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 영웅 만들기
“누구, 저요?!”
깜짝 놀라 나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던 병사에게 물었다.
“예! 드래곤의 가호를 받으시는 마법사님 맞으시죠?!”
“그, 그건 맞는데… 제가 어벙해 보여요?”
내가 얼떨떨해하며 묻자 병사는 당황해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그, 바보처럼 보인다는 게 아니라… 아, 아무튼 역시 그분이었어!”
대답을 제대로 못 하던 병사는 말을 돌리기 위해선지 주변을 돌아보며 내가 그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라는 것을 알렸다.
“정말 진짜 그분이었어?!”
“만세!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분이 함께해 주신다면 두려울 게 없지!”
별 관심 없던 병사들까지 우르르 몰려와 떠들기 시작하니 귀가 아플 정도였다.
내가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세르바인 님이 어디선가 나타나 소리쳤다.
“다들 조용히 못 할까!”
마나까지 은연중 실려 있는 외침에 잔뜩 흥분해 있던 병사들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산전수전을 다 겪은 병사들이라 해도 대마법사가 마나까지 실어 소리를 지르면 절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지.
“기껏 도와주러 온 사람을 놀라게 하면 쓰나!”
“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박력 넘치는 세르바인 님의 모습에 병사들은 누군지도 모르면서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기 바빴다.
“전우들의 부상을 더 악화시킬 생각이 아니라면 멀쩡한 자들은 물러가서 자기 할 일이나 하게!”
“넵!”
이곳에 들어서면서 보았던 지치고 무력한 모습은 어디 갔냐는 듯 바짝 군기가 든 모습으로 원래 있던 곳으로 흩어졌다.
다들 긴장한 기색임에도 얼굴에는 희미하게 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흠, 역시나.>
뭔가 확신했다는 듯한 카이서스의 말에 나는 영문을 몰라 되물었다.
‘뭐가 역시라는 거야?’
<쯧, 덜떨어진 녀석 같으니. 이름이야 지원단이니 뭐니 그럴싸하지만 실질적으로 전쟁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으냐?>
‘그게 무슨 소리야?’
<다른 녀석들은 네가 8서클은 물론 9서클에 올랐다는 것은 꿈에도 모르고 있지. 저번에 메테오를 쓰긴 했지만 그 이후로는 눈에 띄는 활약이 없으니… 네 실력을 믿지 못하는 놈도 있을 거다. 한데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라는 호칭은 그냥 내버려 두기에는 너무나도 아깝지. 좀 전에도 봐라, 다 죽어가던, 이미 포기하고 있던 놈들도 네 정체를 알자마자 기세가 완전히 바뀌었잖느냐.>
‘그러니까 한마디로……’
<드래곤의 권위를 자신들 멋대로 이용하다니, 기분 나쁘군.>
툴툴거리는 카이서스였지만 나 역시도 기분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내가 아니라, 내 뒤의 카이서스의 이름을 빌리는 거라니.
내가 카이서스와 이야기하고 생각에 잠겨 있느라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서 있자 세르바인 님이 다가왔다.
“갑작스러운 인기에 당황한 모양이군?”
농담하듯 웃으며 건넨 세르바인 님의 말에 나는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세르바인 님, 저희가 이곳에 온 이유가 정말 뭡니까?”
내 물음에 잠시 흠, 하고 생각하는 듯하던 세르바인 님이 손짓했다.
“이야기를 하기에는 조금 소란스럽군. 자리를 옮길까.”
그러곤 근처에 있던 수비대장 텔 마이어를 불러 조용히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을 요구했다.
“그렇다면 제 방을 쓰시죠. 멀쩡하지는 않지만 다른 곳보다는 그나마 나을 겁니다.”
그를 따라 들어간 요새 안쪽의 방은 확실히 깨끗하고 편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제대로 청소한 것이 언제인지 짐작도 안 갈 정도였다.
그럼에도 다른 곳보다는 그나마 낫다니, 다른 곳은 어떻다는 거야?
“그럼 이야기 나누십시오.”
수비대장이 나가자 세르바인 님은 근처의 의자에 올려져 있던 잡동사니를 대충 치우고는 앉았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모양이군.”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던 제가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마법지원단의 진짜 목적은 뭡니까?”
“진짜 목적이라니?”
“말만 지원단이지 저희처럼 소수의 인원으로 군대를 지원하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렇게 뛰어난 마법사들을 모아두고 곳곳을 돌아다니며 치료나 기타 지원만을 해준다니, 이상하잖습니까. 다들 한 부대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신 분들인데.”
청색 마탑의 주인, 그리고 그가 끌어모은 면면들은 하나하나가 가볍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같은 소속으로 모여 다니며 부상자들의 치료만 한다니, 이상했다.
지금까지 아무 생각을 못 하고 있던 게 이상할 정도다.
<흥, 애초에 내가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생각도 못 했을 거면서.>
‘네가 말해주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알아챘을 거야.’
<퍽이나.>
피식거리며 대꾸하는 카이서스를 애써 무시하며 세르바인 님의 대답을 기다렸다.
“흠, 자네도 알고 있을 거라 지레짐작하고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었군. 미안하네.”
<음, 내가 경험으로 해석해 보면 저거 ‘네가 그렇게까지 멍청할 줄은 몰랐다’라는 뜻이다.>
‘아 좀! 분위기 봐가면서 놀려!’
<싫은데?>
후, 진정하자.
여기서 갑자기 혼자 화를 내면 나만 미친놈이 된다.
마음을 가다듬고는 세르바인 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네는 전쟁에서 중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나?”
“네? 그거야… 병력의 숫자나 전략이나… 여러 가지가 있겠죠.”
갑작스러운 질문에 나는 당황해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지만 세르바인 님은 상관없다는 듯 계속해서 말했다.
“군대의 사기가 낮으면 아무리 수가 많고, 좋은 병기로 무장하고 전략을 잘 짠다고 해도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가 없지.”
나는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법사는 전장에서 큰 힘이 될 수 있지, 하나, 한계가 있다는 건 자네도 알겠지. 아무리 대단한 마법사라도 혼자서는 전쟁 전체의 분위기를 바꿀 수 없지.”
확실히, 하나의 전투에서 큰 활약을 하더라도 다른 전장에는 영향을 주기가 어렵지.
“하지만 자네는 달라.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라는 칭호는 병사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지. 불리한 상황에서 자네 같은 존재가 함께함으로써 승리를 거둔다면 어떻겠나?”
세르바인 님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던 눈에 힘을 주었다.
“자네는 희망일세. 지치고 궁지에 몰린 병사들에게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 그 희망이 커질수록 아군에는 용기를, 적군에게는 불안감을 주겠지.”
내 자신이 하나의 상징이 된다는 그런 뜻인 모양이다.
“…그래서 이곳을 첫 번째로 지원하러 온 거군요.”
누가 봐도 불리한 상황의 전장, 이 상태에서 승리한다면 세르바인 님의 말대로 함께하는 것만으로 사기를 진작시키는 존재가 될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제가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황이 악화된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텐데요.”
언뜻 전해 들은 정보만으로도 빌헬름 요새 수비군과 제국군의 전력은 비교가 안 될 정도였다.
“그때는 드래곤의 가호를 받는 자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불리한 상태였다는 것을 내세워야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한 세르바인 님의 대답에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런…….”
“해선 안 되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이용해야 하는 것이 전쟁이라네. 그런 걸 어쩌겠나.”
쓴웃음을 지어 보이는 세르바인 님의 모습에 나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내가 그저 그렇게 대답하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세르바인 님은 말없이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나갔다.
잠시 혼자 서 있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방을 나섰다.
정말 내가 사람들이 원하는 희망, 그러니까 영웅 같은 게 될 수 있을까?
내세울 수 있을 만한 게 없어서 집에서 도망쳐 나오기까지 했던 내가?
<생각보다 어렵지 않던데? 그냥 화려하게 등장해서 큼지막한 걸로 하나 터뜨려 주면 다들 좋아 죽더라고.>
카이서스가 자신의 추억을 회상하듯 말했지만 말이야 쉽지.
카이서스가 떠들어대는 소리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하던 중에 갑자기 다급한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적습이다!”
“놈들이 다시 공격해 온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
“일어날 수 있는 놈들은 전부 무기를 들어! 일어나! 죽으려거든 일어서서 죽어!”
제국군이 다시 공격해 온다는 소리에 곳곳에서 다급하게 움직였다.
이미 지칠 대로 지친 병사들과 기사들은 얼마 남지 않은 체력을 쥐어짜기라도 하듯 악을 쓰며 소리쳤다.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전투를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라엘 군! 멍하니 있지 말고 이쪽으로 오게!”
먼저 나와서 사람들과 함께 있던 세르바인 님이 나를 불렀다.
“다들 모였나?”
빠진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던 도중 수비대장 텔이 다가왔다.
“세르바인 님! 전투를 치르러 오신 것이 아닌 것은 알지만 부탁드립니다. 도와주십시오!”
누가 봐도 불리한 처지인 데다 제대로 쉬지도 못한 상태에서 다시 전투를 치르게 생겼다.
그러니 비전투원으로 온 우리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하겠지.
다들 하나하나가 실력 있는 마법사들 이니까.
너무나도 간절한 텔 대장의 얼굴에 세르바인 님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네.”
담담한 세르바인 님의 대답에 텔 대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함께 싸울 사람은 앞으로 나오게!”
다들 이 요새의 상황을 몸으로 직접 느껴서인지, 아니면 애초에 세르바인 님이 그런 사람들만 골랐던 것인지 대부분이 앞으로 나섰다.
“자네는 공격마법을 거의 모르지 않나! 뒤에서 부상자의 치료와 보호에 전념하게! 자네도!”
다들 돕겠다고 나서는 탓에 몇몇을 추려내야 할 정도였다.
“우리는 병사들 뒤에서 지원을 하도록 하지. 텔 대장, 시야를 확보하기 좋은 곳이 어딘가?”
대부분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곳은 눈에 잘 띄는 곳이기에 적의 표적이 되기 쉽기도 했다.
제하지만 제대로 마법을 시전하려면 눈으로 확인하면서 사용해야 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을 알고 있던 텔 대장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좋은 장소를 생각해 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 동쪽의 지휘소로 가시죠. 넓은 창을 통해 바깥이 잘 보이면서도 구조상 요새 바깥에서는 내부가 잘 안 보이는 곳이니 괜찮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텔 대장은 근처에 있던 부관에게 우리를 안내하라고 지시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살아남아서 다시 감사 인사를 드릴 수 있으면 좋겠군요.”
결연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는 요새의 성벽으로 달려가는 텔 대장을 쳐다보던 세르바인 님이 부관에게 눈짓했다.
뒤에서 부상자들을 담당하기로 한 몇몇을 제외한 우리는 부관의 안내를 받아 지휘소로 자리를 옮겼다.
텔 대장의 말대로 큼지막한 창을 통해 바깥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지휘소는 좀 비좁기는 해도 삼십여 명의 마법사가 자리를 잡기에는 충분했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요새 너머의 광경은 보는 것만으로도 갑갑해질 정도였다.
애초에 작은 요새인 터라 우리 병력이 고작 천여 명 정도인 것에 비해 공격해 오는 제국군의 수는 거의 일만은 되어 보였다.
공성전에서 공격하는 쪽은 수비하는 쪽보다 훨씬 많은 병력이 필요하다는 건 알지만 이건 너무 많은 것 아니야?!
작은 요새를 상대로 공성무기 등을 동원하여 시간을 끌기보다 많은 병력으로 단숨에 쓸어버리겠다는 생각인 듯했다.
“망할 놈들, 아무리 쪽수가 많다지만 이건 너무하구먼!”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다른 마법사 하나가 투덜거리며 소리쳤다.
우리를 안내했던 부관도 적의 군세를 눈으로 확인하곤 당황하고 있었다.
“맙소사, 이전의 다섯 배는 되어 보입니다.”
세르바인 님은 그 광경에 눈살을 찌푸렸다.
“제국 쪽에서도 라엘 군을 신경 쓰고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건 좀 상황이 좋지 않군.”
제국에서는 크라우드 왕국에서 생각하는 바를 알고 일찌감치 나를 경계하고 있던 모양이다.
얼마 전 아버지와 만났을 때도 이미 나를 감시하는 제국의 눈이 있었으니… 우리가 여기로 온 것을 알고 병력을 증원한 모양이다.
“라엘 군, 자네가 먼저 시작하게.”
시작을 나에게 맡기려는 세르바인 님의 모습에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번 전투를 시작으로 나를 영웅으로 만들려는 생각임을 잘 알고 있기에, 처음 사용할 마법을 고르는 것도 고민이었다.
<볼케이노는 어떠냐.>
볼케이노라면 용암이 땅 속에서 터져 나오는, 말 그대로 화산을 만들어내는 마법이다.
분출하는 것만으로도 그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데다 한동안 용암으로 주변을 뒤덮어 다가가는 것조차 못 하게 하니 적들 한가운데에 사용하면 효과는 끝내줄 거다.
‘그런데 그건 8서클은 되어야 쓸 수 있는 마법이잖아?!’
물론 나는 9서클에 도달했기에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껏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숨기고 7서클인 것으로 하고 있다.
그렇기에 볼케이노를 사용한다면 지금껏 내 본실력을 숨겨온 의미가 없어진다는 소리다.
‘그런데도 정말 그걸 쓰라고?’
재차 물어보는 나의 말에 카이서스는 약간의 짜증을 섞어 대답했다.
<그래, 웬만하면 수준을 숨기는 게 좋지. 근데 이 상황에서 계속해서 숨기느라 실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데다 오히려 위험해질 것 같거든. 어느 정도는 힘을 드러내야 네 적들이 함부로 덤비지 못할 거다.>
카이서스의 말이 맞다.
지금처럼 실력을 숨기기만 한다면 아무것도 못 하고 나를 노리는 자들에게 당할 뿐이겠지.
‘어쩔 수 없지, 하는 수밖에.’
나는 마법주머니에서 스태프를 꺼내고는 로브의 소매를 살짝 걷어 올렸다.