라보았다.

한창 전장을 정리 중인 병사들은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의 승리에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잔뜩 고양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아 진짜, 내가 영웅 같은 거 행세를 해도 괜찮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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